To.End.All.War.Oppenheimer.The.Atomic.Bomb.2023.1080p.WEBRip.x264.AAC5.1-[YTS.MX] <-- Open play menu, choose Captions and Subtitles, On if available --> <-- Open tools menu, Security, Show local captions when present -->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원자 폭탄으로
하룻밤에 1,400만 미국인을

 

몰살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인지를요

 

안타깝게도 그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의 아버지였습니다

 

모순덩어리에
무척 복잡한 사람이었죠

 

너무나 두렵고도 끔찍한
공격용 무기입니다

 

오펜하이머는
폭탄을 사용하길 바랐죠

 

그래야 그 실체를
세상에 알릴 테니까요

 

오펜하이머 박사님
우리가 통제하지도 못할 물건을

 

만들려는 건 아닐까요?

 

핵무기가 등장하면

 

전쟁은 멈출 것입니다

 

세계 최초의 핵무기 실험을
하루 앞두고 있습니다

 

교양 있고 점잖은 이 사람이

 

인류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무기 탄생에 이바지했습니다

 

자신이 세상에
풀어 놓은 괴물을

 

여생을 바쳐 제어하려고 했죠

 

세계 대전이 다시 일어난다면

 

문명은 파멸할지도 모릅니다

 

“에놀라 게이호”

 

그는 정치의
희생양이 됐습니다

 

인류는 이미 멸망을 자초할
무기를 발견했나요?

 

그 때문에 망가졌죠

 

‘이제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됐도다’

 

우리가 만든 물건은
어떤 잣대로 판단해도

 

사악한 것입니다

 

" 전쟁의 종식자 "
오펜하이머와 원자 폭탄

 

“오펜하이머의 자택
뉴멕시코 로스앨러모스”

 

15살 때 오펜하이머와
단둘이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칵테일파티 때였죠

 

저는 파티에서
전채를 나르다가

 

혼자 서 있는
오펜하이머를 보고

 

‘당신은 성자 같아요’라며
말을 걸었습니다

 

“엘런 브래드버리 리드
로스앨러모스 과학자의 딸”

 

오펜하이머는 깜짝 놀라서

 

왜 그런 말을 하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전 이렇게 대답했죠
‘과거를 반성했잖아요’

 

그러자 그는 뒤돌아서
모자를 집어 들고 나갔습니다

 

저는 생각도 못 했지만
그 말이 박사에게는

 

무척 충격적이었나 봅니다

 

크롱카이트와 인터뷰
테이크 1

 

오펜하이머 박사님

 

역사적인 상황으로 봤을 때
필연적인 결정이었는데도

 

박사님은 여전히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듯한데

 

그런가요?

 

10만 명이 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마음이 편할 수는 없습니다

 

오펜하이머는 평생에 걸쳐

 

인류 역사상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복잡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정답이 없는
수많은 질문과 맞닥뜨려야 했죠

 

로버트 오펜하이머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는 인류를 말살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들어 냈죠

 

문명을 끝장낼 만큼
강력하지만

 

사실 이 무기가 만들어진
진짜 목적은

 

서방 세계 문명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사진으로 보는 세계의 뉴스”

 

1930년대에 미국인들은

 

영화관에서 틀어 주는
뉴스를 통해

 

유럽에 관한
소식을 접했습니다

 

히틀러의 출현에
오펜하이머는 경악했죠

 

오펜하이머는
유대인의 본능으로

 

파시즘이 얼마나
위험한 사상인지 알았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1939년에는

 

버클리대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었죠

 

그해에 그의 제자 한 명이
사무실로 뛰어 들어와서는

 

핵분열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알렸습니다

 

방금 독일에서
들어온 소식입니다

 

“이론 물리학 학회”

 

우라늄 원자는
중성자와 충돌하면

 

두 개로 분열된다고 합니다

 

오펜하이머는
이 소식이 믿기지 않았죠

 

칠판으로 달려가서
몇 가지를 계산해 보고

 

결국 핵분열을 통해서

 

에너지를 생성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질을 순수한
에너지로 변환하면

 

그 양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은

 

아인슈타인이
확실히 증명했습니다

 

그 유명한
‘질량과 빛 속도의 제곱’이죠

 

그 이론대로라면
아주 적은 양의 물질로도

 

선박, 비행기와 기차 등을
운행할 연료는 물론

 

전기도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엄청난 위력을 지닌

 

살상용 무기도
만들 수 있었죠

 

우리는 걱정했습니다

 

핵분열을 발견한 것이
나치 독일이었으니까요

 

나치 독일이 핵폭탄을
만들 가능성이 생긴 겁니다

 

뚜렷하고도 현실적인
걱정거리였습니다

 

1941년 12월 7일은

 

치욕의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진주만 공습이 발생했죠

 

이러한 배신행위로
우리 국민이 위협받는 일은

 

다시는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일본이 태평양을 폭격”

 

결국 미국도 참전했습니다

 

당시에는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게 목표였죠

 

당장 내일 아침에라도

 

히틀러가 핵무기를
독점할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핵무기를 개발하고
실험할 수 있고

 

운반에 도움이 될
장소가 필요했습니다

 

장소는 물론이고

 

개발 과정을 이끌
인재도 필요했죠

 

연구소 소장 자리에
오펜하이머가 앉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존재감이 별로 없었고

 

뛰어난 공적을
남긴 이력도 없었습니다

 

지인이었던 한 과학자는
오펜하이머가

 

핫도그 노점 운영도
못 할 거라고 할 정도였죠

 

친구들이 본 오펜하이머는

 

자기 정체성에 자신이 없는
분열된 사람이었습니다

 

언젠가 오펜하이머에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자신에 대한
깊은 혐오감에 사로잡혀서’

 

‘생각도, 행동도, 소통도
제대로 못 했어요’

 

“1904년”

 

오펜하이머가 태어난
1904년은

 

과학적 가능성이
꽃피던 시대였습니다

 

1900년부터 1920년대에는

 

대담한 지적 진보가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전기와 자동차, 비행기 등이

 

일상생활에서 쓰이게 됐고

 

과학계도 놀랍도록
빠르게 발전했습니다

 

불가능한 일은
세상에 없어 보였죠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일생은
미국 이민자의 역사입니다

 

오펜하이머의 부친은
독일에서 건너와

 

의류 산업에 종사하며
엄청난 돈을 벌었죠

 

어퍼 웨스트사이드에 있는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에 살았고

 

집에는 피카소 작품 한 점과
반 고흐 작품도 세 점 있었습니다

 

모친은 파리에서 공부한 예술가로

 

맨해튼 화랑 곳곳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오펜하이머의 모친은
예민한 사람이어서

 

아들이 외출하는 것을
무척 꺼렸습니다

 

오펜하이머는 과잉보호로
사교성이 매우 떨어졌습니다

 

한번은 여름 캠프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고약하게 굴어서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홀딱 벗고 밤새도록
얼음 저장고에 갇혔다고 합니다

 

온몸을 녹색으로
칠한 채로요

 

생식기까지 칠했죠

 

희한하게도
오펜하이머는 반항하지 않고

 

괴롭힘을
조용히 받아들였습니다

 

그 나이대 소년으로서는
흔치 않은 태도였죠

 

오펜하이머는 매우 예민하고
영리한 아이였지만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은
전혀 몰랐습니다

 

또래 친구들과는
아예 교류가 없었죠

 

오펜하이머가 심리적 위기를
가장 심하게 겪은 것은

 

대학생 시절이었습니다

 

케임브리지대에 진학해
물리학을 배웠지만

 

학교생활이 잘 안 풀렸죠

 

물리학 실험 연구소에
들어갔는데

 

