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회 (1945)   - 어서 오세요
- 안녕   - 이봐요, 나 왔어요
- 오랜만이네요   - 어제는 올 수가 없었어요
- 무슨 일이 생겼나 궁금했어요   - 작은 소동이 있었죠
- 무슨 소동요?   어떤 사람이 일등실에서
내리길래   표를 확인해 보니까
3등실 표더라구요   그래서 돈을 더 내라고 했더니
마구 행패를 부려서   - 손더스 씨를 불렀죠
- 그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 큰 도움이 됐어요
- 그럴 리가요   호되게 야단치던데요   당장 돈을 더 내지 않으면
경찰에 넘기겠다고요   '경찰'이란 말을 들먹이니까
그 작자 안색이 싹 변하던데요   목소리부터 확 바뀌더니
번개처럼 돈을 내더라고요   그럴 줄 알았어요
손더스 씨 혼자선 어림도 없죠   - 경찰 덕분이죠, 뭐
- 그렇게 못난 사람은 아니에요   아내는 당뇨병이고 본인도 폐가
안 좋은데 그 정도면 씩씩하죠   당신이 안 와서
일이 생겼구나 했어요   - 급한 약속이 있었어요
- 그랬군요   - 아는 사람이 결혼을 했거든요
- 아주 재밌었겠네요   - 대체 왜 그래요?
- 내가 뭘 어쨌는데요?   - 갑자기 쌀쌀맞게 굴잖아요
- 베럴, 빨리 해!   - 난로에 석탄도 좀 더 갖다 놓고
- 알았어요   미안하지만 당신하고 한가하게
농담이나 하고 있을 시간 없어요   - 한 잔 더 안 줄 거요?
- 다 마시면 얼마든지 더 드리죠   베럴이 줄 거예요
난 계산할 게 좀 있어서요   한 잔 주고 시작하면 안돼요?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아요   - 로라! 이게 웬일이야
- 달리   녹초가 될 정도로
쇼핑을 했더니   발도 아프고
목은 바짝바짝 타   카페에 들어가 쉬고 싶었지만
기차를 놓칠까봐...   - 힘들어!
- 이 분은 하비 선생님이셔   - 안녕하세요?
- 차 한 잔 갖다 주시겠어요?   지금 카운터까지
갈 기운이 없어서요   네, 그러죠   괜찮아 보이는데, 누구야?   로라는 정말 대단해
아침에 프레드에게 전화해 줘야겠어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가워
이게 얼마만이야?   가끔 생각은 했는데
일이 많아서 그렇게 됐어   - 참, 필리스가 떠났어
- 안됐구나   사실 그 애를 잘 돌봐주진 못했지
물론 토니는 잘 따랐지만...   자세한 얘기는 이따 기차에서 하고
정말 고마워요   우유가 좀 많아 보이긴 하지만
기운은 날 것 같네요   - 설탕을 안 넣었군요
- 스푼에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정신이 없어요   로라, 네가 나올 줄
진작 알았으면   같이 점심도 먹고
수다도 떨었을 텐데   혼자 쇼핑하는 건
딱 질색이거든   - 당신이 탈 기차예요
- 네, 알아요   - 우리와 같이 안 가세요?
- 전 반대 방향인 철리로 가요   - 그렇군요
- 전 일반 개업의입니다   - 다음 주에 아프리카로 떠나실 거야
- 대단하시네요   5시 40분 발 철리, 리 그린
랭던 행 열차는 4번 홈입니다   - 그만 가볼게요
- 그러세요   - 가보겠습니다
- 안녕히 가세요   뛰어가지 않으면 놓칠 거야
건너편 플랫폼까지 가야 하니   기차 얘기를 하니까
브로드햄 역의 일이 생각나네   그 역에선 기차를 타려면
한참을 걸어야 해   며칠 전 집 임대 계약을 다시
하려고 변호사를 찾아갔는데   기차 출발 30초 전에
역에 도착한 거야   날듯이 뛰었지만
토니를 데리고 간데다   바보 같이 응접실에 놓을
스탠드까지 샀었거든   여기서도 쉽게
살 수 있는데 말야   내 시야를 가릴 만큼
큰 스탠드였어   그렇게 난감했던 적이 없었지
여자까지 칠 뻔했다니까   근데 집에 도착해서 보니까
산산조각이 났지 뭐야   우리 기차인가봐
저 기차가 케치워드 행인가요?   - 아뇨, 급행 열차예요
- 항구로 가는 거야   그럼 여긴 정차하지도 않겠네
초콜릿 좀 주세요   - 밀크 초콜릿으로요?
