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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선라이즈

 

저 두 사람
왜 다투는지 알아요?

 

- 영어 할 줄 알아요?
- 네

 

저도 몰라요, 미안해요
독일어는 잘 못하거든요

 

커플이 나이가 들수록
상대의 얘기를 듣는 능력이

 

- 떨어진다는 소리 들어본 적 있어요?
- 아뇨

 

이건 사람들 추측인데
남자는 고음을 듣는 능력이 떨어지고

 

여자는 저음을 듣는 능력이 떨어진대요

 

- 서로가 서로를 중화시키는 거죠
- 그렇네요

 

서로 죽이지 말고
함께 늙어가라는

 

자연의 처사예요

 

뭐 읽어요?

 

"조지 바타이유
마담 에드와다"

 

아, 그거

 

당신은요?

 

"킨스키
내게 필요한 건 사랑뿐"

 

이봐요, 휴게실에 갈까
생각 중이었는데...

 

- 같이 갈래요?
- 그러죠

 

좋아요

 

영어는 어떻게 잘하게 됐죠?

 

여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학교를 다녔어요

 

- 여기 괜찮아요?
- 네, 좋아요

 

런던에서 생활한 적도 있고요

 

영어는 어떻게 잘하게 됐죠?

 

나요? 난 미국인이에요

 

- 미국인이에요? 정말요?
- 네

 

농담이에요
미국인인 거 알았어요

 

당연히 다른 나라 언어는
하나도 못하겠죠?

 

그래요, 알겠어요

 

다른 나라 언어는 하나도 모르는
버릇없고, 멍청하고, 저속한

 

미개인이다 이거죠?

 

그래도 시도는 했어요

 

고등학교 때 4년간 불어를 배웠죠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

 

지하철역에 줄을 서서
뭐라고 말할까 연습을 했어요

 

어쨌거나

 

그랬는데

 

매표원을 보는 순간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그래서 영어로 말했죠
'저기요, 표 한 장만...'

 

알잖아요? 어쨌든...

 

목적지가 어디예요?

 

파리로 돌아가는 길이에요

 

- 다음 주가 개강이거든요
- 학교 다녀요? 어디요?

 

- 네, 소르본요, 알아요?
- 그럼요

 

부다페스트에서 탔어요?

 

- 네, 할머니 댁에 다녀오는 길이죠
- 할머니는 어떠세요?

 

괜찮아요

 

- 괜찮아요?
- 좋아요

 

- 당신은요? 목적지가 어디죠?
- 난 비엔나에 가요

 

비엔나? 왜요?

 

몰라요, 내일 거기서
비행기를 탈 거예요

 

휴가 중이에요?

 

그걸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여행 다니며

 

지난 2, 3주 동안
계속 기차만 탔죠

 

친구 만나러 온 거예요?
아니면 그냥 혼자서?

 

- 네, 마드리드에 친구가 있긴 한데
- 마드리드, 멋지네요

 

네, 유레일 패스를 샀거든요

 

잘됐네요

 

그래서 유럽을 돌아보니
마음에 들던가요?

 

네, 그럼요... 형편없더군요

 

뭐라고요?

 

그러니까, 내 말 좀 들어봐요

 

몇 주 동안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는 건 정말 좋았어요

 

무슨 뜻이에요?

 

그러니까, 가령

 

평소에는 못하던 생각들을
하게 되거든요

 

- 예를 들면요?
- 듣고 싶어요?

 

- 네, 말해봐요
- 좋아요

 

나한테 아이디어가 있어요, 알겠어요?
텔레비전 쇼에 대한 거죠

 

내 친구 중에
VJ 특공대 PD가 있어요

 

그게 뭔지 알아요?

 

시청자가 저가로 만든 프로그램을
틀어주는 TV 프로죠

 

내가 생각한 건 뭐냐면 1년간 하루
내내 계속되는 프로예요, 알겠어요?

 

그러니까 전 세계 각 도시에서

 

365명을 모집한 다음

 

그 사람들의 24시간을
실시간으로 내보내는 거죠

 

현실 생활을 있는 그대로요

 

가령 한 남자가 있다고 치면
아침에 일어나서

 

오랫동안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고 커피를 만들고

 

신문을 읽고...

 

잠깐만요, 매일 같이 벌어지는

 

망할 지겨운 일상을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고요?

 

난 '일상의 시'라고
말하려 했는데...

 

그렇게 생각되면 그렇게 생각해요
난 나대로 생각할 테니까

 

맘에 들어요

 

- 이런 식으로...
- 그걸 누가 봐요?

 

이런 식으로 생각해봐요
태양 아래서 잠을 자는 개가

 

왜 아름답죠? 아름답잖아요

 

하지만 은행 현금 지급기에서

 

돈을 인출하는 남자는
완전 바보처럼 보이지 않아요?

 

말하자면 인간을 대상으로 한
내셔널 지오그래픽 같은 거군요

 

그래요

 

어떻게 생각해요?

 

내 생각엔 따분한 24시간짜리
다큐멘터리 같아요

 

미안해요, 3분 섹스 끝나면
바로 곯아떨어지는 것도 나오겠군요

 

그래요, 그 에피소드 재미있겠는데요
사람들한테 인기 끌겠어요

 

혹시 친구들이랑 파리 편
만들고 싶으면 내가 허락할게요

 

- 내 말은...
- 그러죠

 

모르겠어요, 이 아이디어의
관건은 배급이에요

 

계속 방송을 내보낼 수 있게
이 도시 저 도시에 보내줘야 하거든요

 

방송이 24시간 계속 나가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까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이거 알아요?
고객 서비스가 별로예요

 

내가 본 유럽은 그래요

 

우리 부모님은 나한테
사랑에 빠지는 일이라든가

 

결혼이나 양육에 대해
얘기했던 적이 한번도 없어

 

아주 어릴 때도

 

부모님은 내가 선택해야 할
직업에 대한 얘기만 하셨지

 

실내 장식가라든가 변호사라든가
뭐 그런 거 말이야

 

내가 아빠한테
'작가가 될래' 이러면...

 

아빠는 '언론인'

 

내가 '집 없는 고양이들을 보살필래'
이러면 아빠는 '수의사'

 

내가 '배우가 될래'
그럼 아빠는 'TV 앵커우먼'

 

계속 이런 식으로

 

나의 비현실적인 야망을
소위 잘 나가는 직업에 연관시키셨어

 

난 어릴 때 별명이
걸어 다니는 거짓말 탐지기였어

 

거짓말을 정확히 집어냈거든

 

그러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사람들이 내 장래에 대해
뭐라고 하면 그걸 귀담아들었다가

 

정반대로 하곤 했어

 

다들 나쁜 뜻으로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냥 다른 사람들이 내 인생에 대해
간섭하는 거엔 취미 없었거든

 

그런데 이거 알아?

 

부모님이 어떤 일에
아예 대놓고 반대하는 대신

 

기본적으로 친절하게 지지해주면...

 

그땐 불평을 하기가 훨씬 더 힘들어

 

부모님이 틀렸을 때도 말이야
그 수동적인 반대는 정말 신물 나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
난 그게 싫어

 

정말 싫어

 

있잖아

 

그런 모든 허접쓰레기 같은
기억에도 불구하고

 

내게 어린 시절은...

 

황홀한 시간이었어, 정말이야

 

엄마가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얘기해준 게 기억나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셔서

 

가족이 모두 플로리다에
막 도착했을 때였거든

 

내가 3살인가
3살 반인가 그랬을 거야

 

어쨌든 그때 난
뒤뜰에서 놀고 있었어

 

누나가 정원에 있는 호스로
그걸 막 가르쳐 줬거든

 

왜 그거 있잖아

 

햇빛에 물을 뿌리면
무지개 생기는 거 말이야, 알지?

 

그걸 하고 있었는데

 

그때 물안개 너머로
할머니가 보이는 거야

 

저기 서 계시더라고
나한테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야

 

난 호스를 들고
한참을 서 있었지

 

할머니를 보면서 말이야

 

그러다 마침내
호스를 놔버렸어, 알지?