그쪽 분야에는
소질이 없었습니다

 

자기 손으로 실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죠

 

자신감은 뚝 떨어졌습니다

 

심리적 위기가
정점을 찍으면서

 

정신 불안 증상까지
나타났습니다

 

한번은 동창생이
빈 강의실 칠판 앞에

 

혼자 서 있는
오펜하이머를 발견했죠

 

계속 이렇게 중얼댔습니다

 

‘그러니까 요점은, 요점은…’

 

끝없이 그 말만 중얼거렸죠

 

어떤 친구는
기숙사 방 안에서

 

끙끙대는 소리가 들리길래
방문을 열었더니

 

오펜하이머가 몸을 웅크린 채

 

굴러다니며
신음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오펜하이머는
거의 자살 직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더니

 

자기만의 세계에서
사는 듯하다는 말을 들었죠

 

그 당시에는
개념조차 희미했던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었던 겁니다

 

부모는 그를 파리로 데려가
다른 의사에게 보였고

 

오펜하이머는
프랑스식 상담을 받았습니다

 

의사는 직업여성과
적포도주를 처방했죠

 

다만…

 

그대로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오펜하이머는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는

 

똑똑한 아이였습니다

 

동급생이 모두 우러러볼 만큼
지적 능력이 뛰어났죠

 

그런데 대학교에서는
뒤처진 겁니다

 

그때는 그 사실을
견디기 힘들어했습니다

 

그 상황을 벗어난 것은

 

양자 물리학 분야를
발견한 덕분이었습니다

 

그때 물리학계는
황금기를 맞았죠

 

이론 물리학이
크게 발전했습니다

 

젊고 기민한 학자들이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독특한 이론으로

 

큰 업적을 이루고
이름을 날리던 시기였죠

 

오펜하이머는
독일 괴팅겐 대학으로 가서

 

막스 보른 밑에서 공부하며

 

이론 물리학자로서
활짝 꽃피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독일에서
학계를 대표하는 물리학자인

 

하이젠베르크를 만났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람이
독일의 원폭 개발을 이끌었죠

 

이 시절 오펜하이머는
‘오피’라는 인격을 만듭니다

 

‘옵제’라는 별명이
오피로 변한 것이죠

 

오피는 불안하고
정체성 혼란을 겪는

 

미국인 소년이 아니었습니다

 

늘 남보다 다섯 보는 앞서고
창의적인 생각이 번뜩이는

 

영리한 청년이었죠

 

특이하고도
흥미로운 천재였고

 

늠름하기까지 했습니다

 

게다가 엄청난 골초였죠

 

1920년대에 찍은
오펜하이머의 사진을 보면

 

밥 딜런 같습니다

 

체격은 호리호리했지만
눈빛은 성경 속 예언자 같고

 

언제나 머리에
납작한 중절모를 쓰고 다녔죠

 

오피는 오펜하이머가
되고 싶어 하던

 

이상형의 집합체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오피로의 재탄생은
굉장히 성공적이었습니다

 

“1942년”

 

나치가 검은 손을
사방으로 뻗는 지금

 

유럽과 전 세계 인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과학자들이
가장 우선시했던 동기는

 

독일보다 먼저
폭탄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목숨이 달린 일인 만큼
집중할 수밖에 없었죠

 

문명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너무 커서

 

원자 폭탄에 관한

 

도덕적, 윤리적 의심을
품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결국 원자 폭탄을
먼저 손에 넣는 쪽이

 

전쟁에서 이기고
세계를 호령하리라 믿었죠

 

1942년 여름
원자 폭탄 제조 계획은

 

군이 주도하게 됐습니다

 

‘맨해튼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죠

 

“군사부”

 

맨해튼 계획은
대규모 국가 사업이었습니다

 

이런 거대한 사업에는
총책임자가 필요했죠

 

그래서 선택된 인물이
키 190cm, 체중 109kg의

 

건장한 체격을 자랑하는

 

레슬리 리처드 그로브스
장군이었습니다

 

레슬리라는 이름보다는
자칭 ‘딕’으로 통했죠

 

그로브스 장군에게
닥친 과제는

 

원자 폭탄을 제조할 사람들을
직접 뽑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려면
세계 최고로 손꼽히는 석학들과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눠야 했죠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사람들과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일을 시키려면

 

물리학을 잘 알고
저명한 인사여야 했습니다

 

콧대 높은 사람들이
알아서 따르도록 말이죠

 

“레슬리 리처드
그로브스 장군”

 

오펜하이머와 그로브스 장군은
1942년 가을에 처음 만났습니다

 

두 사람의 성향은
극과 극이었죠

 

하지만 장군은
오펜하이머에게서

 

누구도 보지 못한
뭔가를 봤습니다

 

오펜하이머의
첫인상은 강렬했습니다

 

누가 봐도 그렇죠

 

그야말로 최적의 인재입니다

 

장군은 본인을 둘러싼
학계 지도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펜하이머를 선택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큰 집단을
이끈 경험이 없었지만

 

뭔가를 설명하는
재주는 뛰어났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매력적이었고

 

머릿속을 떠다니는
수많은 생각과 이론을

 

조화롭게 인식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로브스 장군은
그 재능을 알아봤죠

 

보안상 이유로
이 계획을 실행할 장소는

 

외딴곳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장군은
계획에 적합한 장소가 있을지

 

오펜하이머와 상의했죠

 

그러자 오펜하이머가
뉴멕시코주 사막을 추천했고

 

조사팀이 로스앨러모스라는
현장을 조사하러 갔습니다

 

오펜하이머에게 이곳은
매우 익숙한 장소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한때 뉴욕을 떠나

 

뉴멕시코에 사셨습니다

 

할아버지의 삶에서
소중한 때였죠

 

거기서 카우보이들과 어울리고
말을 타기도 하셨습니다

 

그 시절의 모든
순간을 사랑하셨죠

 

본인이 사랑하는 두 가지를
함께 누리고 싶다고 했는데

 

그게 물리학과
뉴멕시코였습니다

 

그 바람은
정확히 이루어졌습니다

 

“미 정부 자산
출입 금지”

 

정부에서 보낸 불도저와
건축가, 노동자들이

 

뉴멕시코주 사막에 도착해서

 

새로운 시설과
연구소 건설에 착수했습니다

 

원래 아무것도 없는
빈 땅에서 말입니다

 

말 그대로 맨땅에서 시작했죠

 

아무도 시도한 적 없고
증명된 것도 없는 계획이어서

 

해낼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고

 

있는 건 이론뿐이었습니다

 

“로스앨러모스 계획
출입구”

 

나치보다 먼저
무기를 개발하려면

 

세계 최고의 과학자를
모셔 와야 했습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미국으로 떠납니다

 

독일 대학 최고의 두뇌가

 

전 세계에서 모인 과학자들의
선봉에 서게 됐습니다

 

혼란한 유럽 정세 때문에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엔리코 페르미와

 

한스 베테

 

에드워드 텔러

 

텔러는 훗날 수소 폭탄 개발로
명성을 떨쳤죠

 

계획에 참여한
과학자들 명단에는

 

온갖 유명한
석학들이 가득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지적이고도
매력적인 분위기로 유명했습니다

 

전국을 돌며
번뜩이는 지적 능력을 선보이면

 

학자들이 몰려들었죠

 

오펜하이머는
자세한 내용은 말할 수 없지만

 

이 계획이 성공하면
전쟁이 끝날 거라며

 

과학자들을 설득해
끌어모았습니다

 

모든 전쟁이
사라질 거라고 했죠

 

오펜하이머는 저를
로스앨러모스로 불렀습니다

 

