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olet.Evergarden.the.Movie.2020.1080p.NF.WEB-DL.DDP5.1.x264-Mr.Lahey

꽤 갑작스러웠어

 

몸이 안 좋으셨으면
연락을 하실 것이지

 

엄마가 바쁜 줄 지레짐작하고
아무 말 않으신 거겠죠

 

외할머니가 그런 분이란 건
엄마도 잘 알면서

 

데이지

 

내 탓이란 거니?

 

외할머니 돌아가신 게?

 

그건 아니지만

 

그냥

 

외할머니가 엄마를
더 보고 싶어 했을 것 같아서요

 

더 같이 있고 싶었을 거예요

 

왜냐면

 

외할머니는

 

엄마를 무척이나…

 

네 외할머니는

 

아주 어려서 엄마를 여의었으니까

 

웬 편지?

 

네 외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외할머니가 받은 편지들이다

 

돌아가신 분한테서
편지가 왔다고요?

 

당신이 돌아가신 후에도

 

매년 생일마다 편지를 받게끔
대필을 부탁했거든

 

인형에게

 

인형요?

 

편지를 쓰는 인형이 있어요?

 

아니, 옛날에 눈이 먼 아내를 위해
타자기를 발명한 사람이

 

그 기계를
'자동 수기 인형'이라 불렀어

 

그 후로 대필을 하는 여성을
'인형'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대필?

 

대신 편지를 써요?

 

 

당시엔 글을 읽고 쓰는 걸
못 하는 사람이 많았거든

 

그러다 글을 아는 사람이 많아지고
전화가 보급되면서

 

편지 쓰는 사람이 줄었지

 

이젠 그 직업도 없어졌을 거야

 

당시엔 특별한 경우나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땐

 

인형에게 의뢰했어

 

외할머니는 그 편지들을
보물 다루듯 하셨어

 

그러셨구나

 

슬슬 돌아가지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어

 

 

자, 데이지도

 

전 좀 더 여기 있을래요

 

장례식 끝났다고 다 가 버리면

 

외할머니 혼자 외로울 테니까

 

데이지

 

엄마는 돌아가세요

 

엄마에겐 늘 가족보다
일이 우선이니까

 

그렇지 않아

 

내겐 네 외할머니도

 

너도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

 

역까지 바래다줄게

 

데이지, 일 끝나면 다시 돌아오마

 

외할머니

 

엄마한테 또 막말을 해버렸어요

 

엄마 일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면서도

 

앤, 8번째 생일을 축하해

 

슬픈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겠지

 

그래서 지금은 버겁겠지만

 

희망을 포기하지 마

 

슬프고 울고 싶을 때면

 

이걸 꼭 기억하렴

 

엄마는 늘 널 사랑한다는 걸

 

앤, 10번째 생일 축하해

 

이제 제법 많이 자랐겠구나

 

여전히 독서와 춤을 좋아하겠지

 

수수께끼랑 벌레 잡기는
이제 졸업했니?

 

18번째 생일 축하해

 

이제 어엿한 숙녀네

 

사랑하는 사람은 생겼니?

 

사랑에 대한 조언은 할 수 없지만

 

네가 골랐다면
분명 멋진 사람일 거야

 

생일 축하해, 앤

 

이제 스무 살이 되었구나

 

대단해!

 

어른이라도
가끔은 불평해도 괜찮아

 

네가 불안해질 때마다
내가 곁에 있단다

 

 

늘, 언제나

 

널 지켜보고 있을게

 

 

해마다 생일에

 

이런 편지를 받으신 거야?

 

외증조할머니도 참

 

외할머니가 엄청 걱정되셨나 봐

 

웬 신문 스크랩?

 

이 사람은…

 

그 편지들을 쓴 건

 

당시 화제가 됐던 인형인 것 같다

 

그 인형은
공주를 위해 연애편지를 쓰고

 

오페라 가수의 의뢰로
신작 오페라의 가사를 썼다

 

게다가 유명 극작가의 대본을
대필하기도 했다

 

라이덴에 있는 우편사에
소속돼 있었지만

 

18살 때 그곳을 관둔 후로

 

그녀에 대한 기사를
더는 볼 수 없었다

 

그 인형 이름은…

 

"바이올렛 에버가든"

 

북동 전투 지역에서 주웠다

 

이름은 안 붙였어

 

이봐, 인사해!

 

함부로 다루지 마!

 

애한테 무슨 짓이야

 

길, 그냥 애가 아니야

 

무기지

 

전쟁 도구일 뿐이야

 

그럼 내가 이름을 지어 줘도 될까?

 

바이올렛

 

바이올렛이야

 

넌 반드시 이 이름에 걸맞은
여성으로 성장할 거야

 

도구가 아니라

 

이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 될 거야

 

바이올렛 에버가든

 

앞으로

 

올해 바다에 바치는 찬가를 쓴
필자가

 

올해 바다의 여신인
일마 펠리체에게

 

찬가를 증정하겠습니다

 

바다에 바치는 찬가, 정말 좋았어

 

바이올렛

 

정말 고된 작업이었겠어

 

바이올렛

 

 

일반 편지와는 달랐어요

 

바다는 끝없는 공간으로

 

수많은 수생 생물의 거주지죠

 

풍부하고 무척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인간처럼

 

공적이나 지위, 인격이
있는 게 아니라서

 

찬양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아, 그런가

 

좋아요! 내년엔 제가 쓸게요!

 

이봐, 바다에 바치는 찬가는
선정 안 되면 못 써

 

지금부터 엄청난 편지를
미친 듯 써재껴서

 

선정되면 되죠

 

그치, 바이올렛?

