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 DC
한국전쟁 기념탑'

 

먼 나라를 지키다가 죽어 간
이 땅의 아들 딸들을 기리며

세계사에서 과연 한국전쟁은 무엇일까?

전 세계를 긴장 시켰던
제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 사이에 일어난
소규모 전쟁에 불과 했을까?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다르다

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었으며

혹독한 추위와

지칠 줄 모르는 공산군에
맞서야 했던 처절한 전쟁이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당시 참전 군인들의
눈으로 한국전쟁을 바라보려고 한다

여러분은 공포와 혼란, 피가 뒤범벅된
진짜 전쟁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참고로 이 프로그램의 많은 화면들이
일반에게 공개되기는 처음이다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
그럼 냉전의 첫 번째
화약고 한반도로 가 보자

 

'제1막 전쟁의 먹구름'

 

1950년 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두달 전인 이때
이미 전쟁의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한국의 한 사진촬영 기사가
촬영한 이 처형 장면은

전쟁으로 치닫고 있던 남한과
북한의 대치상황을 잘 보여준다

처형당하는 사람들은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들이다

 

불과 몇년 전까지 남한과 북한은
한 나라였지만 이제는 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싹트기
시작한 남북간의 긴장관계는

당시 거의 폭발 직전이었다

 

한국은 오래 전 부터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알려졌지만

실제 자연환경은 험하고
과거역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한국이 위치한 한반도는
북태평양쪽의 조그만 반도로

미국에서 일만여Km 떨어져 있는 나라다

 

특이한 점은 주변에 러시아, 중국, 일본
세 강대국이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한반도는 주변 강국들의

힘겨루기 장소가 되어
잠시도 편할 틈이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서 막 벗어난 상태였다

 

1945년7월

포츠담 회담에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의 일본군을 공략하기 위해

남쪽과 북쪽에서 각각
진격해 들어 가기로 했다

 

'여기는 북위 38선'
그렇게 해서 미군과 소련군은

'여기는 북위 38선'
한반도 중간인 38선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기로 한다

소련은 38선의 위쪽인 북쪽을
미국은 남쪽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을 모델로 한
새 정부를 각각 세웠다

 

1947년 미군과 소련군이 철수할때
남한과 북한에는 다른 정부가 들어섰다

 

북한에는 "조선인민공화국"
이라는 공산 정권이

남한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

 

남한과 북한은 서로
상대를 없애려고 했다

대립은 격화되었고

38선 부근에서는 이미
수차례 교전이 벌어졌다

 

이 작은 반도는 두 개의
정부가 양립 하기에는 비좁았다

이제 누가 전쟁을 먼저
시작 하느냐가 문제였다

 

'제2막 전쟁의 발발'

 

'북한, 남한을 침략하다'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략한다

이전의 소규모 교전과는
차원이 다른 전면전이었다

13,5000 여명의 북한 인민군은
별 다른 저항을 받지않고

거침없이 남쪽으로
38선을 넘어 쳐들어 왔다

수적으로나 장비면에서 열세였던

남한의 군대는 저항다운
저항 한번 못 한채

속수무책으로 패퇴했다

당시 남한이 보유한 무기의 열세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한국 전쟁전에 이승만 대통령은

공공연하게 북침을 하겠다고 주장했다

 

이에 미국은 아예 남한
군대의 전력 증강을 막았다

 

그런데 미국의 이런 전략이
남한을 위험에 빠트린 꼴이 되었다

남한은 보잘것 없는 무기로

북한의 탱크와 엄청난
화력에 맞서야 했다

 

결국 전쟁발발 이틀만에 38선에서
50여 킬로미터 떨어진 서울이

북한에게 넘어가고 만다

 

겁에 질린 서울 사람들은
피난을 떠나기 시작했다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이들 피난민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그러나 북한 인민군의 남하를 두려워한
국군이 한강다리를 폭파 시킨다

 

한강다리가 폭파되는
순간 다리를 건너고 있던

수 백 명의 피난민은
거의 대부분 목숨을 잃었고

수천 명은 피난길이
막히는 신세가 되었다

 

서울이 함락 됐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고

남한은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북한은 자신들이 남침할 경우 미국이
간섭하지 않을것 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벌어지자

미국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남한이 공산정권에 넘어가면
다음은 일본 차례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론이 들끓자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우선 해, 공군력을 이용해
북한군을 격퇴하라고 명령한다

 

'트루먼 대통령의 연설'
1950년 7월 19일'

'한국은 천마일넘는
거리의 작은 나라이다'

'트루먼 대통령의 연설'
1950년 7월 19일'

그러나 그곳에 일어난 사건은
미국의 어느곳보다 중요하다

 

이와 같은 침략 행위는

 

모든 자유우방의 안전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이것은 자유 국가 건설에
도전 하는 행위라 하겠다

 

자유와 평화롭게
사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이러한 도발에는 즉각 대응해야 합니다
우린 단호하게 응징해야 합니다

 

미 공군은 출격한 첫날

북한 전투기 6대를
격추시키는 성과를 올린다

 

한편 미 해군은 북한의
해안선에 폭격을 가했다

 

그러나 정작 지상의 북한군을
저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해결책으로 핵 폭탄을
투하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그러나 이미 핵폭탄을
보유한 소련과 충돌할 경우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게 뻔 했다

결국 지상군을 투입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트루먼 대통령은 UN에 '국제경찰'로서
북한을 저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트루먼 대통령의 연설
1950년 7월19일'

"UN이 무법적인 침략행위를
저지키 위해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고

이 조치에 전 세계의
자유 국가들이 즉시 호응할 때

국가간의 체계를 세우려는 인류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유엔군의 핵심은 미군이 맡았다

그러나 1950년 미 군사력은
걱정스러울 만큼 약한 상태였다

예산은 1945년의 10분의1 정도였고

특히 극동 아시아에
배치된 미군은 극소수였다

 

당시 남아있던 미국의 군사력은

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거의 집중되어 있었다

 

극동군 총사령관이자
제2차 대전의 영웅이었던

맥아더 장군이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맥아더 장군은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인물 이었다

그는 유엔군 총사령관에 임명됨으로써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보여줘야 했다

 

제일 먼저 급파된 '스미스
중령의 특수 임무 부대'는

급박한 전쟁 상황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7월초 '스미스 부대'는 오산 부근에서
남쪽으로 진격하는 북한군을 발견했다

 

즉시 산 속에 숨었다가

북한군이 다가오자

가지고 있던 모든 화력을
동원해 저지 작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북한군의 탱크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겨우 4대 파괴했을 뿐

나머지 33대는 미군의
저지선을 뚫고 남하했다

 

말 하자면 미군은 적진 한
가운데에 남겨진 꼴이 되었고

죽을 힘을 다해 빠져 나와야 했다

 

"부대원들의 시체가
사방에 나뒹굴었고

부하 한명이 복부에 총을 맞았죠

그 친구가 고통스러워 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것 뿐이었어요"
** 스미스 부대, 데이 중위 **

 

이 오산전투를 통해 유엔군의 임무가

단순한 국제경찰이 아니라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점이 명확해 졌다

 

뒤이어 몇주 동안 미 제8군
소속의 지원부대가 도착 했지만

손바닥으로 강물을 막는 격이었다

북한군은 부산 근처까지 진격해 내려왔고

유엔군은 조금만 더 밀리면
바다로 뛰어 들어야 할 형편이었다

 

