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bange 3.0 - (C) Breadu Soft 2008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 전도서 1:18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된다는 건

 

큰 변화죠

 

특히 도시 출신이 아니라면 더

 

그래서 저희가 그 과정을 도와드릴 거예요

 

여러 가지 방법으로요

 

와, 대단한 경험이네요

 

축하해요

 

뭐, 아직 합격한 건 아니지만

 

충분히 합격하겠어요

 

신입생 OT가 있어요

 

대학생활 적응하기에
아주 좋은 기회죠

 

이 학교에서 가장 좋은 걸 꼽으라면
아무래도 강의가 최고죠

 

그래서 대학 가기 싫다구요?

 

이번 학기 수강편람을 아직 못 읽어 봐서요

 

이 학교가 좋은 게 뭐냐면, 음

 

뉴욕이라는 캠퍼스에 있다는 거죠

 

세계 최고의 도시에 있는 학교

 

에세이 읽어봤는데, 잘 썼던데요

 

맞춤법 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수능 다시 칠 거라구요?

 

과외활동이 진짜 좋아요

 

학식 가봤어요?

 

최고

 

대학 이후엔 뭐하고 싶어요?

 

졸업하면?

 

리버럴 아츠
(2012)

 

이 봐!

 

조쉬 래드너
(제시 피셔 役)

 

엘리자베스 올슨
(지비 役)

 

- 누구 거야 이건?

 

- 내 거

 

갖고 싶음 가져도 돼

 

- 셔츠 샀어?

 

- 어, 샀어

 

괜찮아?

 

- 그런 거 묻지 마

 

- 왜?

 

- 자기 기분 좋게 해주는 거
이제 내 일 아니잖아?

 

- 더 없으세요?

 

- 네?
- 한 권이요?

 

- 아, 네

 

- 셔츠 멋있네요

 

- 고마워요

 

- 여보세요

 

- 제시 전화인가요?

 

- 네, 맞는데요

 

- 네가 좋아하는 공산주의자다

 

- 피터 호벅 교수님?

 

- 나 공산주의자 아냐, 인마

 

잘 있니?

 

- 예, 저야 뭐

 

- 그래, 시간을 뺏고 싶진 않다마는

 

부탁할 게 있다

 

자랑할 일은 아닌데
퇴임한다고 하니까

 

학교가 이제라도
날 그만 미워하기로 했나 봐

 

오하이오가 뉴욕만큼
매력적이진 않겠지만

 

이 달 말에
퇴임 기념식을 열어준다는데

 

제자들 중에 송별사니 뭐니

 

입에 발린 소리 좀 해줄 사람을 찾더구나

 

네가 입에 침 좀 바를 줄 알잖니

 

- 언제죠?

 

- 25일

 

시간 되면 말이다

 

- 네

 

확인해 볼게요

 

약간 조정해야 될 거 같긴 한데

 

 

가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야, 참

 

안녕하세요

 

각본 및 감독
조쉬 래드너

 

- 제시 맞죠?
- 네, 안녕하세요

 

- 데이빗이에요
여기는 수잔이고

 

- 안녕하세요

 

- 교수님이 우리도 있다고 얘기했죠?

 

- 네, 들었습니다

 

- 교수님한테 신세 좀 지고 있어요

 

오는 길은 괜찮았고요?

 

- 예, 그럼요
별탈 없이 왔죠

 

- 교수님, 제시 왔어요

 

- 모교에 오니까 좋아요?

 

- 네, 좀... 이상하네요

 

언덕을 올라오는데

 

갑자기 오래 전 여자친구를
보는 그런 느낌이랄까요

 

- 헤어진 여자친구?
- 그렇죠

 

- 지비도 학교가 너무 좋아서

 

방학 때 집 오는 게 싫다잖아요

 

- 지비요?

 

- 아, 미안
우리 딸 엘리자베스가

 

여기 2학년이에요
- 그렇군요

 

지비가 즉흥연기 동아리를 하는데
공연한다 해서 보러온 거예요

 

- 어떠셨어요?
- 진짜 재밌었어요

 

- 좀 상스럽긴 했는데, 재밌었어요

 

- 교수님하고는 어떤 사이세요?

 

- 어릴 때 과외 선생님이셨어요

 

- 정말요?

 

막 투쟁가 같은 민중가요를
가르쳐주셨다니까

 

- 형제들이여 일어나 싸우라

 

뭉치면 죽지 않으리

 

형제들이여 일어나 싸우라
뭉치면 죽지 않으리

 

연락도 한 통 없고

 

- 교수님

 

- 어디 좀 보자

 

나쁘지 않네

 

배고프신 분?

 

- 저 배고픕니다
- 그래, 갑시다

 

예약해뒀다고

 

세상에, 37년이라니

 

감이 좀 오니?

 

뉴욕에서 난 사람이 37년을

 

제일 높은 건물이 9층인 곳에서 살다니

 

세상에

 

- 기분이 좀 어떠세요?

 

- 퇴임하는 거 말이냐?
- 네

 

- 글쎄 말이다

 

교수회의 1년만 더 하라면

 

저 9층 건물에서 뛰어내리고 싶을 거다

 

그나저나 입학처 일은 좀 어떠…세요?

 

- 입학처 일은 좀 어떠세요?

 

어, 저거 페어필드 교수님이에요?

 

- 그렇네

 

- 와, 진짜 멋있으시네

 

교수님이라니!

 

좀 어떠세요?
여전히 쿨하신가요?

 

- 확실히 따뜻하지는 않잖니

 

- 낭만파 문학 강의 진짜 좋아했거든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교수님이셨어요

 

제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교수님이셨어요

 

- 못 믿을 놈

 

못 믿을 놈 같으니

 

- 예?

 

- 제시, 얘가 지비예요

 

- 안녕하세요

 

- 네, 안녕하세요

 

- 교수님, 저희가 따라갈까요?

 

- 원하실 대로

 

- 그리고 나서 교수님이
"이 나라에 아주 신물이 났다"

 

"억압적이고 퇴행적이고
파시스트적인 정권 같으니"

 

- 내가 진짜 그랬던가?

 

- 네, 그러셨어요

 

그리고 애들 앞에 서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더라구"

 

"그래서 다 정리하고
프랑스로 날아갔지"

 

- 지금 아주 왜곡된 사실을
듣고 있는 거야

 

- 그래서 제가 손들고 질문했어요

 

"교수님, 잠시만요. 잠시만요"

 

"그래서 지금 미국에 화가 나서"

 

"프랑스로 가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수님이
"그래"

 

"국가장학금 받고 갔어"

 

- 내가 이 녀석

 

대학 시절에 어땠는지 얘기하면

 

울면서 뛰쳐나갈 걸?

 

- 아, 그건 맞아요

 

- 어땠는데 그래요?

 

- 아주 멋있었죠?

 

맞게 기억하고 있는 거죠?

 

- 아니, 그런 기억은 없는데

 

기억나는 건 졸업식 때

 

부모님한테 땡깡 부린 게 기억난다

 

졸업하기 싫다고 아주

 

- 맞아요

 

이상하게 부모님 탓을 했어요
네 분 모두한테

 

대학생활 끝나는 게
부모님 탓인 양

 

- 우리한텐 그러지 말거라

 

- 안 그래요
- 지금은 안 그런다네

 

- 부모님한테 들으니까
즉흥연기를 한다면서요?

 

- 네

 

- 어때요?

 

- 최고죠. 너무 좋아요

 

- 뭐가 그렇게 좋아요?

 

- 음, 즉흥연기라는 게
무서워서 좋은 거 같아요

 

그리고 모든 상황에
'예스' 해야 되는 것도 좋고

 

- 아, 미안
그게 무슨 말이에요?

 

- 즉흥연기의 유일한 규칙이에요

 

'노' 할 수 없고

 

'예스' 한 다음에
다른 말로 이어가야 하는 거죠

 

음, 그러니까… 예를 들면

 

엄마, 나랑 엄마랑

 

며칠 동안 사막에서 헤매다가

 

죽기 직전인 상황이에요, 알았죠?