 

그러자 호스는 땅에 떨어졌고
할머니는 사라졌지

 

난 안으로 달려 들어가
부모님께 얘길 했어

 

부모님은 날 앉히더니
한참 동안 연설을 늘어놓더군

 

죽은 사람은 만날 수 없다고,
내가 상상한 거라고 말이야

 

하지만 난 내가 뭘 봤는지 알고 있었어
그걸 보게 돼 기쁘기만 했지

 

그 이후론 그런 건 본 적이 없거든
하지만 모르겠어

 

덕분에 모든 게 너무 모호하다는 것만
깨닫게 된 것 같아

 

죽음조차도

 

죽음에 대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넌 운이 좋구나

 

난 매 순간 죽음을 두려워해

 

정말이야, 내가 이 기차를
탄 것도 바로 그래서라고

 

비행기를 탈 수도 있었는데
너무 무서웠거든

 

- 말도 안 돼
- 도저히 대책이 없어

 

통계상으론 비행기가
더 안전하다지만

 

비행기만 타면 자꾸 폭발이
연상되는 걸 어쩌겠어

 

내가 구름 밑으로
떨어지는 게 연상된다고

 

게다가 정말 끔찍한 건
죽기 바로 직전에 몇 초 동안

 

내가 이제 죽는구나 하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이야

 

자꾸만 그런 생각이 나

 

- 피곤하지
- 그래, 그렇겠다

 

정말 피곤해

 

- 비엔나에 다 왔나 봐
- 그래

 

- 여기서 내리지 않아?
- 맞아, 이제야 도착했네

 

널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걸
얘기하는 동안 즐거웠거든

 

나도 그래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

 

정신 나간 생각이라는 건 아는데
너한테 물어보지 않으면...

 

- 이 생각이 평생 날 쫓아다닐 거야
- 뭔데?

 

너랑 계속 얘기하고 싶어
네 상황이 어떤진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 우린 통하는 게
있는 것 같아, 맞지?

 

그래

 

좋아, 그러니까 이렇게 하자
바로 이렇게 하는 거야

 

나랑 같이 비엔나에서 내려
마을을 둘러보자

 

- 뭐?
- 가자, 재미있을 거야

 

- 어서
- 여기서 뭘 하게?

 

몰라, 내가 아는 거라곤
난 내일 아침 9시 30분발

 

호주 항공을 타야 하고
지금 수중에 호텔비는 없으니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닐 건데
네가 있으면 더 재미있을 거라는 거야

 

이 녀석 알고 보니 사이코네 싶으면
다음 기차 타고 가면 되잖아

 

좋아, 이런 식으로 생각해봐

 

10년, 20년이 흘렀다 치자, 알았지?
그리고 넌 결혼을 했어

 

그런데 결혼 생활이
옛날만큼 재미있지가 않아

 

그래서 남편을 탓하며...

 

네가 옛날에 만난 모든 남자를
떠올리기 시작하는 거야

 

그때 그 남자를 선택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하는 거지

 

그 남자 중 하나가 바로 나야

 

타임머신을 타고

 

지금 이 시기로 돌아와
네가 놓친 게 뭔지 생각해봐

 

놓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넌 물론이고 네 미래의 남편도
크게 감사하게 될지 누가 알겠어

 

난 낙오자인데다
의욕도 없고 따분한 놈이니

 

넌 올바른 선택을 한 거고
따라서 행복한 거야

 

가방 가져올게

 

- 짐은 사물함에 넣어두자
- 좋아

 

이름이 뭐야?

 

내 이름? 제시야

 

원래는 제임스인데
다들 제시라고 불러

 

혹시 그 유명한 열차 강도
제시 제임스?

 

- 아냐, 난 그냥 제시야
- 난 셀린이야

 

- 이 다리 멋지다
- 그래

 

- 좀 이상해
- 맞아, 좀 이상하지?

 

어째 어색해

 

그래도 괜찮아, 안 그래?

 

멋있어, 어디 구경이라도 가자
안내 책자를 봐

 

비엔나에 왔으니 구경을 해야지

 

- 저 사람들한테 물어보자
- 그래

 

안녕하세요?

 

- 영어 할 줄 아세요?
- 네, 그럼요

 

- 기분 전환으로 독일어 해요?
- 네?

 

농담한 거예요

 

방금 비엔나에 도착했는데
뭔가 재미있는 일이 없나 해서요

 

박물관이라든가 전시회...

 

박물관은 요즘 재미가 없어요

 

폐관했을 시간이에요

 

- 얼마나 여기 머물 거죠?
- 오늘 밤만요

 

비엔나엔 왜 왔죠?
뭘 보려고 왔어요?

 

신혼여행 왔어요

 

맞아요, 얘가 임신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결혼을...

 

안 믿어요, 거짓말 진짜 못하네

 

우리 둘이 출연하는
연극이 있는데

 

- 두 사람을 초대할게요
- 두 분 배우세요?

 

직업 배우는 아니고
취미 삼아 하는 거예요

 

인디언이 암소를
찾아다닌다는 내용이죠

 

- 정치가도 나오고 멕시코 사람이랑...
- 러시아 사람, 공산주의자들

 

- 진짜 암소가 나오나요?
- 아뇨, 배우가 암소 분장을 해요

 

- 이 친구가 암소죠
- 맞아요, 내가 암소예요

 

- 좀 이상한 암소죠
- 암소한테 병이 있어요

 

그래서 마치 개처럼 행동해요

 

누가 막대기를 던지면
가서 그걸 물어오곤 하죠

 

그리고 발로 담배도 피우고
못하는 게 없어요

 

- 멋지네요
- 여기 주소가 있어요

 

- 2번 구역에 있죠
- 프라터 근처죠, 프라터 알아요?

 

- 그 큰 회전식 관람차? 가보자
- 맞아요, 모두 다...

 

관람차 타고 나서
연극 보러 오면 되겠네요

 

21시 30분에 시작하죠

 

- 21시 30분요?
- 9시 반이오

 

- 9시 반
- 그렇군요

 

좋아요, 연극 제목이 뭐죠?

 

영어로 번역하면 '윌밍턴 암소의
뿔을 내게 가져오라' 예요

 

내가 윌밍턴 암소죠

 

- 좋아요
- 멋지네요

 

- 올 거예요?
- 노력해 볼게요

 

- 내가 암소예요
- 당신이 암소군요

 

잘 가요

 

- 좋아, 이거 해, 준비됐어?
- 그래

 

진실 게임을 하는 거야
우리가 알게 된 지 좀 됐잖아

 

같이 돌아다니는 처지니
서로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하는 거야

 

- 알았지?
- 서로 질문을 하자 이거군

 

그래, 100% 진실만 말해야 해

 

- 물론이지
- 좋아

 

좋아, 첫 번째 질문

 

- 너
- 그래, 내가 물을 거야

 

타인에게 느꼈던
첫 번째 성적인 감정에 대해

 

묘사해봐

 

첫 번째 성적인 감정? 맙소사

 

알았다

 

장-마크 플러리였어

 

장-마크 플러리?

 

여름 캠프에 같이 갔었는데
걘 수영 선수였어

 

하얗게 표백된 머리에 녹색 눈

 

수영 기록을 단축하려고
팔과 다리는 면도를 했었지

 

- 구역질 난다
- 한 마리 돌고래 같았어

 

내 친구 에마가
걔한테 반했었다니까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들판을
가로질러 숙소로 가고 있는데

 

걔가 내 옆으로 다가온 거야
내가 말했지

 

'에마한테 데이트 신청해
에마가 너한테 반했대'

 

그랬더니 걔가 하는 말이

 

'안됐네, 난 너한테
반했는데 말이야'

 

그래, 난 그때 정말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걔가 진짜 멋지다고 생각했거든

 

그랬는데 걔가 나한테 데이트 신청을
하는 거야, 난 걔가 싫은 척했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너무 무서웠어

 

그 후 난 걔를 보러
수영 대회에 몇 번 갔었는데

 

진짜 섹시했어, 정말이야
진짜 섹시하더라니까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우린
사랑에 대한 성명서를 만들었어

 

그리고 계속 편지하자고 약속했지

 

곧 다시 만나자고...

 

- 만났어?
- 물론 아니지

 

그렇다면 이 말하는 데 지금이 적시군
묘하게도 내가 기막힌 수영 선수야

 

- 정말?
- 그래

 

- 기억해둘게
- 좋아

 

- 이제 내 차례다, 아냐?
- 맞아, 네 차례야

 

질문해

 

사랑에 빠져본 적 있어?

 

그래, 다음 질문

 

- 무슨...
- 잠깐만

 

- 한 마디로 대답해도 되는 거야?
- 왜 안 돼?

 

하지만 난 내 경험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얘기해줬잖아

 

네 질문은 내 질문이랑 아주 달라
나도 성적인 감정 얘기해줄 수 있어

 

하지만 사랑이라는 건...
내가 사랑에 관해 물었다면 어쩔래?

 

거짓말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적어도 멋진 거짓말을 만들어냈을 거야

 

거짓말할 수도 있었다니!
사랑은 복잡한 문제야, 알지?

 

그러니까...

 

그래, 내가 사랑을 고백했던
사람이 몇 있어, 그땐 진심이었지

 

하지만 그게 아낌없이
주는 사랑이었냐?

 

아름다운 사랑이었냐? 아니

 

있잖아, 사랑은...

 

나도 모르겠어

 

알아?