당시 유엔군의 전략은 북한군을
상대로 지연작전을 펴는것 이었다

남진속도를 둔화시키고 방어선을
구축하며 시간을 벌려고 했지만 힘 들었다

계속해서 북한군에게
밀려 후퇴를 거듭했다

 

7월20일 결국 금강 전선마저
무너지고 남한은 한쪽 구석에 몰리게 됐다

누가 봐도 유엔군의 참담한 패배였다

 

'제3막 부산을 지켜라'

 

'북한군 서해지역 완전장악'

 

1950년 8월 유엔군은 궁지에 몰렸다

한반도 최남단 부산에서 불과 100km
떨어진 지점까지 밀려난 것이다

이제 부산을 지켜주는
마지막 울타리는 낙동강으로

이 방어선마저 무너지면 끝장이었다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선은 불안정했다

미식축구장 백 개정도의 전선을 방어
하려면 3600명의 사단병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낙동강 전선은 150개의 미식
축구장을 몇개 대대가 지키는 격이었다

 

수적(數的) 열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바닥에 떨어진 사기였다

유엔군은 평화유지 임무를 수행하다가

갑자기 치열한 전투 현장에 투입되어

상당수가 '전장공포' 증세 마저 보였다

 

화가 난 미 제8군 사령관 워커중장은

이런 사실을 맥아더
총사령관에게 직접 보고했다

 

워커 중장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패튼의 휘하로 활약한

철두철미한 군인이었다

그는 7월29일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여기서 더 후퇴하면
장례식을 치러주겠다"고 말했다

 

사방에 적들이 깔린 상태에서

워커 중장의 부대가 한가닥
희망을 거는 것은 우세한 화력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의 서남부에서 미 제8군
제25사단이 반격을 시도하는 동안

콜세어 전폭기가 북한군에 폭격을
가하며 적의 보급로를 파괴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미군 지원포병
대대가 북한 인민군의 공격을 받는다

피아가 뒤섞인 상황에서

미 포병대대는 무참하게 당하고 만다

 

이 전투로 미 포병대대는
모든 장비를 잃었고

수백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서남부 반격작전은 실패했다

 

한편 이보다 조금 상류 쪽에서는

북한군이 낙동강 방어선의
빈틈을 발견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밤사이 낙동강을 건넌 북한군은
이름없는 능선을 점령하는데

이 능선을 통해 곧바로
부산으로 진격할 수도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미군은 즉각 공세에 나섰다

 

2주 동안 치열한 전투가 전개됐다

얼마나 치열했던지 어떤 고지는

미군과 북한군이 서로 십여
차례씩 번갈아 가며 차지할 정도였다

 

그 사이 북한군에 대한 공습은 계속됐다

 

"총격전이 끝나면

아군 전폭기의 공습이 시작됐습니다

북한군은 비명을 질렀고

그 소리는 우리 귀에도 들릴 정도였죠"
** B중대, 플로이드 애킨스 **

 

마침내 낙동강을 건너왔던
북한군을 격퇴시킬 수 있었다

개전 이후 처음으로
북한군의 공세를 막은 것이다

 

8월 중순 유엔군은 효과적 지상전 수행이
가능한 만큼 병력을 보충할수 있게 됐다

부산항을 통해 프랑스

터키, 태국, 에티오피아의
지원군이 도착했고

특히 영국을 비롯해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같은 영연방
국가에서 많은 지원군이 도착했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는 너무 어렸고

이제 활약할 나이가 된 젊은이들이었다

그런데 전쟁의 참상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었다

 

특히 미군들은 자신감이
지나쳐 보일 정도였다

 

"부산은 마치 대학생들의
동창회 날 같았습니다

 

들뜬 분위기였죠

주눅 든 모습은 없고
모두들 당당 했어요

마치 '걱정하지마! 우린 미해병대야!'
라는 것 같았죠"
** 탐 깁슨 소위 **

 

새로 도착한 미군들
중에는 흑인 신병들도 많았다

이 흑인신병들은 미군 역사상 처음으로

백인들과 한 부대에서
전투에 참가하게 됐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미군은 흑인과
백인이 다른 부대에 소속돼 있었지만

급하게 병력을 배치하면서

흑백 혼합 부대가 탄생하게 되었다

전쟁터에서 피부색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들은 전투 중에도
휴식 중에도 잘 뭉쳤다

 

북한군은 9월1일 다시
낙동강 방어선 전역에 걸쳐

대 공세를 시작한다

 

그러나 북한군은 지칠 대로
지친데다 보급로가 차단되어

공세를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유엔군이 반격을 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그 반격의 장소는
맥아더 총사령관이 알고 있었다

 

'제4막 인천 상륙작전'

 

'UN군 인천에서 승리'

지난 몇주간 맥아더 장군은 대반격의
지점으로 인천항을 점찍고 있었다

인천항은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로

교통과 보급의 주요거점이었다

 

그러나 인천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적진 한 가운데 위치해 있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1km나 됐다

게다가 항공 정찰 결과

북한군이 인천항을
철통같이 경계하고 있었다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해군과 해병대 장군들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 반대했다

그러나 맥아더의 의지는 단호했다

맥아더는 9월 8일 전보를 보냈다

"이 작전의 타당성에 대해
나는 추호의 의심도 없으며

성공할 가능성도 높다고 본다

또 한 발 더 나아가 이것이야 말로
적으로 부터 주도권을 빼앗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며 결정타를
입힐 수 있는 기회이다"

 

인천항 점령은 북한군에게
정신적인 타격이 될 것이다

 

반면 유엔군에게는 사기를 높이고 전쟁
주도권을 잡는 계기가 될것이 분명했다

 

또 인접한 김포 비행장과
40킬로미터 거리의 서울을

공략하기도 적당 했다

 

그러나 좁은 해안에 상륙해
곧바로 도시를 공략해야 하는 만큼

쉽지 않은 작전이었다

작전이 성공하려면 보통
군대로는 어림 없었다

 

맥아더 총사령관은 인천 상륙작전을
위해 '제10군단'을 편성한다

육군과 해병대, 해군으로 구성된

이 군단은 부산을 떠나 인천으로 향했다

한 참전군인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부산항을 떠나자 마자

인천항의 조수간만에
대한 브리핑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조수간만의 차가 큰
곳에서 작전을 수행하긴 처음이었죠

또 그런 대규모
상륙작전도 처음이었고요

9월15일 새벽이 밝아 오는데

만만치 않을거란 느낌이 들었습니다"

 

** 미 해군소속 조지 길맬 소위 **

 

인천 상륙작전은 전략을
짜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썰물일때 수심이 너무 얕아서 대형
군함의 기동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륙작전을 밀물 시간에
맞춰서 두 단계로 나눠야 했다

아침 밀물 시간에

인천항 입구에 위치한
월미도를 확보한 다음

저녁 밀물 시간에
인천항을 공략하기로 했다

 

작전 개시 닷새 전

월미도에 폭격을 가해 적을
무력화시키기 시작 했다

 

이틀 전에는 상륙정도 합류했다

 

드디어 9월15일 새벽

미 제10군단은 월미도 공략에 들어갔다

 

월미도의 북한군은 방심하고 있다가

사상자를 320명이나
내고 섬에서 후퇴했다

미군은 전사자는 한 명도 없이
부상자만 20명이었다

 

월미도 점령 후 다음
밀물까지 11시간 동안

제10군단의 보병들은 휴식을 취했고

콜세어 전폭기들은 인천
시가지에 융단 폭격을 해댔다

 

다음은 당시 월미도에서 공습을 지켜본

잭 시걸 기자의 생생한 음성이다

 

'잭 시걸 기자의 라디오 방송'
"콜세어기가 날아가고 있습니다

'잭 시걸 기자의 라디오 방송'
정말이지 쏜살같이 날아 다니네요

폭발음 들리십니까?
두번 울리죠?