 

- 그래

 

- 응, 그래서 내가
"레모네이드 좀 주세요" 하는 거야

 

레모네이드 좀 주세요

 

- 수잔, 그냥 줘버리지 뭐하고 있어

 

- 아니에요

 

제시, 레모네이드 좀 주세요

 

고마워요

 

달콤하니 아주 좋은데요

 

- 이렇게 하는 거구나

 

- 근데 말이 안 되지 않니?

 

사막에 있는데

 

어디서 레모네이드를 구해?

 

- 그래서 전공이 뭐였어요?

 

- 영문학 전공에
부전공은 사학이었어요

 

절대 취업할 수 없는 조합이죠

 

- 그렇네요
- 전공이 뭔데요?

 

- 연극이요

 

아직 확정한 건 아닌데

 

아빠가 그닥 좋아하질 않아서

 

미술사도 해볼까 생각 중이에요

 

- 그래도 수업을 듣는다니 다행이에요

 

하루 종일 즉흥연기만
하는 건 아닌가 해서

 

- 그렇진 않아요

 

근데 그렇기도 하죠

 

이런 생각 해본 적 있어요?

 

- 어떤 생각이요?

 

- 인생의 모든 것은
즉흥적이라는 생각

 

인생은 대본이 없잖아요

 

우리가 살면서 만들어 가는 거죠

 

- 그렇네요

 

- 맞아요

 

즉흥도 어려운 거라구요

 

- 우린 이제 갈게요

 

-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제시
- 네, 저두요

 

- 조심히 가세요

 

- 그럼, 다음에 봐요

 

- 네, 다음에 봐요

 

- 반가웠어요

 

- 네, 저두요

 

- 다음에 봬요

 

대학생활 즐겨요

 

- 오늘 넥타이 할 거니?

 

- 네?

 

-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모두들 저한테
좋은 말을 한껏 해주는데

 

저는 그냥

 

"이게 누구한테 하는 소리야"

 

시간이 너무 빠르네요

 

너무 빨라요

 

37년이라니

 

37년

 

나이를 세는 게 상처가 되는 때가

 

누구에게나 오기 마련이지만…

 

글쎄요, 여기에 너무 오래 있어서

 

다른 곳에 가면
엉망이 될까 걱정입니다

 

뭐, 금방 알게 되겠죠

 

오늘 맛있는 닭 요리 감사합니다

 

조금 차긴 했지만, 뭐 그래도

 

저의 좋은 모습만 기억해주시기를

 

부탁합니다

 

- 아뇨, 매칼리스터 대학에서도 했어요

 

우리 학교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겁니다

 

- 그래, 좋은 생각이네

 

월요일에 더 얘기하지

 

- 그러시죠

 

잘 있게, 제시

 

- 네, 들어가세요

 

- 괜찮은 생각이야

 

괜찮기는

 

끔찍하군

 

- 네? 아니, 좋았는데요

 

- 거짓말 실력이 줄었구만

 

이렇게 와줘서

 

너무 고맙구나

 

- 어떻게 안 올 수 있겠어요

 

제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교수님이신데

 

- 농담 아니야

 

그만 가 보마

 

- 같이 가시죠

 

- 아냐, 아냐, 있어

 

잠깐 혼자 있고 싶어

 

- 나도 알아요

 

나무는 많은 걸 알고 있죠

 

- 무슨 일 있어요?

 

- 아니, 괜찮아요

 

- 혹시 이름이

 

이든이에요?

 

- 아뇨, 왜요?

 

- 이든 같이 느껴져요

 

- 난 이든 아니에요

 

- 얼마나 멋졌을까
아저씨 이름이 이든이고

 

내가 딱…

 

맞췄으면

 

- 여기 학생이에요?

 

- 아뇨,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학생이에요?

 

- 아뇨

 

그냥 친구 좀 만나러 왔어요

 

시간 때우기 나쁘지 않은 곳이잖아요?

 

냇이에요

 

- 나는 제시예요

 

- 저기 음악 소리 들려요, 이든?

 

파티 하는 거 같은데

 

우리 잠깐 이 소리를 따라가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알아보는 건 어때요

 

- 아니…
- 아니라고 하지 마요

 

행운은 아니라는 사람한테
절대 찾아오지 않으니까

 

- 맥주 좀 갖다 줄게요
술은 등신들이나 마시는 거지만

 

- 어… 근데

 

냇, 난 이제 이런 데랑 안 어울려

 

이만…

 

- 5분만 적응할 시간을 가져 봐요

 

변화란 쉬운 게 아니니까

 

말해 봐요

 

미스터리 서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 음, 별 생각 없는데

 

- 아주 이상한 일들을 벌이고 있다구요

 

영국놈들이 술 취해가지고 심심해서

 

만들어 놓은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죠

 

조금만 시간을 갖고 살펴 보면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무언가 우리와 대화하고 싶어한다는 걸

 

매일 아침 모든 신문 1면을
장식할 만한 일이라구요

 

- 그래

 

- 안녕하세요!

 

내 생각이 맞았네

 

- 안녕하세요
- 여기서 뭐하세요?

 

-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죠

 

- 네, 네, 맞아요

 

- 멋진데요?

 

다시 대학생이 되셨네

 

기분이 어때요?

 

아, 여기는 바네사예요

 

- 안녕하세요

 

- 난 냇이에요

 

- 제시는 졸업한 선배님이야
오늘 아침 같이 먹었는데

 

우리 엄마가 완전 빠졌다니까

 

- 여기 다니셨어요?

 

- 네, 다녔어요

 

- 몇 학번이세요?

 

- 아, 그게… 9로 시작해요

 

- 우리 태어날 때 쯤이네요

 

- 네, 그렇네요

 

좀 늙었죠

 

- 그래도 멋있어요

 

좀 차려 입은 것만 빼면

 

좀 낫네

 

- 난 이 아저씨가 왜 이렇게 좋지?

 

- 좋아할 만 하니까

 

마실 것 좀 갖다 줄게요

 

- 아니, 난 이만
가볼게요

 

- 안 돼, 더 있어요

 

- 아니, 가야 될 거 같아요

 

- 커피 마셔요?
- 그럼요

 

- 아, 진짜? 대박이다

 

여기 내 친구도 마시는데

 

두 사람, 내일

 

커피 한 잔

 

- 응, 난 좋아요
괜찮아요?

 

음, 나는…

 

네, 좋아요

 

9시 괜찮아요?

 

- 아

 

진심이시구나

 

11시 반 쯤은 어때요?

 

- 아, 괜찮아요

 

- 지비

 

- 안녕

 

- 얘기 좀 할까?

 

- 어, 그래

 

내일 볼까요?

 

- 네, 내일 봐요

 

- 네

 

- 저 놈, 쫄지 마요

 

아저씨한테만 관심 있으니까

 

- 그래

 

잘 자, 냇

 

- 잘 자요, 이든

 

- 무슨 일이시죠?

 

- 미안해요

 

난 그냥

 

최고의 책이잖아요

 

잠깐 봤어요

 

- 최고의 책이요?

 

- 최고 중 하나죠

 

-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심하게

 

과장해서 얘기하는 줄 알아요?

 

다 최고래

 

"교수님 최고다"라든가

 

아님 "이 고기 패티 최고다"라면서

 

자기가 세상에 있는
모든 교수들과 고기 패티를

 

표본조사를 해본 마냥 얘기하죠

 

알다시피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인데 말이죠

 

- 알았어요

 

- 안녕하세요

 

- 저 완전 늦었죠

 

- 아뇨, 커피 마실래요?

 

- 아니, 이거 마실게요

 

- 괜찮아요?

 

- 잘 모르겠어요

 

술 냄새 나요. 술 냄새 나죠?

 

- 네, 그렇네요

 

- 잠깐만… 실례할게요

 

잠깐만

 

- 죄송했어요

 

좀 전에

 

같은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한테

 

왜 그렇게 무례하게
굴었는지 생각해봤어요

 

아직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 괜찮아요

 

- 네, 그럼…

 

전 이만

 

- 졸업반 때 학점이 개차반이었는데

 

그 책만 읽고 싶었거든요

 

어때요? 좋아요?