- 그냥 초콜릿요   아니, 밀크 초콜릿이 낫겠어요
땅콩이 들은 것도 있나요?   네슬레 땅콩 밀크 초콜릿
6펜스예요   그 초콜릿 하나랑
그냥 초콜릿 하나요   - 큰 거요, 작은 거요?
- 큰 걸로 주세요   내 친구 어디 갔죠?   나가는 건 못 봤는데요   어디로 사라졌나 했어   급행 열차가 지나가는 걸
보느라고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파?   - 몸이 좀 안 좋아
- 저리 가서 좀 앉자   우리 기차일 거야   - 잠깐만, 브랜디 좀 있어요?
- 지금은 팔 수가 없어요   - 사람이 아파서 그래요
- 난 괜찮아   - 한 모금 마시면 기운이 날 거야
- 그러죠   - 고마워요, 얼마죠?
- 10펜스예요   케치워드 행 열차가
3번 홈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서둘러야겠어   운이 좋네, 이 기차는
늘 사람이 많은데   정말 걱정이네
안색이 너무 안 좋아보여   이젠 괜찮아
잠시 현기증이 났을 뿐이야   가끔 그래
바비의 학교 연주회 때도 그랬지   그래서 바비가
단단히 화가 났지   - 그 사람 정말 미남이던데?
- 누구?   아까 그 의사
이름이 뭐였더라...   - 그래, 좋은 사람이야
- 알고 지낸지 오래 됐어?   아니, 그렇지 않아
사실 아는 것도 없어   난 의사한테는
늘 우호적이지   왜 여자들이 노이로제에
시달린다면서...   내가 달리를
믿을 수 있다면   달리가 현명하고
친절한 친구라면...   그 동안 별 관심없이
그저 알고 지낸   수다쟁이가 아니라면...
그랬다면...   그럼 좋았을 텐데...   - 아프리카로 간다고? 결혼은?
- 했어   - 애들은?
- 아들 둘, 자랑이 대단해   - 부인과 애들도 같이 간대?
- 그래, 같이   잘 생각한 거야, 그런 탁 트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니   하지만 아무리 야생마들이 날
유혹해도 이 익숙한 영국에서   난 한 발자국도
안 나갈 거야   - 그래도 고향이 최고지, 안 그래?
- 그래, 그렇지   몇 년 전에 남편의 일 때문에   아프리카에 갔던 여자가 그러는데
거기 생활이 끔찍했었대   그녀가 피크닉을 갔다가 세균에
감염돼 몇 달 동안이나 앓았는데...   제발 저 수다 좀 멈췄으면...   꼬치꼬치 캐묻지 좀 말았으면...   달리가 죽어 버렸으면...
이러면 안돼!   제발 좀 멈췄으면...   그 여자는 머리카락이 다 빠져서
사람들 만나기도 괴로웠대   - 그 한적한 시골에서도 말야
- 오, 달리   - 왜? 또 아파?
- 아니, 현기증이 나서   - 눈을 좀 감고 있어야겠어
- 이런, 안됐다   할 말이 정말 많지만
이제 그만 할게   혹시 잠들면
도착하기 전에 깨워 줄게   내리기 전에 정신도 가다듬고
화장도 고칠 수 있게 말야   고마워, 달리   이래선 안돼   이 비극 속에
빠져있어선 안돼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자신을 추스려야 해   어떤 것도 영원한 건 없어
행복도 절망도...   인생도 그렇게 오래
지속되진 않아   오늘 일을 신경쓰지
않을 때가 올 거야   편하게 미소지으며
'정말 어리석었어'라고 할 때가...   아니, 그런 때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언제까지나...   내가 죽는 그 날까지   케치워드 역입니다!   - 로라, 일어나! 다 왔어
- 케치워드 역입니다!   방향도 비슷하니까
집까지 같이 가줄까?   엘모아 거리를 가로질러
그래머 학교만 지나면 돼   달리, 마음은 고맙지만
이제 정말 괜찮아   - 정말이야?