저는 기꺼이
참여하겠다고 했죠

 

제자 대부분이 그랬듯

 

저도 오펜하이머를
지구 끝까지 따랐을 겁니다

 

낯선 땅의 산꼭대기에서

 

역사에 남을 물리학 연구로
나치와 맞서 싸우자는데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저라도 합류했을 겁니다

 

결과에 대해
생각이 부족했다며

 

이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떤 식으로든

 

인류 역사의 방향에
분명히 개입하리라는 것을

 

다들 알았습니다

 

연구소가 문을 열었을 때쯤
오펜하이머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죠

 

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던 중

 

딸도 태어났습니다

 

1939년 여름

 

오펜하이머는
버클리대 칵테일파티에 갔습니다

 

그때 키티 프루닝이라는
젊은 여성이

 

정원 건너편에서
오펜하이머를 훔쳐보고는

 

한눈에 반했죠

 

불꽃 같은 여성이었습니다

 

둘은 사랑에 빠졌고

 

1940년에
키티는 아이를 가졌습니다

 

둘은 함께 살았습니다

 

‘행복하게’라고는
안 했습니다

 

둘은 서로 깊이 아꼈지만

 

순탄치 않았던 로버트의 삶과

 

두 사람의 성격
살아온 환경의 차이 등

 

다양한 이유로
결혼 생활은 삐걱댔죠

 

키티는 생물학자이자
식물학자였지만

 

로스앨러모스에서 지내며
연구와는 멀어졌습니다

 

엄마이자 아내 역할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절망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물이 나올 때까지 휴점”

로스앨러모스는

 

키티에게
외롭고 힘든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술에 의지하게 됐죠

 

오펜하이머는 진 마티니도
아주 잘 만들었습니다

 

주중에는 동료 과학자들이
연구에 매진하도록 독려했고

 

주말에는
화끈한 파티를 열었죠

 

다들 월요일에는
숙취에 시달리면서도

 

힘을 합쳐 열심히 일했습니다

 

오펜하이머 덕에
그럴 수 있었죠

 

이 학자들에게 연구소 시절은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뜻깊고 중요한 일을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일했고

 

그런 그들을 이끄는 건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푸른 눈을 가진

 

젊은 소장 오펜하이머였습니다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

 

“로스앨러모스 교역소”

 

저는 로스앨러모스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맨해튼 계획 때
로스앨러모스로 이사하셨죠

 

흥미진진한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폭파를 했거든요

 

폭파 시간은
10시, 12시, 3시였는데

 

1학년 때는 그 소리로
점심시간과 하교 시간을 알았죠

 

거기 살던 꼬맹이들은
폭발 전문가였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께
무슨 일을 하시는지 물었더니

 

누구도 해 본 적 없는
일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뭔지는 잘 모르지만
흥미롭다고 생각했죠

 

“1944년”

 

연구소가 생긴 지
1년쯤 됐을 무렵

 

일이 생각보다
힘들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쉬운 게 하나도 없었죠

 

원자 폭탄은
매우 복잡한 장치였습니다

 

핵무기는
단순한 구조가 아닙니다

 

수많은 이론과 설계를

 

한곳에 집약해서
완벽히 작동하게 해야 하죠

 

원자 폭탄을 만들려면
연료가 필요합니다

 

플루토늄과 농축 우라늄이죠

 

서로 다른 두 물질을
시험해 봐야 했습니다

 

쓰기에 더 좋은 건
플루토늄이었습니다

 

좀 더 구하기 쉽고

 

적은 양으로도
폭탄을 만들 수 있었죠

 

“플루토늄”

하지만 격발은 더 어려웠습니다

 

최초의 원자 폭탄은
포신형이었습니다

 

“포신형, 우라늄”

폭탄 내부의 두 부품이

 

강하게 충돌해서

 

“핵폭발”

 

임계 질량에 도달해
폭발하는 것이죠

 

고농축 우라늄을 쓰면
괜찮은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플루토늄으로는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죠

 

플루토늄은
반응성이 매우 강해서

 

“포신형, 플루토늄”

초속 900m가 넘는 속도로

 

격발하지 않으면

 

연쇄 반응이 실패해
충돌하기 전에 녹아 버립니다

 

충격이었습니다

 

플루토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수백만 달러를 낭비할 판이었죠

 

“J. R.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는 물론
로스앨러모스 전체가 실의에 빠졌습니다

 

우울해진 오펜하이머는
소장직 사임을 생각했지만

 

동료 과학자들이
그래서는 안 된다며

 

반드시 폭탄을 만들어 내자고
오펜하이머를 만류하자

 

마지못해 사임을 포기했죠

 

연합군은 이 공격을 위해
3백만 병력을 훈련했습니다

 

반대편 진영에서는

 

나치 역시
연합군의 훈련을 알아채고

 

이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독일을
앞지르지 못해 걱정했습니다

 

1944년 여름까지도

 

독일의 폭탄 개발이
어떤 상황인지 몰랐죠

 

플루토늄 문제를 해결해야
제때 폭탄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연구소 전체가 바짝 긴장해서
폭탄 개발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사실 계획 초기에
여러 설계안이 나왔지만

 

너무 어려워 보여서
기각됐습니다

 

그중 하나가 내폭 방식이었죠

 

“내폭 방식”

내폭 방식 원자 폭탄은

 

껍질 속에
소프트볼 공보다 조금 작은

 

플루토늄 구체가 들어 있습니다

 

그 플루토늄 구체를
고폭약으로 감싸죠

 

“고폭약”

 

이 고폭약은
특별한 방식으로 제작됩니다

 

터뜨리면 안쪽을 향해
폭발파가 발생하며

 

중심부에 있는
플루토늄 구체에

 

모든 각도에서
강한 압력을 가합니다

 

엄청난 폭발력으로
구체를 압축하는 거죠

 

플루토늄 구체 표면을

 

균일한 압력으로
쥐어짜야 합니다

 

압력이 불균형하면
작동하지 않습니다

 

순간적으로
엄청난 압력을 가해

 

아원자 입자들이
반응을 일으키도록

 

강력하고 균일한 폭발을
일으켜야 했습니다

 

어려운 기술이죠

 

“중성자원 통제”

 

처음부터 다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원래 10년에 걸쳐
개발할 기술이었지만

 

시간이 1년밖에 없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밤낮으로
폭탄 제작에 매달렸습니다

 

계획의 규모가 커지면서

 

보안을 담당하는 조직도
인원이 늘었죠

 

로스앨러모스의
과학자 대부분이

 

오펜하이머를 좋아하고
우러러봤지만

 

그를 의심하고 경계하는
세력도 있었습니다

 

오펜하이머의 과거 행적이

 

보안에 큰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캘리포니아주 버클리대학교
1930년대”

 

캘리포니아주 버클리대에서
교편을 잡았던 시절

 

오펜하이머는
세상일에 무관심했고

 

과학에만 집중했습니다

 

그 무렵 대공황이 일어났죠

 

제자들이 끼니도
제대로 못 챙기는 모습에

 

오펜하이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학생 중 한 명은
고양이 캔 사료로

 

배를 채우기도 했습니다

 

제일 값이 싸서였죠

 

현실의 고통을 목격한
오펜하이머는

 

심경에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자연스럽게

 

당시 버클리대에 있던
동료들처럼

 

좌익 사상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초대장, 5월 1일”

 

“공산당에 들어오세요”

 

1930년대에 공산주의 사상은
민심을 사로잡았습니다

 

인터넷도 없던 시대라
소련의 실상을 몰랐죠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이
자국민 2천만 명을

 

학살한 사실도
알 길이 없었습니다

 

