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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macine(2008.9)

 

누군가가 이제 50대에 이른
내 인생을 평가해보라고 한다면,

 

개인적으로 또 직업적으로
남부럽잖은 성취 수준을 이뤘다고 말하겠다

 

그 이상으로는,
"굳이 파고들지 않겠다"라고 할 것이다

 

나라는 인물의 어두운 면이
드러날까 꺼려해서가 아니다

 

뭔가 잘 돌아가는 것 같으면
그대로 놔두는 편이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마리온 포스트다

 

괜찮은 여대 철학과
학부 과장이다

 

지금은 책 집필을 시작해서
휴직 중이다

 

남편은 아주 성공한 외과의로서
심장전문의다

 

몇 년 전 내 심장 검사를 하다가
반해서 청혼 해왔다

 

둘 다 두 번째 결혼이고
남편한테는 16살 난 딸이 있는데,

 

제 어머니랑 살면서
자주 우리를 찾아온다

 

그 애는 착하지만
가끔 좀 버릇없이 구는데,

 

최대한 감싸주려고 노력한다

 

또 나한테는 결혼한 남동생이 있다

 

어머니는 최근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건강하게 지내신다

 

더 덧붙일 말은 없고,
한가지 보통 집에서 집필하는데

 

이웃에서 공사 중이라
너무 시끄러워

 

시내에 방 하나짜리
작업실을 빌리기로 했다

 

새 책을 쓰는 건
늘 신경쓰이는 일이다

 

진짜로 집필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에릭 사티,짐노페디 1번)

 

첫 날 오전 일에 들어가려는데
묘한 일이 생겼다

 

...그 친구의 어떤 점이
좀 마음 깊이 와닿았아요

 

그러니까...대단한 경험인데
남자한테 그러긴 처음이죠

 

그 생각을 좀체 떨쳐낼 수 없었어요
아직도 환상에 빠지죠,

 

뭣에 홀린 듯이

 

...그 환상이라는 게 뭐죠?

 

...뭐,가끔 수음을 하는 거죠
그러니까...

 

뭐,어떨 때는...
일하는 도중에도

 

질을 생각하면서
나 자신을 알았어요

 

그렇다고,어,아내가 더 이상
매력없다는 건 아니에요

 

여전하죠.진짜 아내나 딴 여자한테
육체적 매력을 느껴요,하지만...

 

정신과 진료실에서 흘러나오는
은밀한 고백을 엿드는 것이

 

누구한테는 흥미진진할지 모르지만
내가 이 곳을 빌린 의도는

 

전혀 그게 아니었다

 

...뭐,음...

 

진짜 그 친구를 포르노 쪼가리의
인물 쯤으로 생각하는 건 아닌...

 

나는 종일 열심히 일했고
일은 느리게 진척됐다

 

집필의 서두가
내게는 늘 제일 어려운 부분이고,

 

늦은 오후가 되자
지쳐버렸다

 

나는 고개를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깜빡 졸았나 보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쿠션 하나가 통기구 아래로
미끌어진 것 같았다

 

다시금 목소리가
차츰 귀에 들려왔다

 

여자 목소리였는데
아주 번민하는 애통한 소리로

 

그 애달픈 어조가
완전히 나를 사로잡았다

 

...한 밤 중에 자다 깨어
문득 알았어요

 

시간이 지나는데
묘한 그림자가 있더라구요

 

내 인생을 생각한다는 게
곤란해졌어요

 

뭔가 진짜같지 않은 것

 

거짓 투성이

 

그 그..그 거짓들은

 

아주...여러가지였고

 

대부분 내 일부가 되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됐어요

 

갑자기 진땀이 났어요

 

침대에 앉은 채
심장이 마구 뛰었어요

 

맞은 편의 남편을 봤는데,

 

마치 마치...낯선 사람 같았어요

 

불을 켜고
남편을 깨우고는,

 

안아달라고 했어요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겨우 마음을 추스렸어요

 

하지만 처음 한 순간

 

커튼이 갈라지는 듯하면서

 

내 자신이 똑똑히 보였어요

 

내가 본 게 두려웠어요

 

앞으로를 생각했어요

 

어쩌면...

 

어쩌면 다 끝장이 아닌지

 

자,자

 

약간의 기쁨과 크게는
무력감의 우려가 뒤섞여서,

 

바야흐로 50줄에 들어서게 됐어

 

어,지난 주까지는
기분이 괜찮았어

 

그런데 아들놈 말이,"어,아빠,
숨찬 게 옵션 되는 거 아네요?"

 

참 웃기는 놈이지,그 녀석

 

마리온,린다한테 오늘 그
당신의 희한한 이야기 하던 중이오

 

- 아,네
- 요즘 새 건물들은 순 날림이야

 

- 아냐,오래 된 갈사암 건물인데
- 뭐 요새는 사생활이란게 있나

 

지난 주에 리디아와 집에 있었는데
일요일 아침이었소...

 

- 마크...
- 실화요.막 키스를 하고는...

 

- 마크!
-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지...

 

- 미쳤나봐? 취했어
- 주방 마루에서 일을 벌였소

 

거실 마루지,거실 마루

 

- 하긴 좀 뜻밖이긴 했어
- 안 그랬다고?

 

그런데 문이 열리더니
관리인이...열쇠가 있거든

 

- 아이고,저런
- 수리기가 들어왔지.수도 새는데 쓰는

 

현장이 들통난 거야

 

이이가 어쨌는지 알아?
벌거숭이로 일어나서는,"반두치씨,

 

여기 파이프는 고칠 필요없는데"

 

즉탕이란 거지,켄
그렇게 즉탕 식으로 해본 적 있나?

 

- 아니
- 오금저리게 그만이야

 

- 그 사람 웃던가요?
- 오,아뇨

 

얼굴이 벌개지더니
성호를 그었어요

 

안됐네

 

50이 되어 한가지 좋은 점은
되풀이는 안된다는 거지

 

알았다

 

로라야.제 엄마랑 또 싸웠대
우리 집 와 자고 싶다는데

 

캐시한테 그럼 안되지

 

말 좀 해줘,내가 또 그랬다간
그 애랑 곱게 못지내지

 

알았어.저..잠깐 있어봐라

 

마리온 바꿔줄게,그래

 

로라? 이런 식으로 나가면 안 좋아

 

네 어머니가 신경이 예민하잖아
아주 속상해 할 거다

 

너한테는 좀 그럴지 몰라도
기분 좀 풀어드려야지

 

그래도 안되면
그냥 덮어버리고

 

알았지?
내일 우리 아버지 집에서 보자꾸나

 

그 때 이야기하자,그래

 

바이 바이

 

당신 말은 듣네,올려다 보니까
나하고는 통 대화가 안돼

 

이건 좀..이건 참 그러네

 

(# "The Bilbao Song" on piano)

 

헤이

 

생각 나?