 

네, 꼭 선정돼 주세요

 

나만 믿어

 

 

바이올렛 에버가든

 

시장님, 그리고 사모님

 

바이올렛, 여긴 라이덴시장님과

 

사모님이셔

 

처음 뵙겠습니다

 

고객님이 원하신다면
어디든 달려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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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렛 에버가든입니다

 

예뻐라! 진짜 인형처럼 생겼어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네

 

올해 그대가 이 전통 깊은

 

바다 감사제에서
찬가를 쓰게 된 건

 

내가 추천했기 때문이야

 

공개 연애편지를 쓴 후

 

그대가 쓴 플루겔 왕국의
다미안 국왕 선서문은

 

문장들이 참으로 아름다웠지

 

그대처럼 멋지더군

 

대관식 선서문은

 

다미안 국왕의 이상과 뜻을
제가 글로 풀어냈을 뿐입니다

 

저를 멋지다고 하셨지만

 

제가 쓴 글과 저 사이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부디 언짢아 마십시오

 

바이올렛, 그 말은 그러니까…

 

그 말은, 내가 그대를
높이 평가한다는 뜻이야

 

지금처럼 인형으로 활약하기 전엔

 

이 라이덴샤프틀리히를 구한
군인이었으니까

 

제가 구한 게 아닙니다

 

수많은 군인이 싸운 덕이죠

 

하지만 그 전쟁은 동시에
수많은 생명을 앗아 갔습니다

 

저 역시 그랬고요

 

그런 이유로

 

저는 칭송받아 마땅한
사람이 아닙니다

 

뭐 좀 먹을까요?

 

난 볶음국수

 

가끔은 다른 걸 먹어 봐

 

네네

 

바이올렛

 

에리카 님

 

오랜만이야

 

이야, 좋아 보이는데

 

네, 사장님, 오랜만이에요

 

극작가 조수 일은 손에 익었어?

 

바이올렛이 대필해 준
그 극작가 맞지?

 

 

그분 연극을 같이 본 후
에리카 님을 소개해 줬습니다

 

제자로 받아 달라고 떼를 썼어요

 

선생님이 매일 글을 쓰고
퇴고를 하셔서

 

타자기로 따라가기 벅차지만

 

공부가 많이 돼요

 

볶음국수 먹을래?

 

좀! 베네딕트

 

우리 말 끊어 먹지 말지?

 

뭐야, 그 말투는!
못됐어, 정말

 

이봐, 우리랑 같이
축제 둘러보지 않을래?

 

죄송해요, 초대는 고맙지만

 

오늘은 다음 달에 올리는 공연
리허설이 있어요

 

에리카 님이 쓴 거예요?

 

 

마을 회관에서 하는
작은 연극이지만

 

괜찮다면 보러 와

 

그럼

 

이만 가볼게요

 

뭔가를 간절히 바라면
진짜 이루어지나 봐

 

아무리 간절히 바라도
이루어지지 않는 건

 

어떡해야 할까요?

 

저도 그만 가볼게요

 

할 일이 많아서요

 

오늘은 쉬도록 해

 

축제를 즐겨야지

 

아뇨

 

그러면 제가 짠 작업 일정이
어그러져서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소령님

 

소령님?

 

도망쳐

 

난 여기 두고 도망쳐

 

절대 죽게 내버려 두지 않겠어요!

 

그만해

 

그만하라니까!

 

살아남아야 해

 

바이올렛

 

넌 살아야 해

 

자유롭게

 

진심으로 널

 

사랑해

 

친애하는 길베르트 소령님

 

오늘도 소령님을 생각했습니다

 

뭘 보고 뭘 하든

 

소령님과의 추억으로 연결됩니다

 

시간이 흘러 과거와 멀어져도

 

소령님과 함께한 추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계속 제 옆에 계시네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제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셨죠

 

그리고 저에게 처음으로

 

'사랑해'

 

라는 말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소령님께
편지를 씁니다

 

언젠간 이 편지가 도착하기를

 

제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여기 잔돈 3코르스입니다

 

감사합니다

 

무게가 1.2리브니 11코르스입니다

 

네, CH 우편사입니다

 

고객님이 원하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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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 카나리입니다

 

 

있습니다만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청하신 인형은 공교롭게도

 

앞으로 3개월 동안
예약이 다 찼습니다

 

대신 제가 하면 어떨까요?

 

아,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그럼 3개월 후로
예약해 드리겠습니다

 

네, 그렇군요

 

이만 끊을게요

 

아이리스

 

고객에게 불만 섞인 태도를
보이면 어떡해

 

태도는 전화상으로는 안 보여요

 

감정이 목소리로 드러나잖아

 

알겠어요

 

너도 예약이 꽉 찬 거 아니야?

 

카틀레야 님에 비하면 뭐…

 

이렇게 가다간 만년 3등이에요

 

수고가 많아

 

사장님, 수고하셨어요

 

이번 주도 바빴지?
모두 내일 푹 쉬어

 

난 이번 주말에 출장 가는데

 

가다릭과의 통상 조약 개정 회의에
서기를 해달라고 해서

 

그렇군

 

전 시장 사모님 파티에 갈 거예요

 

새 고객을 섭외하려고요

 

다들 진짜 열심이네

 

최근에 테니스를 시작해서

 

같이 칠 사람이 있을까 했는데

 

사장님은 위기감 안 들어요?

 

지금 열심히 해야죠

 

저 끔찍한 기계 때문에
언젠간 편지가 사라질 테니까요

 

곧 저 송신탑이 완공될 텐데

 

그러면 전화가 더 보급되겠죠

 

그러게

 

변화의 바람이 불겠지

 

이 우편사도 조금씩 변화할 거고

 

언젠간 한물간 직업 취급을 받겠지

 

인형 말이야

 

그러다 쓸모가 없어져
사라져 버릴지도

 

그래서 그 전에 열심히
돈을 벌어 둬야 해요

 

바이올렛도 파티에 가?

 

아뇨, 전…

 

제 라이벌을
파티에 데려갈 순 없어요

 

 

안 데려가도 괜찮습니다

 

따로 가볼 데도 있고요

 

그렇지!

 

뭐야? 자꾸 툭툭 끊어지잖아

 

여자랑 치는 거면 재미라도 있지

 

사장하고 무슨 재미야

 

다들 바쁘다잖아

 

바이올렛한테도 퇴짜 맞고

 

잘됐잖아, 웬일로 외출을 한다는데

 

그래도 걔가 있으면

 

모르는 여자들 관심 받기
딱 좋은데

 

배달하고 있으면 꽤 물어봐

 

'CH 우편사 소속이에요?'