미국인들은
왜곡된 정보를 접했습니다

 

소련에서는 모든 이가

 

자유롭고 평등하며
일자리와 집이 있고

 

훌륭한 사회 구성원이 되려고
노력한다는 식이었습니다

 

매일 끼니를
걱정할 상황이라면

 

저라도 솔깃했을 겁니다

 

오펜하이머가 진짜 공산당에
입당했는지는 불확실합니다

 

하지만 동생인
프랭크 오펜하이머와

 

프랭크의 부인인
재키는 공산당원이 됐죠

 

오펜하이머와 가까운 사람들이
공산당에 들어갔습니다

 

버클리대와
다른 대학의 제자들도

 

여러 명이 입당했죠

 

오펜하이머는 30년대 중반에
진 태트록이라는 여성을 만납니다

 

진은 정신과 의사 지망생으로
영리한 젊은 여성이었죠

 

둘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들은 두 번 약혼했습니다

 

당시 오펜하이머는
진에게 집착했던 듯합니다

 

진은 공산당원이었고

 

오펜하이머는
공산주의에 관심이 있었죠

 

오펜하이머는 실제로
진과 사귀고 4년간

 

꽤 많은 돈을
공산당에 기부했습니다

 

이런 정치 활동이
눈길을 끌게 됐죠

 

당시 FBI는
공산당원들을 따라다니며

 

이들이 집 앞에 세운
차 번호를 적어 가서

 

조사했습니다

 

그러던 중 FBI는
오펜하이머를 포착했죠

 

오펜하이머가
맨해튼 계획에 참가했을 때도

 

FBI는 그를
도청하고 주시했습니다

 

군 정보부도 계속
오펜하이머를 추궁했죠

 

그래도 오펜하이머는
태연했습니다

 

자기가 결백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겠죠

 

의심받을 게 뻔한데
옛 연인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1943년에 진 태트록은
오펜하이머에게 연락했습니다

 

정서적으로 힘들어지자
만나고 싶다며 연락한 거죠

 

오펜하이머는 진을 못 잊고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진에게 거절당한 후
키티와 결혼했지만

 

진이 우울증으로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기꺼이 만나러 갔습니다

 

그는 로스앨러모스를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향했습니다

 

FBI 입장에서는
월척이 걸린 거죠

 

아파트 밖에
두 남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진 태트록에게는
감시가 붙은 상태였습니다

 

그때도 여전히
공산당원이었죠

 

둘은 함께 밤을 보냈습니다

 

과거의 열정을
다시금 불태웠을 겁니다

 

당시 캘리포니아주
군 정보부 수장이었던

 

보리스 파시가
둘에 관한 보고를 받았습니다

 

파시는 두 사람의 만남을
보안상 큰 위협으로 여겼고

 

오펜하이머가 진 태트록을 통해
핵무기 관련 기술을

 

공산당에
넘길지도 모른다고 봤죠

 

안타깝게도 진은
몇 달 후인 1944년 봄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습니다

 

부친이 발견한 현장은
수수께끼투성이였습니다

 

진은 벌거벗은 채
욕조 속에 머리를 집어넣고

 

몸은 욕조 가장자리에
걸친 상태였죠

 

자살이라기에는
이상한 상황이었습니다

 

살해당했을 것이라는
의혹도 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소식을 전했던
보안 담당관은

 

오펜하이머가 상실감에
목 놓아 울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그 심정을 털어놓을 수 없었죠

 

속으로만 슬픔을
삭여야 했을 겁니다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속보를 전합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서거했습니다

 

사인은 뇌출혈입니다

 

1945년 4월에는
세계의 운명이

 

완전히 뒤집히듯
급박하게 돌아갔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죽고
히틀러는 자살했죠

 

히틀러의 제국이
불타고 있습니다

 

원래 원자 폭탄은
히틀러의 대항마였습니다

 

그런데 1945년 봄
히틀러가 죽자

 

나치의 위협도 사라졌죠

 

히틀러가 만든 원자 폭탄이
뉴욕에 떨어질 염려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폭탄 개발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나기 전에
폭탄을 완성하려 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폭탄을 사용하길 바랐죠

 

그래야 그 실체를
세상에 알릴 테니까요

 

해리 S. 트루먼이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트루먼 취임 후에도
폭탄 개발은 진행됐고

 

이 폭탄을 투하할
장소가 필요했습니다

 

히틀러가 죽자
일본이 표적이 됐죠

 

일본이 빼앗은 땅을
되찾기 위해

 

B-24기 편대가 팔라우 제도를
연일 폭격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여러 섬을
차례로 함락하고

 

일본군이 참호 방어선을
파 놓은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수많은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죠

 

폭탄을 투하하지 않은 채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고

 

매일 병사들이
수천 명씩 죽어 나갔습니다

 

병사 수천 명이 다쳤습니다

 

다른 수천 명은
목숨을 희생해 가며

 

달려드는 적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일본 땅에
발을 내딛으려 합니다

 

일본의 패배는
기정사실이 됐지만

 

항복을 받아내는 건
다른 문제였습니다

 

그 방법이 관건이었죠

 

핵무기가 등장하면
전쟁은 멈출 것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을

 

동양 철학적인
시각으로 바라봤습니다

 

폭격은 파괴 행위이자
잠재적인 창조 행위이며

 

전쟁 도구인 동시에
평화의 도구라는 거죠

 

폭탄을 잘못 다루면
인류가 멸망하겠지만

 

제대로 제어하고 다루면

 

전 세계를 평화의 시대로
이끌 수도 있었습니다

 

“1945년 여름”

 

1945년 여름까지 1년간
내폭 방식 폭탄을 완성하려고

 

학자들은 새로운 방식을 고안하고
설계를 고치며 고군분투했습니다

 

폭약과 기폭 장치
배터리를 비롯해

 

폭탄에 들어가는 모든 부품이
완벽하게 작동해야 했습니다

 

폭탄이 실제로
잘 작동할지 알아보려면

 

실물 실험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죠

 

폭탄을 실험할
장소가 선정됐고

 

오펜하이머는 실험 현장을
‘트리니티’라고 명명했습니다

 

당시 오펜하이머가 읽던
존 던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내 가슴을 때리소서
삼위일체인 주여’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언급하는 내용이죠

 

진 태트록에게 바치는
이름이기도 했을 겁니다

 

진과 오펜하이머는 잠자리에서
함께 존 던의 시를 읽었으니까요

 

1945년 7월 15일, 일요일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에서

 

세계 최초의 핵무기 실험을
하루 앞두고 있습니다

 

트리니티 실험을 앞둔
현장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습니다

 

이 실험 한 번을 위해
수십억 달러와

 

수십만 인원의
노력이 들어갔죠

 

신무기 제작과
실험 성패의 책임이

 

오펜하이머의 어깨에
오롯이 실려 있었습니다

 

현장 과학자들의
어깨가 무겁습니다

 

더 지체할 여유가 없습니다

 

대통령이 스탈린을 만나기 전에
결과가 나와야 합니다

 

미국 대통령은 당시
독일 포츠담에서 열릴

 

포츠담 회담에
참석할 예정이었습니다

 

이오시프 스탈린과
윈스턴 처칠을 만나서

 

유럽과 태평양 전쟁의
미래를 논의하는 자리였죠

 

그때까지 핵무기 보유국이라는
입지를 확정해야 했습니다

 

다들 마음이 급했고

 

부담감에 짓눌린
오펜하이머를 달래야 했습니다

 

원래도 골초였지만
줄담배를 피워 댔죠

 

오펜하이머 박사가
초조해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날 저녁에 찍은
유명한 영상이 있습니다

 