 

참,그래

 

거실 마루에서 하는 거
생각해본 적 있어?

 

그러고 싶어?

 

글쎄,그러고 싶어?

 

글쎄

 

사실 당신이 마루 바닥에서
그럴 타입은 아니잖아

 

아니라구?

 

헤이,켄,거기서 뭣들 해요?
안 먹고

 

내 아내 잘 아시지

 

자기가 거실 바닥에서
뒹구는 타입이라는데 어때요?

 

- 켄!
- 오,참,남자들이란...

 

- 해본 소린데
- 전엔 좀 낯뜨거웠는데

 

몸만 작살 안나면
나쁘지 않아

 

이튿날 오전,올케가 만나러 온다길래
그러고마 했다

 

한참 기다렸지만 나타나지 않아
나가기로 했다

 

- 마리온,미안해요
- 오,하이

 

- 교통이 막혀서
- 아,그랬군,지금 많이 늦어서

 

- 미안해요,잠깐이면 되는데
- 스케줄이 아주 밀렸거든

 

8시라고 해서 기다렸는데
이젠 가봐야해

 

- 멍청한 버스가 꼼짝도 않잖아요
- 다른 날로 잡지

 

글 쓸 때는 나름의 규율이 있어,린,
안 그러면 제 때 못 끝내

 

돈을 좀 빌리려구요
폴하고 이혼하기로 했잖아요

 

들었어,안됐어

 

- 그래요?
- 왜 그렇게 나와?

 

뭐...저를 탐탁찮게 여겼잖아요

 

왜,잘 알지도 못하는데

 

노력 안한 건 아니에요

 

아,그래,속이 많이 상하겠지
그래도...

 

미안해요

 

돈이 필요하면
폴이 부탁하지,왜?

 

그게...안한대요

 

왜 그러지?
전처럼 하지

 

마리온

 

폴의 감정을 몰라요?

 

뭐,우린 늘 아주 가까운 사인데

 

착각하시는 거에요

 

그야,어떤 면으로는 우러러보지만...

 

미워하기도 해요

 

안됐지만,무슨 소린지

 

통찰력 있으시잖아요
어떻게 동생 감정을 몰라요?

 

봐,음,난 늦었어,또...

 

어...

 

솔직히 이런 식의 대화에는
익숙치 않아

 

부질없는 짓이고
말해놓고는 나중에 후회하지

 

그냥 얼마가 필요하다고 하면
켄하고 상의할텐데,안 그래?

 

올케와의 만남으로 화가 났지만

 

일에 방해가 안되도록 마음 먹었다

 

상당히 진도가 나간 날이었지만
늦 오후가 되자

 

좀 노파심이 생겼다

 

...참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요즈음 결혼 생활이
좀 기묘하게 느껴졌죠

 

뭔가...무너지는 듯한

 

여러 방법으로
그걸 부인해보려 했어요

 

한가지 고백하죠

 

내가 옳은 선택을 했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전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고 했죠

 

마지막 본 게 여러해 전,

 

결혼하기 전의 파티에서였어요

 

(# "A Fine Romance")

 

그만,그만둬요.이건 미친 짓이야
켄하고 결혼할 거고,그렇게 돼있어요

 

- 어떻게 켄하고 결혼해요? 날 사랑하면서
- ..뭐가? 아주 독단적이네

 

왜 내가 당신을 사랑하다고 여기죠?

 

알지.어떤 일은
그냥 알아버리는 거니까...

 

그래,내..내가..오산이에요
오인시켜 미안하군요

 

- 오산은 당신 쪽이요
- 참 놀랍군요

 

켄의 친한 친구잖아요

 

당신의 전부를 사랑해요
서로 함께 살고 싶고...

 

그만,그만해요! 당장

 

마리온? 건배하려는데!

 

그냥 가요

 

켄과 마리온의
다음 주 경사를 위해

 

마리온의 새 책을 위해
독일 철학자들도 못 따라올 걸

 

그렇기만 하면

 

앞날이 창창하잖소
하이데거야 대우 다 받은 거고

 

헤이,건배하고 싶은데

 

건강과 행복을 위해

 

- 마리온을 위해서는 아니고?
- 그래,그렇지

 

마리온한테는 눈으로

 

좋네,기막힌 말이야

 

뭣 좀 가지러 왔는데

 

그만 좀 쳐다봐요

 

내가 유령인가

 

이 집에서 몇 년을 같이 살고
애를 길렀는데

 

전화하고 오지

 

안 있을 거야
몇몇 옛 친구들이 와있긴해도

 

- 한 잔 할 거야?
- 키티...

 

미치게 하지마.
안 마실 거야

 

더 예의바르던 시절의 유물인가

 

당신이 그냥 훌쩍 가버린 거잖아

 

어느 쪽이 마리온이지?

 

- 난데요
- 캐시,취향이 고약하잖아

 

아,전 남편이 취향 전문가였군!

 

에밀리 포스트(예절서의 작가)는 뭐라 그럴까
누군 병원에서 난소제거 수술 받는데

 

그 남편이랑 홀리데인 인 호텔에서
놀아난 철학교수를?

 

- 좋아,됐어.이제 좀 가줘
- 아이고 참

 

마음 아픈 줄 알고
잘못이 있었다면 미안해

 

용서해.
질책을 달게 받겠어

 

미안합니다

 

(# "Make Believe")

 

무슨 말을 하면 마음이 바뀔까?

 

정말 놀랍군요

 

같은 친구면서. 막...
황당한 경우를 당했잖아요

 

그래요,내 친구고 좋아하지

 

하지만 벽창호요
차갑고 꽉 막혔지

 

못 봤소?
"질책을 달게 받겠어",참!

 

아주 곤란한 경운데
잘 대처했어요

 

아,너무 잘했지?
그게 좋소?

 

그 친구는 속물이요

 

좋은 사람이에요

 

또...유능한 의사고

 

교양있고 신사답죠

 

같이 있는 게 좋아요,그건...

 

- 같이 책을 읽고,또...
- 여기 쏠린 거군,온통 여기

 

또 섹시해요

 

홀리데이 인에서 놀아나서?
신용카드로 받던가요?

 

그이는 당신 험담은 안해요

 

그 친구가 뜨거운 여자를 좋아한다면?

 

다른 이들과 어울려야겠어요

 

당신을 잘못 봤나보군

 

- 두 가지 당신이 있거나
- 샴페인을 너무 마셨나 보네요

 

이런 대화를 겁내나 보군

 

가봐야겠어요

 

꼭 그래야겠소?

 

...간혹 진실한 사랑을 생각해봐요

 

어쩌면...
스스로 그 생각을 막고 있어요

 

어떤 경험 같은 건 아니에요

 

더 깊고,더욱 더 강렬한
그러다 두려워져요

 

너무 많은 걸...