세상에!

어느새 저쪽산까지 가서 한방
먹이고 다시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어둠이 깔리자 본격적인
인천 상륙작전이 시작됐다

상륙 목표지점은 인천
시가지와 가까운 '레드비치'와

남쪽의 '블루비치'였다

 

구축함의 함포와 항공기
로켓포 포탄을 마구 퍼부어댔다

 

상륙정들은 속속 해변으로 향했다

 

탱크와 각종 중장비들도 상륙했다

 

보병들은 해변에서
인천항 탈환을 준비했다

 

작전개시 1시간 30분만에
'레드비치'를 완전장악 하고

혹시 모를 저격수를 경계하며

인천 시가지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레드비치'와'블루비치'로
상륙한 보병들이 서로 만나면서

작전은 끝났다

 

인천 상륙작전은 신속 정확하게 이루어져

유엔군 전사자가 단 20명에 불과했다

'인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맥아더 총사령관의 도박은 성공했고

그 성공에 가장 기뻐한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제5막 가자 서울로!'

 

'상륙성공, 서울로 진격'

유엔군의 인천 상륙으로
남한에 있던 북한군은

큰 타격을 입게 됐다

당시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총력전을 펼치고 있었고

유엔군의 인천상륙은
전혀 예상치 못 했다

 

게다가 낙동강의 북한군은
인천 상륙작전이 끝난 뒤에도

일주일 동안 이 사실을 통보받지
못한 상태에서 전투를 하고 있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북한군은

겁을 먹고 즉시 퇴각하기 시작했다

 

한편 인천을 점령한 미 제10군단은
서울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발걸음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제1목표 지점은 김포 비행장이었다

김포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비행장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9월18일 김포는 미 해병대의 손에 들어왔다

 

그 후 해병대의 콜세어기가 김포
활주로에서 이륙해 서울을 폭격했다

서울 수복의 신호탄이
울려 퍼진 것이다

 

서울 수복 작전은
세 갈래로 나뉘었다

우선 제5해병사단은
김포를 통해 바로 한강을 건너

서울의 서쪽 시가지를
공략하기로 했다

한편 제1해병사단은 서울
남부의 교외지역을 점령하고

서쪽 시가지에서
제5 해병사단을 만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낙동강 방어선의
미육군 제7사단이 올라 오면서

동쪽에서 발생할지 모르는
북한군의 증원을 차단한다

 

미 해병대는 작전대로
한강을 건넜지만

서울 서쪽의 고지에서
강한 저항에 부딪힌다

 

북한 인민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치열한 접전으로
미 해병대는 큰 타격을 입었다

 

포대와 전투기가 사흘
동안 지원사격을 했다

 

또 화염 방사기까지 동원됐다

 

그러나 북한군의 저항은 거셌다

미 해병대 소속의 중대가 '66고지'에서
치른 전투는 처절한 정도였다

 

이 해병중대는 참호 속의 북한군을 상대해

총검을 들고 백병전까지 치러야 했다

포연이 걷혔을 때

중대병력 206명 가운데 33명만이
살아남아 승리의 기쁨을 맛 봤다

 

한편 서울 남동쪽에서는

미 육군 제7사단이 북한군을
쫓으며 올라오고 있었다

9월 22일 북한의
전차대대를 격퇴시켰고

서울에서 남동쪽으로 30여km
떨어진 수원 비행장을 확보했다

김포와 수원 비행장에서
이륙한 전투기들은

지상군의 서울 진격에 힘을 실어줬다

 

9월24일 유엔군은 서울
주변의 고지를 점령했다

 

"그 때 광경을 잊을수 없어요
아래 펼쳐진 도시 곳곳에서

연기가 치솟고 건물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죠

콜세어 기가 날아와 폭격을 하면

폭발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치솟아 올랐습니다

 

고지에서 본 그 광경은
마치 영화의 한장면 같았죠

하지만 그건 현실이었어요"
** 비숍 이등병 **

 

다음 날인 9월25일
북한군은 서울에서 퇴각하고

3개월 만에 서울은 수복됐다

 

남한 경제 문화의 중심인 서울이
다시 원래 주인에게 돌아온 것이다

 

1950년 9월29일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총사령관이
참석한 서울 수복기념식이 거행됐다

성대한 기념식이었다

이 기념식은 전세계에 유엔군의 국제
경찰로서의 위상을 알리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념식 중간에도
멀리 저격병들의 총성이 들려

위험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경고했다

 

'제6막 38선을 넘어'

 

'미 제8군 38선으로 진격'

1950년 9월 이제 전세는
유엔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마치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연합군의 모습을 보는것 같았다

 

우선 목표는 38선까지 진격해

예전의 군사분계선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10월 1일 한국군 사단이
제일 먼저 38선에 도착했고

그 여세를 몰아 계속 북진했다

 

1주일 뒤에는 유엔군도 38선에 도착해

북진 명령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때부터 미국
정계의 고민은 시작 되었다

유엔군을 북으로
진격시키는 것이 옳을까?

그렇게 되면 국제경찰의
임무 범위를 넘는 것이 아닐까?

결정은 쉽지 않았다

 

한편 이때 미군사령부는

중국이 북한을 돕기 위해 병력을
만주로 이동 시킨다는 정보를 받는다

중국은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간섭을 못마땅해 했고

그 간섭이 만주지역으로
이어질까 염려하고 있었다

첩보에 따르면 45만명의
중국 공산군이 압록강 너머에서

언제라도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대기 중이라했다

그러나 완전한 승리를
바라는 미군과 미국 시민들은

이런 위험신호를 무시해 버렸다

미국민은 절반의 승리에 만족하지 않았다

 

사실 한국전쟁은 미국과는
거의 무관한 전쟁이었다

1950년대 미국은 평화로웠고

집집마다 자동차가 최소 한대씩
있을만큼 풍요로워서 따분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때 마침
한반도의 전승 소식은

미국민들에게 자극제가 되었다

특히나 공산주의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던 미국민들은

미군의 북진을 환호했다

 

전쟁터가 북한으로 옮겨 지면서
남한 사람들은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결혼식과 장례식도 치르고 시장도 열렸다

 

또 지난 넉달동안 전쟁이
남긴 상처를 복구 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늘 다짐했던

한반도의 통일을 기대했다

 

그 기대는 오랜 세월

외세의 간섭과 침입에
시달렸기 때문에 더욱 간절했다

 

한국은 과거 때로는 중국
때로는 일본, 때로는 러시아의

간섭을 받는 수모를 겪었다

심지어 한때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기도 했다

그 가운데서도 중국은

천년이 넘게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래서인지 두 나라는

불교와 벼농사를 짓는 등
문화적으로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러나 1950년 이 두 나라의
정치체계는 완전히 달랐고

한국전쟁은 이를 확인하는 자리가 됐다

 

남한의 국군과 중국의
공산군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충돌을 앞두고 있었다

북한의 수도 평양으로
가는 길은 거칠 것이 없었고

유엔군은 각 부대별로 누가
먼저 평양에 도착하는지 경쟁했다

북한은 평양 근처에
저지선을 구축했지만

유엔군의 파죽지세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미 제8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한지
열흘 만에, 평양 부근에 도착했다