오펜하이머가
폭탄을 거치한 탑 꼭대기에

 

직접 올라가는 장면이죠

 

폭탄이 정상적으로 작동할지
최종 점검을 하는 모습입니다

 

불안한 나머지 모든 부품을
하나하나 직접 살펴봤죠

 

폭탄 실험이 성공할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안 터지는 데
10달러를 걸겠다며

 

다른 과학자들과
내기하기도 했죠

 

불안 요소가 100개는 됩니다

 

하나만 잘못돼도
실험이 실패할 수 있죠

 

실험 자체가 가능할지
모두 의문을 품었습니다

 

아무런 확신이 없어서

 

지구 대기 전체가 불탈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죠

 

원자 폭탄이 대기를 불태우고

 

인류 전체를
집어삼킬까 봐 걱정했습니다

 

대기 중에는 산소가 있습니다

 

원자 폭탄이 터지면서
대기 속 산소에

 

불이 붙을 수도 있었죠

 

결과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29분, 실험 개시 1분 전”

 

1945년 7월 16일
동트기 전이었습니다

 

하늘은 어두웠고

 

폭탄은 30m짜리
탑 꼭대기에 걸린 채

 

폭발을 앞두고 있었죠

 

오펜하이머는
현장 벙커에 있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이렇게 중얼대며
자신을 다독였다고 합니다

 

‘신이시여, 제 책임이
너무나 막중합니다’

 

발사 10초 전, 9, 8…

 

오펜하이머는
계속 되뇌었습니다

 

‘정신 차려야 해’

 

7

 

‘정신 똑바로 차리자’

 

6

 

1초가 한 시간 같았죠

 

5, 4

 

3, 2

 

그리고 그 순간

 

눈앞이 번쩍했습니다

 

한 과학자는 제게

 

누가 오븐 문을
연 것 같다고도 했죠

 

엄청난 열기가 들이닥쳤습니다

 

복사열이어서
빛과 동시에 열기가 느껴졌죠

 

곧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뒤따르고

 

첫 번째 버섯구름이
하늘로 솟았습니다

 

주황, 보라, 파랑
노랑이 뒤섞인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죠

 

인류의 생존을 좌우할
새로운 무언가가

 

이 땅에 탄생한 겁니다

 

수십 년간 수많은
폭탄 실험이 있었지만

 

이 폭탄의 규모는

 

정말 어마어마했습니다

 

세계 역사상
이런 순간은 없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과
중요한 것에 대한 가치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생각이 확 변하는 순간이었죠

 

상상도 못 했던
엄청난 힘이 탄생했고

 

이제 아무도 이 힘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세상은
전과 달라졌습니다

 

몇몇은 웃었고

 

몇몇은 울었으며

 

대부분은 침묵했습니다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 속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비슈누 신은

 

왕자가 자기 의무를 다하도록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깊은 인상을 주려고

 

팔이 여러 개인 형태로 나타나

 

이렇게 말했죠

 

‘이제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됐도다’

 

우리 모두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겁니다

 

실험이 끝나고 오펜하이머는
의기양양해졌습니다

 

인생의 절정기였죠

 

결국 해낸 겁니다

 

오펜하이머는 이 업적을
무척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 순간 세상이 변했다는 걸
과학계도 알았죠

 

이제 원자 폭탄의 쓰임새는
정부가 결정하게 됐습니다

 

“트리니티 현장
세계 최초의 원자 폭탄 실험”

 

그로브스 장군은 사무실로 돌아가
황급히 전보를 쳤습니다

 

폭탄 실험은 성공했고

 

예상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는 내용이었죠

 

포츠담 회담에
참석한 트루먼은

 

이 전보를 받고
태도가 돌변해서

 

미국이 확실히
승리하리라는 듯 굴었습니다

 

스탈린 앞에서도
기세등등했고

 

일본에 대해서도
양보는 없다고 못 박았죠

 

트루먼은 취임 때부터
폭탄이 개발 중인 걸 알았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위력을
확인하고 나서는

 

입장이 확 달라진 겁니다

 

우리의 요구는
과거에도 현재도 변함 없이

 

조건 없는 항복입니다

 

저희 부모님은 모두
2차 대전에 참전하셨는데

 

어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개발한 지 4년이 지났는데

 

원자 폭탄의 윤리적 문제를

 

아무도 제기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윤리적 문제가 있어도

 

단지 전쟁을 빨리 끝내려고
무서운 무기를 쓰려고 했죠

 

그때는 다들
전쟁에 지친 상태였고

 

한 다리만 건너도
지인이 전쟁에 희생됐다는

 

경험담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폭탄을 투하한다는 건
섬뜩한 결정이었습니다

 

민간인이 사는 도시에
폭탄을 떨어뜨리면

 

어린이를 포함해
일본인 약 20만 명이

 

목숨을 잃을 것이 뻔했죠

 

하지만 폭탄을 써서
전쟁을 빨리 끝내지 않으면

 

수백만 명이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선택지는
두 가지밖에 없어 보였죠

 

하지만 세 번째
선택지도 있었습니다

 

힘을 과시하는 것이죠

 

도쿄만에 떨어뜨려서
희생자를 최소화하고

 

폭탄의 위력도 보여 주면

 

일본이
항복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는 것만으로도 말이죠

 

미 의회도 오펜하이머도

 

세 번째 선택지를
거부했습니다

 

심사숙고한 끝에
결정을 내렸습니다

 

불모지에 투하하는 것만으로

 

그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제대로 보여 줄 수 있을지
깊이 고민했고

 

그러기는 힘들다고 봤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이 무기를
실전에서 사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반향이 엄청날 것을 알았기에

 

그만큼 심사숙고했습니다

 

오펜하이머의 비서였던
앤 윌슨은

 

트리니티 실험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충격에서
못 벗어났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은 오펜하이머와 함께
일터로 걸어가는데

 

몇 발짝 앞에 있던 그가
갑자기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가엾은 사람들
불쌍해서 어쩌나!’

 

그래서 오펜하이머에게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앤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설명했죠

 

일본의 도시 두 곳에
폭탄을 투하할 예정이고

 

민간인이 희생되는 것은 물론

 

도시 전체가
날아갈 거라고 말입니다

 

오펜하이머는 고통스러울 만큼
그 여파를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주에

 

폭탄 투하 임무를 책임진
장군들을 만나서

 

어느 정도의 고도에서
어떤 식으로 떨어뜨려야

 

가장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할지 설명하고

 

투하 방식을 지시했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죠

 

윤리 기준이 높고 예민하며

 

인류애도 충만한 교수가

 

민간인이 사는 도시에
폭탄 투하를 지시하면서

 

효과적으로 위력을 발휘할
고도까지 계산해 줬다니

 

이 양면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감히 추측해 보자면
오펜하이머는

 

그것이 첫 번째
실전 핵무기 사용이 아니라

 

마지막이 되기를
바란 듯합니다

 

다시는 쓸 엄두가
나지 않도록

 

비참하고 끔찍한 결과를
세상에 보여 주려고 한 거죠

 

“1945년 8월 5일
태평양 티니언섬”

 

1945년 8월 무렵

 

일본에서 인구가
5만 명이 넘는 도시는

 

대부분 불바다가 됐습니다

 

무사한 도시 서너 군데는

 

원폭 투하를 위해
일부러 남겨 둔 거죠

 

폭탄이 어떻게
도시를 파괴하는지

 

관찰하기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었습니다

 

히로시마는
평평한 도시였습니다

 

원자 폭탄이 폭발해서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는지

 

구석구석 끝까지
관찰하기 적당했죠

 

그래서 히로시마를
고른 겁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아름다운 강
일곱 줄기가 흘렀습니다