 

- 하이,안녕하세요?
- 그래

 

여기 좋다,진짜 괜찮네
맘에 드는데.준비 됐어요?

 

- 그래
- 미안해요,너무 일렀나?

 

- 아니다
- 알맞게 온 거죠? 그럼 됐네요

 

- 아빠는 못 오시는 거 알지?
- 네,이야기 들었어요. 괜찮으세요?

 

- 나?
- 좀...

 

- 아냐,괜찮다
- 좋아요

 

자,그럼,나가요
차들 몰리기 전에

 

네 어머니 소지품과 유품을
다 모아놓았다

 

사진,편지

 

네가 보관하는 게 낫겠다

 

내 손으로 치우기도 뭣하고

 

- 몇 달 동안 견딜만 하셨어요?
- 그럭저럭 바삐 지냈다

 

- 시내로 옮겨오셨으면 했는데
- 여기서 괜찮아

 

클라라가 오잖아
평소대로 청소하고 요리해주니,

 

달라진 것도 없지

 

일년에 두 번
스미소니언 위원회 모임이 있지

 

그 땐 워싱턴에 가
시간을 좀 보내고

 

난 괜찮다.여기가 좋아

 

그래도 여기 계시면
엄마 생각 나실텐데

 

뭐,역사가라도 과거에 연연하지 않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 연세에도 누굴 만나
다시 사랑에 빠질 수 있으세요?

 

이 나이에는 책임질 게 없는 게
한가지 바램이지

 

폴과 린이 이혼하는 거 아세요?

 

폴이 무슨 일인들 못하겠냐
그 애한테 안 들어 다행이구나

 

- 운이 안 좋았어요
- 너랑 같은 기회를 가졌다

 

그냥 이것저것 건드려서 탈이지

 

- 여전히 돈 보태주는 건 아니겠지
- 아네요,뭐,가끔씩

 

재정 곤란을 해결해 준게 얼만지

 

돈 많이 썼어
너한테는 다 이야기 안했지

 

언젠가는 그 놈의 벤처기업인가로
남의 등을 칠 거다

 

그러다 감옥 가지

 

(바흐,첼로 소나타 2번)

 

아까 나무라는 눈길로 절 보시던데요

 

그래,아버지한테
좀 뭣한 질문을 하더라

 

사랑에 빠질 나이 하면서

 

- 뭐,나쁘게 안 여기시던데
- 그래도 썩 적절한 건 아니지

 

늙으셨잖아
그런 건 안 돌아보셔

 

죄송해요

 

됐다,그냥...

 

잊어버려라..젊으니까

 

사진들이네

 

엄마 보석이고
이것 봐

 

이걸 추억으로
간직하게 될 줄은

 

이건 릴케 시집이고

 

그래,독일 시를 나한테
처음 소개해주셨지

 

이건 가을의 집 사진이야

 

아주 멋지지
아,부엌에 우리들이 있어

 

클라라도
아주 젊을 때잖아,클라라

 

우리한테 아주 잘해줬지
그 때 구워주던 그 쿠키의 맛

 

우리가 감기로 고생하면
옆에 꼭 붙어있었지,수호천사처럼

 

아,이건 좀 나이 들어서
빈 방에서 그림에 매달려 있는 거

 

한참 그림을 그리노라면
시간이 훌쩍 갔지

 

이건 내 친구 클레어와 같이
그래,여배우가 되었어

 

아주 친했는데
못 본지 몇 년 됐어

 

그리고 우리 엄마
여기저기 거닐길 좋아하셨지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하셨어
자연과 음악,시

 

그런 게 어머니의 전부였어

 

- 폴,이야기 좀 하고 싶은데
- 네,아버지?

 

큰아버지 벤과 상의했다

 

다음 철에 자기 회사에
네 자리를 마련해보겠다고 했어

 

판지 상자 공장에서
일하고 싶지 않아요

 

- 제지 공장이야,상자가 아니라
- 전에 해봤잖아요. 지겨워서

 

폴...

 

사람한테는 책임감이란 게 있다

 

올 해는 때가 안 좋아

 

네 엄마는 많이 아프지
나는 전념할 데가 있어

 

*대륙회의 연구를 마쳐야 해
*미 독립혁명 때 주 대표회의

 

마리온이 대학 갈 돈을
마련하는 게 중요해

 

학위를 따게 해야지
그만큼 영리한데

 

난 다른 계획이 있어요

 

카드놀이나 하면서
시간 허비하는 계획 말이냐

 

- 나한테만 그래요
- 폴,네 성적이 그렇잖아

 

똑똑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열중하지 않잖아

 

그래요,마리온은 천재지

 

브린 마워대에 갈 자격이 있어

 

- 그 길을 막고 싶냐?
- 아니요

 

잘 될 거야.뭐든 해내고
거침없을 거야

 

숲에서 수채화나 그리겠다는
몽상만 안하면

 

폴?

 

왜 그래?

 

나더러 박스공장에 가서 일하라잖아

 

- 그럼,뭘 하고 싶은데?
- 모르겠어

 

집 나가 돌아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일을 찾아볼 거야

 

박스공장보다야 낫겠지

 

아버지가 싫어. 엄마도

 

자기들만의 세계에 살잖아

 

(바흐,첼로 소나타 2번)

 

- 이 근처니?
- 네,여기서 스코트와 만날 거에요

 

같이 가요. 만나면 좋아할텐데
내가 이야기 많이 했거든요

 

고맙지만,정말 피곤해서

 

- 다음 기회도 있잖아
- 가요,딱 맥주 한 잔만

 

한참 이른데
아빠도 아직 안 오셨을 거구

 

누구 보여요?

 

- 그래
- 누군데요?

 

그냥,어..아는 얼굴인데
아는 여자야

 

좋아요,고마웠어요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 그래
- 네,바이

 

오늘 밤엔 대사 반은 까먹었어

 

마리온,너...

 

- 클레어?
- 너구나,너야.그래

 

- 클레어? 막 네 얘기를 했는데
- 그래?

 

아버지 집에서 낡은 사진을 보면서
여기서 뭐하는 거야?

 

- 연극해.막 내렸지만...
- 무대에 서?

 

그래,신문 연극면은
잘 안 읽겠지

 

하긴,그래,
그래도 참 뜻밖이네

 

나 좀 봐,뭐하지? 미안해
여긴 남편 잭이야

 

- 마리온 포스트에요
- 반갑습니다

 

아이고 참,클레어
정말 자주 궁금했었는데

 

- 뭐,지금 몬테레이에 살아
- 그래? 한잔 할 시간 있니?