 

그래, 무슨 뜻인지 알아

 

하지만 성적인 감정에 대한 거라면
1978년 미스 7월한테 느낀

 

소유욕이 시발점이었어

 

- '플레이보이' 알아?
- 들어봤어

 

- 크리스털 알아?
- 아니

 

크리스털 몰라? 난 잘 알아

 

이제 내 차례지? 좋아

 

널 화나게 하는 게 뭔지 말해봐

 

- 미치게 만드는 거 말이야
- 화나게 하는 거라

 

- 맙소사, 모든 게 날 화나게 해
- 2개만 말해봐

 

맞다, 난 낯선 사람이
말 걸 때 화가 나

 

거리에서 보면

 

심심풀이로 모르는 여자한테
미소 짓는 남자들이 있거든

 

또 뭐가 있지?

 

맞아

 

여기서 300km 떨어진 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게 싫어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아무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어떤 사람은 신경도 안 쓰지

 

난 우리 정신을 지배하려는
대중 매체도 싫어

 

- 대중 매체?
- 그래

 

잘 드러나지가 않아서 그렇지
파시즘의 새로운 형태라고

 

그리고...

 

난 외국에 나가는 것도 싫어
특히 미국은 진짜 최악이야

 

내가 검은색 옷을 입거나
화를 내거나 뭔가 말하곤 할 때마다

 

사람들이 이러거든
'역시 프랑스인이야, 너무 귀여워'

 

그거 정말 싫어, 참을 수가 없어

 

끝났어?

 

아직 많이 남았는데...

 

- 이제 내 차례야
- 좋아

 

- 대답해야 해
- 알았어

 

지금 신경 쓰이는 게 뭐야?

 

너, 아마도

 

뭐?

 

요전 날 생각한 게 하나 있는데

 

그게 신경 쓰여

 

뭔데?

 

기차를 타고 가다 생각한 건데...

 

좋아, 말해줄게

 

넌 환생을 믿어?

 

그래, 흥미롭잖아

 

많은 사람이 과거의 삶 같은 걸
얘기하고 있어, 알지?

 

어떤 정해진 방식으론
환생을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영혼이 불멸하다는 건
인식하고 있다고, 맞지?

 

- 그래
- 좋아

 

내 생각은 이래, 5만 년 전엔
인구가 백만도 안 됐어

 

만 년 전엔 지구에
2백만 명이 살고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
5십에서 6십억 사이야

 

우리가 모두 자신만의
개별적인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그 영혼은 다 어디서 온 걸까?

 

현대의 영혼은 기존에 존재하던
영혼의 일부분일 뿐인 걸까?

 

만약 그렇다면 지구 시간으로
찰나에 지나지 않는 지난 5만 년간

 

하나의 영혼에서
5천 개의 육신이 파생된 셈이야

 

기껏해야 우린
걸어 다니고 있는 사람들의

 

일부일 뿐이라고

 

그래서 우린 산재돼 있는 거야?
그래서 우린 한정돼 있는 거야?

 

잠깐만, 모르겠어, 난...

 

그래, 생각이 완전히
산재해 있다는 거 알아

 

- 바로 그래서 말이 되는 거라고
- 그래, 동감이야

 

여기서 내리자

 

- 여기 멋지다
- 그래

 

저기 감상실까지 있어

 

이 가수 알아?

 

아마 미국인일걸
친구한테 들었어

 

저 감상실 작동되는지
가서 확인해볼래?

 

그래

 

이것 봐, 아름다워

 

서둘러, 떠나려고 해

 

내 생각엔, 그러니까...

 

봐, 토끼야

 

그러네

 

안녕, 토끼야

 

너무 귀엽다

 

십 대 초에 여기 왔었어

 

당시 그 어떤 박물관보다도

 

- 더 강한 인상을 내게 남겼지
- 그래?

 

- 조그맣네
- 알아

 

그때 한 왜소한 할아버지랑
얘길 나눴었어

 

이곳 관리인이었는데

 

그분 말로는 이곳에 묻혀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다뉴브 강가로 밀려온
시체였다는 거야

 

언제 세워진 거야?

 

아마 20세기 초쯤일 거야

 

무명씨들의 묘지라고 불러

 

왜냐하면 여기 묻혀있는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없거든

 

기껏해야 이름 정도가 다지

 

왜 강가에서 시체로 발견됐지?

 

내 생각인데 일부는 보트 사고
같은 거로 죽은 사람이고

 

대부분은 강에 투신한
사람들이 아닌가 싶어

 

난 늘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져간 사람들에 대한 얘길 좋아했어

 

난 어릴 때 말이야

 

내가 죽었다는 걸
가족이나 친구들이 모를 경우엔

 

정말로 죽은 게 아니라 생각했어

 

사람에게 최상과 최악의 시간을
선사하는 건 바로 사람이지

 

바로 이거 같아

 

맞아, 내가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게 이거야

 

"엘리자베스"

 

얜 13살 때 죽었지

 

난 그 사실에 충격을 받았어
처음 이걸 봤을 때 나도 13살이었거든

 

난 그때보다 10살이나 더 먹었는데
얜 아직도 13살 그대로야

 

재미있어

 

저게 다뉴브야

 

- 강이지?
- 그래

 

아주...

 

굉장해

 

그래, 아름답지

 

이렇게...

 

석양도 있고

 

- 그래
- 관람차도 있고

 

뭐랄까

 

아주...

 

뭐?

 

있잖아...

 

나한테 키스하고 싶다는
말하려는 거야?

 

그래?

 

"펀치 벨리"

 

- 그런데 이거 알아?
- 뭐

 

어떤 세대에 태어났냐는
상관이 없어

 

우리 부모님을 봐

 

모든 것을 혐오하던
68년 5월 혁명의 성난 젊은이였잖아

 

정부를, 보수적인 가톨릭 배경을
거부한 세대지

 

그 후 얼마지않아 내가 태어나고
아빠는 성공한 건축가가 됐어

 

아빠가 다리며 탑 같은 걸 지으러
다닌 덕에 우린 전 세계를 구경했지

 

그러니까 난 불평할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고

 

부모님은 이 세상에서
날 가장 사랑하고

 

두 분이 싸워 일궈낸
자유 속에서 난 자라났어

 

그런데도 지금 보면
투쟁할 게 또 있단 말이야

 

예나 지금이나 문제는 똑같아
그런데 우리는

 

그 적이 누군지, 뭔지를 몰라

 

적이란 게 있는지 모르겠어

 

자식 인생을 말아먹지 않는
부모는 없어

 

부자는 자식한테 너무 많이 주고
가난뱅이는 너무 적게 주지

 

애정 과잉, 애정 결핍

 

무관심하거나 혹은 집착해서
엉뚱한 걸 가르치기 일쑤야

 

우리 부모님은 서로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결혼하고 아이를 가졌어

 

나한테 잘하려고 최선을 다했지

 

두 분 이혼하셨어?

 

그래, 마침내 말이야
더 일찍 갈라섰어야 했어

 

나랑 우리 누나 때문에
그렇게 못한 거지

 

대단히 감사합니다

 

한번은 엄마가 아빠 앞에서
나한테 이런 말을 했어...

 

두 분이 언쟁 중이었는데
아빠가 날 원하지 않았다고 말이야

 

엄마가 날 임신한 걸 알았을 때
아빠가 엄청 화를 냈었대

 

날 임신한 건 실수라고 했다더군
그 말은 내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줬지

 

난 항상 이 세상에
잘못 태어난 거로 생각했어

 

너무 슬프다

 

뭐, 하지만 이젠
이런 나한테 자부심을 느껴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 거잖아

 

날 거부한 세상을
극복하고 태어났으니 말이야

 

좋은 사고방식이야

 

우리 부모님은 여전히 함께 사셔
서로 행복해하는 것 같아

 

하지만 내 생각엔 이전의 모든 걸
거부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은 것 같아

 

맞아

 

최근 들어 이런 의문이 생겨

 

행복하게 사는 커플 본 적 있어?

 

그럼, 나 그런 커플들 알아

 

내 생각엔 그 커플들은
서로를 속이는 것 같아

 

맞아

 

사람은 인생을 거짓으로 살 수 있어

 

난 결혼해 사는 우리 할머니를 보며

 

할머니가 참 쉽고 단순한
사랑을 한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할머니가 고백하길
평생 할머니의 마음속엔

 

다른 남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거야

 

할머닌 그저 운명을
받아들인 거지, 너무 슬퍼

 

하지만 한편으론 할머니한텐
없을 거로 생각한 감정이

 

할머니한테 있었다는 게 신이 나

 

장담하는데 그 편이 나아

 

할머니가 그 남자랑 잘됐다면
결국엔 실망했을 테니 말이야

 

- 어떻게 알아? 넌 두 분을 모르잖아
- 그야 그렇지

 

하지만 사람들은 모든 걸
로맨스로 보는 습성이 있어

 

현실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있지

 

- 로맨스?
- 그래

 

관람차에 함께 올라탄
미스터 로맨스가 누구더라?