 

뻥 뚫린 길을 바라보며
미군들은 몹시 들떴다

 

"맥아더 총사령관이 추수 감사절을
고향에서 보내게 될 거라고 했고

우린 그 말을 믿었어요

사기가 하늘을 찔렀죠"
** 카디널 이등병 **

 

미 제8군은 북한을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

평양에서 다시 북서쪽으로 전진했다

 

북한의 마지막 주요 육상
거점이었던 청천강을 건널 때는

승리가 바로 눈 앞에서
손짓하고 있었다

 

그러나 건너편에서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100여구의 미군포로 시체였다

 

궁지에 몰린 북한이 최후의
발악으로 미군 포로들을 죽인 것이다

 

10월24일 유엔 결의안에 따라

맥아더 총사령관은
압록강까지 진격할 것을 명령한다

 

완전한 승리가 곧 손에 잡힐 듯 했다

 

그러나 압록강에서 이들을 맞이한
것은 완전한 승리가 아니었다

수십만명의 중공군이었다

 

'제7막 중공군의 기습공격'

 

'50만 중공군 개입 가능성'

1950년 10월25일 유엔군이
설마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압록강으로 진격하던 유엔군 앞에
갑자기 셀 수없이 많은 중공군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중공군은 유엔군의 항공정찰을 피해

몰래 북한 산악지역에 잠입 숨어있었다

이들의 기습공격에
유엔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당시 유엔군의
방어책은 항공지원 뿐이었다

사방에서 몰려오는 중공군에
맞서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대부분 전사하고 만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몇시간
전 까지만 해도 하늘을 찌르던

유엔군의 사기는
급속도로 땅에 떨어졌다

 

"생존자들은 중국말을 들었다

그리고 우린 어떻게
된 일인지 몰랐어요

할로윈 때 였는데 날은춥고

우리는 꽁꽁 얼어 있었죠

앞이 캄캄했어요"
** 제19보병대 하퍼 **

 

승전 퍼레이드를
준비하고 있던 극동사령부는

중국이 전면적으로 전쟁에
개입 한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미 태평양함대 사령부'
중국이 전면적으로 전쟁에
개입 한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극동지역 미공군 사령부'
그래서 워싱턴에 압록강의 중국 수비대와
미공군이 작은 마찰일 뿐이라고 보고했다

'제 5 전투기 사령부'
제 5 전투기 사령부도 작은
마찰이 있었을 뿐이라고 보고했다

 

'제 5 전투기 사령부'

 

그러나 워커 중장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휘하 부대원들을 전부
청천강까지 후퇴 시킨 다음

상황을 다시 알아 보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일순간 중공군이
자취를 감춰 버렸다

산 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린 것이다

 

11월 내내 중공군의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유엔군의 정찰기가 떴다

 

파악된 중공군의 수는 5만~7만명으로
충분히 대적할 수 있는 규모였다

 

그러나 실은 25만명이 더 있었다

 

중공군은 위장술의 천재 들이었다

이들은 나뭇가지로 위장한 채

낮에는 꼼짝않고 숨어 있었다

아무리 정찰기가 자세히 관찰해도
중공군을 찾아 내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11월도 거의 지나가고

유엔군은 크리스마스에는 고향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중공군이 잠잠하자 11월24일
맥아더 총사령관은 재전진을 명령한다

 

서부전선은 미 제8군이 맡았다

이번에는 단 일개대대도 낙오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압록강으로 전진했다

 

동부전선은 제10군단이 맡고
장진호 방향으로 전진했다

 

첫 날의 성과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조금이지만 모든 부대가 고루 전진했다

그러나 다음 날 전세는 뒤집어졌다

 

미 제8군과 제10군단
사이에는 허술한 빈틈이 있었는데

중공군이 이 지점을 집중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유엔군의 전선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재전진 사흘만에 유엔군은
전면 후퇴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두동강이 난것은
유엔군의 전선만이 아니었다

 

혹독한 겨울과 무자비한 중공군 앞에서

유엔군의 사기도 두 동강이 났다

 

'제8막 얼어붙은 장진호'

'중공군, 유엔군을 위험에 빠뜨리다'

1950년 11월 말

유엔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국제 경찰로서

승승장구하며 북진하던 중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부딫혀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서부전선의 미8군이
격전을 치르는 동안

동부전선의 제10군단은
장진호로 북상 중이었다

 

장진은 북한의
고산지대에 위치 해 있어

11월말인데도 추위가
살을 에이는듯 했다

수은주가 영하 40도까지 내려갔고

시속 60킬로미터의 강풍은
체감온도를 더욱 떨어 뜨렸다

 

모든 것이 꽁꽁 얼어 붙었다

엔진오일, 총포, 약품은 물론

군인들의 손과 발도 얼었다

땅은 어찌나 단단하게 얼어붙었는지

참호를 팔 수 조차 없었다

 

몸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눈 싸움 뿐이었다

 

추수 감사절을 보내기에 결코
이상적인 곳은 아니었지만

장병들은 현실을 받아들였다

"추수감사절 날 칠면조와
기타 음식이 나왔어요

그런데 얼어 버릴까봐
빨리 먹어야 했죠

소스와 감자가 맨 처음 얼었어요
후다닥 재빨리 먹어 치웠죠

총알은 계속 머리위를 날아다녔구요"

** 의무병 데이비스 **

 

시베리아의 추위와 적의 공격으로

미 제1 해병사단의 고생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

군인들은 몇주째
속옷도 갈아입지 못했고

먹는것도 부실했으며

영하의 추위로 잠도 거의 자지 못했다

그러나 해병대 정신으로

전열을 정비하고

11월27일 대공세에 나선다

 

하지만 이미 서부전선의 유엔군이

밀리고 있는 가운데
이들의 운명은 밝지 못했다

 

미 제1해병사단의
목표는 장진 서쪽으로 해서

북한정부가 도피중인
강계까지 가는 것이었다

당시 유엔군은
네 지점에 주둔 중이었다

우선 최전선은 장진호 북쪽의
유담리에 해병대 2개 연대가

두 번째 지점은 장진호 서쪽으로
3천명의 미 해병대가 주둔했다

세 번째 지점인 고토리에는 미육군
보병과 영국 해병대 4200명이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장진호 동쪽에
2500명의 보병이 있었다

장진호 부근의 유엔군에
대한 보급은 불안정 했다

이미 장진호 이남은
철수 중이었기 때문이다

장진호의 유엔군은 고립상태나 같았다

 

따라서 원활한 보급을
위한 묘책이 필요했고

그래서 주목하게 된것이

헬리콥터이다

헬리콥터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처음 전쟁에 투입된 이후

한국전쟁 때는 눈부신 활약을 한다

특히 한국처럼 혹한으로

육상 보급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서는 더했다

 

유담리의 미 해병대는

무평리로 북상을 시도하지만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다

 

이에 즉시 미 해병대는
공세에서 수세로 작전을 바꾸고

유담리로 후퇴해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한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다음 날인 11월 28일

중공군 6개 사단병력이 유담리를 공격한다

이후 사흘 동안 치열한 전투가 계속됐다

미해병대는 모든 화력을
동원해 중공군에 맞섰다

 

동해의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폭격기들이

적진에 포탄을 퍼부어 댔지만

그러나 역부족 이었다

 