 

- 미안한데,친구들과 만나기로해서
- 아냐,약속 때까지 시간 있잖아

 

- 그런가?
- 아 잘됐네요.여기 들어갈 데 있겠지

 

- 자,이리 쭉 가
- 난 그냥...

 

...국제 엠네시티와 ACLU
마침 한 날이잖아요

 

이거,놀리시는군요
그렇다면

 

엠네스티와 자유인권협회
회원이시라구요?

 

마리온은 늘 자선 일에는
열심이었으니까,안 그래?

 

그래,그냥 홍수나 기근에
기부하는 거지,켄이랑

 

- 시간이 어디서 나셔서?
- 늘 바쁘건 아니죠

 

철학과 과장이시면서
어려울텐데

 

나도 시카고대학에서
2년 철학과에 있었죠

 

- 아주 좋은 과죠
- 그랬죠,날 내보내기 전까진

 

클레어,이런 이야기는
전에 안했잖아

 

- 했을텐데
- 서로 단짝이었는데

 

- 분명 뛰어난 여배우일 거에요
- 아냐...

 

아니긴,뭐가
원래 재능이 있었어요

 

극장에 자주 가시나요?
스케줄이 안될텐데

 

그렇죠.남편은 오페라 팬이죠
거의 못 보지만

 

- 브레히트에 열중한 적도 있는데
- 브레히트를 올렸었죠

 

- 그랬어요?
- 네,억척어멈(Mother Courage)

 

- 여기서 아니죠?
- 아니,여기서죠.보셨나요?

 

그야 봤죠.여태 본 연극 중에
가장 지적인 연출이더군요

 

- 과찬의 말씀을
- 번역이 좀 그렇더군요

 

몇몇 대사는 좀 더 나을 수 있는데

 

- 맞아요.번역이 서툴렀지
- 그래도 대단한 일을 하셨어요,정말로

 

헤이,헤이,헤이

 

가끔은 날 좀 봐
누가 당신 아낸데

 

어?

 

아까부터 저 애 말에만
매달리고 있잖아

 

사람 무안하게 하네

 

남편이 썩 감명받았나봐
나한테는 없는 그 무엇에

 

클레어,진정해

 

한 시간 동안
네 눈만 쳐다보고 있는데도?

 

- 내 말은 귀에도 안 들어올 거야
- 좀 취했나보군

 

- 혹시 둘이 따로 있고 싶으면...
- 클레어,그만 해,바보처럼

 

- 그저 즐겁게 얘기한 건데
- 관 둬.내숭떨기는

 

- 이게 처음도 아니면서
- 그만 좀 해

 

- 그게 무슨 뜻이지?
- 가,클레어.미안해요,마리온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어

 

순진한 척 끼어들어서는
내 인생에 회의를 품게한

 

클레어,왜 그리 과장되게 나와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우린 그냥 소원해진 게 아냐,마리온
내가 끊은 거야

 

- 데이빗 이야기 하는 거야?
- 거봐,알고 있네

 

- 난 관심 가진 적도 없었는데
-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 지는 알았지

 

그럴 일이 없어
무슨 언질이라도 줬어야지

 

그렇지 않아

 

아주 장난기 가득한 말투에
은근히 쳐다보는 눈길,

 

또...교묘하게 홀리는 행동

 

안 그래

 

그래서 날 적대시한 거라구?

 

너한테 빠져서
딴 건 안중에도 없었다구

 

한시라도 둘만 있은 적 없었어
둘이 아무 일 없었어

 

그런데 내가 홀린다고 해
그 사람만 있으면...발동되던 걸

 

뭐 의식 못하고
그럴 수도 있지

 

클레어,이 얘긴 그만 둬

 

네가 있는데
난 얼마나 밋밋하게 보였을까

 

말도 안돼!
상상 때문에 친구 관계를 끊었다구?

 

그래 내 탓이겠지
널 뿌듯하게 여겼는데

 

단짝이었지. 아주 재치있고 활발한
냐야 그저 고지식했고

 

뭐 데이빗을 빠져들게 하고 싶었겠지
특별했으니까

 

뭐가 특별해,제안도 거절했어
너랑 사귀라고 했어,딱 잘라서

 

- 그 때까지 데리고 논 거지
- 말도 안돼

 

진짜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는 것 같구나

 

이건 모욕이야
술 마시면 안되겠어

 

믿어줘,그럴 생각 없었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또 뭐든지...

 

생각해 봐,가끔 잘 생각해 봐
배우가 될 걸 그랬어

 

집에 왔을 때 켄은 자고 있었다
몸이 떨려 잠도 오지 않았다

 

클레어와의 일로
신경이 곤두서고 불편했다

 

뭔가 읽으면 진정되리라 생각했다

 

어머니의 릴케 시집을 넘겼다

 

16살 때 표범에 관한 릴케 시의
리포트를 쓴 적 있었다

 

우리 밖을 노려보는
표범의 이미지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그 이미지가 죽음일따름이라고
결론내렸었다

 

어머니의 애송시가 보였다

 

"아르카이크의 아폴로 상(Archaic Torso of Apollo)"

 

페이지에 어머니의
눈물 자국 같은 것이 있었다

 

마지막 연에 번져있었다

 

"이곳은 그대가 보이지 않는 곳이니

 

그대는 인생을 바꾸어야 하리라"

 

간밤에 늦었더군

 

옛 친구를 만났어

 

잠을 못 잤어
10분이나 눈 붙였을까

 

그러고선 어떻해,쓰러지지

 

오늘 밤 마크와 리디아랑
콘서트 갈 건데

 

오늘은 괜찮아
내일쯤 부대낄 거야

 

내일은 톰과 엘리노어랑
저녁을 해야하는데

 

금요일엔 마크와 리디아가
밖에서 우리 결혼기념을 하자고 하고

 

- 벌써 기념일인가?
- 그래,빠르잖아

 

왜 그래?

 

모르겠어

 

뭔데?

 

그러니까,단 둘이
기념일 보내면 안되나?

 

처음 만난 날 밤
그 레스토랑에 가던지

 

필라델피아의?

 

안아줘

 

헤이

 

여보

 

벌써 선물은 찍어놨어

 

내가 부추겨서 아내와 헤어졌어?

 

아냐,내가 부추긴 거지,기억 안나?

 

유부남이라 생각도 않을까봐
고심했었다고

 

그래...

 

어제 로라와는 어땠어?
당신을 우러러보잖아

 

그래

 

가야겠어
시내 가는 길에 도서관 들리게

 

그래

 

...오늘은 말이 없군요

 

평소엔 다 얘기하더니

 

...네,저..말할 게 없어요

 

...흐음

 

...그러니까..전할 말이 없어요

 

...화났나요?

 

...아뇨,그런 게 아네요

 

...그런데 할 말이 없으시다고?