 

강기슭은 아름답고

 

강물은 맑았죠

 

저는 꽃이 가득 핀
멋진 정원에서 뛰놀았습니다

 

정원에는 온갖 종류의
아름다운 곤충이 있었죠

 

지저귀는 새들은
전쟁이 뭔지 몰랐고

 

행복한 소리가
사방에 넘쳤습니다

 

“에놀라 게이호”

 

그런데 지구가 분노하는 듯한
폭발음으로 뒤덮였죠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

 

조금 전, 미군 전투기가

 

히로시마에
폭탄을 투하했습니다

 

이 폭탄의 위력은
TNT 2만 톤보다 강합니다

 

바로 원자 폭탄입니다

 

우주의 기본적인 원리를
이용한 무기입니다

 

우리는 과학사상
가장 거대한 도박에

 

20억 달러가 넘는
돈을 쏟아부었고

 

승리를 거뒀습니다

 

“사흘 후”

 

“1945년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

 

일본은 멸망을 목격했습니다

 

평범한 공습이 아니었습니다

 

침략국의 시체를 화장할
장작 세례였죠

 

그때가 생생히 기억납니다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파편 더미에 깔려 있다가

 

새어 들어오는 빛을 보고
기어서 빠져나갔습니다

 

어머니를 찾아 헤맸죠

 

비참하게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며

 

저 속에 어머니가
없기만 빌었습니다

 

사촌과 어머니, 친한 친구가
무사하다는 소식은

 

결국 듣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그때 함께 죽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했죠

 

폭탄 투하 이후 삶이
너무 고단했기 때문입니다

 

몸도 힘들었고
마음은 무너질 듯했죠

 

“히로시마”

 

“미국 정부 촬영본”

 

전쟁이 끝나고 몇 년 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실상을 담은 영상을 봤습니다

 

소리는 담기지 않은
영상이었는데

 

기모노 꽃무늬가 불타서

 

사람들의 피부에
그대로 눌어붙었고

 

강 위에 시신들이 떠다녔죠

 

너무나 충격적이었죠

 

아버지와 동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뭔지 아셨을까요?

 

이런 끔찍한 일을
알고도 저질렀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도
결과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물론 과학자들도
마음이 무거웠죠

 

“원자 폭탄, 세계를 놀라게 하다”

 

끔찍한 전쟁이었지만

 

폭탄 두 개로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도시는 파괴됐습니다

 

과학자들에게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죠

 

오펜하이머도 여생을
죄책감에 시달렸을 겁니다

 

히로시마 폭격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생명을 빼앗고
고통을 선사했으며

 

비인도적이었습니다

 

일이 다 끝나고
말로 하기는 쉽죠

 

오펜하이머는 두 폭격에 관해
어떤 방식으로도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원자 폭탄의 윤리적 의미와

 

자신이 폭탄 개발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극도로 신중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폭격 이후

 

누가 봐도 그의 언동은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듯했죠

 

우리는 여기에 모여

 

주요 전쟁국을 대표하여

 

엄숙한 평화 협정 체결에

 

동의하고자 합니다

 

오늘 오후에 일본 정부가 보낸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저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인다고
답변을 보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원자 폭탄 덕분에

 

2차 대전이
끝났다고 믿었습니다

 

“전쟁이 끝났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걸 가능케 한 게
로버트 오펜하이머였죠

 

사방에서
오펜하이머를 찾았습니다

 

타임지 표지도 장식했고
라이프지에도 실렸죠

 

그가 안 나온 표지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피직스 투데이’
창간호 표지는

 

사이클로트론에
중절모를 씌운 사진이었습니다

 

그 중절모는
오펜하이머 그 자체였죠

 

오펜하이머는 큰 인기를 누렸고
미국 과학계의 권위자가 됐습니다

 

본인도 그걸 즐겼죠

 

드디어 인생에서
성공을 거뒀다고 느꼈을 겁니다

 

이제는 주변인이 아니었고

 

세상의 중심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선 사람이었죠

 

오펜하이머는
그 인기에 취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원자 폭탄을 탄생시켰다는

 

죄책감에도 시달렸죠

 

계속하세요

 

“트리니티 실험 재연
‘마치 오브 타임’, 1946년”

 

자동 제어 장치는 됐어요

 

이번 판은 위험 부담이 커요

 

잘될 거예요,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의 아버지로서

 

폭탄을 제어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낀 듯합니다

 

계속하세요

 

40초 후면 알겠죠

 

 

히로시마 투하 3개월 후에는

 

원자 폭탄은 침략을 위한

 

두려운 전쟁 도구라는 내용으로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원자 폭탄의 아버지가 한
연설을 들어 보시죠

 

세계 대전이 다시 일어난다면

 

문명은 파멸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파멸을 막기 위해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지
자문해야 합니다

 

할아버지의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렇게 연설하셨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원자 폭탄을 만든 것은’

 

‘우리의 본능이었습니다’

 

‘과학자라면 그러한 일을
멈출 수 없습니다’

 

‘과학자라면 누구나
세상의 원리를 밝히는 게’

 

‘좋은 일이라고 믿습니다’

 

‘인류가 세상을 바꿀 만큼
큰 힘을 손에 넣고’

 

‘그 가능성을 최대한
펼쳐야 한다고 믿습니다’

 

할아버지는 폭탄 개발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과학자들과 함께 이룬 성과를

 

올바르게 다뤄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셨습니다

 

오펜하이머는 폭탄 개발에
더는 참여하지 않기로 했죠

 

그래서 연구소장직을 사임하고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사 격이죠

 

오펜하이머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였고

 

그 인지도를 이용해
영향력을 행사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러 갔죠

 

오펜하이머의 목적은
해리 트루먼에게

 

핵무기 통제의 중요성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대통령을 설득했죠

 

그런데 트루먼이
그의 말을 끊고 물었습니다

 

‘오펜하이머 박사’

 

‘러시아는 언제쯤
핵무기 개발에 성공할까요?’

 

오펜하이머는
움찔하더니 대답했죠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개발할 겁니다’

 

그러자 트루먼은
‘아뇨, 못 해요’라고 했습니다

 

그때 오펜하이머는
트루먼 대통령이

 

핵무기 기술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리고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을 했습니다

 

대통령은 그의 말에
큰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각하, 제 손에는
피가 묻었습니다’

 

일본에 폭탄 투하를
지시한 장본인에게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이었죠

 

할아버지는 대통령에게

 

강한 인상을 줘서
설득하려고 했지만

 

말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할아버지는
매력적인 분이었지만

 

힘 있는 윗사람들의
눈 밖에 나는 일이 많았죠

 

트루먼은 대통령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트루먼은 오펜하이머를
집무실 밖으로 쫓아내며

 

결정은 자기가 내린다고 했죠

 

트루먼은 면담을
즉시 중지하고

 

징징대는 저 과학자를
다시는 안 보겠다고

 

보좌관에게 말했습니다

 

“원자 폭탄 주의!
오늘의 뉴스”

 

안전한 미래를 맞이할
유일한 방법은

 

신뢰와 선의를 바탕으로
전 세계 사람들과

 

협력하는 것뿐입니다

 

오펜하이머는
폭탄 투하 직후

 

국제 군비 축소를
장려하는 단체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봉인은 이미 풀렸고

 

폭탄을 소유하는 국가가
세계 질서를 좌우하게 됐죠

 

소련도 즉시
원자 폭탄에 주목했습니다

 

1949년에 소련이 시행한
원자 폭탄 실험은

 

세상을 충격에 빠트렸습니다

 

“러시아 원폭 투하가
유엔 총회를 뒤흔들다”