중공군이 미 해병대를
겹겹이 포위한 상태였고

살기 위해서는

이 여러겹의 포위망을
하나씩 돌파해야 했다

당시 사단장 스미스
장군의 말은 지금도 유명하다

 

"제군들 우리는 후퇴하는게 아니다
새로운 방향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 스미스 사단장 **

 

한편 장진호 동편의 상황은

이보다 더욱 나빳다

미 제7보병사단이 해발
1000미터가 넘는 고지에서

포위돼 완전 고립된 상태였다

어느 쪽으로 나가려고 해도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했다

겁에 질린 미군들이

장진호의 차가운 물 속으로 뛰어 들거나

산속으로 들어간뒤
상당수가 행방불명 됐다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후방의 아군과 합류하기 위해

특수임무 부대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부상병을 실을 트럭만 챙기고

나머지 무기와 차량을 모두 파괴했다

12월1일 탈출이 시작됐다

 

사방에서 적의 탄환이 날아왔고

공군의 항공 근접지원으로
아군이 쏜 네이팜탄까지

위험할 정도로 가깝게 날아왔다

특수 임무부대가 앞선 가운데

포위망 돌파 작전에 들어갔다

 

포위망을 뚫고 나오던 제7보병 사단은

중공군이 들 끓는 마을에 도착한다

이제 다른 곳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

정면으로 돌파해야 했다

 

마을에 도착할 당시
2천5백명이었던 미보병 가운데

살아 남은 것은 천 명뿐 이었다

전우의 시체를 끌고
나오기도 부족한 숫자였다

장진호 전투는 2주간 계속됐고

유엔군은 간신히 안전한 곳으로 철수했다

 

장진호 전투는 현대 전쟁사에서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살인적인 추위

무자비하게 공격해오는 적군

물샐 틈 없던 포위망

이것을 뚫고 나온 생존자들은 미국에
돌아와서 "쵸신퓨"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쵸신퓨" 는 장진호의 일본식 발음으로
일본이 만든 지도를 유엔군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제9막 다시 남쪽으로'

 

'북한을 포기하고 후퇴!'

1950년 11월 맥아더 총사령관은

유엔군이 무너지는 것을
애통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그는 한국전쟁이 자신의

마지막 전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거의 손 안에 들어왔던
승리가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맥아더의 실망감은 무척 컸고

그 화살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돌아갔다

트루먼은 맥아더가 중국으로
진격하지 못하게 막았다

미국 전투기가 중국 전투기를 쫓아

중국 영토에 들어갈 수 없도록 했으며

전선에 투입하는 인원과 장비도 제한했다

 

11월28일 맥아더 총사령관은

국방부에 이에 대한 불만을 써서 보냈다

"우리는 새로운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선전포고 없이 끼어든
중국 공산군과의 전쟁 입니다

우리 사령부는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고 있지만

현재 상황은 우리의 능력과
통제권을 넘어 섰습니다"

** 맥아더 총사령관 **

 

그리 원만하지 못했던
트루먼과 맥아더의 관계는

유엔군이 열세에 몰리자
더욱 험악해 졌다

두달전에 물 밀듯이
북상했던 유엔군은

다시 쫓기듯이 남하해야 했다

 

유엔군의 후퇴 행렬은

북한 주민들의 합류로
거대하게 불어났다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탈북했다

 

이들이 탈북을 결심 한데는

비행기를 통해 뿌려진
전단지의 영향이 컸다

 

전단지는 공산주의의 폐해를 경고하고

자유세계의 안정된 모습을 선전했다

 

공산정권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북한 주민들에겐

솔깃한 얘기들 이었다

 

한편 중공군의 공세는 계속됐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유엔군의 사기는 밑바닥이었다

당시 유엔군은 워싱턴의
소극적인 태도에 불만이 높았다

전력으로 보면 분명히 적보다 우세한데

워싱턴의 제약으로

전력을 마음껏 쓸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전쟁에서
밀리고 있다고 여겼다

만약 워싱턴의 제약이 없다면

크리스마스를 한국이 아닌

고향에서 맞이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크리스마스 이틀 전에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차량 사고로 죽는다

낙동강 사수명령을 내리면서

"여기서 더 후퇴하면
장례식을 치러주겠다"던 그가

먼저 장례식을 치렀다

후임으로 리지웨이 장군이 부임했다

리지웨이는 맥아더
총사령관의 전승 의지와

워싱턴 정가의 신중론을
모두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수 사단장으로
전투 현장에서 싸운 한편

워싱턴의 국방부에서도 일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적이었다

한국에 도착한 리지웨이 장군은
유엔군의 침체된 분위기를 보고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한 눈에 봐도 아군은
자신감을 잃었어

눈빛에도 발걸음에도 자신감이 없고

말단 병사부터 장군까지
모두 침체돼 있네

활기 넘치는 군대의 모습인

공격성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가 없어"

** 리지웨이 장군 **

 

반면 중공군의 공세는 꺾일 줄 몰랐다

새해가 시작될 무렵엔 38선을 넘어
서울을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서울 북쪽에
약간의 방어 병력만 남기고

모두 한강 이남으로
후퇴할 것을 명령한다

방어 병력을 남긴 건 잠시
적의 공세를 늦추려는 의도였다

중공군 7개 군단이

 

곧바로 서울을 향해 진격해 왔고

유엔군은 또 다시 열세에 몰렸다

 

1월3일 서울은 다시
공산군의 손에 들어갔고

다음 날인 1월4일 유엔군은

서울에서 남쪽으로 50여km
떨어진 금강까지 후퇴했다

바로 1. 4 후퇴였다

 

넉달 동안 수많은 사상자만 내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다행히 획기적인 의료체계로

많은 사상자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제10막 야전병원의 활약'

 

많은 미국민들은 한국 전쟁하면

11년동안 CBS에서 인기리에 방영됐던

시트콤 시리즈인

 

맛쉬(M.A.S.H)를 떠올린다

맛쉬는 '이동외과병원'의 영어 약자로

쉽게 말해 기동성을 갖춘 야전병원이다

실제 한국전쟁 중의 야전병원들은

시트콤 '맛쉬'의 웃고 떠들석하고
신나는 야전병원과는 달랐다

실제 야전병원에선 바로
부근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의료진들은 살벌한 전쟁
현장의 진정한 영웅들 이었다

 

야전병원은 한국 전쟁때
일대 변신을 한다

이때 부터 전투현장
바로 옆에 설치됐고

언제라도 이동할 태세를 갖추게 됐다

역사상 전투현장과 가장 가까운

야전병원이 탄생한 것이다

 

부상 당한지 2시간 30분만에...

'라디오의 야전병원 인터뷰'
부상 당한지 2시간 30분만에...

'라디오의 야전병원 인터뷰'
병실에 누을 수 있다니 정말 놀랍네요

전투지와 거리가 얼마나 되죠?

15킬로미터쯤 됩니다

이 야전병원은 38선과 일치하죠

정말입니까?

수술실은 북한땅
수술 준비실은 남한땅이죠

수술실이 북한땅
준비실이 남한땅이라구요!