 

...네

 

(# 적도,"Ecuatorial")

 

마리온이 우릴 봤어,스코트
문 잠궈

 

둘이 숲으로 산책갔다 그랬잖아

 

아빠는 주말에 우리가 같이 지낸 걸 알면
언짢아할 거야

 

그럼 해명을 해야 할 거고
뭐 별일 없었다는 둥...

 

- 봐,마리온이 거들어주겠지
- 참,넌 마리온을 모르잖아

 

- 아주 생각이 깼다고 했잖아
- 그래,그렇지,대단하지..

 

대단해,근데..모르겠어
그냥 뭐랄까..

 

좀...남을 판단해

 

있잖아? 내려다보면서
값을 매기는 것 같은

 

남동생 이야기도 들었어,그래서..

 

늘 그런 식으로 날 대하는 것 같아,
모르지만

 

그냥 괜히 내가...싸구려 같아

 

- 싸구려?
- 그래

 

- 싸구려?
- 그렇다니까

 

- 아주 로맨틱했어
- 그래

 

장작불과 포도주...

 

그래,그랬어

 

그 날은 일이 손에 안잡혔다

 

바깥 바람을 쐬고 싶었다

 

정처없이 거닐면서
헝클어진 생각들을 정리해보려 했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돌아보니
작업실에서 아주 멀리 와있었다

 

웬 일이야?

 

모르겠어

 

무슨 일로 왔어?

 

- 뭔가 잘못됐구나
- 그런 소리 마

 

마리온,회사로는
거의 안 찾아오잖아

 

뭔가 필요해서겠지

 

그래,뭔가 필요해

 

그게 뭔지 잘 몰라서 그렇지

 

- 그래,내가 어떻게 해줄까?
- 정직하게 대해줘,폴

 

어려서부터 아주
가까운 사이였잖니

 

얼마나 정직하면 되는데?

 

그러고보니 우리가
서로 이야기 나눈 적도 한참 됐구나

 

그래...

 

쫓아다니는 게 영 불편한 것 같아
그만 단념했지

 

- 그렇지 않아
- 그러지 마,자,마리온

 

있잖아...

 

깨달았지..실망끼친다는 거

 

더우기 남부끄럽게 한다는 걸
내가 사는 거나,결혼생활..

 

뭐 이젠 갈라설 거니까
그 걱정은 하지 마

 

사촌 앤드류한테 가
일하라고 하잖아

 

그 말도 맞지,뭐,
아내나 애들을 제대로 부양 못했으니까

 

그래,그게 그렇게 싫어?
앤드류와 일하는 게?

 

전에도 그랬었지

 

그래,그런 적 있지만...

 

- 시대가 변했잖아
- 그래,분명 그렇지

 

기억나려나,몇 년 전,

 

어,뭘 좀 써서 보여줬는데
뭐랬었는지 기억나?

 

아니,모르겠어
그냥 사실대로 말했겠지

 

그래,그랬지
"과장됐어,

 

너무 감정적이고 감상적이야

 

너한테는 의미있는 꿈일지 몰라도
객관적으로 봐서...

 

너무 낯뜨거워"

 

내가 그랬다구?

 

한 말 그대로야

 

그래서 더는..낯뜨거운 짓은

 

안하기로 했지

 

가야겠어

 

("말러,교향곡 4번 G장조")

 

오후 내내 생각했는데
어디 기막힌 데가 없을까,

 

금요일 둘의 기념일 축하 때 말이야

 

필라델피아의 호텔은 어떠신가?

 

처음 남몰래 열정을 꽃피운 곳이고

 

- 그래? 당신이랑 생각이 통했나보군
- 술김이지,무슨 생각은

 

마시지,마실 거고
술을 입에 댔으니..그래도 술김은 아냐

 

저기,실례가 아닌지 모르지만...

 

20년 전 버몬트에서
교수님 학생이었어요

 

- 신시아 프랭크?
- 기억 못하시는 줄 알았는데...

 

아니,기억해,기억하고말고

 

- 내 인생을 바꾸셨으니까
- 내가?

 

그러니까...철학과 모든 여학생들의
귀감이셨으니까요

 

- 고마운 말이네
- 아직도 그 강의가 똑똑히 기억나요

 

윤리와 도덕적 책임감에 관한
특별한 언급이었어요...

 

참,경이로운 생각이셨고
아직도 내겐 경이로워요

 

괜히 끼어들었는데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전에도 여기서 뵜는데
내 인생을 바꾸셨다는 말을 못 드렸어요

 

감사해요

 

헤이,좋아,좋아,대단하군요

 

그 강의 기억나시나?
멋졌어,주위를 둘러보면서...

 

아주 감동적이야

 

그 날 밤도 잠을 이루지 못했고
다음 날 그 여파가 왔다

 

한 줄도 쓰지 못했고
움직이기도 버거웠다

 

평소에 낮잠은 안 자지만
지친 상태였다

 

잠깐 눈을 감자,
꿈이 찾아들었다

 

...아무 이야기도 안한다고?

 

한 마디도 안하고
시간이 다 됐군

 

참,아무 말도 안하다니

 

화가 나서 그럴 거요

 

분노를 억누르느라 그런 거지

 

뭣 때문에 그렇게 격분하지?

 

...삶이요

 

- 삶?
- ...세상과

 

무자비함과 불공평

 

고통받는 인류

 

질병..노쇠..죽음

 

다 추상적인 거군. 인류라
인류 걱정 그만해요

 

자기 인생이 먼저지

 

- 그래요
- 내일 계속합시다

 

뭣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 것 같소?

 

- 자기기만
- 그래,좀 일반적이군

 

- 거짓을 구분 못할 거에요
- 못해? 안됐군

 

- 스스로 원하지 않는다면
- 바로 지금 그래요

 

원하면은 하겠지

 

- 아주 갑작스레 일어나요
- 서둘러야겠지

 

자살하는 걸 막도록 해야지

 

- 그럴 것 같아요?
- 이미 시작됐지

 

- 그래요?
- 아,극적이지는 않지

 

그럴 타입이 아니요
천천히 정연하게 하겠지

 

젊어서부터 시작된 거지

 

자,실례요만
다음 환자가 있소

 

이제 내 인생은...

 

끝이 가까운데,

 

회한뿐이구나

 

일생을 같이 했던 여자는

 

절절히 사랑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아들과의 사이엔
애정이라곤 없었다. 내 탓이지

 

딸애를 너무 몰아붙였지

 

요구만 하고
충분히 배려를 안해줬어

 

스스로에게도 너무 유감이다,

 

그 역사 속 인물 연구인가
뭔가에 몰두하느라

 

비록 이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명성을 얻었지만,

 

자신에겐 너무 무심했어

 

갑자기 꿈이 옮겨갔다
어딘지 눈에 익은 거리였다

 

클레어와 마주 쳤던
그 극장 앞 같았다

 

(# "적도,Ecuatorial")

 

- 무슨 일에요?
- 들어와요,괜찮아요

 

리허설 참관하시겠다고?
클레어는 훌륭한 여배우죠

 

다양한 역을 소화해요

 

거실 바닥에서 그러는 거
생각해본 적 있어?