 

트루먼 대통령이

 

러시아가 원자 폭탄을
터뜨렸다고 발표하자

 

기자들은
플러싱메도로 달려갔습니다

 

러시아의 비신스키가
유엔 연설을 위해 그곳으로…

 

덕분에 미국은
복잡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다른 나라도 핵무기를
보유하게 됐기 때문이죠

 

핵무기를 보유한
두 국가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대두됐고

 

그러면 양쪽 다 전멸하는 건
시간문제였습니다

 

미리 대비해야 합니다

 

원자 폭탄이 터졌을 때

 

몸을 지키는
방법을 배워 봅시다

 

그래서 몇몇 과학자와
정치인들은

 

수소 폭탄을 만들어서
대비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원자 폭탄의
다음 단계로 말이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폭탄의 위력은

 

“원자 폭탄 대 수소 폭탄”

TNT 15킬로톤과 비슷합니다

 

단위부터 어마어마하죠

 

하지만 수소 폭탄의 위력은

 

메가톤 단위로 넘어갑니다

 

TNT 백만 톤과 맞먹죠

 

“수소 폭탄, 15메가톤”

한마디로 차원이 다릅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때보다
천 배는 강한 위력이죠

 

거대한 수소 폭탄 하나로

 

2차 대전 전체 희생자를
한 번에 죽일 수 있습니다

 

오펜하이머가 보기에는
지나친 힘이었죠

 

그는 수소 폭탄을
대량 학살 무기로 칭했습니다

 

“3번 도로, 메사까지 2마일
TD구역”

 

전쟁 막바지에는 다들
개발을 멈추길 바랐습니다

 

저는 아니었죠

 

수소 폭탄을 잘 아는 사람 중
개발에 찬성했던 사람은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에드워드 텔러는
헝가리계 유대인으로

 

헝가리를 탈출해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2차 대전 중에 텔러는
로스앨러모스에서 일했죠

 

하지만 원자 폭탄을
완성하기 전부터

 

수소 폭탄에 집착했습니다

 

텔러는 원자 폭탄을
오펜하이머의 작품으로 여겼고

 

더 크고 좋은 것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텔러에게
연구하는 건 좋지만

 

만들지는 말자고 했죠

 

불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오펜하이머는 워싱턴에서
위원회의 책임자를 맡아

 

수소 폭탄을 만들지
깊이 고민했습니다

 

결정을 내려야 했죠

 

다들 궁금해할 질문을 여쭤보죠
오펜하이머 박사님

 

우리가 통제하지도 못할 물건을

 

만들려는 건 아닐까요?

 

수소 폭탄을
만들지 말지에 관한 결정은

 

우리 도덕성의 근간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위원회가 내린 결정은

 

수소 폭탄을
만들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두려움에 휘둘리기만 한다면

 

위기의 시대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두려움에 대한 해답은
용기 속에 있죠

 

오펜하이머가
반대 입장을 밝히자

 

개발에 찬성하는 쪽은
격하게 반응했습니다

 

공군은 더 강력하고
많은 폭탄을 원했습니다

 

폭탄 한 개가 강력할수록

 

비행기 한 대로도
큰 타격을 줄 수 있죠

 

전략 공군 사령부는
소련 폭격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차라리

 

소련 폭격기를 요격하는 게
현명한 처사라고 했죠

 

오펜하이머가 계속
공군에 반대 의견을 제시하자

 

공군은 오펜하이머를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1953년쯤 미국 정부 기관의
주요 인물 대부분이

 

오펜하이머를 적대했습니다

 

그중 한 명인
루이스 스트라우스가

 

원자력 위원회
의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저는 방금 태평양에서

 

열핵 폭탄 실험을
목격하고 돌아왔습니다

 

스트라우스는 취임 직후부터

 

오펜하이머를
눈엣가시로 여겼습니다

 

스트라우스는
오펜하이머와 다투고

 

몹시 화를 낸 적이 있죠

 

그래서 스트라우스는
음모를 꾸며서

 

오펜하이머를
쫓아내기로 했습니다

 

어떤 음모였을까요?

 

스트라우스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오펜하이머가
1930년대 버클리 대학 시절에

 

좌익 성향 친구들과
어울렸다는 것이었죠

 

공산주의

 

미국의 삶을 파괴하는
이 사악한 시스템을

 

따르는 자는 누구일까요?

 

2차 대전 당시 소련은
미국의 동맹이었습니다

 

“공산당”

 

그래서 공산주의를 추종하거나
공산당원들과 어울리는 것이

 

그리 나쁜 일도 아니었죠

 

그런데 냉전에 접어들자

 

분위기는 돌변해서

 

과거 어떤 식으로든
공산주의와 관련된 사람은

 

안보를 위협하는
존재가 된 겁니다

 

우리 정부 안에
공산주의자가 없었다면

 

어째서 18개월이나

 

수소 폭탄 개발을
미뤘겠습니까?

 

그런 분위기에 떠밀려
결국 정부는

 

오펜하이머에게 줬던
기밀 정보 취급 권한을

 

박탈하기로 했습니다

 

30일 안에
권한을 포기하지 않으면

 

청문회에 출석해야 했죠

 

할아버지는 권한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위험인물이라는 낙인을
인정하지 않으셨죠

 

오펜하이머는
그때 관뒀어야 합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원자 폭탄의 아버지도

 

못 알아보다니

 

됐다고 말이죠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오펜하이머는 싸우기로 합니다

 

워싱턴에 가기 전
그는 아인슈타인을 만나서

 

몇 주간 자리를
비우겠다고 말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펄쩍 뛰었죠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버트, 당신은
원자 폭탄 그 자체예요’

 

‘아쉬운 건 저쪽이라고요’

 

‘그냥 관둬요
왜 사지로 들어가려고 해요?’

 

오펜하이머는 고개를 저으며
아인슈타인에게 말했죠

 

‘당신은 이해 못 해요’

 

떠나는 오펜하이머를 보며
아인슈타인은 비서에게

 

‘나르’가 따로
없다고 했습니다

 

이디시어로 ‘바보’란 뜻이죠

 

이번 주, 전 세계의 이목이

 

워싱턴 원자력 위원회에
집중됐습니다

 

오펜하이머 박사의
특별 안보 청문회가

 

이곳에서 열릴 예정이죠

 

최초의 원자 폭탄을
만든 학자인…

 

안보 청문회가 열리자

 

이것은 단순한
청문회가 아니라

 

재판이라는 사실이
곧 드러났습니다

 

수소 폭탄 개발에 반대했다는
새로운 혐의가 제기됐습니다

 

노골적이고
추잡한 공격이 계속됐습니다

 

변호사와의 대화를
불법 도청하고

 

검사 측에 넘겨서
일거수일투족을 예측했죠

 

위원회 측은 마음대로
FBI 기밀 자료를 봤지만

 

권한이 없는 오펜하이머는

 

자신에 관한 자료도
볼 수 없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진 태트록과
사귄 적이 있었고

 

동생은 여전히 공산당원이라는
의혹이 있었습니다

 

위원회는 이런 자료로
오펜하이머를 공격했죠

 

특히 치명적인 증거가
하나 있었습니다

 

2차 대전이 한창일 때

 

오펜하이머는
버클리의 자기 집에서

 

친구 호콘 슈발리에와
대화를 나눴죠

 

그때 호콘은 오펜하이머에게

 

원자 폭탄 정보를
소련에 넘길 방법이 있다며

 

넌지시 떠봤습니다

 

당시 오펜하이머는
이 말을 무시했지만

 

대화를 보고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공산당원들과
친한 것 때문에

 