 

'바이올렛이란 인형이 일하는?
소개 좀 해줘요'라고

 

바이올렛을 네 불순한 동기에
이용하지 마

 

그건 그렇고

 

어디에 간 걸까?

 

과잉보호라니까

 

대령님

 

너였던 거냐

 

매달 어머니 묘소에
꽃을 두고 가는 사람이

 

기일인 내일 오는 게 맞지만

 

다른 친척분이 오실 것 같아서요

 

제가 폐를 끼친 건가요?

 

아니

 

하지만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올 필요까지야

 

모처럼 쉬는 날일 텐데

 

쉬는 날이라
찾아올 수 있는 겁니다

 

그 녀석 대신 이러는 건가?

 

소령님 대신 이러는 건 아닙니다

 

제가 오고 싶어 오는 거니까요

 

전쟁이 끝난 지 몇 년이나 지났어

 

알고 있잖아, 녀석은 이미…

 

길베르트는 이제 잊어

 

잊기가 힘드네요

 

제가 살아 있는 한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이봐

 

바이올렛

 

틀렸어요

 

그건 바이올렛이 아니라

 

팬지라는 꽃이에요

 

그래?

 

잘 아는구나

 

소령님을 다시는 못 본다 해도

 

'잊기가 힘들다'라…

 

리본이…

 

- 네, CH 우편사…
- 저기…

 

인형 있어?

 

저도 인형입니다만

 

진짜? 일을 맡길 게 있는데

 

내가 있는 데로 와 줄 수 있어?

 

오늘은 쉬는 날입니다

 

정말?

 

그렇구나

 

실례지만 목소리로 봐선
꽤 어린 분 같은데요

 

편지 쓰는 데 나이가 중요해?

 

부탁하면 어디든 간다고 하더니만

 

거짓말이었어?

 

거짓말 아닙니다

 

그럼 와 줘

 

누구세요?

 

CH 우편사에서 온 인형입니다

 

아,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고객님이 원하신다면
어디든 달려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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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렛 에버가든입니다

 

진짜 왔네

 

고객님이 요청하셨으니까요

 

꽤 어려 보이는데, 괜찮겠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유리스!

 

형, 우리 왔어

 

들어간다!

 

잠깐만!

 

숨어, 빨리!

 

빨리!

 

형아!

 

유리스, 누가 왔었니?

 

아뇨

 

그래?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기분은 어때?

 

매일 똑같은 질문 그만하세요

 

괜찮니?

 

괜찮으면 왜 이런 데 있겠어요?

 

미안하다

 

형아

 

내가 그림책 읽어 줄게

 

그림책 따위는 안 읽어
시시하다고

 

형이 몸이 안 좋아서 그래

 

그냥 안 좋은 정도가 아니죠

 

수술을 세 번 하고
1년 내내 입원해 있는데

 

유리스, 류카가 문병 오고 싶대

 

네가 보고 싶다면서

 

안 와도 돼요

 

왜?

 

- 둘이 그렇게 친…
- 됐다니까요!

 

이게 뭐야?

 

- 되게…
- 멋대로 만지지 마, 멍청이야!

 

그… 그건

 

옆방에 문병 온 사람 건데

 

잠깐 맡아 주고 있는 거예요

 

그게…

 

나 졸려요

 

미안하구나

 

우린 산책하고 올게

 

그래, 눈 좀 붙이려무나

 

나중에 또 오마

 

미안해

 

이제 나가도 될까요?

 

제가 숨어 있어야만 했던 이유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도련님

 

유리스라고 불러도 돼

 

네, 유리스 님

 

아빠, 엄마, 동생 모르게
편지를 쓰고 싶어

 

편지를요?

 

 

저 세 명에게 보낼 거야

 

내가 죽은 후에 읽을 수 있게

 

편지를 쓴 다음 얼마간 맡아 줘

 

바로 보내지 말고

 

 

내 말 이해해? 그렇게 할 수 있어?

 

문제없습니다

 

전에도 비슷한 의뢰를 받아
처리한 적이 있습니다

 

응?

 

유리스 님보다 약간 어린
아가씨에게

 

어머니가 보내는 편지였죠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난 후

 

50년 동안 매해 따님의 생일마다
받을 수 있게요

 

50년 동안? 50통을?

 

 

지금도 해마다 생일에 맞춰
한 통씩 배달되고 있죠

 

미안하지만 난 그렇게 많이는
의뢰 못 해

 

저 통에 들어 있는 돈만큼만 써 줘

 

몇 통 쓸 수 있겠어?

 

세 통이니까
한 통당 20자는 쓸 수 있겠네요

 

20자?

 

'엄마에게
건강해야 해요, 유리스가'

 

너무 짧잖아!
그 정도는 나도 쓸 수 있어

 

그런 거 말고

 

엄마, 아빠, 동생이

 

읽고 나면
기운이 막 나서 버틸 수 있는

 

그런 편지를 쓰고 싶다고

 

유리스 님, 방금 말씀드린 건
일반 요금이고

 

우리 회사엔 어린이 할인 요금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통에 든 돈으로

 

유리스 님이 원하는 만큼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진짜야?

 

진짜입니다

 

없는 말 지어내지 마!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임무 수행을 할 수 있게

 

유사시 특별 규정을 마련했거든요

 

'긴급 규정'입니다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뭔가 짱인 것 같아

 

좋다는 뜻이야

 

그럼 시작하자

 

손이…

 

전쟁 중에 잃었습니다

 

몇 년 전, 저도 병원에 입원했었죠

 

그걸로 편지는 쓸 수 있고?

 

이 의수를 잘 쓸 때까지
시간이 좀 걸렸지만

 

지금은 문제없이 잘 씁니다

 

이런 동작도 가능합니다

 

재미있는 사람이네

 

늘 '몸은 어때?'

 

'괜찮아?', '이제 좀 쉬어'
이런 말만 듣거든

 

부모님, 간호사들과는 달라

 

제가 어떻게 다른가요?