 

- 음, 네

 

두 번째 읽는 중이에요

 

- 와

 

대단한데요

 

짧지 않은데

 

- 네

 

- 그 작가가 "소설을 읽는 건"

 

"고독과 맞서기 위해서"라고 했잖아요

 

- 그렇구나

 

처음 들었어요

 

- 네

 

그런데 한편으론 상당 시간을

 

1,100쪽짜리 책을 읽는데 쓰면

 

그만큼 사회생활은 줄게 되는 거죠

 

- 네

 

고독이 동시에
늘어나고 줄어들었죠

 

- 안녕

 

- 둘이 아는 사이예요?

 

- 네, 첫 학기 때 기호논리학 같이 들었어요

 

난 지비

 

- 응, 딘이야. 안녕

 

- 난 제시라고 해요

 

- 네

 

- 음

 

재밌는 친구네

 

- 네

 

돌아온 게 놀랍네요

 

- 왜요?
무슨 말이에요?

 

- 작년에 조증 상태가 된 적이 있어요

 

사람들이 병원에 데려가서

 

모르겠어요, 진정시켰겠죠

 

천재기가 있는 애인 거 같아요

 

- 좀 괜찮아졌어요?

 

- 네, 그럼요

 

토했어요

 

- 아

 

역겹죠

 

죄송해요, 쓸데없는 소릴 했네

 

자, 우리 좀 걸어요

 

- 우리 부모님이 진짜 맘에 들어했어요

 

- 아, 감사하네요

 

나도 두 분 좋아요

 

정말 행운인 거예요
그런 부모님 둔 거

 

- 그런 부모님?

 

- 음, 글쎄요

 

가까이 계시고, 우선

 

그리고 여전히 부부로서
함께 걱정해 주시고

 

- 네, 행운이죠

 

부모님이 가장 좋을 땐
가끔 애 취급 안 하실 때

 

근데 그럴 때가 1%나 될까

 

맞다, 부모님이 덜 신경쓰이게 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는데

 

들어볼래요?
- 해봐요

 

- 알았어요
부모님을 항상

 

술 취한 상태인 것처럼
대하는 거예요

 

아니, 진짜 효과 있다니까

 

부모님이 좀 짜증나거나
기분 나쁘게 말하면

 

그냥 "화낼 수 없지, 술 취하셨는데"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니까"
하는 거야

 

취한 사람이 조언하는 걸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 없잖아요?

 

- 좋은 방법이네요

 

- 클래식 음악 좋아해요?

 

- 네, 그럼요

 

- 작년에 음악 수업 하나 들었는데

 

세상에

 

완전 삶이 바뀌었다니까요

 

어젯밤에 마주쳐서 참 다행이에요

 

- 응, 나도

 

우연이었지

 

어제 그 남자앤 누구야?

 

- 어떤 남자애?

 

- 어젯밤 그 남자애 있잖아

 

- 아, 에릭이라고 있어요

 

- 에릭

 

에릭이 네 남친이야?

 

- 아니

 

아니에요

 

대학 와서 다 좋은데

 

남자관계는…

 

- 잘 안 되나?

 

- 아무도 만남을 갖지 않아

 

다들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거 같아요

 

- 내가 학교 다닐 때랑 똑같네

 

- 응

 

내 안에 좀 애늙은이 같은 면이
있는 거 같아요

 

- 과거에

 

그리고 현재
18살에서 22살짜리들을 대신해서

 

진심으로 사과할게

 

용서해 줘

 

뭘 모르는 놈들이니까

 

- 대학 다닐 때 가장 좋았던 건

 

불가능한 게 없다는 느낌 있잖아

 

무한한 선택지가
앞에 놓여있는 듯한 느낌…

 

졸업하고 나서
뭐든 시작할 수 있잖아

 

그런데 실제로 졸업하고 나면

 

인생이 시작되지

 

어떤 결정을 해야 하고…

 

그러면 그 많던 선택지가

 

별로 남아있질 않더라고

 

그러다 어느 시점에 보면

 

"아, 이렇게 내려가는 거구나" 하면서

 

좌절하게 되는 거 같아

 

- 젊음을 너무
미화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젊다는 것도

 

나이 먹는 것만큼
어렵고 힘든 일인 거 같은데

 

아니, 당신이 늙었다는 건 아니고
전혀 안 그래

 

- "다 똑같다"는 말은 이해해

 

맞는 말이지만
또 틀린 말이기도 해

 

내가 학생일 때 느꼈던 것과
지금은 또 다르게 느끼고

 

네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지만,
너도 그럴 거야

 

- 그래서 세상이 거지같다고?

 

나도 그 거지같음에 준비해야 될까요?

 

- 아니, 인문학 수업이
다 해결해 줄 거야

 

- 참 다행이네

 

- 다 해결해 줄 거야

 

- 서로 안아줘요

 

- 뭐라고?

 

- 계속 얘기할 수도 있는데

 

서로 안아주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빨리

 

- 그래

 

누가 먼저
- 내가

 

- 그래
- 자

 

- 와, 진짜 옛날에 학교 다녔구나

 

- 잠깐만

 

- 아니, 그러니까
- 됐어, 됐어

 

- 제시, 가기 전에 한 번 보렴

 

맘에 들어 할 것 같은데
난 이제 필요가 없어서…

 

그래, 이거 어떠냐

 

응? 별로?

 

- 예, 좀…

 

- 얘는… 이거 좋은 거야

 

내가 이거 입고 무슨 일 겪었는지 모르지

 

- 저야 모르죠

 

- 이 녀석은 패션감각도 없네

 

응? 이렇게 멋있는 셔츠를 말이야

 

아무튼 못 가져가겠구나
- 네

 

- 이렇게 편한데!

 

여보세요?

 

응, 그래

 

아니, 아직 여기 있단다

 

그래, 잠깐만

 

지비다

 

- 여보세요?

 

- 아직 안 갔네요

 

- 응, 아직
- 잘 됐다

 

가기 전에 만나요

 

서점에서 볼래요?

 

알겠다고 해요

 

- 알겠어

 

어제 추천해 준 책이 뭐냐고요

 

- 저 이만 갑니다
- 그래

 

- 차까지 바래다 주시죠

 

- 알았다, 알았어

 

- 셔츠 감사해요
다음에 올 때 챙겨갈게요

 

- 그래, 가는 길에 아마

 

"다시 달라고 전화해볼까" 할 게다

 

- 안녕

 

오래 붙잡아두려는 건 아니고

 

그냥…

 

이거 만들어봤어요

 

CD 구운 거예요

 

내가 말했던 음악 수업에서

 

나온 음악 모음이에요

 

- 아
- 클래식하고 바로크, 오페라…

 

- 정말?

 

대단한데

 

아는 게 하나도 없어

 

안 알려진 인디밴드를 들어야 한다고

 

하던 사람인지라…

 

- 그러게

 

그래서, 음… 글쎄

 

나도 이런 음악들을
좋아하게 될 지 몰랐는데

 

그 음악 수업은 진짜…

 

그렇잖아요
어떤 걸 수백 번 들어도

 

"뭐라는 거야" 하다가도

 

좋은 선생님을 만나게 돼서

 

눈을 뜨면

 

하루 아침에
"베토벤이 이런 거구나" 하는…

 

- 맞아

 

진짜 고마워

 

나도 선물을 준비했음 좋았을 텐데

 

- 선물해 줄 거 있어요

 

편지 써 주면 되죠

 

- 그럴까?

 

- 손 편지로요

 

펜이나 연필로…

 

응, 편지지에

 

빨간 밀랍으로 봉인도 하면 좋고

 

- 음악 들으면서 쓰면 되겠다

 

- 응, 17세기에 있는
기분일 거예요

 

- 그래, 그래

 

근데 주소를 모르는데

 

- 아, 내 사서함 번호가 108번이에요

 

나머지 주소는 알 수 있죠?