 

'키스해줘, 석양 좀 봐
너무나 아름다워'

 

됐어, 할머니 얘기나 해봐
할머니가 어쨌다고?

 

저 남자들 좀 봐

 

'한스, 고백할 게 있어'

 

'나 안에 속옷 안 입었어'

 

'정말? 그래서 겁나나?'

 

- 비밀 말해줄까?
- 그래

 

이리 와봐

 

- 뭔데?
- 어서

 

손금쟁이야
분위기가 묘한 여자네

 

그러게

 

- 왜?
- 저 여자랑 눈이 마주쳤어

 

- 설마 이리 오진 않겠지
- 오고 있어

 

젠장

 

안 돼

 

- 너 손금 볼래?
- 싫어

 

- 싫어?
- 그래

 

- 알았어
- 안녕

 

왔다

 

영어할 줄 아세요?

 

손금을 봐 드릴까요?

 

좋아요, 얼마죠?

 

- 손님한텐 50실링, 좋아요?
- 좋아요

 

여행 중이군요

 

이곳에선 이방인이에요

 

당신은 모험가예요

 

탐구자죠

 

당신 마음엔 모험가가 있어요

 

여성의 힘에 관심이 있군요

 

여성의 저변에 숨어있는 힘과
창조력에 관심이 있어요

 

그런 여성으로 성장할 거예요

 

인생이 서투르다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해요

 

내면의 평화를 찾을 수만 있다면

 

타인과 진실한 교류를
할 수 있을 거예요

 

두 분 잘 모르는 사이예요?

 

그럴걸요

 

이 남자분은 안심해도 돼요
지금 배우는 중이죠

 

다됐습니다, 복채

 

두 분은 모두 별이에요
그걸 잊지 말아요

 

수십억 년 전 별은 폭발해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걸 만들었죠

 

우리가 아는 모든 건
우주먼지예요

 

그러니 두 사람은
우주먼지란 걸 잊지 말아요

 

아주 훌륭해

 

우린 모두 우주먼지고
넌 위대한 여성이 된다니 말이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마

 

신문에 난 오늘의 운세를
본 거로 치라고

 

무슨 소리야?

 

내가 여행 중이라는 거,
우리가 잘 모르는 사이라는 거

 

내가 크게 될 거라는 거
다 알아맞혔잖아

 

하지만 너도 들었잖아
내가 '배우는 중'이라고?

 

그런 오만한 말투가 어딨어?
내 손금은 보지도 않고 말이야

 

저런 손금쟁이 같은 기회주의자가
만약 진실을 말해야 한다면

 

그날로 거리로 나앉을 거다

 

차곡차곡 모은 돈을 들고
점쟁이한테 찾아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미래에 관해 묻는 할머니한테...

 

이런 얘길 해줄 수 있는 점쟁이를
단 한 명이라도 봤으면 좋겠어

 

'내일은 물론 앞으로의 여생이
오늘과 똑같을 것입니다'

 

'지루한 삶의 연속이죠'

 

'새롭게 열정을 품는 일도 없고
새로운 생각도 없고'

 

'여행 갈 일도 없어요'

 

'그러다 죽으면
세상에서 완전히 잊히죠'

 

'이상 50실링 되겠습니다'
이런 걸 보고 싶다고

 

정말 재미있어

 

손금쟁이가 넌 인식도 못했잖아
이상해, 이유가 궁금하네

 

- 현명하고 열정적인 여자였어
- 그래

 

- 점괘가 맘에 들어
- 당연히 그렇겠지

 

좋은 얘기 듣고 싶어서
돈을 내는 건데 말이야

 

비엔나 어느 허름한 골목에
마약을 파는 곳이 있을지도 몰라

 

- 찾아볼래? 그럴래?
- 넌 정말...

 

우주먼지

 

전시회야

 

맞아, 그런데 못 보겠네
다음 주에 시작한대

 

그러네

 

"쇠라"

 

몇 년 전에 이 그림
미술관에서 본 적이 있어

 

눈을 뗄 수가 없었지

 

45분쯤 쳐다봤을 거야

 

맘에 들어

 

'철도', 대단한 그림이지

 

사람들이 배경에 녹아 들어가는 듯한
모습이 마음에 들어

 

이것 좀 봐

 

사람보다 환경이 더 강한 것 같잖아

 

쇠라의 그림에서
인간의 형체는 늘 일시적이야

 

재미있어, 일시적 맞아?

 

그래

 

- 문이 열려있을까?
- 글쎄, 들어가 보자

 

며칠 전 부다페스트에서

 

할머니랑 이런 오래된 교회에
들어가 본 적이 있어

 

난 종교적인 건
대부분 거부하지만

 

상실감이나 고통, 죄책감을 안고
이곳에 와서 답을 구하는

 

그런 사람들에겐
어쩔 수 없이

 

연민을 느끼게 돼

 

수많은 세대의 수많은 고통과 행복이
한 장소에 융합돼 있다니

 

정말 멋진 것 같아

 

할머니랑 친해?

 

그래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 이상한 생각 때문인 것 같아

 

난 나 자신이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노파라고 생각돼

 

내 인생은
그 노파의 기억 같은 거지

 

정말 이상해

 

난 늘 내가 13살짜리
꼬마라고 생각하거든

 

어떻게 해야 어른이 되는지
잘 모르는 꼬마 말이야

 

그래서 인생을 사는 척하면서

 

어른이 돼야 할 때를 대비해
메모를 해두는 거지

 

중학교 때 학예회를 앞두고
최종 연습을 하듯이 말야

 

재미있다

 

그렇다면 아까 그 관람차에서

 

노파가 꼬마한테
키스한 거네, 그렇지?

 

퀘이커교에 대해 잘 알아?

 

아니, 별로

 

퀘이커교 결혼식에
한 번 갔었는데 정말 굉장했어

 

어떻냐면

 

신랑 신부가 들어와서
하객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리곤 서로를 응시하지

 

신이 계시를 내려주기 전까진
한마디도 해서는

 

안 돼

 

그렇게 서로를 응시하고 있다가

 

1시간쯤 지나면
결혼한 게 되는 거야

 

아름답다, 맘에 들어

 

끔찍한 얘기가 있어

 

뭔데?

 

- 여기선 말하기가 좀 그래
- 뭔데?

 

친구랑 차를 타고 가는 중이었어

 

그 친구는 무신론자야

 

이 친구가 한 노숙자 옆에
차를 세우더니

 

100달러짜리 지폐를 꺼내선

 

창밖으로 몸을 내밀곤

 

이러는 거야, '신을 믿나?'

 

그 노숙자, 내 친구 한 번 보고
돈 한 번 보더니

 

이러더군

 

'믿습니다'

 

내 친구 왈, '답이 틀렸어'
그리곤 우린 떠났지

 

- 너무했다, 안 그래?
- 그래

 

나랑 같이 기차에서 안 내렸으면
넌 지금쯤 파리에 도착했을까?

 

아니, 아직

 

넌 뭐 했을 것 같아?

 

공항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잡지도 읽고

 

떠난 널 생각하며
눈물의 커피를 마시고 있겠지

 

난 아마 딴 사람이랑
잘츠부르크에서 내렸을 거야

 

그러셔? 알겠어

 

그러니까 난 심심풀이 땅콩에 불과한
멍청한 미국놈이다 이거지?

 

나 지금 행복해

 

- 정말?
- 그래

 

나도

 

내가 여기 있는 걸
아무도 모른다는 게 기뻐

 

너의 나쁜 점을 말해줄 사람을
내가 아무도 모른단 사실도 말이야

 

- 내가 말해줄게
- 그러고도 남지

 

사람에 대한 나쁜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

 

남자를 사귀기 시작할 때면
난 항상 장군이 된 느낌이 들지

 

전술을 짜고 작전을 세우고

 

남자의 약점을 파악하고
뭘 싫어하고 뭘 좋아하는지 알아내고

 

끔찍해

 

우리가 함께하게 된다면

 

나의 어떤 점이
널 가장 화나게 할 것 같아?

 

싫어, 그 질문엔 대답 안 할래

 

옛날에 사귀던 여자도
늘 그런 걸 물어보더라고

 

'나의 어떤 점이 싫어?'

 

견디다 못해 내가 얘기했지
'넌 비판을 못 참는 것 같아'

 

그랬더니 화가 나서는
나랑 헤어졌잖아, 실화야

 

걔가 원했던 건

 

내 결점을 지적할 구실을
마련하는 거였다고

 

- 네 의도도 그거야?
- 뭐?