 

- 그러고 싶어?
- 글쎄,그러고 싶어?

 

뭐,당신이 마루 바닥에서
뒹굴 타입은 아니잖아

 

참,아주 모욕적인 말이네

 

당신이야말로 불끄고
침대에서만 하는 타입이지

 

- 이제 모욕당할 차례인가?
- 옷 벗고 잠자리에 들 거잖아

 

그래,밤 1신데

 

솔직해져봐
우리 결혼생활엔 열정이란 게 남아있어?

 

- 없나? 모르겠는데
- 딴청부리지 말고

 

한마디 하자면
이젠 전혀 감흥이 없어

 

- 그래,전혀?
- 있어?

 

마리온,피곤해

 

같이 자는 것도 영 드문드문이고
그것도 옆에 책을 끼고서

 

매일 똑같지.다음 할 일,
다음 순서가 뻔해

 

그래,맞아,둘 다 일상에 길들여졌지
이제 그만 잘까? 늦었는데

 

참,자면서 좀 뒤척이고
잠꼬대 좀 하지마

 

간 밤엔 계속 래리를 부르더군
래리 루이스 꿈을 꾸는지

 

래리 루이스란 이름을 듣고,

 

묘하게 가슴이 애잔하고 설레였다

 

꿈 속에서 울음이 북받쳤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 결혼했군요?
- 그렇소,알고 있을텐데

 

아,그래요

 

네,들었어요

 

래리는 뉴욕으로 옮겨가재요
싫은데

 

산타페에서 너무 즐거웠는데

 

- 행복해요?
- 행복하지

 

참 좀 비켜줘야지
서로 할 이야기가 많을텐데

 

가끔 잡지에서 이름을 봤어요

 

내 소설 읽었소?

 

그래요.아니,아직 안 읽었다고 하면
좀 그렇겠죠

 

주인공 하나는 당신이 모델이요

 

아?

 

- 너무 심하게 안 다뤄줬으면
- 아니요,애정을 다해 그렸지

 

부인이 사랑스럽네요

 

그렇소,당신과 작별한 직후에 만났지

 

제니퍼라고 해요
좋은 동료 작가지

 

- 애들도 있어요?
- 그렇소

 

딸애가 있지

 

평생 제일 멋지고
대단한 경험이었소

 

날 생각한 적 있어요?

 

날 생각한 적은 있소?

 

가끔은

 

켄과 행복하기를 바랬지

 

얼마 전에 거리에서 마주쳤소
이야기했을텐데

 

가끔 이상으로 생각했어요

 

후회는 없었겠지
후회했다고 말하지는 말아요

 

여보,좀 와봐요
해지는 게 너무 아름다워요

 

소설의 어느 주인공이 나죠?

 

헬렌카.아름다운 이름을 붙였소
헬렌카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을 그린 거요

 

알아볼 거요

 

가야겠소

 

아내가 기다리니까

 

마리온,울지 말아요

 

우리 연극이 감동적이라
기쁘긴해도

 

- 집에 가겠어요
- 그러시던지

 

마지막 2막을
보고 싶으실텐데

 

당신 첫 남편의 자살 장면이죠

 

찡해요

 

샘은 자살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알아요?
이혼한 지 15년 흘렀는데

 

술과 약을 섞어마시고는
자다가 죽었어요

 

장례식에 갔었어요

 

뭐,그거야 늘 애매한 상황이죠

 

혼자 호텔 방에서,

 

낙담해서...

 

샘은 훌륭한 사람이었어요

 

좋은 시간을 함께 했죠

 

많은 걸 가르쳐 줬잖아요

 

우수한 학생이었지
수업에서 제일 눈길을 끌기도 했고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부추기지 말아야 했어
지적으로 말이야

 

유혹을 뿌리쳐야 했어

 

흠모하지 말도록 해야했는데
그토록 두드러지니 말이야,

 

어쩔 수 없더군

 

그 대가를 치른 거지

 

둘 다 대가를 치뤘어요

 

피할 수 없는 때가 오는 거지
제자가 스승의 모든 걸 흡수한 뒤에는

 

기쁨의 원천인 것 같던
지식과 견해의 전수가,

 

숨막히게 되지

 

얄궂게도
내 사망확인서에 그렇게 적혀있지

 

질식사

 

오,샘

 

잠깐,두 분 사이의
다른 중요한 장면이 남았는데

 

아니

 

그만 됐어요

 

그 날 밤엔 저녁 만찬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톰과 엘레노어 뱅크스 부부와
의학박사 뱅크스

 

다들 활기넘쳤으나
나만 뚱해보였을 것이다

 

지친데다 꿈 때문에
기분이 어수선했다

 

톰과 엘레노어는 재미있어

 

초감각(ESP)이나 심령술같은 걸
시험한다잖아

 

아주 예민할 거야

 

당신이 단호히 깎아내리니까
애가 타던데

 

좀 잔인하지만 옳은 소리지

 

너무 피곤해서 기분이 엉망이었어
누가 알아,그 쪽이 맞을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이
있을 지 모르지.누가 알겠어?

 

위자보드(점판)에서 한 걸음 더 나간거래
그 그리스 이야기들 하며!

 

전에 그리스 섬 일주항해
안해 본 사람 있나

 

톰과 엘레노어가 그토록 변변찮다면
뭐하러 같이 식사를 해?

 

변변찮다고는 안했어.꺼내는 화제가 문제지
다음 주엔 비행접시일 거야

 

왜 매일 밤 딴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지?
둘만의 시간도 없이

 

- 뭐가,안 그래
- 아니,그래.매일 밤 친구들이지

 

서로의 친구들과 낯선 사람들

 

톰과 엘레노어는 안지 오래됐잖아

 

- 마음에 들지도 않으면서
- 마음에 들어

 

방사선과라고 몇 번이나
우습게 말했잖아

 

- 대단찮게 보는 거지
- 농담한 거야

 

아니,안 그래
농인척 하면서 본심이었어

 

- 지금 말싸움 하려는 거야
- 왜 둘만 있는 걸 꺼려해?

 

- 안 그런 것 같은데
- 더는 할 말이 없다는 거지?

 

이야기하잖아

 

왜 기념일에 마크와 리디아랑
같이 나가야 돼?