 

걱정이라든가 동정이라든가

 

과잉보호

 

하여간 그런 것들엔 질렸거든

 

그렇군요

 

그 세 가지는 제 감정에서
제거해 보겠습니다

 

역시 재미있단 말이야

 

좋아, 그럼…

 

편지 써 줘요

 

우리 아빠한테

 

네 아빠한테?

 

네, 전쟁에 가셨거든요

 

라이덴샤프틀리히라는 나라에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아직이에요

 

나도 동생도 엄마도 잘 지낸다고
알리고 싶어요

 

편지 써 줄 수 있어요?

 

바이올렛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할까

 

그럼 거기 가자

 

그 레스토랑

 

바이올렛이 여기 처음 왔을 때
같이 간 데 있잖아

 

당신은…

 

디트프리트 대령

 

호진스 중령

 

아니, 이젠 사장인가

 

전쟁이 몇 년 전에
벌써 끝났다는 걸

 

자꾸 잊는다니까

 

무슨 용건이라도?

 

그게…

 

바이올렛!

 

대령님

 

무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아

 

이거

 

그건 제…

 

그걸 돌려주러 오신 겁니까?

 

떨어뜨리고 간 것 같아서

 

바이올렛이 간다고 한 곳이 설마…

 

묘지였습니다

 

소령님 어머님 묘소가 있는

 

대령님, 감사합니다

 

자, 자

 

짐 내려놓고 밥 먹으러 가자

 

그래

 

바이올렛도 같이 가자

 

 

이봐

 

이번에 집안 소유이던 배를
처분하기로 했다

 

배를요?

 

그래

 

그 녀석도 어릴 때 자주 탔던 배다

 

배 안에 동생이 읽던 책이며
갖고 놀던 장난감이 많아

 

혹시 갖고 싶은 게 있다면…

 

제가 가져도 되나요?

 

잡동사니뿐이지만

 

그 배가 있는 데가 어디든
찾아가겠습니다

 

매달 묘소에 찾아가는지 몰랐어

 

보고했어야 하는 건가요?

 

그건 아니고

 

보고 안 해도 돼

 

그런 건 사적인 거잖아

 

그래서 배에 가보게?

 

갈 때 보고하겠습니다

 

안 해도 된다니까

 

바이올렛

 

같이 갈까?

 

괜찮습니다
걱정, 동정, 과잉보호를

 

사장님 마음에서 지워 주십시오
문제없습니다

 

문제없다잖아

 

시끄러워!

 

넌 입 닫고 먹기나 해

 

바이올렛 말대로 해

 

언제까지
바이올렛 걱정만 할 거야?

 

걱정 안 하게 생겼어?

 

디트프리트 그 자식이

 

바이올렛의 상처를 갖고 노는데

 

의외로 바이올렛에게
좋은 상대일지도 몰라

 

소령에 대한 추억도
공유할 수 있고

 

그 인간이
고아인 바이올렛을 데려다가

 

전쟁 도구로 이용했다고

 

그래서 바이올렛에게
다가가면 안 된다고?

 

예전의 대령이 아니라 해도?

 

둘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게 하라는 뜻이야?

 

그러면 안 돼?

 

바이올렛은 지금도
소령에게 감정이 있어

 

이대로라면 그 감정에
무너질까 봐 걱정이야

 

하지만 대령이라면

 

우리는 줄 수 없는
위안을 줄지도 몰라

 

언젠가 아이가 생긴다면

 

역시 아들이 좋겠어

 

딸이면 걱정을 달고 살 것 같아

 

녀석이 푹 빠져 읽었던 책이야

 

아버지와 자주 게임을 했었지

 

이것도 소령님 건가요?

 

아니, 내 거야

 

실례했습니다

 

그렇게 예의 안 차려도 돼

 

 

대령님과 소령님은 어렸을 때

 

이 배를 타고
바다에 자주 나가셨나 봐요

 

응, 아버지와 같이

 

아버지는 육군 외길 인생이었는데

 

왜 바다에 나가는 걸
좋아하셨나 몰라

 

바다 좋아하는 것만 닮았어

 

우리 가문을 상징하는 꽃이다

 

꽃 따위에 누가 신경 써요?

 

지금 뭐라고 했어?

 

아버지가 보여 주고 싶었던 건
저거잖아요

 

아버지처럼 군인이 되게 하려고

 

 

우리에겐 저 선택권밖에 없다는 걸

 

보여 주려는 거잖아요!

 

형!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부겐빌리아 남자들은

 

군인 외에 다른 선택권이
없잖아요!

 

아버지, 그만하세요

 

형은 때리지 마세요

 

제가 될게요

 

커서 아버지처럼 될 테니까!

 

내가 워낙 반항적이어서

 

길은 아버지 말씀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

 

나 때문에 본인 뜻대로 못 살게
만든 걸로도 모자라

 

여전히 동생을 함부로 대했어

 

저는 형제가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가까운 사람에게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게
어떤 건지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다른 사람 감정을 이해한다고?

 

비꼬려는 의도는 없었어

 

잘 압니다

 

이 책과 보드게임을
제가 가져도 될까요?

 

 

이제 나갈까

 

괜찮아?

 

감사합니다

 

아주 소중한 걸 잃었구나

 

너나

 

나나

 

저번엔 미안했다

 

다시는 녀석을 못 볼 거라는 둥
녀석을 잊으라는 둥 한 거

 

나도 녀석을 잊는 게 안 되는데

 

결국

 

녀석은 내 동생이니까

 

 

녀석을 다시 보면

 

사과할 게 많아

 

할 이야기도 많고

 

 

다음은 내 동생

 

걔한텐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어

 

시온은 겨우 5살이라

 

그렇다면
동생이 태어났을 때 느낌을

 

말해 주면 어떨까요?

 

아…

 

걔가 태어났을 때 정말 기뻤어

 

갓 구운 빵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웠지

 

그랬는데…

 

부모님을 빼앗아 간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나요?

 

부모님이 동생을 칭찬하면
질투가 났고요?

 

족집게야

 

하지만 동생이 졸졸 쫓아다닐 땐
귀여웠죠?

 

그런 걸 어떻게 다 알아?