 

- 나한테 결점이 있어?
- 아니

 

- 나의 어떤 점이 맘에 안 드는데?
- 그런 거 없어

 

만약 있어야 한다면 그게 뭘까?

 

만약 너한테 결점이 있어야 한다면,
그걸 생각해내야 한다면

 

아까 그 손금쟁이한테
네가 보인 반응이 좀 그랬어

 

왕자병 환자 같더라고

 

- 왕자병이라고?
- 그래

 

관심이 왜 내게 집중되지 않느냐고
징징대는 꼬마 같더라니까

 

내 말 들어봐, 넌 그 여자한테
완전히 속은 거야, 알아?

 

엄마가 밀크셰이크 안 사준다고...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울어대는 꼬마 같더라고

 

그런 사기꾼들이 뭐라 하든...

 

안녕하세요?

 

네?

 

전 좀 이해하는데
얘는 전혀 몰라요, 미안해요

 

좋아요

 

- 뭐 좀 물어봐도 돼요?
- 그래요

 

당신들과 거래를 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나한테 돈을 주는 대신
단어를 하나 고르는 거예요

 

당신이 단어를 선택하면

 

그 단어를 가지고
내가 시를 지어드리죠

 

만약 내 시가 맘에 들면

 

내 시가 당신들 인생을
더 흥미롭게 만든다면

 

얼마든 좋으니 내게 적선하세요

 

물론 시는 영어로 써드리죠

 

- 좋아요, 그러죠
- 좋아요

 

그렇다면?

 

단어를 골라요

 

단어라

 

- 밀크셰이크
- 밀크셰이크? 좋네

 

난 '왕자병 환자'를 생각했는데
그게 좋겠어, 밀크셰이크요

 

밀크셰이크요?

 

좋아요, 밀크셰이크

 

- 좋아요, 그럼...
- 좋아요

 

비엔나에 사는 부랑자들은
다양해서 맘에 들어

 

난 시가 인생을 흥미롭게
한다는 말이 맘에 들더라

 

그건 그렇고 아까 우리
첫 말다툼한 거야?

 

- 아니
- 맞아, 말다툼이었어

 

설사 말다툼이었다고 해도
사람은 왜 갈등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갈등에서 좋은 게 많이 파생된다고

 

그래, 맞아

 

사실 잘 모르겠어

 

난 내 인생이 힘들다는 걸

 

스스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내 인생에 대해 그렇게까지

 

화는 안 날 것 같아

 

좋은 일이 생기면
기뻐할 수도 있고 말이야

 

그래서 난 아직 학교에 다니나 봐

 

투쟁할 게 있으면 도움이 되거든

 

우리 모두의 내면엔
그런 경쟁심리가 숨어있어

 

난 진짜 무익한 일을
할 수도 있거든

 

다트 게임이나 당구 같은 걸
할 수도 있다고

 

그런데 그러다 갑자기
경쟁심이 솟구치는 거야

 

이겨야겠다 싶지

 

그래서 날 기차에서
끌어내린 거야? 경쟁심 때문에?

 

- 무슨 뜻이야?
- 됐어요

 

- 다됐습니다
- 좋아요

 

읽어주겠어요?

 

그러죠

 

'백일몽과 같은 망상'

 

'리무진 같은 속눈썹'

 

'오, 그대, 예쁜 얼굴로'

 

'내 포도주잔에 눈물을 흘려주오'

 

'저 큰 눈을 보라'

 

'그대는 내게 어떤 의미인지 보라'

 

'달콤한 케이크와 밀크셰이크'

 

'나는 망상의 천사

 

'나는 환상의 퍼레이드'

 

'내 생각을 그대가 알아주길
더 이상의 추측은 사라지길'

 

'나의 과거를 그대는 모르네'

 

'우리 미래를 우리는 모르네'

 

'강물의 나뭇가지처럼
인생에 정체되어'

 

'조류에 휘말려 하류로 흘러가네'

 

'난 그대를, 그대는 나를 운반하리'

 

'그것이 마땅하니'

 

'그대는 날 모르는가?'

 

'지금쯤 날 알지 못하는가?'

 

근사해요

 

- 고마워요
- 고마워요

 

여기요

 

- 고마워요
- 그래요

 

- 여기요, 고마워요
- 고마워요

 

행운을 빌어요

 

- 잘 가요
- 안녕

 

- 멋진 시지?
- 그래

 

- 왜?
- 저 사람이 안 쓴 건지도 몰라

 

그냥 단어만 갖다
집어넣은 건지도 모른다고

 

'밀크셰이크'를 말야

 

- 무슨 뜻이야?
- 아냐, 맘에 들어, 멋지다

 

- 뭐가 화나는지 알아?
- 뭔데?

 

사람들은 항상 기술이 위대하네
덕분에 시간이 절약됐네 하잖아

 

그런데 쓰지도 않을 시간
절약해서 뭐한대?

 

- 일만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야
- 맞아

 

이런 얘기하는 사람 아무도 없잖아
'워드 프로세스 덕에 시간이 절약됐군'

 

'절에 가서 수행을 해야겠어'

 

- 이러는 사람 없다고
- 어쨌든 시간은 추상적인 거야

 

- 저 여자 쳐다보고 있었어?
- 뭐?

 

아냐

 

- 여기 들어갈래?
- 뭐?

 

- 여기 들어갈래?
- 그래, 클럽이네, 그렇지?

 

그래

 

- 들어갈래? 안녕하세요
- 그래

 

50실링이래

 

- 한 사람당
- 100실링 있어, 내가 낼게

 

내가 맥주 살게, 고마워

 

- 네가 맥주 산다고?
- 그래

 

여기선 올드 밀워키가 비싼가?

 

"언세인"

 

"보너스"

 

저기...

 

지금까지 우리 이 얘긴 안 했는데
만나는 사람 있어?

 

지금 파리에 널 기다리고 있는
남자 친구가 있는 거 아냐?

 

- 아냐, 지금은 없어
- 옛날엔 있었구나

 

- 6개월 전에 헤어졌어
- 6개월 전에?

 

- 그래
- 안됐네

 

아니, 별로 안되지 않았어
자세히 얘기해봐

 

싫어, 진짜 따분하단 말이야

 

말해봐, 어서

 

좋아, 난 정말 실망이 컸어

 

걔랑 오래 갈 줄 알았거든

 

왜냐하면 걘 멍청한 데다 못생기고
침대에선 형편없고, 알코올 중독에다...

 

- 알잖아
- 봉을 잡았었군

 

내가 잘 보살펴줬어

 

그랬는데 날 떠나더군
내 사랑이 과하다면서 말이야

 

내가 자기 예술적 표현을
가로막고 있다나 뭐라나

 

어쨌든 상처를 받은 난

 

걔한테 집착하기 시작했어

 

그래서 정신과에 갔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어 갖고는 말이야

 

그러니까 어떤 여자가
남자 친구를 죽이려고 하는데

 

어떤 식으로 죽일 건지
치밀한 계획을 다 세워놓은 거야

 

- 완전 범죄로 만들 방법을...
- 자기 남자 친구를 죽인다고?

 

그래

 

내가 그러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지어낸 얘기였어

 

아냐, 이해해

 

그랬는데 이 멍청한 정신과 의사가
내 말을 완전히 믿더라고

 

그때가 첫 진료였는데
나한테 경찰을 불러야겠다잖아

 

- 경찰을 부른다고?
- 그래

 

난리도 아니었어!

 

내가 정말 그럴 거라고
믿더라니까

 

내가 이건 지어낸 얘기라고
얘길 했는데도 말이야

 

내 눈을 보며 이러더라고

 

'말하는 걸 보면 알아
당신은 실행하고도 남는다고'

 

'말하는 걸 보면 알아'
그 여자 제정신이 아니었어

 

- 그 후로 다시는 안 갔지
- 그래서 어떻게 됐어?

 

걔는 완전히 잊었어

 

대신 요즘엔

 

걔가 사고로 죽는 상상을 해
정말 그렇게 되면 천km 떨어져 사는

 

내가 비난을 받게 되겠지

 

왜 사람들은 자기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집착할까?

 

- 무슨 말인지 알아?
- 글쎄

 

넌 어때?

 

- 뭐가?
- 만나는 사람 있어?

 

이런 얘기 안 하고 용케도
오래 버틴 게 재미있지 않아?

 

하지만 이젠 못 피해

 

난 사랑이라는 건

 

혼자가 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탈출구라 생각해

 

재미있어, 사람들은 항상
이런 말을 하거든

 

사랑은 완전히
이타적인 거라고 말이야

 

하지만 생각해보면
사랑만큼 이기적인 게 없어

 

알아

 

그래서 누구랑 방금 헤어졌는데?

 

뭐?