 

- 응, 그럼, 그럼

 

- 그리고… 내 번호
케이스에 적어놨어요

 

- 그랬구나

 

- 그냥… 혹시 몰라서

 

- 응, 그래

 

알겠어

 

- 응

 

- 그럼 안녕
- 안녕

 

- 페어필드 교수님

 

제시 피셔인데요

 

어…

 

학부 다닐 때

 

교수님 낭만파 문학 강의
수강했었습니다

 

- 그래서?

 

- 강의가 참… 좋았어요

 

 

- 딘

 

- 싫어하시겠죠

 

- 졸업하면 다들 끊게 돼요
그 때 끊어요

 

- 차 좋은데요

 

- 좋기는…

 

렌트한 건데

 

과속을 즐기진 않아서

 

- 알 거 같아요

 

- 어디 가요?

 

- 기숙사요

 

- 타요. 태워다 줄게

 

- 여기 다니셨다고요?

 

- 응

 

- 학교 좋았어요?

 

- 아주 좋았지

 

뭐, 안 좋은 기억을
제외하면 말이야

 

2월에 졸업 논문 쓰는 거 같은

 

- 네, 2월엔 죽을 맛이죠

 

- 죽지, 죽어

 

그래서 2월 제외하면
다닐 만 해?

 

- 그렇진 않아요

 

- 괜찮으면…
더 얘기해 볼래?

 

- 음, 뭐 비밀은 아니구요

 

작년에 약간 정신이 나가서요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좀 상태가 심각해졌었나 봐요

 

그래서 환각제 처방까지 받고…

 

덕분에 사람 행세는 하고 있는데

 

모든 게 다 물속에 있는 거 같아요

 

말처럼 썩 좋은 기분은 아니죠

 

- 어떻게 돌아올 생각을 했어?

 

- 어머니가 간호사세요

 

혼자서 힘들게 키우셨죠

 

전액 장학생이 됐는데

 

엄마가…

 

참 자랑스러워 하세요

 

태워줘서 고마워요

 

- 지비에게

 

이 음악들을 알려줘서
참 고마워

 

음악 자체도
너무 사랑스럽지만

 

무엇보다 뉴욕에 대한 내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고 있는 거 같아

 

원래는 좀 복잡미묘한

 

그런 감정이었거든

 

도시의 경적 소리와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대신

 

슈베르트나 텔레만 음악을 듣자면

 

도시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아름답게 보여

 

오랫동안 도시와 나 사이에 있던
얄팍한 갈등 같은 것들을

 

음악이 치유해 주었다고나 할까

 

지금까지 마음에 드는 곡…

 

우선 마스네의〈타이스명상곡〉

 

이 보다 아름다운 곡이

 

과연 쓰였을 지 모르겠어

 

바흐의〈브란덴부르크 협주곡〉도 장난 아니고

 

그리고 너의 베토벤에 대한 감정도
이해할 수 있는 거 같아

 

와…

 

또 비발디의「지우스티노」는

 

잘 모르겠지만

 

내겐 일탈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아

 

약간 나쁜데 멋있는 느낌 있잖아

 

마치 영화에 나오는

 

섹시한 스파이가 된 느낌이랄까

 

바그너의〈서곡〉은

 

인터넷으로 잠깐 찾아보니까

 

순결한 사랑과
관능적 사랑 사이에서의

 

고뇌를 다룬 오페라던데

 

19금 표시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또 하루는

 

평소처럼 무슨 생각에 빠져서는

 

길을 건너고 있었는데

 

바그너〈서곡〉을 듣다가

 

음악이 짙어질 때
갑자기 깨닫게 된 거지

 

내게 손이 있고, 발이 있고,
몸이 있다는 걸

 

그리고 수 많은 사람과 차에
둘러싸여 있는 걸 말이야

 

그게 뭐라고
딱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 순간 마치

 

신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진 몰라도

 

신께서 콘크리트 더미와
택시 안에도 살아있음을 느꼈어

 

강이나 호수, 산처럼 말이야

 

은혜라는 건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는 것 같아

 

필요한 건 딱 맞는
배경음악일 뿐이지

 

내 삶에 이렇게 음악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들어오면서

 

적어도 고상한 음악가 선생들에 대한

 

생각을 바꿔주고 있는 것 같아

 

네게 감사해야겠지

 

그건 그렇고,
어떻게 지내?

 

너의 친구, 제시가

 

- 제시, 난 잘 지내요

 

음악이 좋다니 다행이에요

 

나도 그 음악 수업 듣고

 

삶이 한 단계 높아진 기분이었어요

 

참 신기한 게

 

그 음악을 모두
사람이 만들었다는 거?

 

요새도 음악을 그렇게 만들까요?

 

아마 아니겠죠

 

모짜르트의「코시 판 투테」도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난 그 곡 처음 들었을 때
왠지는 모르겠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더 아름다워 보였거든요

 

한 번 실험해보고
어땠는지 알려줘요

 

- 엘리자베스에게
모짜르트 음악은 정말 그렇더라

 

뉴욕 사람들 모두를

 

다 애인처럼 보이게 하더라고

 

한 순간도 빠져나올 수가 없어

 

나도 오페라를 좋아하게 된 거 같아

 

누구한테도 얘기하지 말아 줘

 

절대로

 

- 얘기 안 해요

 

편지 받을 때마다 그 음악들

 

다시 들어보고 있어요

 

당신이 얘기한 곡을
찾아 듣는 게 참 좋아요

 

우리가 펜실베이니아를 두고
떨어져 있지만

 

같은 음악을 듣고 있으니까

 

그리 멀지 않다고 느껴져요

 

얘기한 적 있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그립네요

 

흠, 왜일까요

 

우린 잘 모르는데

 

어쨌든, 손 편지는

 

진짜 최고인 거 같아

 

계속 보내줘요

 

- 왜 요샌 그런 음악들이
안 만들어지는지 물었지

 

옛 작곡가들이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들은

 

지금 우리의 정신세계엔
너무 광대하다는 생각이 들어

 

- 잘 지내고 있어요

 

학교는 뭐 뻔하구요

 

- 마스네의〈명상곡〉을 예로 들면

 

내 신경계가 그 광대한 감성을

 

받아들일 능력이
조금 부족하지 않나 싶기도 해

 

- 우리가 같이 학교를 다녔다면

 

진짜 좋은 친구가 되었을 텐데

 

- 이 음악들 때문에
나 죽을지도 모르겠어

 

네 손에 피를 묻히는 거야

 

감당할 수 있겠어?

 

- 제시, 편지를 주고받는 것도
너무 좋지만

 

다시 만나고 싶어요

 

가능하다면 빨리

 

나 만나러 와 줘요

 

여기 남자애들은 여전히
18살에서 22살짜리들이라서

 

나이대로 행동하고 있어요

 

난 신사 방문객이 더 좋고…
또 그게 당신이었음 좋겠어요

 

당신의 친구, 지비가

 

- 엘리자베스
너의 제안을 받아들일게

 

14일에 가서
여관에서 지내겠지만

 

같이 걷거나,
산책하거나, 산보 가거나

 

소풍이나 나들이 갈 수는 있어

 

기다려진다

 

제시가

 

- 밥

 

최근에 니 스스로에게
많이 물어봤는데

 

퇴임한다고 그 소란을 피웠지만

 

근데, 뒤돌아 보니까…

 

- 뒤돌아보시면 어떡하겠어요

 

소금기둥이 돼버릴 지도 모르는데

 

- 그렇지, 그렇지…

 

근데 너무 빨리
말을 꺼낸 것 같네

 

아직… 아직
힘이 남아있는 것 같아

 

- 교수님, 학교에서 저만큼
교수님 존경하는 사람 없는 거 아시죠

 

- 고맙네

 

- 처음 퇴임한다고 발표하셨을 때
모두가 만류했지 않습니까

 

근데 계속 지금이 맞는 때라고 하셨잖아요

 

- 그래, 그 땐 그렇게 생각했네

 

- 다른 사람 임용했습니다

 

버지니아 대학교에 있는 젊은 교숩니다

 

아주 인상 깊은 사람이에요

 

첫 번째 선택이었죠

 

못 데리고 올 줄 알았는데,
성공했죠

 

후임자 관련해서는
관여 안 한다고 하셨잖습니까

 

- 그렇지, 맞네

 

난 단지…

 

이렇게 빨리 진행되리라고 생각 못 했네

 

- 네, 다들 만장일치로
그 사람을 원해서요

 

평소보다 좀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 밥

 

기회를 주게

 

- 교수님, 못 합니다

 

이 사람 데려오는 데

 

수천 달러를 썼습니다

 

이미 다른 제안들
다 거절했다고 하고요

 

어떻게 진행되는지 아시잖습니까

 

- 자네, 내가 데려왔네

 

그런 얘긴 할 필요도 없는…

 

한 마디 해 줄까?