 

그게 그렇게 마음에 걸리면
가지 말지

 

그래도 그 사람들이니까,필라델피아까지
우리 첫 밀회 장소로 태워다주지

 

그러지 마
추억을 농담거리로 삼지 마

 

그래,바닥에서 뒹구는 것과
같은 수준이지

 

바닥이면 어때서
침대에서도 안 하는데

 

- 참 이런 언쟁을 하다니
- 왜 나랑 안 자려는 거야?

 

쉽게 사람이 원기가 떨어질 때도 있지
별난 게 아냐

 

왜? 이유를 알고 싶어

 

그냥 그만 자자구

 

둘이 죽자살자 할 때도 있었는데

 

마리온,당신은 여전히
나한테 최고의 여자야

 

오늘 밤도 그냥 잘 거잖아
무슨 핑계를 대면서

 

이제야 알겠네
그 동안 잘도 빠져나갔다는 걸

 

정말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용서해

 

질책을 달게 받겠어

 

("바흐,첼로 조곡 6번 D장조")

 

...우수한 학생이었지

 

수업 시간에 제일 눈길을 끌기도 했고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사랑해

 

저두 사랑해요

 

- 생일 축하해요
- 이러지 말랬잖아

 

뭐,내가 원해선데
끌러봐요

 

나가 계신 동안 쓰신 논문 읽어봤는데
아주 기막히던데요

 

자네 도움이 컸지
더구나 초안을 잡았잖아

 

- 이게 뭐지? 연극 같은데서 쓰는 건가?
- 그래요

 

*라 지오콘다의 프랑스제 원품이에요
*모나리자

 

- 좋은데
- 그럴 줄 알았어요

 

큰 상점에서
가진 돈 다 턴 거에요

 

(# "The Bilbao Song")

 

다은 날 아침
켄의 기념 선물을 깜빡한 걸 알았다

 

간단한 일로 여겼는데
뜻밖에 시간을 잡아먹었다

 

사실은 그가 뭘 좋아할지
생각해보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한 시간쯤 눈구경만 하다가
어느 골동품상에 들어갔다

 

처음엔 뭐 특별한 게 있을까 여겼지만

 

그냥 한 번 둘러보기로 했다

 

그곳은 텅빈 채 먼지투성이였고
뒷 쪽에서 라디오 소리가 났다

 

기묘한 물건 천지라
그만 구경에 푹 빠져버렸다

 

실례지만,괜찮아요?

 

감사해요,괜찮아요

 

도울 일이라도?

 

죄송해요.왜 이렇게
감정적인지 모르겠어요,난..

 

감사해요

 

감사해요.그냥...저 그림을 보고 있는데,
그만...

 

그냥 너무 슬퍼서요

 

아,이건 아주 낙관적인 작품인데

 

그러니까,전에 원화를 본 적 있어요
제목이 희망(Hope)이었어요

 

*클림트의 그 시기 작품 중에는 가장
긍정적이 작품일텐데. *오스트리아 화가

 

죄송해요

 

화가세요?

 

네,뭐,젊었을 적에
좀 그렸었죠

 

학창 시절 내내
아주 매달렸어요

 

재밌네요.오늘 아침 그 생각을 했는데...
그림이 그리웠죠

 

- 다시 그리고 싶었어요
- 그래요?

 

될지 모른다고 상상하는 거죠

 

하지만 오랜 전 일이에요

 

뭐,하여튼...

 

- 이젠 좀 나아졌어요?
- 네,바람 좀 쐬야겠어요

 

- 무슨 그림을 그렸댔어요?
- 아,수채화요,주로

 

우리는 가게를 나와 함께 걸었다

 

나는 나서지 않으면서
그녀를 더 알고 싶었다

 

그림 이야기와 토론을 하면서
그녀는 좀 밝아졌다

 

우리는 어떤 화랑에 들러
그림에 감탄하며 시간을 보냈다

 

틈을 봐서 점심 초대를 했는데
응락을 받고 기분이 들떴다

 

그녀가 한적한 작은 곳을 제안했는데
조용한 멋진 장소였다

 

포도주 한 병을 주문했는데
임산부라 그녀는 거의 입에 안댔다

 

자연히 내가 다 비우게 되었고,

 

그녀를 알고 싶으면서
주로 내 이야기를 하게 됐다

 

50

 

30은 무난히 넘어갔어요

 

남들은 딴 말들을 하지만

 

다음은 40이 고비라더군요

 

아니었어요
재고할 거리도 없고

 

그리고는 50이 되면
충격이 온댔어요

 

그 말이 맞았어요

 

사실이에요

 

50에 들어서니까
균형을 못잡겠어요

 

아우,참,50이면 한참인데

 

아니,그렇지 않아요,그게..

 

갑자기 고개를 들어
자기 있는 곳을 보게되죠

 

괜찮은 자리에 계실테죠,네?

 

뭐,그런 셈이죠

 

그런데 기회들이 지나가고
다신 안 돌아오죠

 

저,어떤 거요?

 

글쎄

 

아기를 갖는 것도 멋지겠죠

 

정말 그런 생각이세요?

 

그래요

 

전에는 그런 적 없지만
그래요

 

...참 오만하군!
그토록 이기적이고 무정해!

 

아기 안 갖겠다 그랬잖아요!

 

무슨 소리야,"아기를 안 갖겠다"?

 

- 내 일부이기도 한데!
- 내 인생의 걸림돌이 될뿐인데

 

- 다 망친 거야!
- 당신이야 맘대로 일 계속하고,

 

- 난 관두고 애 길러야죠
- 책임 분담하면 되지

 

- 그래봐야 내 차지에요
- 난 애를 원했어!

 

- 그건 내 계획이 아니라고 했어요
- 한마디 상의도 없었잖아

 

상의? 내 앤데!

 

하는 일마다 다 상의하라구요?
당신 자존심만 다칠텐데

 

- 애를 원한다고 했잖아
- 그랬지만 지금은 아네요

 

내 앞길이 그렇게 창창한 건 아냐

 

말은 쉽죠.당신은 업적을 다 쌓았잖아요
난 이제 시작인데,

 

혼자 헤쳐나가야 된다구요
애한테도 안된 일이지

 

그래도 한마디 묻지도 않고!
따져볼 기회도 안 주다니!

 

따지고 싶지 않았어요
한도 끝도 없지.그렇게는 못해요!

 

이런 세상에서
애를 기르고 싶어요? 정말?

 

그토록 증오하던 세상에서

 

존재의 맹목성을
그만치 강의해놓고는

 

- 널 증오해!
- 놔요! 그만해요!

 

더 못 견디겠어!
놔요!

 

그토록 감정이 메말랐다니!

 

내 마음이 어떤지 알아!

 

자기 자신만 중요하겠지!

 

자기 경력.자기 사고방식

 

...저기..좀 속이 상해요

 

오늘 정말 안된 여자를 만났어요

 

보기엔 모든 걸 다 가진 여자

 

근데 아니에요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걸 보니 겁이 났어요

 

그러니까...