 

상처받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처럼 들려

 

- 내가?
- 그래

 

좋아

 

고백할게

 

좀 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실은 나 파리에서
헤밍웨이나 읽으며

 

시간 보내려고
유럽까지 온 게 아니었어

 

봄 내내 마드리드로 날아갈
경비를 모았더랬어

 

여름을 여자 친구랑
함께 보내려...

 

- 여자 친구?
- 헤어진 여자 친구

 

작년에 마드리드에서
그 한심한 미술사 공부를 했거든

 

어쨌든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
마침내 만났는데

 

내가 도착한 첫날 저녁 식사에
자기 친구 여섯을 부른 거야

 

페드로, 안토니오, 곤잘로,
마리아, 고향 친구 수지

 

내가 도착한 처음 이틀 동안
둘만 있게 되는 걸 피하더군

 

혼자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걘 내가 온 게 못마땅한 거더라고

 

그래서 제일 싼 비행기 표를 끊었지
내일 비엔나에서 떠나는 표 말이야

 

그런데 출발이 그때로부터 2주 후라
그래서 유레일 패스를 산 거야

 

누군가한테 차였을 때
제일 못 견디겠는 게 뭔지 알아?

 

뭔데?

 

내가 예전에 찬 여자들을

 

거의 생각 안 하듯

 

날 찬 여자도 날 거의 생각
안 할 거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야

 

날 찬 여자도 슬플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

 

하지만 현실은 안 그래
'이야, 차고 나니 속 시원하네'

 

알아

 

-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 뭐?

 

그 정신과 의사가 한 말이야

 

나한테 시간당 9백 프랑씩 받고
날 사이코라고 진단한 그 의사 말이야

 

그 의사 말이 긍정적인 일에
집중하면 집착을 줄일 수 있대

 

효과가 있어?

 

글쎄...

 

- 핀볼엔 효과 없네
- 그러게

 

그런 것 같아, 최근 들어
아무도 안 죽였거든

 

최근 들어? 다행이네
그럼 넌 치료된 거야

 

그런 원숭이들이 있는데
그 놈들이 하는 거라곤 섹스뿐이야

 

사시사철 말이야, 알아?

 

그런데 그놈들이 가장 온순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원숭이로 판명됐거든

 

그러니까 바람피우는 게
그리 나쁘진 않다 이거지

 

- 지금 원숭이 얘기하는 거야?
- 그래, 원숭이

 

- 그런 줄 알았어
- 왜?

 

그 얘긴 처음 듣지만

 

듣는 동안 바람피우는 걸
정당화시키려는

 

남자들의 주장이 생각났거든

 

암컷 원숭이들도 바람피워
모두가 바람피운다고

 

그래, 귀엽다, 난 여성 운동이
남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그런 끔찍한 피해망상을 갖고 있어

 

남자들이 여자들을 꾀려고 말이야

 

'여자들이여,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나랑 잡시다'

 

'내가 그 짓을 맘껏 하는 한
우린 다 행복하고 자유로워요'

 

알았어, 하지만 이 이론에
생물학적 근거가 있는지도 몰라

 

- 생물학적?
- 어떤 섬에

 

남자 1명이 여자 99명과
함께 살고 있다고 상상해봐

 

그럼 1년에 아기는
99명이 태어날 수 있어

 

하지만 반대로 여자 1명에
남자가 99명이라면...

 

1년에 태어날 수 있는 아기는
단 1명이야

 

그러니까...

 

이거 알아?

 

그 섬엔 아마
남자 43명만 남게 될 걸

 

여자랑 서로 자려고
남자들끼리 죽여버렸거든

 

반면 첫 번째 섬엔

 

여자 99명에 아기 99명,
대신 남자는 한 명도 없어

 

여자들이 담합해서
남자를 잡아먹었거든

 

- 그래?
- 그래

 

일리가 있어

 

어떨 때 보면 여자들은
남자들이 망가져도 신경도 안 쓰거든

 

한번은 헤어진 내 여자 친구랑
길을 걸어가는데

 

카마로 옆에 불량배처럼 생긴
녀석 4명이 서 있는 거야

 

그중 한 놈이 이러더군
'아가씨, 엉덩이 예쁜데! '

 

난 그냥 '됐어, 내버려 둬' 이랬거든

 

- 게다가 적이 4명이나 됐잖아
- 그렇지

 

그런데 얘가 이러는 거야
'엿 먹어, 얼간이들아!'

 

난 속으로 생각했지
'좋아, 잠깐 생각해보자'

 

그 녀석들이 두들겨 팰 건
걔 엉덩이가 아니라고

 

말썽은 누가 피우고
대가는 누가 치러야 하지?

 

여자들은 남자들 보호에
숨이 막힌다고 불평하다가도

 

자기들이 필요할 때 안 나서면
계집애 같네, 나약하네, 이러면서...

 

이거 알아? 남자들이 망가지길
원하는 여자는 없어

 

설사 있다 해도 그건 불가능해

 

남자들이 망가지길 원하는 여자보다

 

여자가 망가지길 바라는
남자들이 훨씬 더 많을 걸

 

어쨌거나 우울한 얘기야, 있잖아?

 

- 이 얘기 그만할래?
- 너무 싫어

 

여자, 남자, 이런 얘긴 끝이 없어

 

- 고장 난 레코드 같지
- 맞아

 

커플치고 이런 얘기
안 하는 커플이 없어

 

결론도 없는데 말이야

 

이거 다큐멘터리로 본 적 있어
출산 춤이야

 

- 출산 춤?
- 그래

 

- 돈 내야 해?
- 응

 

흥미롭다 싶은 건
죄다 돈이 드는군

 

출산 춤이라고?

 

짝짓기 할 때
추는 춤이랑 비슷해

 

아냐, 여자들은 이걸
출산 때 추곤 했어

 

어떤 나라에선 아직도 저걸 해

 

- 정말?
- 그래

 

출산할 여자가 텐트로 들어가면

 

부족 여자들이 그 여자를
둘러싼 채 춤을 줘

 

그리고 함께 춤을 추도록 유도하지

 

출산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말이야

 

그러다 아기가 태어나면
다 같이 축하하는 춤을 춰

 

우리 엄마는 그런 거 못할 걸

 

춤은 일상 속에서
함께할 수 있어서 좋아

 

- 모두가 참여할 수 있잖아
- 맞아

 

어떤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젊은 사람들이 춤추는 걸 보면서...

 

이랬대, '아름다워'

 

'몸을 흔들어 성기를 털어내고
천사가 되려 하는군'

 

- 맘에 든다
- 춤에 대해 질문이 하나 있어

 

여자들이 춤을 추며
영적으로 교류를 하는 동안...

 

남자들은 뭐 하지?

 

양식 구하러 나가나?
남자는 왜 빼놔? 우린 필요 없어?

 

짝짓기 끝난 다음에
안 잡아먹는 걸 다행으로 여겨

 

어떤 곤충들은 그래, 거미던가?

 

우린 최소한 너희를 죽이진 않는데
뭐가 불만이야?

 

얘가 농담 한번 심하게 하네
어쨌든 능력은 인정해주지

 

- 대화 주제가 풍부한 거 말이야
- 뭐?

 

- 그래
- 아냐, 잠깐만

 

심각하게 얘기하는데

 

난 내가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의 본보기가 돼야 한다는 거에

 

남자에 인생을 걸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거에 의무감을 느껴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게 내겐
아주 큰 의미인데도 말이야

 

난 늘 그런 걸 비웃어 넘기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일이
좀 더 사랑받기 위한 거 아냐?

 

그렇지

 

모르겠어

 

가끔 난 꿈을 꿔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 되는 꿈 말이야

 

가끔은 가능하게 느껴져

 

반면 어떨 때는

 

어리석게 느껴지지

 

그게 내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속박되는 게 두렵다거나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존재여서가 아냐, 그건 자신 있거든

 

다만 솔직한 심정으로 고백하자면

 

난 내가 정말 잘하는 게 뭔지
아는 상태에서 죽길 원하는 것 같아

 

그냥 좋은 가장이 되는 것보다

 

내가 남들보다 월등히 잘하는 게
있다는 걸 알고 싶은 거지

 

그래

 

어떤 할아버지 밑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분 말이

 

자신은 평생 일이나
출세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살았대

 

그런데 52세가 되고 보니 문득

 

자신은 아무것도 베풀지 않고
살았다는 게 느껴진 거야

 

그분 인생에 타인을 위한
시간은 없었어

 

울먹거리면서 그 얘길 하시더라

 

있잖아,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너나 나,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어

 

이 세상에 마술이란 게 있다면

 

그건 상대를 이해하고 함께
나누려는 시도 안에 존재할 거야

 

그 시도가 성공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알게 뭐야, 안 그래?

 

대답은 그런 시도 안에 존재해

 

이건 문명의 쇠퇴나 같아
서비스 좀 봐

 

- 서비스?
- 종업원 어딨어?