- 응, 신경써 줘서 고마워   그런 소리 마, 괜찮은지
아침에 확인전화 할게   괜찮을 거야, 잘 가   잘 가, 남편하고 애들한테
안부 전해 줘   - 로라, 당신이야?
- 그래요   당신이 돌아와서 정말 기뻐
난리가 났었거든   - 무슨 일인데요?
- 바비와 마가렛이 또 싸웠어   당신이 답해주기 전엔
둘 다 안 잘 거야   - 엄마, 오셨어요?
- 그래, 마가렛   빨리 2층으로 와 보세요
할 얘기가 있어요   이 말썽꾸러기들, 왜 아직 안 잤어?
그래, 할 말이 뭐니?   엄마, 내일은 내 생일이고
난 서커스 구경을 가고 싶은데   누나는 자기 생일도 아니면서
팬터마임을 보러 가겠대요   내 생일은 6월인데
그때는 팬터마임을 안 해요   그 얘기를 하기엔
너무 늦었다   둘 다 안 자면 아빠한테 아무 데도
데려가지 말라고 할 거야   엄마!   두 군데 다 데려가지 그래
한 군데씩 차례로 말야   그럴 순 없어요
그럼 애들이   너무 늦게 자게 되고
그러면 피곤해져요   그럼 이틀에 걸쳐
데려가면 되잖아   당신은 날더러
애들을 망친다고 하지만   너그러운 당신에게 2주만 맡기면
애들 버릇 다 망칠 거예요   알았어
당신 방식대로 해   - 어디로 갈까요?
- 두 곳 다, 아냐   그냥 두 녀석을 다락에
가둬 버리고   우리끼리 영화나 보러 가자구   오, 프레드   - 아니, 왜 그래?
-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보, 무슨 일 있어?   - 어서 말해봐
-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에요   기운이 좀 없어서 그래요   밀포드 역 휴게실에서 잠시
어지러웠는데 왜 그랬는지...   이상하지 않아요?
달리와 같이 있었는데   하염없이 수다를 떨었어요
죽이고 싶도록요   잘 해주려고
그러는 건 알지만   사람들이 친절한 척하는
것도 지겨워요   - 그만 자는 게 어때?
- 아뇨,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럼 서재 난롯가에 가서
좀 쉬어   낱말 맞추기나
도와주면서 말야   - 정말 특이한 휴식 방법이네요
- 그럼 좋아질 거야   - 자, 이렇게...
- 고마워요   왜 어지러웠지?
도통 알 수가 없네   새삼스러울 거 없어요
가끔씩 그러는 거 알잖아요   바비의 학교 연주회 날도
에일린의 결혼식 때도   당신이 연주회에 가자고
고집부릴 때도 그랬잖아요   그래
그때는 코피까지 흘렸지   왜 난 이 모양인지 모르겠어요
정말 창피해요   아무래도 그레이브 박사에게
가보는 게 좋겠어   - 시간 낭비예요
- 여보...   됐어요, 별일 아닌 것 갖고
호들갑 떨지 말아요   쇼핑하느라 지친데다
휴게실이 더워서 그런 거니까   - 그 이상은 아니에요
- 알았어   정말 그 뿐이에요
낱말 맞추기나 해요, 전 괜찮아요   그래, 알았어   시를 좋아하니 이건 당신이
풀 수 있을거야, 키츠 시야   "그날 밤
그 얼굴을 보았을 때"   "아련한 로맨스의 느낌이
밀려들었다" 뭘까?   '로맨스'인 것 같은데요
확실해요   "아련한 로맨스의 느낌이..."
영국 시집에 나올 거예요   그게 아니고 격렬한 흥분을
뜻하는 단어 같아   - 음악 좀 틀어도 괜찮죠?
