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서독 리덕스

장국영

 

임청하

 

양조위

 

유가령

 

양가휘

 

양채니

 

장학우

 

특별출연
장만옥

 

각본/감독
왕가위

 

"움직이는 것은 깃발도 바람도 아니요
그대의 마음이다"

 

동사서독

 

금년엔 오황이 태세를 만나서
천하가 가뭄에 시달렸다

 

가뭄을 당하면 문제가 생기고
나도 일거리를 얻게 된다

 

나는 문제 해결이 직업인
구양봉이란 사람이다

 

나이가 40대 초반이군요

 

살다 보면 들추기 싫은 일이나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죠?

 

당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죽이고 싶었던 적도 있을 테고?

 

하지만 용기가 없었군요

 

필요성을 못 느꼈던가

 

살인은 아주 쉽소

 

무공은 뛰어나지만
형편이 어려운 친구가 있는데

 

돈만 조금 주면
그 사람을 죽여줄 거요

 

잘 생각해 보시오

 

살인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쓴다

 

나는 백타산을 떠나 사막에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경칩

 

매년 경칩을 즈음해서 한 친구가
술을 마시자고 찾아온다

 

그의 이름은 황약사이다

 

그는 이상하게도 매번 동쪽에서 왔다

 

몇 년 동안 계속 그랬다
금년엔 선물을 가지고 왔다

 

얼마 전에 어떤 여자가
술을 한 병 주었는데

 

술 이름이 취생몽사(醉生夢死)야

 

마시면 지난 일을
모두 잊는다고 하더군

 

난 그런 술이 있다는 게
믿어지질 않았어

 

인간이 번뇌가 많은 까닭은
기억력 때문이라고 하더군

 

잊을 수만 있다면 매일
매일이 새로울 거라 했어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어?

 

자네 주려고 가져온 술인데

 

함께 나눠 마셔야겠군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마시지 않았다

 

효과가 있었던 걸까?

 

그날 이후로 황약사는
많은 일을 잊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기억 안나

 

여기에 어떻게 왔는지는?

 

모르겠어

 

왜 자꾸 새장을 쳐다봐?

 

무척 낯이 익어

 

그날 그는 잔뜩 취했고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났다

 

그가 왜 취생몽사를 가져 왔는지는
모르지만 무슨 걱정이 있는 것 같았다

 

한달 후 황약사는 남쪽으로 갔다

 

그 곳은 친한 친구의 고향이다

 

친구가 혼인하던 해에
황약사는 그곳에서 거처했다

 

어느 날 친구가 집을 떠나자
황약사도 그 곳에 가지 않았다

 

술 한잔 권해도 되겠나?

 

오늘은 물이나 마시겠네

 

우린 아는 사이인가?

 

옛날에 절친한 친구였어

 

하지만 지금은 아냐

 

여긴 왜 왔나?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이
취생몽사라는 술을 줬는데

 

마시면 지난 일을
모두 잊는다고 하지

 

마셔 봤는데
정말이더군

 

마셔 볼텐가?

 

술과 물의 차이점을 아나?

 

술은 몸이 달아오르고
물은 몸이 차가워지지

 

우린 또 만나겠지?

 

아니

 

이자를 다시 만나면
꼭 죽이겠다고 맹세했지만

 

시력이 나빠져서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남자야, 여자야?

 

지엄하신 대연국의 공주인 내게
이런 무례를 범하다니

 

내 손에 죽고 싶은가?

 

취하셨군요

 

기억이 흐린 사람은
남의 일에 관여해선 안된다

 

원수까지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 황약사는 죽을 뻔했다

 

누구나 1년중 몇 달은
죽음이 두려운 모양이다

 

입춘 후에 전혀 일이 없어서
한달 동안 손님은 1명뿐이었다

 

황약사라는 사람을 죽여주시오

 

그는 뛰어난 검객이라
죽이기가 쉽지 않을 거요

 

그를 죽여만 준다면
어떤 대가도 치르겠소

 

하지만 가장 고통스럽도록
내 손으로 죽이게 해주시오

 

왜 그렇게 그를 저주하시오?