각 야전병원은 신속한 구조를 위해
헬리콥터가 배치되어 있었고

구급 의료진과 첨단 의료장비도 갖췄다

 

이 야전병원의 기본 기능은
일명 '미트볼 수술'이다

'미트볼 수술'이란 부상자가 후방의
제대로 된 병원으로 이송될 때까지

가능한 모든 외과조치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

 

또 야전병원은 시간에 대한 철칙이 있었다

부상당한 지 1시간 이내에

야전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신속한
수송 수단이 있어야 했다

 

한국은 지형이 험해서

차량과 기차보다는
헬리콥터 수송이 더 적당했다

 

헬리콥터와 야전병원의 활약으로

수많은 부상병들이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덕분에 한국전쟁의 부상병
소생률은 제2차대전 때 보다

25퍼센트나 높았다

또 이런 형태의 야전병원은
베트남전과 걸프전의 전례가 됐다

 

이쪽으로 와 보니까 부상병을

'라디오의 야전병원 인터뷰'
이쪽으로 와 보니까 부상병을

'라디오의 야전병원 인터뷰'
X레이실로 옮기고 있는것 같은데

잠깐 설명 좀 해 주시습니까?

다리의 X레이 사진을 찍으러 갑니다

- 성함이?
- 바비 그린입니다

- 의사세요?
- 아뇨 보조원이요

아 금방 다시 오나요?

네 몇 분이면 끝나요

여기 야전병원은 뭐든 참 빠르네요

30분 안에 수술여부를
결정해야 되니까요

 

어쩌다 전투가 없을 때의 야전병원은

시트콤 '매쉬'의 야전병원처럼
잠시동안 여유가 있었다

여자 의료진들도 남자들과
함께 부상병을 치료했다

 

1951년 후반 전쟁이
소강상태를 보이자

배구를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기다리는 시간을 때우기엔 그만이었다

 

그러나 일단 부상병들이 들어오면
의료진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80시간동안 쉬지 않고
수술을 하는 일도 있었다

이들이 사흘동안 하는 수술은

일반 병원에서 1년 하는
수술보다 더 많았다

의료행위의 기준도 조금 달랐다

"우리의 목표는 부상병을 어떻게든 살려서

후방으로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부상병의 손가락이나
팔 다리도 중요하지만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잘라야 할 땐 잘랐죠

우리는 다리 한 쪽을
구할려고 뒤에 기다리는

부상병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 후커 군의관 **

 

한국 전쟁 중
야전병원의 활약은 눈부셨다

유엔군이 전쟁을 수행하는
데에 든든한 힘이 되어 줬다

부상병들은 야전병원에서
임시 치료를 받고 나면

후방의 큰 병원으로 이송됐다

 

한편 조금 다친 장병들은
다시 전선으로 나갔다

중공군의 공세가 계속되고 있어

한 명의 장병이라도
아쉬운 상황이었다

 

'제11막 전쟁의 소강상태'

 

'공산군, 계속 남하'

1951년 1월,

중공군은 인해전술을 펼치며

유엔군을 계속 남쪽으로 밀어 붙였다

그러나 그 기세는 오래 가지 못 했다

전선이 넓어지고 보급이
원활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공군의 공세는 힘을 잃고 있었다

리지웨이 장군은 곧 반격할
날이 오고 있음을 확신했다

"사실 저는 중국의 지도자 모택동이

'리지웨이 장군의 인터뷰'
"사실 저는 중국의 지도자 모택동이

'리지웨이 장군의 인터뷰'
왜 계속하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이 정도 우리하고 싸워 봤으면
스스로 느낄 때도 됐다고 봅니다

현재 중국의 능력으로는 한반도에서

우리 미국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말이죠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정말로 본때를 보여줄 생각입니다"

리지웨이 장군은 특수 임무부대를 조직해
중공군의 동태를 알아 오도록 지시했다

 

특수 임무부대는 적진으로 침투했다

 

그런데 금강에서 수원까지 올라가는 동안

이렇다할 중공군을 만나지 못 했다

또한 정찰기들은

적군이 남진을 하는 대신
북진하고 있다고 보고해 왔다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적의 사정이 무엇이든
리지웨이 장군은 반격을 결정한다

공산군을 서울에서 몰아낼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1월25일, 작전명
'천둥번개'가 떨어졌다

 

유엔군이 대반격을 시작하자
공산군은 뿔뿔이 흩어졌고

단 며칠만에 힘들이지 않고
인천과 김포비행장을 탈환했다

 

2월에 들어서자 한강까지 진격해
강 건너로 서울을 볼 수 있게 됐다

5개월 전의 상황이 되풀이 되고 있었다

 

유엔군은 공산군이
물러나는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이 기회를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나폴레옹의 다음 말을 인용했다

"마을은 신경 쓰지 말고
포로들만 데려와라"

리지웨이 장군은
점령지역을 넓히는 것보다

중공군에게 타격을
입히는 데에 중점을 뒀다

그의 판단에는 한국전쟁은

유엔군의 화력과 중공군의
인해전술의 대결이었다

그런데 이 때 양쪽 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폭우가 쏟아져 사방이
물바다와 진흙탕으로 변했다

양쪽 다 꼼짝할 수 없게 됐다

 

같은 상황에서도 더 큰
타격을 입은 쪽은 중공군이었다

폭우와 미군의 폭격으로 보급이 끊겨

식량배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흔히들 군대는 배가불러야 싸울 수
있다고 하는데 중공군은 그렇지를 못했다

반면 유엔군의 식량배급은 원활했다

 

게다가 닷새 동안의 휴가가 실시된
덕분에 유엔군의 사기는 한껏 올라갔다

미군은 최전선의 보병들에게
닷새 동안의 일본휴가를 실시했다

장병들은 실컷 먹고 자고 놀며
꿀맛 같은 휴가를 즐겼다

 

그리고 100퍼센트
충전되어 전쟁터로 돌아왔다

 

한편 휴가를 못 간 장병들은

위문 공연단과 함께
전쟁의 긴장감을 털어냈다

1951년 3월1일 활기를 되찾은 유엔군은

한강을 건너 서울을 되찾기
위해 다시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유엔군의 집중 포격에
공산군은 퇴각하고

서울은 다시 유엔군에게 넘어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축하식이 열리지 않았다

네 번이나 주인이 바뀌면서
서울은 완전히 폐허로 변해 있었다

유엔군은 계속 북진했고
3월말에는 38선에 도착했다

그러자 6개월 전의
상황이 그대로 재현 됐다

어디까지 북진 할지를
놓고 격론이 벌어진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정전협상을 원했다

첫번째 실패의 경우를
보고 한국 통일은 오판이며

또 다시 북진하면 괜한
미군들의 목숨만 잃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맥아더 총사령관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중국 전역으로
해상 봉쇄령을 확대하고

중국 본토에도

공습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격분한 트루먼 대통령은 4월11일
맥아더 총사령관을 전격 해임한다

 

'트루먼 대통령의 연설'
'1951년 4월11일'
"개인적으로 매우 유감스럽지만

'트루먼 대통령의 연설'
'1951년 4월11일'
'제가 이러는데에는 확신이 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의 연설'
'1951년 4월11일'
'맥아더장군은 위대한 지휘관입니다

'그러나 특정인의 독단보다는
'세계의 평화가 더욱 중요합니다

 

'트루먼 맥아더 해임시키다'
맥아더의 해임은 급작스러웠고

'트루먼 맥아더 해임시키다'
이로 인해 트루먼의 인기는 추락했다

'맥아더 열렬한 환영 받다'
반면 맥아더는 영웅대접을 받으며 귀국했다

'맥아더 열렬한 환영 받다'
귀국한 맥아더는 미 의회에서
유명한 연설을 한다

'맥아더 감동적인 의회연설'
귀국한 맥아더는 미 의회에서
유명한 연설을 한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나는 지금 내 군경력을
마치렵니다. 그리고 사라지려 합니다