- 그래, 얼마든지   여보   프레드   사랑하는 프레드   당신에게 할 얘기가
너무 많아요   당신은 날 이해할 만한 지혜와
친절함을 지닌 유일한 사람이에요   내 얘기가 아니라
다른 누구의 얘기라면 좋겠어요   이 세상의 단 한 사람, 당신에겐
절대 말할 수 없어요   절대로...   우리가 늙을 때까지 기다렸다
얘기한다 해도   당신은 지난 날을 돌이키며
상처 받을 테니까요   당신이 상처 받는 건
원하지 않아요   그래요
우리는 행복한 부부예요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죠   여긴 내 집이고
당신은 내 남편이고   내 아이들은 2층에서
자고 있어요   난 행복한 여자예요   아니
몇 주 전까지는 그랬죠   여기가 나의 전부였어요   더 바랄 게 없었죠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그랬어요   하지만, 여보
난 너무 어리석게도   사랑에 빠졌어요   난 평범한 여자예요   그런 격정이 평범한 여자에게도
일어날 줄 몰랐어요   모든 것이
평범한 어느 날 시작됐죠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곳에서요   밀포드 역의
휴게실이었어요   난 차 한잔 마시면서   오전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고 있었어요   기차가 10분이나
연착을 했거든요   난 무심코 고개를 들다가
들어오는 한 남자를 봤어요   평범한 남자였어요, 모자를 푹
눌러써서 얼굴을 볼 수가 없었죠   그가 차를 주문하고
돌아설 때   그의 얼굴을 봤는데
꽤 잘생긴 얼굴이었어요   - 설탕은요?
- 스푼에 있어요   그가 내 테이블을
지나갔어요   카운터의 여자는
평소와 다름없었죠   며칠 전에 얘기했던
목소리가 인상적인 여자요   - 미니가 우유를 전혀 안 먹었어요
- 아래로 내려놓아 줬니?   네, 그런데도
근처에 가지도 않았어요   - 동물을 좋아해요?
- 사람보다 낫죠   우리 집 주인 여자도
동물을 굉장히 좋아해요   고양이 두 마리에
맨섬 말과 보통 말 한 마리   부엌엔 토끼를 세 마리나
기르는데 어린 아들 거래요   게다가 눈 위에까지
털이 덮인 개도 있죠   어떤 품종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건 개들도 모를 걸요   베럴, 3번 테이블 좀 닦아
여기서도 빵 부스러기가 보여   한잔 더요, 곧 나가야 돼요
5시 40분 기차가 곧 도착할 거예요   - 출구에 누가 있어요?
- 윌리엄이오   물 한 잔 주시겠어요?
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아요   - 내가 좀 봐 줄까요?
- 괜찮아요, 물로 씻어내면 되겠죠   - 고마워요
- 석탄 가루일 겁니다   내가 아는 남자는 모래가
들어가서 한쪽 눈을 잃었죠   - 아주 고약한 일이군요
- 괜찮아요?   - 소용이 없네요
- 도와드럴까요?   괜찮아요
눈에 뭐가 들어가서요   - 눈꺼풀을 잡아당겨 봐요
- 그리고 콧김을 불어요   - 제가 한번 보죠, 의사입니다
- 정말 감사합니다   오른쪽으로 돌아보세요   위를 보세요   이제 아래쪽을 봐요   가만히 계세요
보이는군요   - 됐어요
- 괴로웠는데 살 것 같네요   - 석탄 가루같군요
- 열차 때문인가 봐요, 고마워요   - 이런, 뛰어가야겠네요
- 선생님이 계셔서 다행이에요   - 누구나 할 수 있는 건데요
- 아니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 기차가 왔네요, 잘 가세요
- 안녕히 가세요   이렇게 시작됐어요   내 눈에 먼지가 들어간 게
계기가 됐죠   하지만 그 일을 까맣게 잊었어요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죠   그 다음 목요일에
난 평소처럼 밀포드에 갔어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죠   루이스 양이 '케이트 오브라이언'의
새책을 구해 줬거든요   이틀 동안이나 카운터 밑에
그 책을 숨겨놓았대요   그리고 나오면서
아이들 칫솔을 샀어요   난 약국 냄새를 좋아해요   여러 약초 냄새와
비누향 등등...   그 때 레프위치 부인이
함께 있었는데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다행히 고개를 들지 않아
그녀의 수다를 피할 수 있었죠   얼른 밖으로 나왔거든요   -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   - 눈은 어떠세요?
- 아주 좋아요, 정말 고마웠어요   - 별 말씀을요, 날씨가 갤 것 같죠?