 

다른 여자 때문에
내 여동생을 버렸소

 

그의 이름은 모용연이고
모용 공자의 후손이라 했다

 

그는 고소성 밖 도화림에서
황약사와 친구가 됐다

 

그날은 겨울이 끝나고
새 봄이 시작되는 입춘이었다

 

그날 밤 황약사는
그에게 농담을 했다

 

자네에게 여동생이 있다면
꼭 아내로 맞이하겠네

 

좋아, 약속 지키게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내 손에 죽을 거야

 

후에 그녀와 만나기로 했는데
황약사가 약속을 어겼다

 

제 오라버니가 찾아왔었나요?

 

낭자의 오라버니가 누구요?

 

모용연이라고 해요

 

왔었소

 

누굴 죽이라던가요?

 

모르겠소

 

그를 죽이는 날엔
당신도 살아남지 못해요

 

큰 돈을 제시했기 때문에
거절하면 난 큰 손해를 입소

 

요즘은 큰 돈을 주는
사람이 별로 없소

 

일을 못하겠다고 하면
2배로 보상해 드리죠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제 오라버니 모용연을 죽여주세요!

 

남매간의 감정이 묘하군요

 

그렇게 오라버니가 싫소?

 

그래요!

 

저와 황약사를 못 만나게 해요
나를 자신의 소유로 생각해요

 

그래서 죽여야 해요!

 

내 여동생이 찾아 왔었소?

 

그렇소

 

동생에게 흑심 품었다가는
당신도 죽을 줄 아시오

 

동생 걱정을 많이 하는군요

 

유일한 혈육이라 돌봐야 하오

 

왜 당신을 찾아왔죠?

 

누군가를 죽여 달랬소

 

이름은 모용연이오

 

황약사가 시켰을 것이오

 

동생 스스로가 원한 일이오

 

당신을 벗어나고 싶어했소

 

내가 죽기 전엔 벗어날 수
없을 것이오

 

오늘 오라버니를 만났죠?

 

그가 말했소?

 

왜 안 죽였어요?

 

돈을 못 받을까 봐서요

 

그는 약점이 있어서
죽이는 건 문제가 아니오

 

약점이 뭔지 아시오?

 

바로 낭자요

 

낭자가 죽이라고 했다고 한 뒤
그의 반응을 살펴봤죠

 

황약사와 못 만나게 하는 건
낭자를 걱정하기 때문이오

 

오라버니가 왜 그렇게 집착하죠?

 

평생 곁에 있어주기를 바래요

 

당신이 필요한 게로군

 

저는 아니에요
저는 황약사를 좋아해요

 

오라버니가 슬퍼하겠군요?

 

그러라죠

 

왜 그를 못 만나게 해서
날 힘들게 하는 거죠?

 

사랑을 못 이루는 고통을
느끼게 할거예요

 

잔인하군요

 

그가 죽어도 괜찮겠소?

 

죽어 마땅해요!

 

그건 왜 묻죠?

 

오라버니의 요구 조건을
오랫동안 생각했었소

 

남자는 연인이 죽어가는 것을
볼 때 가장 고통스럽소

 

하지만 낭자를 죽이면
돈을 못 받으니 그럴 순 없소

 

그렇지 않소?

 

누가 날 죽이려 해요

 

무엇 때문에?

 

황약사가 좋아하는 여자라서요

 

절 살려주세요

 

그 날밤 그녀는 가지 못했고
난 두려워 말라며 술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잠들었다

 

내 동생을 어디에 숨겼소?

 

왜 여기 있다고 생각하오?

 

당신을 만난 후에 아무도
동생을 보지 못했소

 

누가 죽이려 한다며
찾아왔었소

 

하지만 곧 떠났소
집에 안 갔소?

 

동생은 원한을 살 이유가 없는데
쫓기는 이유가 무엇이오?

 

황약사가 가장 좋아하는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했소

 

말도 안돼
좋아한다면 그가 떠났겠소?

 

어떤 사람들은 떠난 뒤에야
사랑했었다는 걸 깨닫죠

 

황약사가 그런 사람이오

 

아니오!

 

어떻게 확신하오?