 

노병은 주어진 본분을
다하려 노력했었습니다

 

그 본분은 신께서 주신
빛나는 임무였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맥아더는 사라졌지만 전쟁은 계속됐다

 

리지웨이 장군이 극동
사령부 총사령관으로 임명됐고

밴플리트 장군이

제8군 사령관이 됐다

 

밴플리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사단장으로 참전했으며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아군의 목숨이
아니라 포탄을 쓰겠다'며

화력의 증강을 요구했다

 

유엔군의 화력이 증강되면서
적의 기세는 더욱 위축됐다

중공군이 대거 철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항공 정찰기의
보고를 분석한 결과

중공군은 제2의 공세를
준비하기 위해 집결 중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유엔군도 대비책이 있었다

 

'제12막 철의 삼각지'

'공산군은 후퇴를 멈추고 반격해 오다'

1951년 봄

'철원-김화-평강'
중공군은 38선 북쪽의
'철의 삼각지'라고 알려진

'철원-김화-평강'
험준한 지형의 고지에
집결하고 있었다

'철의 삼각지'는 서울과 북한의
완충지대 역할을 할 수 있어서

유엔군에겐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그러나 공략하기가 쉽지 않았다

리지웨이 장군은 중공군의 대 반격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기에
방어 전술을 취하며 접근했다

 

지난 6개월간 중공군과의
전투로 전술도 꿰 뚫고 있었다

중공군은 언제나 기습공격을 한 뒤
갑자기 잠잠해지는 특징이 있었다

가공 할 만한 적이지만
장기전엔 약하다는 뜻이었다

 

리지웨이는 단계별로
라인(line)을 설정해 놓고

철의 삼각지를 공략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일단 한 라인에 도착하면

이 라인은 그 위의
라인까지 전진하는 교두보가 된다

만약 후퇴 하더라도

바로 아래의 라인까지만 후퇴해
다음 반격을 준비하도록 했다

각 라인은 미국의 여러주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미 제8군은 얼마 전 아이다호 라인과
38선 바로 위쪽의 캔자스 라인까지 점령했다

 

다음 목표 라인은 유타 라인으로
캔자스 라인이 그 교두보가 된다

마지막으로 와이오밍 라인을
점령하면 철의 삼각지에 근접하게 된다

 

후퇴하건 전진하건

유엔군의 목표는 적을
많이 사살하는 것이었다

 

4월말 유엔군이 유타 라인까지 점령하고

와이오밍 라인 공략을 준비하던 중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4월22일

남한의 국군이 지키고 있는 중부
전선에 중공군의 공격이 가해 졌다

 

중공군은 또 다시 유엔군의
전선을 두 동강 내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엔 리지웨이가
정해 놓은 라인이 있었다

미 제8군은 캔자스 라인으로
후퇴해 방어 자세를 취했다

더 이상의 후퇴는 없었다

 

1주일동안 적(敵)은 보급도
제대로 받지 못 하면서

한반도라는 작은 땅 덩어리를 위해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리고 중공군은 다시 언제나처럼

쥐 죽은듯 잠잠해졌다
미군이 예상한 그대로였다

 

2주 뒤 중공군은 다시 공세를 취했다

그러나 이미 밴플리트는
대비책을 세워두고 있었다

중공군을 향해 일제히
대량의 포탄을 퍼부어 댔다

 

단 24시간 동안

한 포병대대에서
포탄 12000발을 발사했다

그것도 쉬지도 않고 교대로

 

유엔군이 쏘아댄 포탄은 중공군
진영에 날아가 비 오듯이 쏟아졌다

 

이 포격으로 중공군
사상자는 3만 5천명이나 됐지만

유엔군의 사상자는 9백명에 그쳤다
이 포격이 바로 '밴플리트 포격'이다

 

밴플리트는 '아군의 목숨이 아니라
포탄을 쓰겠다'는 다짐을 지킨 것이다

유엔군의 화력이 중공군의
인해 전술을 무너뜨렸다

 

6월, 유엔군은 와이오밍
라인까지 올라갔다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 한 이후
가장 북쪽까지 올라온 것이었다

수천 명의 전쟁포로와
수 톤의 무기도 압수했다

 

그리고 마침내 철의
삼각지 공략을 시작 하지만

적의 철통같은 저항에 부딪힌다

 

유엔군은 철의 삼각지에 열흘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포격과 공습을 시행했다

결국 적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유엔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들어가 철의 삼각지를 장악했고

중공군 개입 이후
가장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됐다

미국 입장에선 정전
협상을 시작 할 때였다

완전히 이기려면 앞으로
몇년이 더 걸릴지 알 수 없고

수많은 인명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지금이 협상을
해야 할 시기라고 워싱턴에 알렸다

연합군은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낼 때라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제13막 평화(休戰)를 향해'

'휴전협상 개시'

1951년 6월말

유엔은 공산측에 정전 협상을 제안한다

그리고 이틀 뒤
공산측이 이 제안을 수락한다

평화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초기에 정전협상은 개성에서 열렸다가

곧 널문리(板門점)으로 옮겨진다

빨리 끝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정전협상은 전쟁만큼이나 힘 들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양측 모두

자신들이 이 전쟁에서
이겼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서로 상대의 양보만 고집했다

 

유엔측은 군사분계선을 현재의
전선으로 정하자고 한 반면

공산측은 전쟁 이전의
38선으로 하자고 요구했다

또 공산측은 전쟁포로를

포로 본인의 뜻에
관계없이 일괄 송환하자고 했다

하지만 공산측은 대부분의
유엔군 전쟁포로를 죽인 뒤였다

 

십만여명의 유엔군 전쟁포로
가운데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자유의 마을'
만3천명에 불과했다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유엔군 전쟁포로들은 고문과

극심한 배고픔으로 악몽
같았던 포로생활을 털어놨다

중공군은 이들을 세뇌하고 재 교육해서
공산주의자로 전향시키려고 했다

 

또 총을 겨누고 강제로 미국에
반대하는 라디오 방송을 하도록 했다

 

포로수용소에서는 의약품이
없어서 아파도 치료를 할 수 없었다

 

수많은 유엔군 전쟁포로들이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거나 굶어 죽었다

 

반면 공산군 포로의 수용소
생활은 그 정도로 비참하진 않았다

이들은 유엔군 경비병보다 같은 동료
포로를 더 무서워 했고 좋은 대우를
할 것을 요구했다

의용군으로 끌려온 반공포로들은
동료 공산당 포로를 더 무서워했다

공산군 포로들은 반공포로와
친공포로로 양분되었고

이 양측간의 충돌로 사상자가
생기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공산측 회담 대표들은 정전협상에서
이 일을 꼬투리 삼아 물고 늘어졌다

양측은 서로 양보하지 않았고
정전협상은 여러차례 중단되었다

그리고 정전협상이 지지부진한 동안
전선에서의 긴장감은 높아갔다

 

특히 긴장감이 높았던 곳은 38선
바로 위의 철의삼각 지대였다

 

1951년부터 1953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부근은
뺏고 빼앗기는 접전이 수없이 반복됐다

 

그러다 잠시 전투가 없을
때는 다른 일로 바빳다

다음 전투를 위해 고지를
튼튼히 정비해야 했다

철의 삼각지 부근은 양측 군인들이
파놓은 참호가 사방에 널렸다

참호에서 파 낸 흙으로는
모래자루를 만들어 쌓아 올렸다

 