 

나 자신을 주체하지 않으면,

 

세월이 흘러
그렇게 될 거라는

 

감정을 허용 안했죠

 

그래서 이렇게...

 

냉정하게 머리로 살아요...
남들을 멀리한 채

 

뭐,그래요,
전에도 이런 얘길 했죠

 

어떻게..어떻게 해야만..
내 식으로 보고 들을 수 있는지

 

그 여자가 바로 그랬어요,그건..

 

오랫 동안 다 괜찮은 척 했지만,

 

똑똑히 보여요
어떻게...어떻게 자신을 잃었는지

 

오래 전 낙태한 걸 후회했죠

 

여러가지로 합리화했지만,

 

사실은 아이가 생겼을 때의
감정을 겁낸 거에요

 

아주 똑똑하고 성공한 여자죠

 

그래도 나랑 비슷해요..그러니까
늘 감정에 등을 돌려요

 

난 압도하는 남자들한테서는
달아났죠

 

그 격정에 겁을 집어먹고는

 

사람이 내내 속마음을 닫고
지낼 순 없어요,그건...

 

그 여자 나이 돼서
텅빈 내 인생을 보고 싶지 않아요

 

(# "The Bilbao Song")

 

...하여튼

 

점심을 드는 동안
아주 당혹스런 일이 생겼어요

 

말하는 도중에
그 여자가 친구 리디아를 본 거에요

 

마리온?

 

늦었군

 

기념일 선물 사왔어

 

내일이긴 하지만
지금 풀어보지 않을래?

 

난 뭘 줄지 모르겠어

 

늘 말한대로 오페라 같은 거

 

기념일 축하해

 

자,옷 갈아입자구

 

아무데도 안 갈거야

 

무슨 소리야?

 

리디아와 있는 걸 레스토랑에서 봤어
날 못봤겠지만...

 

둘을 지켜봤어

 

그러고서는 몇 시간 걸으면서
마음을 진정시켰지

 

참,조금이라도 지각이 있었으면

 

애초에 의심했을텐데

 

캐시 때도 몇 달 동안
간통 저지른 거잖아

 

그건 사정이 달랐어

 

아닌 것 같은데

 

별 거 아닌 거야
말하자면 지나간 거야

 

심각하지 않았어

 

그러니까,어,
리디아 일은 전적으로 바보 짓이었어

 

안됐어,켄,
당신도 나만큼이나 외로웠던 거야

 

우리가 외로웠다구?

 

적어도 난 그걸 깨닫게 됐지

 

다음 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냥 거리를 거닐면서
내 인생을 생각하고

 

정리해보려고 했다

 

동생 폴과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그도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않았던가

 

이상해,린과는 있기만 하면
둘이 툭탁거렸는데,

 

켄과 싸운 적도 없으면서
헤어진다니

 

- 그럼 집을 나올거야? 아니면 켄이?
- 아,내가

 

깨끗하게 새 출발하고 싶어

 

아주 다르게 살고 싶어

 

우리 사이도 그렇고

 

너와 린과도
더 가깝게 지내고 싶어

 

다른 이들을 알고 싶어

 

너만 괜찮으면

 

그럼,아빠 잘못인가요?
무슨 실수를 했나요?

 

아,우리 둘 다지,응?

 

뭐,남 탓 할 것도 없어

 

- 내가 더하지
- 참,안됐군요,그건

 

네가 너무 충격받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뭐,솔직히 말하면,진짜...

 

충격이 아니고
그냥 좀 놀랐어요,있잖아요,그런 거...

 

사실은 늘 두 분 사이가
좀 그런 것 같아어요...

 

뭐라나,너무 편하다고 하나,
그게 아닌데,그게..

 

그런 거 있잖아요?

 

그래,이 일로 너하고 사이에
지장이 없었으면 한단다

 

서로 소중한 사이니까

 

네,저도 소중해요

 

- 네?
- 저,옆 방 이웃인데요

 

방음에 좀 문제가 있는 걸
알려드리려구요

 

- 환자 이야기가 다 들리던데요
- 그래요?

 

이거,감사하군요.처리하지요
전에도 그러더니.방도를 취해야지

 

그런데,젊은 여자 환자분 있죠,
임신했던가?

 

어떻게 좀 연락할 수 있으면 해서

 

아,네,치료를 마쳤어요

 

가버렸고 연락처도 없어요
드릴 말씀이 없지요

 

나는 일로 돌아왔다
잘 나갔고,

 

따로 걸리적거릴 일도 없었다

 

술술 써내려갔고
힘이 넘쳐났다

 

어느 화창한 아침에
짬을 내서,

 

읽어보지 않은 래리 루이스의 소설을
c어보고 싶은 생각이 떠올랐다

 

헬렌카라는 인물이 궁금해졌다
내가 모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책을 펼치고
페이지를 넘기다가,

 

그 이름에 눈길이 가닿았다

 

"어느 날 헬렌카와 우연히 마주쳤는데

 

둘 다 콘서트 티켓을 사려는 참이었다

 

친한 친구의 연인으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최근 둘은 결혼하기로 했다
나한테는 재앙같은 일이었다

 

소개받는 순간부터
그녀에게 빠져버린 나였다

 

한잔 하자고 그녀를 구슬렀다

 

여태껏 둘만 이렇게 있기는 처음이었다

 

사랑스런 그녀 앞에서
나는 너무 많은 말을 급히 쏟아냈다

 

내 속마음을 주체 못해서였다

 

그러면서 가슴이 아려왔다

 

우리는 센트럴 파크를 거닐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쓰려는 책 이야기를 했고
서부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헬렌카는 곧 있을
결혼 이야기에 열중했는데,

 

내 생각엔 좀 너무 열심이었다

 

나보다는 자신에게
확신을 심으려는 듯

 

곧 비가 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폭우를 피해
고가다리 아래로 뛰어들었다

 

그 때 그녀는 얼마나 아름다웠고

 

날 바라보는 눈길은 얼마나 다정했던가

 

감정이 솟구쳐오르며
무수한 말들이 입가를 맴돌았다

 

그녀도 다 알면서
겁내는 것 같았다

 

직감이 내게 속삭였다
키스해,그녀는 받아들일 거야

 

그녀의 키스는 갈망에 차있었고,

 

다른 누구와도
나누지 못할 감정이었다

 

그리고는 담이 쳐지고
순식간에 앞을 가로막았다

 

너무 늦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강렬한 열정이 있으며,

 

언젠가는 스스로 그걸 풀어내리라"

 

책을 덮었다.동경과 희망이 뒤섞인
묘한 감정이 나를 휩쌌다

 

추억이란 내 속에 있는
한 때 잃었던 그 무엇일까

 

오랫만에 처음으로 나는 평온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