 

그는 다른 여자를 좋아하오

 

사람들은 좌절하면 자기
변명을 늘어놓게 된다

 

모용언과 모용연은
한 사람이었다

 

마음에 상처를 입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취했소, 모용연

 

모용연?

 

잘못 봤어요
전 모용연이 아니에요

 

지엄한 대연 국의 공주인
모용언이라고 해요

 

당신은 누구세요?

 

날 모르겠소?

 

저와 혼인하겠다는 분을
왜 모르겠어요?

 

내가 그런 말을 했소?

 

그날 복사꽃 아래서

 

술에 취해서 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여동생이 있으면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했잖아요

 

제가 여자인 걸 알면서
왜 그러셨어요?

 

술에 취해서 한 말을 믿었소?

 

당신의 그 한마디 때문에
전 지금까지 기다렸어요

 

절 대려가 달라고 했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어요

 

두 여자를 사랑할 순 없다고요

 

모용언을 사랑하면서 어떻게
다른 여자를 사랑하죠?

 

전 그 여자를 찾아갔었어요

 

당신이 그 여자를 사랑한다기에
죽이려고 했지만 관뒀어요

 

당신이 그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요

 

당신이 정말 날 사랑하는지
수없이 자문해 봤었지만

 

이젠 알고 싶지도 않아요

 

제가 못 견디고 물어 보면
거짓말이라도 해주세요

 

'당신은 내 사랑이 아니야' 라는
말만은 하지 마세요

 

그날 밤은 무척 길었다
마치 두 사람과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뒤 난 그가 모용언인지
모용연인지 분간이 안됐다

 

모용언!

 

모용연?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 누구죠?

 

당신이오

 

예전에 이 질문을 받았을 땐
대답을 못했었다

 

하지만 황약사의 입장이 되니
별로 어려운 말도 아니었다

 

그날 밤 자고 있을 때 누군가
날 만지는 걸 느꼈다

 

그녀는 날 만지는 게 아니라
내 몸만을 빌린 것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손길은 형수님의
손길처럼 따뜻했다

 

그날 이후 모용연이나 모용언을
만났다는 사람은 없었다

 

수년 후에 강호엔
이상한 검객이 출현했는데

 

아무도 그의 내력을 몰랐고
그는 혼자 검술을 익힐 뿐이었다

 

그는 독고구패라고
불리었다

 

하지

 

날 찾았소?

 

남동생의 복수를 하고 싶어요

 

동생이 어떻게 됐소?

 

며칠 전에 검객들이 저희
집 앞을 지나갔는데

 

철모르는 동생이 그중
한 명에게 실수를 했어요

 

그들이 동생을 죽였죠

 

관가에선 가만히 있었소?

 

그들은 태위부의 검객이라
관가에서도 손을 못 써요

 

돈은 얼마나 낼 수 있소?

 

집이 가난해서 돈은 없고

 

달걀과 당나귀 뿐이예요

 

당나귀는 어머니께서
생전에 남기신 제 혼수예요

 

동생의 복수를 하려거든
돈부터 마련하시오

 

당나귀 한 마리 벌자고
태위부의 검객과 싸울 순 없소

 

복수는 대가를 치뤄야하오

 

낭자가 못생겼다면
포기하라고 했을 꺼요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오

 

내다 팔기에는 낭자가
당나귀보다 비쌀 거란 얘기요

 

무슨 뜻인지 알겠소?

 

그럴 수는 없어요

 

돈이 적다고 하신다면
여기서 기다리겠어요

 

꼭 누군가가 도와줄 거예요

 

그녀가 정말로 동생의 복수를
하려고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고보니 누군가와 닮았다

 

그 후에 매일 밤 복사꽃이
핀 고향 꿈을 꾸었다

 

그때서야 백타산에 오랫동안
안 가 봤다는 걸 깨달았다

 

눈에 무슨 문제가 있나?

 

난 어려서부터 눈이 나빴지

 

의원이 서른 이후엔 실명한다더군

 

금년에 몇인데?

 

서른

 

그런데 왜 왔어?

 

해마다 봄이면 고향에는
복사꽃이 찬란하게 피지

 

눈이 멀기 전에 보고 싶은데
경비가 다 떨어졌어

 

자넨 문제를 해결해 준다던데
날 도울 수 있겠나?