 

다 전에 들은 거라서요

 

거기에 이어서 이렇게 써

 

'내 몫까지 오래오래 살아야 해'

 

'내 몫까지 아빠, 엄마와
사이좋게 지내고'

 

'내 몫까지'

 

'부모님께
어리광도 마음껏 부리고'

 

유리스 님 속마음은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데

 

그 속마음과 다른 말을
내뱉어 버리는 게

 

제 눈엔 보입니다

 

모르는 게 없네

 

편지를 많이 썼거든요

 

말이며 태도, 감정엔
겉과 속이 있어서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란 걸

 

조금씩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속마음은

 

표현을 해야만
상대가 아는 경우도 종종 있죠

 

이렇게 쓰면 어떨까요?

 

좋아, 고마워

 

이렇게 세 통의 편지를

 

안전하게 보관하겠습니다

 

 

내가 천국에 가는 날
모두에게 전해 줘

 

우편사에 알리라고
병원에 말해 둘게

 

 

새끼손가락 약속 할 수 있어?

 

새끼손가락 약속?

 

 

서로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는 거야

 

고마워

 

손가락이 차갑네

 

장갑을 끼고 있어도 느껴져

 

겨울이 오기 전에
내 몸도 차가워질 거야

 

그래도

 

유리스 님이 쓴 편지가

 

부모님과 동생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 줄 거예요

 

꼭 잘 전달하겠습니다

 

제가 할 일은 다 했어요

 

잠깐!

 

편지를 한 통 더 쓰고 싶어

 

류카 님에게요?

 

침대 밑에서 들었습니다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전할 수 있을 때 하는 게 낫죠

 

그럴까?

 

 

저는 물을 수도
전하고픈 말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누구한테?

 

제게 '사랑해'라고 말한
사람에게요

 

그 사람이 죽었어?

 

어딘가에 살아 계실 거라
믿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데?

 

'사랑해'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한다고

 

그 말이 전부야?

 

류카가 그랬어

 

날 보러 오고 싶다고

 

난 오지 말라고 했지

 

류카와는 둘도 없는 소꿉친구야

 

늘 붙어 다니며 놀았어

 

그랬는데 팔과 다리가

 

앙상하게 말라 가면서

 

이런 모습을 보여 주기 싫었어

 

그 감정도 편지에 쓰겠습니다

 

요금은…

 

유리스 님!

 

간호사 불러올게요

 

류카 님에겐 다음에 쓰도록 하죠

 

미안해

 

괜찮아요

 

이게 다 수신인 불명 편지야?

 

롤런드 영감님한테 인계받은 거야

 

발신인을 아는 경우엔 반송하려고

 

그래서?
사장인 나한테 도와달라고?

 

요즘 젊은것들은
잔업을 싫어하는데

 

난 이렇게 열심이잖아
부사장 시켜 줘

 

회계부터 배우고 말해

 

어?

 

회계 장부 못 보는 놈은
부사장 못 해

 

와! 이렇게 출셋길이 열리는구나!

 

그럼 학교부터 다녀 볼까나

 

이건…

 

아, 여긴 비교적 최근 우편물을
두는 선반이야

 

이 필체는…

 

왜 그래?

 

아니야

 

발신인 주소는 에카르테섬이군

 

가다릭이 한때 점령한 섬이잖아

 

종전 후에 독립한

 

왜 날 보자고 한 거지, 사장님?

 

요전 날…

 

거기서 일하는 인형 일로 왔나?

 

걔가 무슨 말이라도 했어?

 

아, 아니

 

안심해

 

우리 배에 왔다가

 

사장이 걱정한다며 돌아갔어

 

미리 말하고 가겠다더니

 

넌 걔 보호자가 아니야

 

걔를 통제할 권리가 없다고

 

네까짓 게 뭔데 그딴 말을 해?

 

미안, 내가 잘못했어

 

입만 열면 이런 식으로만
말이 튀어나온다니까

 

오늘은 바이올렛 얘기 하려고
온 게 아니야

 

이건…

 

한번 알아봐 주겠어?

 

사장님

 

늦은 시간에 미안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어

 

뭔가요?

 

아직 확인한 건 아니지만

 

어쩌면…

 

잘못 짚은 걸 수도 있고…

 

소령님 일입니까?

 

 

뭐라도 알아내셨나요?

 

길베르트 소령님에 대해
뭐라도 알아내셨나요?

 

지금 가보려고?

 

응, 다른 사람일 수도 있지만
가서 확인하려고

 

알겠어요, 여기 일은 걱정 마세요

 

바이올렛, 괜찮니?

 

괜찮을까요?

 

소령님을 뵈어도 괜찮을까요?

 

언짢아하실지도 모르잖아요

 

시간이 몇 년이나 지났는데

 

소령님이 절 알아보기는 할까요?

 

저기, 바이올렛

 

소령님을 뵈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아니면 제 감정을?

 

그걸 잘 전달할 수 있을까요?

 

이상하지 않을까요?

 

바이올렛

 

목적지까지 꽤 멀지?

 

가는 동안 편지를 쓰는 건 어때?

 

우리 왔다, 데이지

 

늦게 와서 미안해

 

데이지?

 

'잠시 라이덴에 다녀올게요'

 

한때 그녀가 일했던 우편사는

 

다른 회사들처럼
결국 국유화가 되어

 

원래 건물은 박물관으로
변해 있었다

 

이곳을 관두고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천천히 둘러보세요

 

아, 죄송합니다

 

계신지 몰랐어요

 

괜찮아요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요

 

 

실은 오래전 여기서
접수계 직원으로 일했어요

 

그러세요?

 

 

저기, 이 우표는 뭐죠?

 

아, 이거요?

 

에카르테라는 섬에서만
발행되는 우표예요

 

에카르테섬…

 

저기…

 

예전에 여기서 일하셨다고 하셨죠?