 

자네 데리고 올 때는
만장일치로 원하고 이런 거 없었네

 

사람들 설득하느라고

 

얼마나 노력한 줄 아는가?

 

그랬는데
20년이 지나서 보니 뭐라고?

 

자네가 망할 학과장 된 건

 

내가 정치논리를 혐오해서일 뿐이야

 

자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러지 좀 말게

 

자넨 너무 정치적이야

 

부탁…

 

부탁하네

 

한 번만 기회를 주게, 밥

 

3년만 더 있겠네

 

- 죄송합니다

 

도와드릴 수가 없네요

 

- 왔어?

 

- 응

 

- 오, 안녕하세요

 

- 제시, 바네사 기억하죠?

 

- 응, 그럼
- 또 오셨네요

 

- 네

 

- 아, 그럼 난…

 

할 게 좀 있어서 이만

 

- 여기가 네 방이구나

 

- 응, 이쁘죠?

 

- 응

 

얼마나 작았는지 잊었었어

 

뉴욕에서 사는 연습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네

 

- 이번에 호벅 교수님

 

뵙고 갈 거예요?

 

- 아마 안 뵐 거 같아

 

음… 그리고 혹시 교수님 만나면

 

나 왔었다고 안 해도 돼

 

- 알았어요
- 그래

 

- 앉지 않을래요?

 

- 어, 그래. 그래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약간 기분이 묘하다

 

- 왜? 그러지 마요

 

- 음, 아는지 모르겠는데

 

난 너보다 나이가 조금 많잖아?

 

- 아, 진짜?

 

- 응, 아주 조금 많아

 

그렇다고 막
앞서나가고 싶지 않다고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 아, 잠깐만요

 

혹시 우리 사이에 로맨틱한 걸
기대하고 있던 거예요?

 

장난이에요

 

일로 와요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요, 알았죠?

 

- 나 안 그래

 

- 저기

 

우리 참 잘 맞죠, 그쵸?

 

- 응, 잘 맞지

 

난 그게 네가 성숙해서인지

 

아님 내가 모자라선지 잘 모르겠어

 

- 내가 성숙해서 그래요

 

- 그런가 보다

 

근데 내가 좀 모자라긴 해

 

- 난 천천히 했으면 좋겠어요

 

- 응,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 그런데 키스해주고 싶어요

 

이마에

 

이마에 키스해도 돼요?

 

알겠다고 해요

 

- 알겠어

 

- 턱에는?

 

턱에 해도 돼요?

 

- 미안! 미안…

 

필요한 게 있어서

 

- 룸메이트들이란…

 

- 우리… 배 안 고파?

 

- 먹을 순 있어요

 

- 그래?

 

우리 잠깐 나가서 뭐 좀 먹을까?

 

- 너무 오래 걸릴 거 같은데

 

나 2시에 수업 있어요

 

- 아

 

근데 괜찮고
더 가까운 곳 아는데

 

- 딘

 

- 여기 취직했어요?

 

- 그랬음 좋겠다

 

내가 친구를 잃어버린 거 같은데

 

잠깐 앉아도 될까?

 

뭐 하고 있어?

 

- 음, 이거…

 

소설이요

 

- 좋네

 

- 네

 

- 잘 돼가?

 

- 아뇨, 그냥

 

- 잘 지냈어?
좀 어때?

 

- 똑같아요

 

그냥 이 모든 게

 

최대한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요

 

대학생활이 왜 그렇게 좋았어요?

 

- 이런 걸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잖아

 

앉아서 하루 종일 책을 읽거나

 

어떤 것에 대해서
깊은 대화를 나누고 그런

 

세상에 나가면
그렇게들 하지 않아

 

생각해 봐

 

여기 어느 누구한테 가서
"난 시인이야"라고 해도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잖아?

 

대단한 거지, 그건

 

- 맞아요

 

이해 돼요

 

난 그냥 왜 내가 대학생활에

 

심하게 불만스러운지
잘 모르겠어요

 

- 제시

 

제시!

 

- 이거 내 번호야
얘기하고 싶음…

 

- 왔어?

 

이거 바네사 책이라고 말해 줘

 

- 아니, 내 책인데

 

- 잠깐, 이거 읽어본 거야?

 

- 응

 

- 다 읽었어?

 

- 그럼

 

- 반어법 아니지?

 

- 아니에요

 

- 여자애들은 뱀파이어에
왜 그리 환장하는 거야?

 

무슨 내용이야?

 

- 뱀파이어

 

- 아니 어떤 이야기냐구

 

- 뱀파이어 얘기

 

- 이해가 안 돼
좋은 내용이야?

 

- 아뇨

 

그러니까, 좋아요. 근데 안 좋아

 

- 근데 왜 읽어?

 

- 그냥 재밌으니까

 

- 그건 책 읽는 이유가 아니야

 

- 그럼 책 읽는 이유가 뭔데요?

 

- 아니, 진짜로

 

세상에 좋은 책이 얼마나 많은데

 

왜 이런 걸 읽어?

 

- 됐어요
나 이런 대화하기 싫어

 

그만 할까요?

 

- 잠깐만, 이거 3부작이지?

 

- 대답 안 할래요

 

- 이걸 세 권이나 읽었단 말이야?

 

- 한 권이라도 읽어보기나 했어요?

 

어떨 거 같아?

 

- 어떻게 읽어보지도 않고서
싫어할 수가 있죠?

 

그런 건 독재정권이나
하는 짓 아닌가?

 

싫어하는 책을 다 태워버리고 싶은 거예요?

 

- 맞아, 내가 뭐 할 건지 알아?

 

이거 읽을 거야, 다

 

그리고 얘기해 보자

 

- 지금?
- 응, 왜?

 

얼마나 걸리겠어

 

좋네, 독서모임 하는 거지

 

- 진짜요?

 

- 응

 

금방 올게

 

- 아, 아니
생각하시는 그런 게…

 

한 번 도전해보는 거예요

 

내기했거든요

 

교수님 강의 좋아했습니다!

 

- 내가 먼저 할까요?

 

- 응

 

- 알았어요

 

읽어서 좋았고

 

재밌었고 바보 같았고

 

시간을 보내게 했고

 

톨스토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TV도 아니었고

 

읽고 기분 좋았어요

 

 

- 고마워

 

이건

 

영어로 쓰인

 

책 중에서

 

최악이야

 

- 그럼 다른 말로 된 책 중에서는
더 최악인 게 있어요?

 

- 아마 없을 거야

 

이 책이 다른 말로
번역된 게 아니라면

 

- 우리 진짜…

 

이걸 왜 하고 있는 거지

 

- 아니, 해 보자

 

난 알아야겠어
어떻게 이…

 

네가 문장이라고 부를
이것들을 읽고 나서

 

불쾌함과 슬픔 이외의
다른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지 말이야

 

- 얼마나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데

 

- 좋아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게 좋은 책이라는 의미야?

 

- 아니,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는 의미예요

 

이 책을 읽고 행복해진다구요

 

언제나 정치학을 생각하거나

 

나도 싫어하는 제프리 초서를
읽어야 되는 건 아니잖아요

 

- 그래야 된다는 건 아니야

 

- 그럼 왜 읽는 거예요?