 

뉴욕에서 이랬다간
그 종업원은 모가지야

 

이제 파리에 있는
단짝 친구에게 전화할 거야

 

8시간 후에 같이
점심 먹기로 돼 있거든, 이해했어?

 

그래

 

- 받아
- 뭐?

 

- 전화 받으라고
- 여보세요?

 

내가 요즘 영어를 공부 중인데
재미 삼아 영어로 말하면 안 될까?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야

 

오늘 점심 약속
못 지킬 것 같아, 미안해

 

기차에서 만난 남자랑 비엔나에서
내렸거든, 아직도 비엔나야

 

너 미쳤어?

 

아마도

 

- 오스트리아 남자야? 그래?
- 아니

 

그냥 여행 중인 미국 남자인데
내일 아침에 미국으로 간대

 

왜 같이 내렸어?

 

설득당했어

 

사실은 나도 같이 내리고 싶었어

 

그 전에 짧게 대화를 나눴는데
너무 멋있어 맘을 뺏겼거든

 

휴게실에서 자기 얘길 해주는데

 

어릴 때 자기 증조할머니
유령을 봤다는 거야

 

그때 홀딱 반해버렸지

 

아름다운 꿈을 가슴에 품은
꼬마 애를 상상해봐

 

난 덫에 걸렸어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아름답게 빛나는 파란 눈에

 

예쁜 분홍빛 입술

 

기름기 흐르는 머리

 

너무 좋아

 

키는 큰 편이고 좀 덤벙대

 

고개를 돌린 날 쳐다보는
그 애 눈빛이 좋아

 

키스할 땐 사춘기 소년 같아
너무 귀여워

 

- 뭐?
- 그래, 우리 키스했어

 

너무 예뻤어

 

시간이 지날수록
걔가 점점 더 좋아져

 

그런데 걔가
날 무서워할까 걱정이야

 

떠난 남자 친구를 살해하려는
그 상상 속의 여자 얘길 해줬거든

 

엄청 겁먹었을 거야

 

날 음흉하고 비열한 여자로
보고 있는 게 분명해

 

날 그런 여자로
생각 안 했으면 좋겠어

 

넌 알잖아, 세상에서 가장
순진한 사람이 나라는 거 말이야

 

난 나 말곤 아무한테도
상처 안 줄 사람이잖아

 

걘 널 무서워하지 않을 거야
아마 널 무척 좋아할 걸

 

- 정말?
- 난 널 오래 알아왔잖아

 

예감이 좋아, 다시 만날 거야?

 

그 얘긴 아직 안 해봤어

 

좋아, 이제 네 차례야
친구한테 전화해

 

- 알았어?
- 좋아

 

이 친구한텐 전화하면
거의 응답기가 받아

 

어이, 친구, 웬일이야?

 

프랭크, 어떻게 지냈어?
집에 있어 다행이다

 

잘 지내
그래, 마드리드는 어땠어?

 

형편없었어

 

결국엔 리사랑
일이 터지고 말았거든

 

안됐네, 내가 말했지?

 

그래, 몸이 멀어지면
맘도 멀어지는 건가 봐

 

마드리드엔 이틀만 있다가 비엔나에서
출발하는 싼 비행기 표를 끊었어

 

그런데 알고 보니
별로 싼 게 아니더라, 왜냐하면...

 

당장 떠날 수가 없었거든
아는 사람은 만나기가 싫었어

 

그냥 유령처럼 아무도
모르는 존재가 되고 싶더라고

 

- 그래서 이젠 괜찮아?
- 그래

 

아주 좋아, 그래

 

기뻐 날뛸 것 같다고
이유를 말해줄게

 

유럽에서의 마지막 밤에
누군가를 만났어, 믿어져?

 

- 끝내준다
- 그래

 

우린 모두 서로의 악마이자
천사라는 말 알지?

 

얘는 말 그대로 보티첼리의 천사야

 

모든 게 다 잘될 거라고
얘기해주는 천사 말이야

 

어떻게 만났어?

 

기차 안에서

 

얘 옆에 앉은 이상한 커플이 말다툼을
하는 바람에 얘가 자릴 옮겨야 했거든

 

그런데 내 건너편 옆자리로 온 거야
그렇게 해서 얘기가 시작됐지

 

얜 처음엔 날 별로 안 좋아했어
얜 진짜 똑똑하고

 

아주 열정적이고

 

아름다워

 

내가 제대로 했나 모르겠어

 

내가 한 얘기 모두
바보처럼 들렸을 거야

 

- 나라면 그런 걱정 안 해
- 진짜지

 

그럼, 걘 널 판단 안 할걸

 

게다가 걔가 네 옆자리에 앉은 건
일부러 그런 걸 거야

 

- 정말?
- 그래

 

우리 남자들은 너무 멍청해서
여자들을 전혀 이해 못해

 

나도 잘은 모르지만
여자들은 좀 이상하게 행동한다고

 

안 그래?

 

맞아

 

마치 꿈속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어

 

그래, 이상해

 

우리가 우리 시간의 주인인 것 같아
우리의 우주 같다고

 

난 네 꿈속에, 넌 내 꿈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야

 

진짜 멋진 건
우리가 함께 보낸 이 저녁이

 

꼭 존재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거지

 

맞아, 그래서 초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지나 봐

 

하지만 아침이 오면
우린 모두 호박으로 변하겠지?

 

알아

 

그렇다 해도 지금 넌 이 시점에서
유리 구두를 들고 맞나 안 맞나

 

확인해 봐야 해

 

- 그래?
- 그래

 

맞을 거야

 

친구 부인이 애를 낳았는데

 

집에서 낳았대, 그래서 친구가
출산을 도와야 했지

 

그런데 그 친구 말이
출산이란 그 심오한 순간에

 

자기 아이가 생애 처음으로
인생이란 걸 경험하며

 

첫 호흡을 내쉬는 걸 보고 있는데

 

언젠가 죽을 인간이
지금 태어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들더래

 

그 생각이 머릴 떠나질
않더라는 거야

 

내 생각엔 그게 사실인 것 같아
모든 건 끝이 있잖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 시간과 어떤 특정한 순간이

 

중요하단 생각 안 들어?

 

맞아, 우리한테
오늘 밤이 그렇듯이 말이야

 

내일 아침이 지나고 나면
우린 아마 다시는 못 만나겠지?

 

다신 못 만날 거로 생각해?

 

넌 어때?

 

글쎄...

 

모르겠어

 

- 난 다시 여행 올까 생각했는데...
- 나도

 

난 파리에 살고, 넌 미국에 살고
난 충분히 이해해

 

네가 비행기 타는 건 싫어
너 비행기 싫어하잖아?

 

그렇게 겁나진 않아

 

탈 수 있어

 

네가 미국으로 올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내가 여기 다시 올 수도 있어

 

왜?

 

아냐, 우리 그냥 성인답게
이성적으로 생각해

 

다른 방법도 없지 않아

 

오늘 밤뿐이라고 해도
그리 나쁘진 않잖아?

 

사람들은 주소랑
전화번호를 주고받지만

 

결국엔 편지 한 통,
전화 한두 통으로 끝나고 말아

 

맞아, 그렇게 사그라지지

 

그래, 난 그거 별로야
그런 거 싫어

 

나도 싫어

 

왜 사람들은 관계가
영원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맞아, 왜지? 바보 같아

 

이게 다라고 생각하지?

 

오늘 밤뿐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 방법밖엔 없지 않아?

 

좋아

 

그럼 그렇게 해

 

망상도, 추측도 없겠네

 

그냥 오늘 밤을
멋지게 만드는 거야

 

- 좋아, 그렇게 해
- 좋아

 

악수라도 해야겠는 걸

 

손 이리 줘

 

우리가 함께 보내는
유일한 밤을 위하여

 

남은 시간을 위하여

 

왜?

 

그냥 좀 우울하지 않아?

 

이제 우리 머릿속엔
내일 언제 작별 인사를 하나

 

이 생각만 들 테니 말이야

 

그럼 지금 작별 인사해
그럼 그런 걱정 안 해도 되잖아

 

- 지금?
- 그래

 

작별 인사해

 

- 잘 가
- 잘 가

 

- 나중에 봐
- 나중에 봐

 

"유로파펑크"

 

좋아, 이렇게 하자

 

난 포도주를 맡을 테니
넌 포도주잔을 맡아

 

- 적포도주
- 적포도주, 좋아

 

- 정말 할 수 있겠어?
- 물론이야

 

- 행운을 빌어줘
- 행운을 빌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 영어 하세요?
- 조금

 

그래요? 조금? 좋아요

 

제가 지금 좀 괴상한 입장에
처했는데 그게 뭐냐면...