 

 

은혜로운 바다여

 

모든 세상을 이어주는 바다여

 

당신 하늘에서 갈매기가 춤을 추고

 

당신 안에서 물고기가 헤엄치고

 

당신 밑바닥을 조개가 파고듭니다

 

당신은 빛을 주고

 

생명을 키우고

 

사랑을 쏟아부어

 

우린 늘 당신 곁에서 삽니다

 

죽는 날까지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까지도

 

너울거리는 당신께
우리 몸을 맡기나이다

 

원래는 바다에 감사를 바치는
행사인데

 

지금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명복을 비는 자리가 돼 버렸어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지

 

섬에 남은 사람은 노인, 여자

 

그리고 애들이 다야

 

바다가 아닌 전쟁에서 죽다니

 

조상님 뵐 낯이 없어

 

우리 아빠들은

 

라이덴 군인들이 죽인 거죠?

 

응? 그래

 

라이덴 사람 모두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요

 

아까 낭독한 찬가는

 

올해 라이덴의 바다 감사제에서
헌정된 건데

 

유명한 인형이 썼다나 봐

 

이름이 바이올렛 에버가든이라나

 

모두 가요!

 

식사 시간이에요

 

우리도 가죠

 

가요!

 

선생님이 너무 좋아요!

 

빨리 가요

 

빨리빨리

 

소령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소령님을 볼 순 없었지만

 

매일 소령님 생각을 했습니다

 

제 기도가 응답을 받아

 

소원이 이루어져서

 

언젠가 소령님을 뵐 수 있기를

 

바이올렛

 

여기서 잠깐 기다려 줄 수 있을까?

 

저도 갈래요!

 

정말로 여기 있는 사람이
길베르트가 맞다 해도

 

그 친구가 현재
어떤 상태인지 모르잖아

 

- 그러니…
- 상관없어요

 

넌 상관없다지만

 

길베르트 마음은 모르잖아

 

본명을 쓰지 않는다고 들었어

 

여긴 작은 섬이야

 

어떠한 소문이라도 도는 건
원치 않을 거야

 

여기서 기다릴 거지?

 

물론입니다

 

다시 뵐 수만 있다면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거예요

 

여긴 처음 왔으니
구경이라도 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응? 저 아저씨 누군지 몰라

 

안녕하세요

 

안녕

 

- 누구 아빠예요?
- 아빠 아닌데

 

- 그럼 누구세요?
- 뭔가 수상해

 

아니, 난 우편사에서 나왔어

 

그럼 편지 배달하러 온 거?

 

음… 뭐

 

맞다! 선물 줄게요

 

완전 깜짝 놀랐어

 

돌아가자

 

아들도 감당이 안 되겠는걸

 

동생 찾으러 왔어요?

 

전…

 

우체부?

 

네, 맞습니다

 

어쩐지!

 

선물 줄게요

 

짜잔!

 

곤충이네요

 

사마귀인가요?

 

안 놀라네요?

 

앞다리가 하나 없네요

 

네, 질베르 선생님도 그래요

 

그 선생님…

 

오른쪽 눈도?

 

잘 아시네요

 

그분이 여러분 선생님인 거고요?

 

맞아요

 

선생님은

 

잘 지내시나요?

 

오른손이 없지만
왼손만 써서 철봉에 매달리세요

 

- 달리기도 빠르고
- 엄청 빨라요

 

- 그치?
- 응!

 

좀 더

 

좀 더 말해 줄 수 있어요?

 

그 선생님에 대해서

 

좋아요

 

우리 선생님은 진짜 친절하세요

 

이해가 될 때까지
여러 번 설명해 주세요

 

누구니?

 

들어오렴

 

이해 안 되는 게 있다면…

 

꿈에도 생각 못 했어

 

용케 살아 있었구나

 

길베르트

 

여기선 질베르로 통해

 

그렇군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

 

여긴 어떻게 찾았어?

 

어떤 아이의 편지를 대신 써 줬지?

 

배달 불능 우편물은
우체국으로 반송되거든

 

발신인에게 반송하기 전
한 번 더 확인하던 중

 

우연히 네 편지를 발견했어

 

너야말로 어째서 여기 있는 거지?

 

그 전투 후

 

눈을 떴을 땐 병원에 누워 있더군

 

인식표가 없었던 나를

 

수도회가 운영하는
병원으로 후송한 거야

 

한동안은 그 병원에서 일했어

 

그러곤 집에 돌아가는 대신
여기저기 떠돌다가

 

1년 전쯤 이곳에 왔지

 

아이들 요청에 따라 편지를 쓰고
가르치기 시작했어

 

이 학교에서

 

원칙적으론
군에 보고하는 게 맞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아

 

바이올렛이 살아 있는 건
알고 있었고?

 

 

그럼 왜 바이올렛을
보러 오지 않은 거야?

 

바이올렛은…

 

- 너만 기다리고 있는데!
- 나 때문에 불행해졌으니까!

 

바이올렛에겐 내가 없는 편이 나아

 

바이올렛도 같이 왔어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알기나 해?

 

볼 수 없어

 

길베르트

 

볼 수 없어

 

다시는

 

너…

 

그 사람은 죽었어

 

길베르트 부겐빌리아는 죽었어

 

다들 그렇게 생각했어

 

세월이 흐르면서
모두 그 사실을 받아들였겠지

 

그러니 다른 인생을 살게
내버려 둬

 

- 길베르트
- 지금!

 

여긴 포도 수확이 한창이야

 

사람들을 도우러 갈 거야

 

이 섬의 모든 남자가 참전했는데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어

 

호진스, 부탁이야

 

돌아가 줘

 

다시

 

올게

 

 

날 증오하고 있니?

 

질문의 뜻을 모르겠어요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잘못한 게 있다면 시정하겠습니다
말씀해 주세요

 

아니야

 

잘못한 건 나야

 

넌 도구가 아니라고 해놓고

 

여전히 널 도구로 쓰고 있으니

 

당연히 쓰셔야죠
전 소령님의 무기니까요

 

전황이 불리합니다

 

다음엔 뭘 할까요?

 

소령님, 명령을 내려 주세요!

 

사장님

 

소령님이셨어요

 

역시 소령님이셨어요

 

아이들한테 들었어요

 

소령님을 못 만나신 건가요?

 

만났어

 

팔과 눈 외에 다른 데는
무사하신 거죠?