 

대학생활 좋아하죠?

 

대학생활이라는 게
다른 관점을 이해하는 거 아니에요?

 

- 취향을 발전시키는 것이기도 해

 

- 그건 가식적이네요
완전 가식쟁이네

 

- 그건 아니야

 

- 아니, 맞아요

 

어떤 걸 싫어하는 게
멋있다고 생각하죠?

 

아니야
그건 진부한 거예요

 

좋아하는 걸 얘기하고

 

싫어하는 건 내버려 둬요

 

-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들어봐

 

이건 중요한 문제야

 

나라 전체가 엉망이라구

 

그리고 그건 사람들이

 

아주, 아주 안 좋은 것들을
좋아하기 때문이야

 

- 그 말이 맞다면

 

왜 당신이 좋고 안 좋고를
판단하는 거예요?

 

당신하고 같은 책을 읽는 사람들한테만

 

둘러싸여 있고 싶은 거예요?

 

- 구체적인 예를 들어 살펴보자

 

- 지금 어디 있어요?

 

- 무슨 말이야?

 

- 난 지금 당신이
어딘가 있기는 한데

 

여기는 아닌 거 같아요

 

- 아냐, 난… 여기 있어

 

- 그럼 왜 자꾸 바보 같은 말다툼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죠?

 

- 안녕하세요, 교수님

 

- 응, 지비야

 

- 교수님

 

교수님!

 

- 여기서 뭐하고 앉아 있는 거냐?

 

- 저도 모르겠어요

 

- 내가 몇 살인지 아니?

 

- 아뇨, 어떻게 되시는데요?

 

- 그건 네가 상관할 바 아니고

 

내가 몇 살처럼 느끼는 지 아니?

 

19살

 

19살이 이후로
19살이 아닌 적이 없었어

 

그런데 아침에 면도를 하고
거울을 보면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거야

 

"저건 19살짜리가 아닌데"

 

지금껏 여기서 아이들 가르치면서

 

19살짜리들한테 둘러싸여있고

 

내가 19살이라고 생각이 들었어도

 

더 이상 19살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야 하는 거지

 

이해가 되니?

 

- 네

 

- 아무도 자기가
어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게 바로 슬픈 진리지

 

- 우주는 얼마나 완벽한가!

 

- 아직도 여기 있어?

 

- 그래서 다행이죠?

 

친구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데

 

- 우리가 먹는 음식에 방부제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그래서 우리가 죽어서
분해되는 데 더 오래 걸린다구요

 

- 설마, 진짜야?

 

- 진짜죠
제대로 된 게 없다니까

 

좋은 거 알려줄까요?

 

- 응

 

- 애벌레들은…
모자 줘요

 

애벌레들은 아주 바쁘잖아요

 

애벌레인 것 자체로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 성충세포라는 게 생겨난단 말이죠

 

과학자들도 이게 어디서 나오는지

 

왜 나오는지 몰라요

 

근데 이것들이
애벌레 안에서 생겨가지고

 

"일어나, 이 애벌레야"

 

"나비로 변신할 시간이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세포들이
어떻게 하는지 알아요?

 

- 모르겠는데

 

- 얘네를 공격한다구

 

죽일라고

 

얘네는 이제
"망할 성충세포들아"

 

"애벌레로 있는 게 행복하다고"

 

"꺼-져"

 

근데 성충세포들이 끝까지 자라서

 

애벌레의 운명을 바꿔놓는 거예요

 

고치로 변하는 거죠

 

다음엔 어떻게 되겠어요

 

- 애벌레가 나비가 되겠지

 

-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거예요

 

- 멋지네

 

- 멋지죠

 

- 좋은 얘기다

 

- 그래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다 괜찮아요

 

- 그건 잘 모르겠는데

 

- 진짜예요

 

다른 건 없어요

 

- 있잖아,
난 네가 진짜인지도 잘 모르겠어

 

농담 아니야

 

- 믿으면

 

다 진짜예요

 

- 그건 뭐야?

 

뭐 마시는 거야?

 

- H to the 2 to the O

 

마셔보는 게 좋을 거예요

 

탈수되지 않으려면

 

- 그래

 

고맙다

 

- 느껴져요?

 

- 응

 

너 좋다, 냇

 

친구가 돼줘서 고마워

 

- 별 말씀을

 

- 즐거웠어

 

갈게

 

- 가서 걔랑 잘해봐요

 

- 그래

 

- 사랑을 하세요

 

사랑하세요!

 

- 즐거워 보이네요

 

- 응, 즐거워

 

-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 나도 몰라

 

뭔가 있었어

 

- 나도 뭔가 얘기해도 돼요?

 

- 응, 그럼

 

- 네, 음…
아까 책 일만 빼면

 

그건 진짜 짜증났지만

 

당신이 좋은 거 같아요

 

누군가에게 이런 느낌을 가진 건
참 오랜만이긴 한데

 

근데 좋아요

 

- 응, 나도 그래

 

- 오늘밤 나랑 같이
보내줬음 좋겠어요

 

- 룸메이트 있잖아

 

- 아, 걘 다른 데서 잘 거예요

 

- 아

 

- 그래 줄래요?

 

- 응

 

- 좋다

 

말해줄 게 또 있어요

 

그러니까, 난 오늘이…

 

처음이에요

 

근데 하고 싶어요

 

당신하고

 

- 음… 그래

 

나 잠깐…

 

잠깐만

 

금방 올게

 

- 네

 

- 말하지 말 걸 그랬어요

 

- 아냐, 아냐. 좋아

 

말해줘서 고마워

 

- 그게 문제가 돼요?

 

- 음…
응, 그렇지

 

- 왜요?

 

- 우선, 난 35살이야

 

- 안 그래 보여요
- 그건 고마워

 

- 그리고, 난 상관없어요

 

- 난 상관 있어

 

- 무슨 상관이 있어요

 

나이는 아무 것도 아니잖아

 

사람이 환생하는 게 진짜라면?

 

생각해 봐요

 

내가 만약에 당신보다
수천 년 더 살았다면?

 

- 이건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 왜죠?

 

- 왜냐면, 그건 마치

 

"현실이 환상이라면 어떨까"
같은 거잖아

 

그러면 결과라는 게 없어지고

 

완전히 논점에서 벗어나는 거지

 

난 결과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 아니, 죄책감이 중요하겠죠

 

- 그럴 지도 모르지

 

그치만 행동 전에 느끼는 죄책감을
도덕이라고 하잖아

 

- 여기 왜 왔어요?

 

- 너 보러 왔지
근데 몰랐어, 너가…

 

- 그게 무슨 상관이죠?

 

몰라, 더 좋은 거 아닌가?

 

- 있잖아

 

엘리자베스

 

섹스는 아주 복잡한 거야

 

나도 어렸을 땐
잘 이해 안 됐어

 

그런데 지금은 이해가 돼

 

- 아니, 나…
고등학교 때 순결서약 같은 걸

 

한 것도 아니에요

 

내숭떠는 것도 아냐

 

그냥… 믿음직한 사람이나

 

충분히 좋아하는 사람을

 

못 만났었던 것뿐이라구요

 

- 안 되겠어

 

-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어요?

 

-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나는…

 

너를 이미 많이
아끼고 있기 때문인 거야

 

- 그래서… 결국

 

나랑 자고 싶지 않은 게

 

날 많이 좋아하고 존중해서다?

 

- 우선은…

 

그렇지

 

- 살면서 들어본 가장 슬픈 말이야

 

- 난 너의 누군가가 되고 싶어
진심으로

 

- 나 오빠는 이미 있어요

 

어떤 멘토가 필요한 게 아니라구

 

- 모든 것에
알겠다고 할 순 없는 거야

 

엘리자베스

 

- 그렇게 부르지 마요

 

- 뭐라고?

 

- 아무도 엘리자베스라고 안 해

 

지금 당장 나가줘요

 

지금 엄청 화났으니까
얼른 가요

 

- 알았어

 

- 나가라구!