 

몇 달 전에 내 친구가
여기서 마적대를 물리쳤지

 

마적대가 복수하러 온다는데
내 친구는 이미 떠났어

 

마을 사람들은 화가 미칠까 봐
그들을 죽일 고수를 사겠지

 

고수가 있다던데
아직 있는지 모르겠군

 

그를 왜 찾나?

 

누가 빠른지 겨뤄 보고 싶어

 

내가 잘못 왔군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어

 

팔만 자르는 건가?

 

자를 바엔 목을 잘라야지

 

넌 오해했어

 

넌 내 상대가 안돼서
잘못 왔다고 한 거야

 

팔만 자른다고 했는데
왜 목까지 내놓았지?

 

저를 도와주실 수 없나요?

 

그는 한물 간 검객이지만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술 한 잔과 밥 두 그릇을 먹고
저녁이 되면 돌아간다

 

왜 자꾸 저 여자를 쳐다보나?

 

그녀를 보면 누군가가 생각나

 

자네 부인?

 

그렇게 그리워하면서
왜 떠도나?

 

그녀는 내 친구와
정을 통했어

 

마적대는 언제 오지?

 

며칠 내에 올 거야

 

복사꽃이 시들기 전에
빨리 와야 할텐데

 

꽃은 언제 피는지 알 수 있지만
마적대는 언제 올지 알 수 없다

 

그는 매일 성 밖에서
늦게까지 기다렸다

 

그는 밤마다 등불을 켰지만
밤에는 물체를 식별도 못했다

 

제가 싫으세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죠?

 

그래

 

혼인했어요?

 

왜 묻지?

 

부인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런데 왜 같이 있지 않죠?

 

술 한잔 더 주겠나?

 

오늘은 술이 당기는 모양이지?

 

내일은 못 마실것 같아

 

새벽녘에 도착할 것 같군

 

내가 등불을 준비했네

 

그럴 필요 없어

 

이제 아무것도 안보이지?

 

태양이 강렬할 때는 보여

 

내일 날씨가 좋기를 바래야겠군

 

내가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사람을 좀 찾아 주게

 

황약사라는 사람이야

 

시골에서 누가 기다린다고 전해 줘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제할 수가 없었다

 

내 얼굴에 묻은 그녀의
눈물이 마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여자가 날 위해 울어 줄까?

 

검이 빠르면 피가 솟을 때
바람소리처럼 듣기 좋다던데

 

내 피로 그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백로

 

이 사람의 이름은 홍칠

 

칼 솜씨가 아주 빠르다

 

그는 신발을 신지 않는다

 

내게 보탬이 될 줄은 알지만
난 이 사람이 싫다

 

내 운세에서 숫자 7을 만나면
명이 끝난다고 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만난 건 그가
막 시골에서 왔을 때였다

 

내가 왜 밥을 주는지 아나?

 

모르오

 

배가 고픈걸 알기 때문이야

 

난 자네를 오랫동안 지켜봤어

 

반 나절이나 담벼락에서
지쳐 앉아 있더군

 

자네처럼 무공을 좀 한다고
천하를 우습게 보는 이는 많지

 

강호를 떠도는 건 힘든 일이야
무공을 하면 많은 일을 못하지

 

농사 짓기 싫지?

 

산적 짓도 못하고
약장사는 더 싫을 텐데

 

어떻게 살 거야?

 

무공 고수도 밥은 먹어야 해

 

자네에게 맞는 일이 있어

 

돈도 벌고 의로운 일이지

 

어때?

 

잘 생각하고 빨리 결정하게

 

배는 금방 또 고파져

 

홍칠이 오고 얼마 안돼서
마적대는 다시 왔다

 

홍칠을 마을로 데려가기
전에 신발을 사줬다

 

신발을 신은 검객이
더 비싸기 때문이다

 

10냥이 비싸다는 거요?

 

그럼 싼 사람을 찾으시오

 

저쪽에 몇 명 있군

 

몇 냥만 줘도 좋아 할거요

 

신발도 안 신은 검객을 믿을 수 있소?

 

만약 저들이 실패해서

 

당신들이 고용한 걸
마적대가 알면 어찌될 것 같소?