 

쟤 보이시죠?

 

- 그래
- 오늘이 우리한텐 유일한 밤이죠

 

쟤가...

 

문제를 말씀드릴게요

 

쟤가 적포도주 1병을 사달라는데

 

제가 돈이 없어요

 

하지만 이 바 주소를 알려주시면

 

제가 틀림없이 여기로
돈을 보내드린다고 약속할게요

 

오늘 밤을 완벽하게 만들어주세요

 

- 돈을 보낸다고?
- 네

 

손 좀 주겠나?

 

좋아

 

- 잊지 못할 밤이 되길 바라네
- 정말 감사합니다

 

난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며
아름다운 순간을 공유하곤 해

 

여행을 한다거나 밤을 새운다거나
일출을 본다거나 하면서 말이야

 

그런 순간들은 정말 특별하지

 

그런데 그때마다 불만인 게 있었어

 

옆에 딴 사람이 있었으면 싶더라고

 

난 내 감정을 아는데

 

중요한 게 뭔지 정확히 아는데
그 사람들은 그걸 이해를 못했거든

 

하지만 지금 너랑 있는 건 행복해

 

넌 오늘과 같은 밤이

 

지금 이 순간 내게 왜 중요한지
모르겠지만 내겐 중요해

 

- 멋진 아침이야
- 그래

 

이런 아침을 또 맞이할 수 있을까?

 

- 왜?
- 성인다운 이성적인 결정 잊었어?

 

맞아

 

이 사람은 여기 없었으면 좋겠네
하고 생각했다는 거 난 이해해

 

나 같은 경우
그 대상은 주로 나 자신이지

 

정말이야, 생각해봐

 

내가 가는 곳엔 항상 내가 있어

 

내가 키스를 할 때는
항상 내가 키스를 하고 말이야

 

그리고 내가 극장에 갈 땐
항상 내가 극장에 가고

 

내가 볼링장에서 시시한 농담을 할 땐
항상 내가 그 볼링장에 있지

 

많은 사람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그래서인 것 같아

 

자기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일에 싫증이 난 거라고

 

너랑 내가 항상 함께한다 치자

 

그럼 넌 판에 박힌 내 행동을
싫어하게 될 거야

 

가령 우리 집에
친구들이 놀러 올 때마다

 

난 불안해 술에 취할 테고

 

지적이란 말로 포장된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얘기를

 

계속 늘어놓을 테니 말이야

 

난 그런 내 꼴을 항상 보거든

 

그래서 내가 싫증 나

 

하지만 너랑 있으면

 

난 내가 아닌 딴 사람처럼 느껴져

 

그동안 이런 식으로
나 자신을 잊는 유일한 방법은

 

춤을 추거나 술을 마시거나

 

약을 하는 것뿐이었는데 말이야

 

섹스하거나

 

섹스, 맞아, 그것도 있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

 

뭔데?

 

키스 받고 싶어

 

그건 해줄 수 있어

 

잠깐만

 

멍청한 얘기 좀 해야겠어

 

좋아

 

진짜 멍청한 얘기야

 

그래

 

우리 같이 자면 안 될 것 같아

 

나도 같이 자고는 싶지만
우린 다시는 못 만나잖아

 

많이 힘들 거야

 

딴 여자랑 있는 널 상상하며
그리워할 테니 말이야

 

성인답지 못하다는 거 알아
여자라 그런지도 모르지만 할 수 없어

 

우리 다시 만나자

 

안 돼, 단순히 섹스하려고
우리 맹세를 깨는 건 싫어

 

그런 섹스는 나도 싫어
내가 원하는 건, 그러니까...

 

우리 해야 할 것 같아

 

아침에 헤어질 거잖아?

 

- 해야 할 것 같아
- 남자의 허영을 채워달라 이거군

 

기차에서 만난 프랑스 여자애랑
섹스했는데 다신 못 만났어

 

이런 얘기 하려고 그러는 거잖아
난 그런 얘기 주인공은 싫어

 

섹스 때문이라면
이런 멋진 밤은 사양하겠다고

 

- 알았어
- 정말?

 

알았어, 섹스 안 해도 돼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닌데 뭐

 

그래

 

나 다시 만나기 싫어?

 

만나고 싶지

 

누가 지금 나한테 너랑 결혼할래

 

영원히 헤어질래 하고 묻는다면

 

난 너랑 결혼하겠어
낭만적인 거짓말인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은 그보다 더 하찮은
이유로도 결혼하잖아

 

사실은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
너랑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

 

그런데 그새 얘길 너무 많이 해
이제는 모르겠어

 

왜 우린 모든 걸
복잡하게 만드는 걸까?

 

모르겠어

 

파리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뭐 할 거야?

 

부모님께 전화해야지, 넌?

 

글쎄, 개 데리러 가겠지
친구 한 놈에게 맡겼거든

 

- 개를 키워? 나 개 좋아해
- 응

 

- 정말?
- 그래

 

- 젠장
- 왜?

 

몰라, 현실로 돌아왔잖아

 

알아, 너무 싫어

 

뭐지?

 

- 하프시코드 소리 같아
- 저기 좀 봐

 

누가 연주를 하고 있어

 

멋있다

 

- 하프시코드에 맞춰 춤출 수 있나?
- 물론이지

 

- 와
- 왜?

 

네 사진을 찍어야겠어

 

널 영원히 기억하도록 말이야

 

그리고 이 모든 것도

 

좋아, 나도 찍을래

 

'세월은 토끼처럼 달려가리니'

 

뭐?

 

아냐

 

나한테 시인 딜런 토마스가
W. H. 오든의 시를 읊은 음반이 있어

 

딜런 토마스의 목소리는
정말 환상적이지

 

이렇게 돼

 

'도시의 모든 시계가'

 

'윙윙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오, 시간이 그대를
기만하지 못하게 하시오'

 

'그대는 시간을 정복할 수 없소'

 

'두통과 걱정 속에서'

 

'인생은 모호하게 새어 나오네'

 

'시간은 그의 공상을 소유하리'

 

'내일 또는 오늘'

 

뭐 이렇게 돼

 

멋지다

 

네가 아까 커플이
몇 년 동안 같이 살게 되면

 

상대의 반응을 예측할 수 있고

 

또 상대의 습관에 싫증을 느끼게 돼
서로를 싫어하게 된다고 했잖아

 

난 정반대일 것 같아

 

난 상대에 대해 완전히 알게 될 때
정말 사랑에 빠질 것 같거든

 

가르마를 어떻게 타는지
이런 날은 어떤 셔츠를 입는지

 

이런 상황에선 정확히
어떤 얘기를 할지 알게 되면

 

난 그때야 비로소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될 거야

 

- 있잖아
- 뭐?

 

우리 그 연극 보러 안 갔어

 

- 연극?
- 그래

 

- 그 암소?
- 그래

 

맞아, 그러네

 

이런, 그걸 놓쳤어

 

공항 가려면
몇 번 버스 타야 하는지 알지?

 

그래, 알지

 

- 여기서 탈게
- 여기, 여기서?

 

좋아

 

- 이게 마지막이지?
- 그래

 

난 정말...

 

난...

 

그러니까...

 

- 있잖아...
- 알아, 나도 그래

 

난...

 

잘 살아, 뭘 하든 재미있게 하고

 

- 학교 잘 다니고 행운을 빌어
- 그래, 일 열심히 해

 

정말 싫다

 

나도, 기차가 곧 떠날 거야

 

저기, 들어 봐

 

우린 다시는 못 만날 거라고
했던 그 헛소리 있지?

 

- 난 그러기 싫어
- 나도 그래

 

- 너도?
- 네가 이 말하기 기다렸어

 

왜 진작 말 안 했어?

 

- 넌 내 맘과 다를까 봐 두려웠어
- 좋아, 우리 어떡할까?

 

5년쯤 있다가
여기서 다시 만나자

 

5년? 너무 길어

 

끔찍하지, 무슨 사회학 실험 같아

 

- 그럼 1년은 어때?
- 1년, 좋아

 

- 6개월 어때?
- 6개월?

 

- 엄청 추울 거야
- 그래

 

무슨 상관이야?
만나서 딴 데로 가면 되지

 

좋아

 

지금부터 6개월? 아니면 어젯밤부터?

 

어젯밤부터, 그러니까
6월 16일부터 6개월 뒤야

 

9번 승강장, 지금부터
6개월 후, 저녁 6시

 

12월이야

 

넌 기차만 타면 되지만
난 비행기를 타야 해

 

그래도 올게

 

- 그래, 나도
- 좋아

 

- 전화나 편지는...
- 싫어, 그런 건 우울해

 

- 그래, 좋아
- 좋아

 

기차가 떠나려고 해, 작별 인사해

 

안녕

 

잘 가

 

나중에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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