 

이게 누구야

 

이제 좀 기억이 날 듯 하네

 

- 그러세요?

 

- 딱히

 

- 힘든 하루?

 

- 네

 

- "비웃으려거든 비웃으라"

 

"모든 것이 헛되니"

 

"바람에 모래를 던질 지라도"

 

"바람은 되불어 오리니"

 

- 윌리엄 블레이크

 

- A+

 

- 안주거리

 

좀 시킬 참이었는데

 

- 안녕

 

맥주 좀 갖다 줄래?

 

- 그냥 내 거 마셔

 

- 그럼, 아주 짜릿했지

 

이번에 신설된 박사과정인데

 

아주 흡족해

 

〈그리스 항아리에 바치는 송가〉를
강의하게 됐으니

 

그것도 최초로

 

천국이 따로 없었겠지?

 

- 네, 네
그렇네요

 

- 그런데 아주 멋들어지게

 

강의하고 싶어서

 

시 전체를 다 암송해 버리자 한 거지

 

알게 뭐야, 그치?

 

- 그럼요

 

-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아주 괜찮았어

 

그런데 마지막 행에서

 

영어로 쓰여진 시 중에서
감히 최고라 할 수 있는 마지막 행을

 

이렇게 읽어버리고 만 거지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이요, 진리가 진리다"

 

- 원래 "아름다운 것이 곧 진리요
진리만이 아름답다" 이건데 말이야

 

- 진짜 재밌네요

 

최고의 일화예요

 

언제 낭만파에 빠지셨어요?

 

어떻게… 궁금한 게요

 

학부 때였나요?
아니면 대학원?

 

저는 그런 작가들 아무도 몰랐습니다

 

교수님 강의 듣기 전까지는요

 

아, 교수님 강의…

 

좀 흥분해도 되겠죠?

 

아직도 그립다니까요

 

아 정말이지…

 

왜 그러세요?

 

- 상당히 열정적이군

 

- 그런가요

 

- 차를 끌고 왔어

 

- 그래서요?

 

- 자네랑 같이 차에 타고

 

어디론가 가고 싶어

 

- 어디로요?

 

- 술값은 걱정 마

 

난 줄 알고 있으니까

 

- 에릭, 왔냐?

 

- 응

 

- 그래, 이제 가 봐

 

- 뭐라구요?

 

- 나가라고, 얼른

 

- 진심이에요?

 

- 그럼

 

- 아, 뭐…
밤을 보낼 생각은 없었긴 한데

 

숨 좀 돌릴 시간은
있어야 되지 않나?

 

- 그래

 

얼마나 걸릴 것 같아?

 

- 왜 웃어?
- 아뇨

 

갑자기 그냥 웃겨서요

 

- 어떤 점이 즐거워서 웃지?

 

- 끝나자마자 한 대 피우는 게
우선 웃음이 나구요

 

- 왜, 담배 안 태워봤어?

 

- 아뇨, 태웠죠
- 끊었구만

 

- 네
- 계집애 같기는

 

- 와, 내가 들은 영문학 강의한

 

페어필드 교수님하고 동일인물 맞죠?

 

- '제가' 수강한 영문학
강의 '하신' 교수님이라면

 

응, 맞아. 나야

 

그런데 단지 우리가 뒹굴었다고 해서
한 순간에

 

요새 애들은 뭐라더라?

 

'절친'이라도 된 줄 알아?

 

- 뭐, 저도 그렇게 생각한 건…

 

-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뭘 안다고?

 

비흡연자야?
그럼 축하해

 

100살까지 살겠구만

 

그런데 인생에 기쁨이 없으면 어쩔 거야?

 

근데 딱 그럴 거 같아
믿어도 될 걸

 

-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죠?

 

- 이제 옷을 주워 입고, 나가야지

 

그리고 난 수면제를 한 알 먹을 거고

 

- 아니, 저는 무슨 일이…

 

- 아니, 진짜로

 

우리가 무슨 밤새도록 껴안고 있을 줄 알았어?

 

워즈워스 시라도 읊어 줘?

 

- 아닙니다

 

- 좋아

 

여기서 20년간 교단에 오르면서

 

너 같은 종자들을 수도 없이 봐왔어

 

맥아리 없이 감성만 넘쳐서는

 

강단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들

 

그런 놈이 되지 말라고

 

가서 직접 살아봐야지

 

건설적으로 말야

 

쌈박질이라도 해 보든가

 

- 와…

 

죽은 노먼 메일러가 땅을 치겠네요

 

교수님하고
딱 맞는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 숫자라도 셀까?

 

- 아니, 잠깐만요

 

잠깐 얘기 좀 해 봐요

 

안 행복해 보여요

 

- 추론능력이 아주 놀라운데

 

명문대 출신이겠어

 

- 잘 이해가 안 되는 게…

 

교수님은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영문학부
종신교수잖아요

 

만족스럽지 않나요?

 

- 인문대 건물에 교수회의 가서
딱 한 시간만 있어 보세요, 젊은 양반

 

단언컨대 인간에 대한 신념이
싸그리 무너질 걸

 

- 그러면 강의실은 어때요?

 

강의실에서는 기쁨이 좀 있죠?

 

훌륭한 선생님이시잖아요

 

- 고마워

 

강의하는 건 좋아

 

아주 좋아했었지

 

- 무슨 일이 있었어요?

 

- 인생이 있었지

 

- 어… 좀 더 설명이 필요한데요

 

- 강의는 거기까지야

 

난 자네완 달리
"미주알고주알 쓸데없는 소리 늘어놓는"

 

세대는 아니라서

 

난 말을 아끼고

 

자기 연민은 혐오해

 

그러니까 이쯤에서 그만 두지

 

사람은 다 실망하게 돼있어

 

- 네, 근데 전…

 

- 누가 편히 앉으래?
- 죄송해요

 

전 교수님처럼

 

그 수많은 시를 읽고 지내면

 

더 낙관적이고 희망에 찰 줄 알았는데요

 

- 헛소리야

 

시인들은 모조리 딱한 작자들이야

 

초월의 경지를 잠깐 맛본 다음
종이에 옮길 능력이 있었을 뿐

 

바이런이 그나마 좀 행복했겠지

 

물건이라도 여기저기 굴렸으니까

 

- 살면서 가장 슬픈 밤이네요

 

- 익숙해지라고

 

조언을 해주자면 이거야

 

그 여리디 연한 마음에
철판을 좀 둘러

 

- 그래도 이 역설적인 상황에
감사해요

 

살면서 가장 안 낭만적인 밤을

 

낭만파 교수님하고 보냈으니

 

제 생각일 뿐이지만

 

교수님 강의에 대해서 말한 건
모두 진심이었어요

 

제 안에 무언가를 깨웠어요

 

감사해요

 

그런데 제 마음이 여리다고 하면

 

교수님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겁니다

 

- 입학처 일은 여전히 재미없나 보구나

 

- 네, 그렇죠

 

- 어린 제시 피셔는 없든?

 

- 있다고 해도, 안 만납니다

 

- 있는데 못 알아보는 걸 수도 있지

 

어쨌든

 

들러줘서 고맙다

 

진짜 고마워

 

여길 뜨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니까 참 좋구나

 

- 좀 괜찮아지셨어요?

 

- 글쎄

 

시간을 돌려보려고 했다만…

 

안 되더구나

 

- 네, 안 되죠

 

- 이젠 그냥…

 

마음의 준비가 되길 기다리고 있다

 

마치 죄수 같다니까

 

가석방되고 나서
밖에서 사는 게 쉽지 않으니까

 

다시 범죄를 저질러서

 

익숙한 세상으로 돌아오려는 그런

 

- 여길 감옥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 어디든 못 떠나면 감옥이지

 

아무튼…

 

- 네

 

교수님

 

교수님이 왜 제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교수님인지 아세요?