 

내 친구의 무공이 저들보다
낫다고 장담은 못하겠소

 

하지만 이 일에 20여명의
목숨이 걸려 있소

 

이 점만으로도 신발 신은
검객을 믿어야 하오

 

실수가 없도록 않도록
홍칠을 어딘가로 데려 갔다

 

왜 시체를 보여주시오?

 

어떻게 죽었는지를 말하고 있어

 

이틀 전에 그는 여기에서
마적대를 몰살하려 했어

 

하지만 자신이 희생되었지

 

여기에 칼을 맞고 죽었어

 

다른 상처와 확연히 다르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친 거야

 

이런 상처는 이거 하나뿐이야

 

그들 중에 한 명이 단칼에
그의 목숨을 뺏은 거야

 

마적대와 싸울 때
한 사람만 주의해

 

검을 왼손에 든 사람

 

내가 죽더라도 찾아오지 마시오
말하는 시체가 되긴 싫소

 

열 닷새
맑고 바람이 불었다

 

인간사의 선악을 정하는 날

 

핏빛이 있으니 먼길을 피하고
재앙을 경계하라

 

돈을 세지도 않고 받는 사람은
그 돈을 금방 다 써 버린다

 

하지만 홍칠은 자세히 세었다

 

이런 사람은 내 곁을 곧
떠난다는 걸 나는 안다

 

초열흘, 입추, 맑음

 

찬 바람이 부니 친구를
만나기에 좋은 날이다

 

홍칠?

 

떠났소

 

다시는 안 올 테니
다른 곳에 가서 알아보시오

 

내 말뜻을 알겠소?

 

여자를 속이는 건 쉽지 않다

 

단순한 여자일수록 그렇다

 

낙타를 버릴 홍칠이 아니기에
그녀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고향에서 기다리라니까

 

왜 자꾸 따라다녀?

 

집으로 돌아 가!

 

싫어요!

 

당장 돌아가라니까!

 

어서!

 

당장 가!

 

벌써 며칠째 기다리고 있군

 

쫓아도 안 가는데 어쩌겠소?

 

마누라와 다닐 순 없잖소?

 

누가 안된다고 했나?

 

다 하기 나름이야

 

나도 옛날엔 자네 같았지

 

천하를 얻기 위해선 여자를
버려야 하는 줄 알았어

 

그런데 집에 돌아가 보니
그녀는 내 형수가 돼 있더군

 

매일 찾아와도 소용없소

 

돈이 없으면 못 도와주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시오

 

부탁이에요

 

부탁해도 소용 없소
난 중개인일 뿐이니

 

부탁하려거든 직접 하시오

 

시간 낭비라고 할지라도
누구에게나 집착하는 게 있다

 

저 여인처럼

 

열 닷새
비가왔다

 

흙이 젖으니 외출은 금물이고
북쪽에 살기가 있다

 

내가 태위부의 검객이라면
죽어도 눈을 못 감았을 것이다

 

그들의 목숨 값이
겨우 달걀 하나였기 때문이다

 

달걀이 손가락과 바꿀
만큼 가치가 있나?

 

없소

 

하지만 기분은 좋소

 

이게 내 본래의 모습이오

 

안 다쳐야 했겠지만
검이 옛날처럼 빠르지 못했소

 

옛날에 검이 빨랐던 건
옳다고 믿고 했기 때문이오

 

대가를 바란 적이 없었소

 

난 평생 안 변할 줄 알았는데

 

그 여자에게 부탁 받는 순간
난 내가 변했다는 것을 느꼈소

 

하지만 당신이 허락하지
않을테니 난 거절했소

 

그런 내 모습이 싫었소

 

당신과 지내면서 내 자신을
잃고 당신을 닮아 가다니

 

난 당신처럼 되긴 싫소

 

당신은 달걀 하나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진 않을테니까

 

그것이 당신과 나의 차이요

 

홍칠을 구해 줄 수 없나요?

 

많이 아프다면서요?