이렇게 쌓아 올린
고지에서 유엔군은 공산군을

공산군은 유엔군을 주시했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남으면 사진을 찍기도 했다

 

'불모고지'

 

또 고향에 편지를 쓰거나 예배에 참석해

전사한 전우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러나 자신들을 위한
기도는 하지 않았다

"죽은 전우들을 위해
기도했고 내가 죽게 되면

고통없이 빨리 죽게
해 달라고 기도 했죠

하지만 살려 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았어요

나만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건 이기적이니까요"

** 카치 이등병 **

이들의 이기적인 기도는 단 하나

고지를 차지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1952년 여름

미8군은 여전히 북측
고지를 주시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 북측의 고지를

하나라도 더 뺏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것은 공산측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양측의 욕심으로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이 부근의 고지는 피로 물 들였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고지가 '불모고지'로
한국군이 주둔하면서 "백마고지"로 개칭했다

포격에 민둥산이 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불모고지'는 근처에서 가장 높아
주변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었다

1952년 6월 유엔군은 이 '불모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작전에 돌입했다

 

보병부대가 적의 포탄이
비오듯 떨어지는 가운데

간신히 '불모고지'를 점령 했지만
곧 중공군에게 빼앗기고 만다

이것은 9개월간 계속될
시소게임의 시작으로

이듬해 3월, 유엔군의 승리로 끝났다

 

양측 군인들은 정전협상에
유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고지 쟁탈에 온 힘을 다했다

 

그러나 정전 협상은
계속 제자리 걸음 이었다

유엔군은 만족 할 만한
협상 결과를 끌어 내기위해

공산측을 더 압박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생각 해 낸 방법이
전투기를 이용한 공습이다

 

'제14막 대공습'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이 확실히
우위를 점했던 부분은 제공권이다

 

유엔군이 참전해서
마지막 전투가 끝나는 날까지

유엔군의 전투기는
북한을 가차 없이 폭격했다

 

유엔군의 전투기는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 때

활약한 기종으로 대표적인
예가 'B-29 슈퍼 포트리스'다

 

한편 한국전쟁에 새로 투입된
차세대 전투기들도 많았는데

이런 점이 전세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 중에서도 'F-86 세이버' 전투기를
투입 한것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이 기종은 미국 전투기
가운데 최초의 후퇴익기로

날개가 뒤로 젖혀져 공중전에 강했다

소련의 미그-15기에 맞서
한반도 하늘을 지킨 1등 공신이다

1952년, 유엔의 공군력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 해에 미 공군의 전투기
출격 횟수만 1500회였고

미 해군과 해병대, 유엔 비행편대에서
출격한 횟수는 훨신 더 많았다

 

1952년 여름

유엔군의 전투기가
북한 상공을 위협했다

정전협상에서 공산측을
밀어 붙이기 위해서 였다

 

유엔 전투기는 북한의
압록강까지 올라 갔다

압록강 주변은 북한의
산업시설들이 몰려있는 곳이다

 

또 한편으로는 중국과의
국경선이기도 해서

중공군 전투기의
역공을 조심 해야했다

 

그러나 이런 위험에도 불구 6월23일

유엔 폭격기는 압록강 주변의
핵심 산업시설에 폭격을 가했다

 

제 1목표는 수력 발전소였다

 

세이버기가 중공군의
미그기를 감시하는 동안

폭격기가 수력발전소를 맹폭격 했다

 

작전은 신속하고
기습적이었으며 성공적이었다

이 폭격으로 북한 전력공급의
90퍼센트가 차질을 빚게 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이 공습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인터뷰'
미군의 비행기가 적군 사령부를 쳤고

'이승만 대통령의 인터뷰'
그들은 공산주의의 심장부를 공략했으며

전세계가 미군기가 이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것입니다

 

그러나 공산군은 이런
치명적인 공습에도

여전히 뻣뻣하게 나왔다

 

공습으로 유엔이 정전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됐지만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았다
뭔가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했다

 

'제15막 전쟁의 막은 내리고 휴전'

 

'아이젠하워, 한국 방문 하겠다'

 

한국전쟁은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주요 쟁점이었다

미국민들이 질질 끄는 전쟁에
싫증을 내고 있는 가운데

민주당은 공화당후보
아이젠하워에 맞서 고전 중이었다

 

'아이크'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아이젠하워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서유럽
주둔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다

맥아더도 그 앞에서는 조연이었다

 

반면 트루먼 대통령은
길어지는 한국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상황이었다

 

한국전쟁이 3년째로 접어들자
미국민들은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끝낼 대통령을 원했다

10월 말

아이젠하워는 이런 기대에
부응하는 약속을 한다

 

'아이젠하워 정경 발표'
'전 한국을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이번 방문으로 해서

 

'좀더 빨리 미국민에게
확신을 드릴려 합니다'

 

'평화를 위해'

 

대통령에 선출된
아이젠하워는 약속을 실행했다

한국의 최전선으로
날아와 장병들을 만났다

장병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종전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들었다

 

당시 언론쪽에선 종전을 위해

핵폭탄을 쓸 것이라는
소문이 흘러 나왔다

트루먼이 2차대전을 종식시킬 때
핵폭탄을 쓴 선례가 있기 때문에

아이젠하워는 그 소문을
전적으로 부인 하지는 않았다

 

아이젠하워가 핵폭탄을
쓸지도 모른다는 태도를 보이자

공산측은 긴장했다
정전협상에 보다 진지하게 임했다

 

아이젠하워의 대통령 취임 석달뒤 중국에서
전쟁을 끝내고 싶다는 뜻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러나 전쟁을 끝내기는
시작보다 더 어려웠다

정전협정이 모양을 갖추는데
다시 넉 달이 걸렸다

 

전방의 양측 군인들은
종전이 눈앞에 다가오자

가능한 더 유리한 상태에서
전쟁을 끝내기 위해 분발했다

 

치열한 고지 쟁탈전은
마지막까지 계속됐다

1953년7월27일 전쟁이
시작된지 3년을 넘기고

'휴전협정체결'
1953년7월27일 전쟁이
시작된지 3년을 넘기고

'휴전협정체결'
드디어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전의 38선 대신 새로운 휴전선이
생겼고 그것은 유엔측의 작은 승리였다

 

그러나 전방의 포문은
그로부터 12시간 뒤

협정의 효력이 발생하는
순간까지 불을 뿜었다

 

그리고 모든 게 멈췄다

 

한국전쟁 3년동안 3백만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군인은 물론 민간인들까지
다치고 죽고 행방불명 됐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나라 전체가 쑥대밭이 됐다

 

또 전세계 20여개국이 유엔군 혹은
공산군 편이 되어 상대에게 총부리를 겨눴다

한반도라는 좁은 땅에서의 전쟁이었지만
세계 대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국전쟁으로 시작된 공산권과
자유진영간의 총성없는 전쟁은

이후 40년간 냉전이란
이름으로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긴 냉전은 끝났지만
아직도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남한과 북한은 지금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1950년 이후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현재 한국은 전세계에서
유일한 분단 국가이다

 

불안한 그림자는 여전히
한반도를 뒤덮고 있지만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싸운 이들의
희생정신은 전쟁사에서 가장 고결한 것이다

이들은 좌절의 시기에 용기를, 냉담의
시기에 신념을, 역경의 시기에 불굴의
의지를 보여줬다

 

우리는 이 용감한 군인들에게
명복을 빌며 감사를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