 

 

그럼 뵐 수 있는 거죠?

 

그게…

 

널 볼 수가 없다는군

 

아직 임무 수행 중이신가요?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런 게 아니야

 

그럼 밤까지라도

 

바이올렛!

 

그럼 내일까지…

 

그래

 

내일 다시 만나 얘기해 볼게

 

녀석은 널 꼭 봐야 하니까

 

그 말은 즉

 

소령님이 날 볼 수 없는 게 아니라

 

보고 싶지 않다고 하신 겁니까?

 

어째서죠?

 

설명하기 힘들어

 

그 편이 서로에게 나을 거라나

 

그렇지 않아요

 

전…

 

전…

 

바이올렛

 

바이올렛!

 

그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면
포도를 위로 쉽게 옮길 수 있겠어

 

자네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비가 대차게 내리겠구먼

 

소령님!

 

소령님!

 

녀석을 찾았어

 

소령님

 

소령님

 

소령님!

 

소령님!

 

집까지 찾아와 죄송합니다

 

소령님, 살아 계셨으면서

 

왜 제게 연락하지 않으신 거죠?

 

왜 절 보러 오지 않으셨나요?

 

전 소령님이 보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를
이어가고 싶어요

 

'사랑해'의 뜻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아요

 

돌아가 줘

 

돌아가!

 

기다릴게요

 

소령님을 뵐 수 있을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게요

 

지금의 너에겐 내가 필요 없어

 

네가 있으면
원치 않아도 기억날 거야

 

어린 널 전장에 몰아넣은 일이

 

내가 내린 명령 때문에

 

네가 양팔을 잃은 일도

 

소령님은 후회하고 계시네요

 

저라는 존재가…

 

제가 소령님을

 

고통스럽게 하나 봐요

 

지금의 전 소령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

 

전부는 아닐지라도

 

조금은 알겠어요

 

이 멍청한 자식아!

 

이걸로 말리세요

 

감사합니다

 

묵을 데가 여기밖에 없었어요

 

여관도 없는 작은 섬이니까요

 

바이올렛

 

이 등대가 우체국 기능도 한다는군

 

이런

 

또다시 이 꽃이 피는 계절이 왔어

 

왕자의 두 눈엔 푸른 사파이어가

 

허리에 찬 검엔
진홍색 루비가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제 술술 잘 읽는구나

 

바이올렛

 

내 옆에 꼭 붙어 있어

 

늘 내 옆에 붙어 있어

 

바이올렛

 

 

두 분, 라이덴에 있는
우편사에서 오셨나요?

 

네? 네

 

바이올렛 에버가든이란 사람이

 

같이 온 그 아이인가요?

 

병원에서 우편사에 연락을 해

 

유리스라는 남자아이가
위독하다고 했다네요

 

유리스?

 

- 그게 대체…
- 제…

 

고객입니다

 

내가 천국에 가는 날
모두에게 전해 줘

 

 

돌아갈게요

 

뭐?

 

라이덴에 돌아가야겠어요

 

바이올렛!

 

이 폭풍을 어떻게 뚫고 가려고?

 

배도 내일 아침에나 뜰 거예요

 

길베르트를

 

보러 가려는 거지?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하지만

 

새끼손가락 약속을 했어요

 

유리스 님과 약속을 했어요

 

아직 쓰지 못한 편지도
한 통 있고요

 

하지만 돌아가는 데
최소 3일은 걸려

 

- 더 밟아요!
- 여기서 어떻게 더 밟아?

 

방금 베네딕트가
네가 맡고 있던 편지를 챙겨

 

아이리스와 병원으로 떠났다는군

 

 

실례합니다

 

유리스

 

인형 일 하시는 분들이 도착했어

 

쓰고 싶은 편지가 있지?

 

바이올렛?

 

대신 온 아이리스예요

 

바이올렛은 지금 멀리 있어서요

 

소중한 사람을 만나러 갔거든요

 

'사랑해'를 가르쳐 준 그 사람?

 

네, 맞아요

 

살아 있었구나

 

다행이야

 

이야기는 전해 들었어요

 

류카에게 쓰고 싶은 거죠?

 

 

뭐라고 쓸까요?

 

유리스!

 

유리스!

 

유리스

 

괜찮아질 거야

 

네, 연결해 주세요

 

부탁드려요

 

유리스, 류카와 연결됐어요

 

이거 어떻게 쓰는 거예요?

 

'여보세요?'라고 하면 돼

 

유리스?

 

 

여보세요?

 

류카?

 

응!

 

미안

 

문병 오지 말라고 해서

 

너 보기 싫다고 해서

 

미안

 

미안해

 

왜 사과하는 거야?

 

 

나 보기 싫다는 말 듣고 슬펐지만

 

그냥 네 마음이 그렇다니까

 

참았어

 

참고 참다가 도저히 안 돼서

 

병원에 몇 번을 갔는지 몰라

 

창문 너머로 네 얼굴을 살짝 봤어

 

심한 말 해서 미안해

 

아니

 

나 하나도 화 안 났어

 

유리스

 

우린 언제나 친구지?

 

앞으로도 영원히
친구로 지내는 거다?

 

 

그래

 

다행이야

 

고마워

 

저 끔찍한 물건이
유용할 때도 있네

 

유리스!

 

유리스!

 

유리스!

 

편지는 쓸 수가 없었대

 

하지만 전화로
마지막으로 류카와 얘기하면서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나 봐

 

'미안해'와 '고마워'란 말을

 

그리고 네가 쓴 편지를

 

부모님과 동생에게 잘 전달했어

 

'엄마, 엄마가 해준 팬케이크
맛있었어요'

 

'야채를 더 많이 먹었다면'

 

'엄마가 더 기뻐했을 텐데'

 

'아빠, 낚시랑 캠핑 재미있었어요'

 

'아빠와 엄마 아들로 태어나
행복했어요'

 

'사랑해요'

 

'유리스가'

 

동생분 편지도 있습니다

 

저요?