 

의원을 불러 주세요

 

의원이요?
돈 들어요

 

낭자는 달걀로 잘 부탁하니
그걸로 의원을 불러보지 그래요

 

그는 내 말을 어겼기 때문에
도와주지 않을 거요

 

낭자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낭자가 구해 주시오

 

낭자가 날 찾아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소

 

당신은 절대로 몸을
팔 수 없다고 했죠?

 

이번엔 어떻게 하는지 보겠소

 

무슨 생각을 하시오?

 

아니에요

 

날 위해 아무 일도 하지 마시오

 

이번에 죽는다고 해도 난 여한이 없소

 

달걀 때문에 낭자를 도와줬고
달걀은 이미 내가 먹었소

 

그러니 낭자는 빚이 없소

 

바보짓 마시오
명심하시오

 

그 후로 그 여자를 보지 못했다

 

다시는 검을 못 잡을 것 같소

 

검이 없어도 맨손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어

 

손가락 잃은 검객이란
명성을 얻을지도 모르고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겨우 이런 일로 돌아갈 거면
애초에 뭐 하려고 나왔어?

 

이 사막 너머엔 뭐가 있죠?

 

또 다른 사막이 있지

 

누구나 산을 보면 그 너머엔
뭐가 있나 궁금해한다

 

막상 산 너머에 가보면
별것 없다는 걸 알게 되고

 

차라리 여기가 낫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는 안 믿을 것이다

 

그는 직접 보기 전에는
포기하지 않는 성격이다

 

어디로 갈 생각이야?

 

안 가 봤던 곳으로
가서 명성을 쌓겠소

 

손가락이 9개뿐인 영웅이
있다고 하면 나인줄 아시오

 

부인은?

 

데려갈 생각이오
다 하기 나름 아니겠소?

 

마누라를 데리고 다니면
안된다는 법은 없잖소?

 

가자!

 

홍칠이 단순하기 때문에
그녀가 좋아하는 것 같다

 

둘이 떠나는 것을
보니 질투가 났다

 

똑같은 기회가 있었을 때
나는 왜 포기했는지 모르겠다

 

떠나던 날에 남풍이 불자
그는 일부러 바람을 거슬러 갔다

 

그날은 열 닷새였고
북쪽이 길한 방향이었다

 

3년 후, 홍칠은 마적대의 두목이
되어 북마적이라 불리었다

 

이후 그는 설산에서 서독(西毒)과
대결해 서로의 목숨을 앗아갔다

 

홍칠이 떠난 후 계속 비가 왔고
그때마다 누군가가 생각났다

 

그녀는 옛날에 날 좋아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지만
그녀 곁을 떠날 때면 비가 왔다

 

슬퍼서 비가 온다고 말했던
그녀는 나중에 형과 혼인했다

 

그녀가 혼인하던 날
나는 백타산을 떠났다

 

자꾸 물어봐도 똑같아요
저는 못 가요

 

오늘 밤이 마지막이야
같이 가자

 

못 가요
난 당신 형수예요

 

이젠 당신 형의 아내예요

 

입춘

 

왜 자꾸 손수건을 보시오?

 

그건 남편 손수건인데
왜 당신이 가지고 있죠?

 

그는 죽었나요?

 

복사꽃을 본지 오래돼서
다음해에 그의 고향에 갔다.

 

하지만 그곳엔
복사꽃이 없었다

 

그건 이제 소용없어요

 

복사꽃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걸
떠날 때야 깨달았다

 

복사꽃은 그 여자의 이름이었다

 

그녀의 눈물을 보고나서야
황약사가 날 찾아왔던 이유를 알았다

 

아이가 이상해요

 

말도 안하고 웃지도 않아요

 

말을 안 걸면
빤히 쳐다봐요

 

원하는 게 있어도
말을 안 해요

 

손에 쥐어 줘야 가져요

 

처음엔 내버려뒀지만

 

이젠 신경조차도 안 써요

 

난 그녀를 좋아하지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포기가 나을 수도 있으니까

 

난 그녀가 아이를 보면서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걸 안다

 

구양봉이 질투난다

 

나는 사랑 받는 느낌을 알기
위해 많은 사람을 해쳤다

 

그와 혼인했을 줄 알았는데
왜 하지 않았소?