보안 당국이 자신을
감시하는 걸 알았으니까요

 

그래서 눈에 띌 짓은
안 하려고 했죠

 

문제는 훗날
로스앨러모스 안보팀에서

 

이날의 대화에 관해
물었을 때

 

오펜하이머가 번번이
모호하게 답변하고는

 

대충 넘어갔다는 겁니다

 

위원들은 청문회에서
이 사실을 공격했습니다

 

그때 왜 솔직하게
답변하지 않았느냐면서요

 

오펜하이머는 대답했죠
‘난 바보가 아니니까요’

 

어떻게 보면 그 순간
스스로 운명을 정한 겁니다

 

오펜하이머는 무너졌습니다

 

증언하려고 했지만
마음이 무너져 버렸죠

 

오펜하이머는 다시
정신의 불안정을 느꼈습니다

 

학창 시절처럼 말입니다

 

여름 캠프에
함께 참가한 아이들이

 

그를 얼음 저장고에
가뒀을 때처럼

 

오펜하이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죠

 

그는 소장직을 사임하고
자기 변론도 하지 않았습니다

 

비틀대던 오펜하이머에게
결정타를 날린 사람은

 

에드워드 텔러였습니다

 

텔러는 오펜하이머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습니다

 

국가의 안보를 걱정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소장직을
맡기는 게 낫다고 말이죠

 

오펜하이머와 친했던 한 과학자도

 

그의 등에
칼을 꽂은 것도 모자라

 

비틀기까지 했습니다

 

오펜하이머가 떠날 때
그 과학자는 악수를 청하며

 

유감이라고 말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그 과학자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죠

 

‘에드워드, 그런 증언을 해 놓고
이건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오펜하이머는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지만

 

조직적인 기득권층의 힘을

 

과소평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것에
홀로 맞서기는 힘들죠

 

결과는 예상대로였습니다

 

“미국 정부
탑A급 과학자 정직 처분”

 

저명한 과학자인
로버트 오펜하이머 박사가

 

원자력 위원회에 의해
정직 처분을 받아

 

온 나라가 들썩였습니다

 

기밀 취급 권한 박탈을
결정하는 투표가 진행됐죠

 

“원자 폭탄의 선구자가
정직되다”

 

전국 신문 1면이
이 소식으로 도배됐습니다

 

“원폭 개발 지휘자가 공산당이라는
매카시 의원의 말은 사실”

 

원자 폭탄과 수소 폭탄 개발에
공산당이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공산당 간부였음이 확실하며

 

동생도 당원으로 활발히 활동했죠

 

그는 정치의 희생양이 됐습니다

 

그 소식에
과학계는 얼어붙었습니다

 

최고로 유명한 원자 과학자도
한순간에 끌어내리는데

 

보통 과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겠죠

 

학계 전체가
오펜하이머의 사례를 보고는

 

정치적 문제에 개입해 봤자

 

좋은 꼴은
못 본다고 생각했습니다

 

“국가 전복 혐의”

 

“국내 최고의 원자 과학자 정직되다”

 

정치에도 과학자들의
전문 지식이 필요한데

 

오펜하이머의 재판 때문에
학계의 도움을 받기 어려워졌죠

 

안보 재판 후 오펜하이머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사람이 텅 빈 것 같았죠

 

식구끼리도 얘기가 나오면
속상하신 것 같았습니다

 

탐탁지 않아 하셔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으셨죠

 

대놓고 언급하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사과를 요구하지도 않으셨죠

 

그리고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셨습니다

 

프린스턴 연구소
소장직은 유지했지만

 

물리학 연구에서는
손을 뗐습니다

 

“풀드 홀”

 

우울한 나날이었죠

 

아인슈타인 교수님도
아직 여기 계시죠?

 

네, 그럼요

 

가끔 전화가 오나요?

 

가끔 연락하세요

 

신문에서 저에 관한
나쁜 기사를 보시면

 

전화해서 괜찮다며
위로해 주시죠

 

오펜하이머는
투지를 잃었습니다

 

핵무기 개발과 관련된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죠

 

“풀드 홀”

오펜하이머 박사님

 

미국의 원자력 정책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까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군요

 

저와는 관계없는 사안이어서요

 

저는 그 분야 일을
걱정할 처지가 못 됩니다

 

한스 베테는 오펜하이머가

 

우리 중에서 가장
머리가 좋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노벨상도 못 받았죠

 

20세기의 위대한
물리학자들조차

 

한 수 접고 들어간
이런 우수한 인재가

 

전공 분야인 물리학에서

 

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까요?

 

할아버지의 일생은
과학을 빼고 논할 수 없습니다

 

과학 관련 이야기를 하실 때는
애정이 묻어났죠

 

지식을 널리 알리는 데
보람을 느끼셨습니다

 

마이너스 입자와 중성자
플러스 입자가…

 

할아버지의 블랙홀 연구는
노벨상감이었습니다

 

1939년, 오펜하이머는
별이 붕괴할 때 생기는

 

블랙홀의 개념에 관한
최초의 논문을 썼습니다

 

블랙홀이라는 개념을
처음 떠올린 것이죠

 

대단한 일입니다

 

오펜하이머가 죽기 전에
실제 블랙홀이 발견됐다면

 

분명히 노벨상을
받았을 겁니다

 

1966년, 오펜하이머는
식도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오랜 세월 담배를
피운 탓이었죠

 

그리고 1967년 초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원자 폭탄 개발을 이끈
J. 로버트 오펜하이머 박사 별세”

 

오펜하이머의 생애는
20세기를 관통하는 이야기입니다

 

20세기에 만들어진 핵무기는

 

지금도 세상을 좌우하죠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계속될 겁니다

 

원자 폭탄은 현실입니다

 

폭탄은 이미 탄생했죠

 

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있다든가

 

히로시마의 민간인들을
희생시켰다는 것으로

 

오펜하이머를
비난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폭탄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남은 유산이죠

 

핵무기를 올바르게 다루려면
끝없이 노력해야 할 겁니다

 

인류의 운명은 위태롭습니다

 

작은 폭탄 하나로도
끔찍한 비극이 벌어졌죠

 

지금은 훨씬 더
치명적인 무기도 존재합니다

 

핵무기를 없애야 한다는
의견이 많이 들립니다

 

저도 그 의견에
깊이 공감합니다

 

반드시 합의점을
찾아야 합니다

 

오펜하이머가 살아 있다면
제 말에 동의할 겁니다

 

1

 

모르는 체해서는 안 됩니다

 

원자 폭탄으로 무엇을 하든
세상은 예전 같지 않을 겁니다

 

폭탄을 제조하는 방법을
없애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물리학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의 아버지로
유명합니다

 

시간이 지난 현재
역사가 그를 새롭게 평가했죠

 

2022년 말, 에너지부는

 

보안 청문회 결과를
취소하기로 했습니다

 

“원자력 위원회의
조사는 엉망진창”

 

매카시즘이 유행할 때 치른
마녀사냥식 재판은

 

국가적인 비극이었습니다

 

이 나라에서
재발해선 안 될 일입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이루어진
뜻깊은 조처입니다

 

하지만 슬픈 일이기도 하죠

 

J.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살아서 누명을 벗지 못했으니까요

 

과학은 삶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말이죠

 

오펜하이머의 영향력은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을
떠받들면서도 두려워하죠

 

오펜하이머는 그 양면성을
여실히 보여 줬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세상을 바꿨습니다

 

이제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죠

 

하지만 인류가
무엇을 할 것이며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에 관해

 

자유롭게 질문할 수 있다면

 

과학은 퇴보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자유 그 자체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 막 : 김 효 영

Modify by Blue-Bi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