 

- 모르겠는데

 

교수님은 당신이 싫어하는
사람들 책도 읽히셨잖아요

 

자부심을 가지셔도 돼요

 

- 고맙다

 

이제 좀 차에 타서
좀 가거라

 

- 지비에게

 

그 뒤로 몇 달이 지났는데

 

여전히 편지를 기다리고 있네

 

나한테 할 말이
별로 없을 줄 알지만

 

네 편지가 아주 많이 그리워

 

네게 상처를 줘서 미안해

 

내 모든 바보 같은 행동들은

 

당황해서 그런 것이지
악의가 있던 건 아니야

 

최근에 '성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내게 시작되고 있음을 알게 됐어

 

나보다 16살 어린
누군가의 도움이 컸지

 

나이에 걸맞게 행동하게 해줬으니까

 

빨간 모자 쓴 사내가 나한테 말하길

 

"다 괜찮아"

 

그 땐 그 말을 못 믿었는데

 

왠지는 모르겠지만
점점 믿어지는 거 같아

 

- 문 닫았어요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

 

- 이 책 맞죠?

 

오셨을 때마다 읽고 계신 거 봤어요

 

- 네…

 

어디 서점을 가든
항상 이 책…

 

- 마지막 세 페이지를 보시죠

 

저도 읽어봤어요
굉장하죠

 

- 네

 

제시라고 해요

 

- 애나예요

 

- 전 책이 진짜 좋아요

 

진짜 이상하리만치 좋아해요

 

- 저도 그래요

 

그게 문제죠

 

- 전 나무도 좋아요
책을 만들어 주니까

 

- 나무가 그래서 참 좋죠

 

- 전 사실…

 

좀 이상하지만

 

좀 적게 읽으려고 해요

 

- 왜요?

 

- TV를 너무 적게 보는 것 같아서

 

아니, 인생에 대한 책을 읽는 게

 

인생을 직접 사는 시간을
뺏고 있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해보려구요
날 초대하는 것들에 응하고

 

세상과 좀 더 만나려구요

 

- 좀 무서울 것 같은데요

 

잘 돼가요?

 

- 그냥… 그래요

 

밖에 나가 있을 때면

 

"침대에서 책 보고 있음
훨씬 행복할 텐데"라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썩 좋진 않죠

 

여전히 엄청 읽어요

 

단지 책의 한계를
더 절감하고 있다 할까?

 

말이 되나요?

 

- 네, 그럼요

 

- 지금은 어때 보여요?

 

- 네? 지금 대화에서요?

 

- 네

 

- 아주 잘하고 계신데요

 

우리, 여기서 나가서

 

좀 걸어볼래요?

 

- 네, 좋아요

 

- 진짜요?
- 네! 걸어요

 

- 좋아요

 

남편이나 남자친구 불러도 괜찮아요

 

- 지금 그이들이 다 조금 바빠서…

 

- 그럼 우리 둘만…

 

- 네, 둘만…

 

- 여보세요

 

- 네, 어…

 

딘인데요

 

프란젠 책 읽던…

 

- 어, 그래… 딘
웬일이야?

 

- 지난 번에 번호 줄 때
전화하고 싶으면 하라고 하셨죠

 

- 그랬지
목소리 들으니까 좋네

 

잘 지내?

 

- 어… 잘 지내요

 

그냥…

 

좀…

 

- 딘?

 

- 약을 좀 먹었어요

 

- 뭐라고?

 

- 약을 좀 많이 먹었어요

 

- 얼마나 먹었는데

 

- 잘 모르겠어요…

 

좀 무서워요

 

- 지금 어디야
- 기숙사요

 

- 거기 가만 있어…
알았지?

 

그대로 있어

 

응, 내가 지금… 바로 신고하고

 

신고할 테니까

 

전화기 바로 옆에 있어야 돼, 알았어?

 

- 아저씨

 

- 어, 그래…

 

좀 어때?

 

- 이상해요

 

어떻게 그렇게 올 수 있었던 거예요?

 

- 과속했지, 이 자식아

 

- 고마워요

 

전화 받아주셔서

 

전화할 사람이 없었어요

 

- 조언 하나 해 줄까?

 

- 네

 

- 이거 그만 읽어

 

- 네?

 

- 주인공 자살했잖아
넌 안 그럴 거니까

 

좀 다른 책을 읽어야겠어

 

딘, 일찍 죽는 천재가 되지 마

 

오래 살아

 

나이 먹는 거
생각보다 괜찮아

 

나이 먹고 늙어서 죽어야지

 

그게 더 나은 삶이야

 

있잖아

 

지금 이 순간
네가 겪고 있는 모든 건

 

책에서는 각주에 불과한 거라구

 

앞으로 졸업하고

 

세상에 나가 보면

 

만족스러운 것들이 일어나게 돼있어

 

진짜라니까

 

- 아저씬 만족스러워요?

 

- 아니, 전혀

 

근데 만족스러운 날들이 있지

 

정말 감사한 날이 있고

 

정말 개 같은 날도 있고

 

그런데 다 괜찮은 거야

 

그러니까 이제 어려운 책은 그만 읽어

 

아저씬 책 뭐 읽는데요?

 

- 뱀파이어 책

 

애들이 좋아 죽더라고

 

읽어 봐
마음이 아주 뻥 뚫릴 거다

 

-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 줘요?

 

과속까지 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우린, 두 번인가 만났잖아요

 

- 내가 책벌레들한테 좀 약하거든

 

요샌 더 찾기 어렵잖아

 

- 나… 진짜 보고 싶었어요

 

우리가 만나고

 

너무 좋았는데…
갑자기 사라졌더라구

 

근데 괜찮아요, 이젠

 

이해해요

 

가끔 그럴 때가 있어요

 

성숙하고 더 많이 아는 '내'가

 

초안 같은 이 19살짜리를
내려다보는 기분?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지만…

 

이 또 다른 나를 따라잡으려면

 

시간을 더 살아야 하는 그런…

 

그래서

 

나도 따라잡는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 가끔 지름길로 가고 싶은

 

그런 거 있잖아요

 

글쎄요

 

당신이 그 지름길로 데려다 줄 거라고
생각했었나 봐요

 

말이 되죠?

 

- 내가 너라는 초안을 쓴
작가라면 이랬을 거야

 

"내가 쓴 최고의 초안이다"

 

- 님들, 좀…

 

- 룸메이트들이란

 

- 난 이제 어른들 세계로 가볼게

 

- 응

 

거기서 봐요, 곧

 

- 안녕, 지비

 

- 안녕, 제시

 

- 자기 너무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나이도 적합하고…

 

- 뭐라고?

 

- 아냐, 아무 것도

 

"이게 진짜 뱀파이어 소설이지"

 

〈드라큘라〉
브람 스토커

 

〈순수와 경험의 노래〉
윌리엄 블레이크

 

- 당신, 지혜가 한 올 늘었어

 

- 늙음이 늘었겠지

 

- 아니, 다른 거야
지혜가 늘었다니까

 

늙는 게 무서워요?

 

- 늙음 자체는 괜찮은 것 같아

 

늙어가는 게 싫은 거지

 

- 난 당신이 멋지게 늙을 거 같아

 

- 정말?
- 응

 

- 살면서 들어본

 

가장 기분 좋은 말이다

 

비꼰 건 아니지?

 

"벌써 꽉 막힌
인종차별자 같으니"

 

"멋진 늙은이가 되겠수"

 

- 아니, 이런 말인데

 

배바지 입고
배도 이만큼 나와서는

 

커피 좀 더 달라고

 

"이것 좀 데워주시겠소, 젊은 양반?"

 

- 맞아

 

그럴 거야

 

당신도 멋지게 늙을 거야

 

- 고마워요

 

난 늙어서 머리가 새도
길게 길러서 묶고 다닐 거야

 

- 알 거 같아

 

지금도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아직 한창이야

 

나중에 사람들이 그러겠지

 

"아직도 한창이시네"

 

- 지금도 그런 소리 듣거든?

 

그리고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해서는

 

작은 집에서 살고 싶어
물가에 있는

 

나이 드는 거, 참 좋을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