 

날 사랑한다고 말을 안했어요

 

굳이 말이 필요 없을 때도 있소

 

난 그 말을 듣고 싶었는데
그는 자존심 때문에 말을 안했어요

 

꼭 그와 혼인할 줄 알았는데

 

난 그의 형과 혼인했어요

 

혼인 전날에 같이
떠나자는 걸 거절했죠

 

왜, 잃고 나서야 얻으려고 하죠?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사랑에 승부가 있다고 해도
그녀가 이겼다고는 생각 안한다

 

하지만 난 처음부터 졌다

 

난 이 여자 때문에
복사꽃을 좋아한다

 

매년 복사꽃이 필 때면
그녀를 만날 수 있다

 

그녀가 구양봉의 소식을 궁금해 해서
난 구양봉을 만나러 간다

 

구양봉이 있는 한
난 매년 그녀를 만날 수 있다

 

내게 소중한 게 뭔지 알아요?

 

당신 아들 아니오?

 

옛날엔 그렇게 생각했죠

 

하지만 아이가 크면
언젠간 떠나 버리겠죠?

 

그래서 모든게 허망해요

 

전엔 사랑이란 말을 중시해서
말로 해야만 영원한 줄 알았죠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하든 안하든 차이가 없어요

 

사랑 역시 변하니까요

 

난 이겼다고 생각해 왔어요

 

그러던 어느 날 거울을 보고
졌다는 걸 깨달았어요

 

내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었죠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그와 친한 사이면서
왜 내 소식을 전하지 않았죠?

 

당신과의 약속 때문에
말할 수가 없었소

 

고지식하시군요

 

얼마 후에 그녀는 죽었다

 

죽기 전에 술을 주면서
그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그녀는 구양봉이
자신을 잊어 주길 바랬다

 

인간이 번뇌가 많은 까닭은
기억력 때문이라 했다

 

그 해부터 난 많은 일을 잊고
복사꽃을 좋아한 것만 기억했다

 

6년 후, 황약사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은둔해서 살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동사(東邪)라 칭했다

 

경칩

 

입춘이 지나고 경칩이 왔다

 

이맘때면 친구가 찾아 왔지만
금년엔 오지 않았다

 

그 후 백타산에서 편지가 왔고

 

2년전 가을 형수가
중병으로 죽은걸 알았다

 

황약사가 안 올 줄은 알지만
계속 기다릴 생각이다

 

난 이틀 동안 문 앞에 앉아서
하늘이 변하는 걸 보고서야

 

이곳에 오랫동안 있었으면서도
사막도 제대로 못 본 걸 알았다

 

옛날에는 산을 보면
산너머에 뭐가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난 기구한 운명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형을 의지해서 자라며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했다

 

거절당하기 싫으면
먼저 거절하는 게 최선이다

 

그래서 돌아가지 않았다

 

그 곳이 좋긴 하지만
이젠 돌아갈 수 없다

 

난 부부 궁합이 나쁜 운세라
혼인은 유명무실하다고 했다

 

그날 난 술이 마시고 싶어
취생몽사를 마셨다

 

그리고 계속 내 일을 했다

 

나이는 40대 초반인 것 같군요

 

살다 보면 들추기 싫은 일이나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죠?

 

당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죽이고 싶었던 적도 있을 테고

 

하지만 용기가 없었군?

 

살인은 아주 쉬운 일이오

 

무공은 뛰어나지만
형편이 어려운 친구가 있는데

 

돈만 조금 주면
그 사람을 죽여줄 거요

 

잘 생각해 보시오

 

너무 오래 고민하지 말고

 

난 할 일이 없을 땐
백타산쪽을 바라보았다

 

옛날에 그곳엔 날
기다리는 여인이 있었다

 

취생몽사는 그녀가
내게 던진 농담이었다

 

'잊으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녀는 전에 늘 말했었다

 

'가질 수 없더라도 잊지는 말자'고

 

난 매일 같은 꿈을 꾸었고
얼마 안 가서 그 곳을 떠났다

 

그 날은 불이 쇠를 이기니
서쪽이 길하다고 했다

 

구양봉은 백타산으로 돌아가
서독(西毒)이라 불렸다

 

각본/감독
왕가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