 

 

'시온'

 

'너에게 화내고 심술부려서
미안해'

 

'하지만 네가 태어났을 때'

 

'무진장 기뻤어'

 

'날 형이 되게 해줘서 고마워'

 

'내 몫까지 오래오래 살아야 해'

 

'내 몫까지
아빠와 엄마 잘 모시고'

 

'사이좋게 지내'

 

'어리광도 마음껏 부리고'

 

'내 소중한 동생에게'

 

'네 형이'

 

형아, 고마워

 

나 기뻐

 

아빠랑 엄마도 기쁘죠?

 

 

그래

 

고맙다

 

유리스

 

바이올렛이 소중한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된 걸

 

유리스가 기뻐했다는군

 

아침에 다시 찾아가 보자

 

이번에도 안 나오면
문을 부수고 들어가

 

한 방 먹여 버려야지!

 

- 아니에요
- 응?

 

한 방 먹일 거라면 제가 해야죠

 

- 바…
- 농담이에요

 

내일 배로 돌아갈게요

 

우편사에

 

돌아가서 편지를 쓰려고요

 

일이 쌓여 있어서

 

바이올렛

 

소령님이 무사히 살아 계시잖아요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목소리라도 들어서

 

저는

 

이제

 

그걸로 충분해요

 

영차!

 

자, 이제 돌려 봐

 

저기 올라온다!

 

대단한걸

 

일이 훨씬 편해지겠어요

 

우편사에서 온 아저씨랑 누나다

 

아저씨?

 

저 기계, 선생님이 만드신 거예요

 

- 진짜 대단해
- 그러게

 

- 봐, 가득해
- 더 넣을 수 있어?

 

멋지다

 

끝내준다, 나도 올려 볼래

 

어때요? 멋지죠?

 

 

이걸 선생님께 전해 줄래요?

 

알았어요, 꼭 전할게요

 

안녕!

 

자네 혼자 져야 할 짐이 아니야

 

젊은이들이 이 섬을 떠나고

 

그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은 건

 

우리 모두의 탓인 것 같아

 

전쟁에서 이기면 풍족해질 거라고

 

다들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모두 라이덴샤프틀리히 놈들을
미워했지

 

그랬는데

 

결국 모두 상처를 받았어

 

모두가

 

돌아갈 곳이 있다면
돌아가는 편이 나아

 

아뇨, 여기 있을 겁니다

 

앞으로 쭉

 

그래 주면 우리야 편하지

 

어이!

 

이 섬에 와서야

 

드디어 네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거야?

 

확실히 좋은 곳이긴 하네

 

 

여기서 세상 편하게 살면서

 

어머니 장례식에
코빼기도 안 내밀다니

 

나와 달리 널 얼마나 예뻐하셨는데

 

미안해

 

뭐, 너 대신 바이올렛이
어머니 묘소에 찾아와 줬어

 

요즘도 매달 찾아오고 있고

 

언젠가 널 다시 만나면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널 마대에 구겨 넣고

 

바이올렛 앞에다
내던져 버리고 싶어!

 

그때

 

바이올렛을 맡는 게 아니었어

 

네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게 뭐야?

 

바이올렛이 어렸을 때

 

좀 더 즐겁게 지내도록
해주고 싶었어

 

예쁜 것들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마음이 춤을 추는

 

그런 시간을 보내게 해주고 싶었어

 

그랬는데…

 

네 앞으로 온 거다

 

읽어 봐

 

'친애하는 길베르트 소령님'

 

'갑자기 찾아와 죄송합니다'

 

'이게 소령님께 보내는
마지막 편지예요'

 

'지금 제가 살아 있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된 건'

 

'다 소령님 덕분이에요'

 

'저를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책을 읽어 주시고'

 

'글과, 그 외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로치를 사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늘 제 옆에 있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널…

 

''사랑해'라고 해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절 사랑한다는 소령님의 말이'

 

'제 인생에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사랑해'란 말의 뜻을
알게 된 지금'

 

'소령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소령님'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모두

 

솔직해지는 데 왜 이리 서툰 건지

 

부겐빌리아 가문은 내가 이을 테니

 

넌 이제 자유롭게 살아

 

가봐

 

바이올렛!

 

바이올렛!

 

소령님

 

길베르트

 

소령님!

 

바이올렛!

 

소령님

 

바이올렛

 

이제 난 네 주인도, 상관도 아니야

 

넌 나 때문에 다쳤어

 

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좋은 주인도 훌륭한 인간도 아니야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

 

그래도

 

아직도

 

 

사랑해

 

전…

 

내 곁에 있어 줘

 

바이올렛

 

전…

 

소…

 

소…

 

전…

 

바이올렛

 

울지 마

 

나도…

 

이것 봐

 

울 것 같단 말이야

 

네 눈물을 닦아 주고 싶어

 

제발 고개 들어

 

전…

 

소령님을

 

소령님을…

 

사랑해

 

바이올렛

 

늘 이렇게 안고 싶었어

 

바이올렛은 남은 모든 일을
마무리한 후

 

다니던 우편사를 관두고

 

섬에 있는 등대에서
우편 업무를 이어받았다

 

지금은 그 우체국도
중심가로 이전한 모양이다

 

전화가 보편화되면서
인형이란 직업도 쇠퇴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서

 

마을 사람들을 위해
많은 편지를 썼을 테지

 

그랬을 것 같다

 

이 우표는
이 섬에서만 발매하고 있는

 

CH 우편사 기념 재단에서
발행한 우표예요

 

한 사람이 1년 동안 쓰는
편지 수로는

 

이 섬이 국내 최고예요

 

예전엔 '인형'이라 불린
여성들이 있었는데

 

이 섬엔 모두가 사랑한

 

인기 있는 인형이 있었어요

 

그 인형 이름은…

 

바이올렛 에버가든

 

제 할머니도

 

그분께 편지 대필을
의뢰하신 적이 있어요

 

아무리 하기 힘든 말도

 

편지라면 가능할지도

 

나도 내 진심을 전하고 싶다

 

내 진심을 전하고픈 그 사람은

 

지금 이 순간에만 있으니까

 

아빠

 

엄마

 

고마워요

 

"사랑해"

 

자막: 전소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