- 네, 그런가봐요   - 그럼, 전 병원에 가봐야겠어요
- 저도 식료품점에 가야 해요   - 좋은 하루 되세요, 그럼 이만
- 안녕히 가세요   그 날 저녁엔 역까지
계속 뛰어야만 했어요   팔라듐 극장에서 한
영화가 너무 길어서   기차를 놓칠까봐서요   플랫폼에 도착했을 때 철리 행
기차가 막 떠나고 있었어요   멍하니 기차의 창문을 쳐다봤죠
혹시 그가 타고있나 해서요   마음이 혼란스러웠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어요   사실 어떤 생각에
골몰해 있었죠   당신의 생일 선물을
고민하던 중이었어요   당신이 원하는 건
너무 비쌌거든요   하지만 과감해지기로 했어요   다음 목요일에 적금을 깨서
선물을 사기로 했죠   그 다음 목요일...   당신이 기뻐할 거란 생각에
무조건 그걸 샀죠   - 이걸로 하죠
- 고맙습니다   사치스럽다는 건 알았지만
죄를 지을 때처럼   무모하고 대담해지는
기분이었어요   날은 화창했고, 모든 사람들이
평소보다 들떠있는 것 같았어요   해리스의 가게 옆 모퉁이에
오르간이 있는데   내가 그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죠?   '세상은 돌고 도네'가
연주되고 있었어요   난 연주자에게 6펜스를 주고
카도마 식당에 점심 먹으러 갔죠   사람이 아주 많았지만
마침 두 사람이 일어났어요   운이 좋았죠
아니 그 반대였을까요?   주문을 하고 난 직후
그가 들어오는 걸 봤어요   좀 피곤해 보였는데
앉을 자리도 없어 보였어요   그래서 웃으며 말을 건냈죠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 혼자세요?
- 네, 그래요   - 꽉 찼군요, 합석해도 될까요?
- 네, 그러세요   우린 제대로 소개도 안 했죠?
전 알렉 하비입니다   반가워요
전 로라 제슨이에요   - 결혼하셨어요?
- 했어요   - 의사시죠, 그 날 말씀 기억나요
- 네   뭐 대단한 의사는 아니고 일반
개업의죠, 철리에 병원이 있어요   - 주문하시겠어요?
- 무슨 요리를 시키셨어요?   - 수프하고 가자미 요리요   - 나도 같은 걸로 하죠
- 마실 건요?   전 괜찮아요
뭐 마시겠어요?   - 아뇨, 물이면 돼요
- 그냥 물이요   저 첼리스트 좀 봐요   정말 형편없네요   하지만 웃지 마세요
우럴 볼 지도 몰라요   악기 학대를 막는
단체도 있어야겠어요   - 피아노 안 치시죠?
- 어럴 때 억지로 좀 배웠죠   - 지금은 안 쳐요?
- 네, 남편이 음악엔 별로 거든요   - 다행이네요
- 제가 재능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 그럴 리가 없어요
- 어떻게 확신하죠?   당신은 너무 모범적이고
복잡하지 않거든요   복잡하지 않은 건 좋지만
좀 둔하단 말로 들리네요   둔하다니 말도 안돼요   - 매주 목요일에 여기 오세요?
- 네, 병원에서 진료를 하죠   스티븐이라고 여기 내과 과장이
저와 졸업 동기인데   일주일에 한번 대신 봐주죠
그는 런던에 가고   - 저는 이곳 환자를 연구해요
- 그렇군요   - 당신은요?
- 제가 뭐요?   - 매주 목요일 여기 오시죠?
- 네, 쇼핑하러요   도서관에서 책도 빌리고
점심 먹고 영화도 보죠   그리 재밌는 일은 아니지만
기분 전환은 돼요   - 오늘도 영화를 보실 건가요?
- 네   기막힌 우연이네요
저도 볼 건데   병원에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비밀인데요, 오전에 사고로
환자 두 명을 죽였어요   수간호사가 하도 눈치를 줘서
감히 돌아갈 수가 없어요   - 그런 말이 어딨어요!
- 실은 오전에 일을 다 끝냈어요   게으름을 좀 부려도 괜찮아요
같이 가도 되겠죠?   - 글쎄, 저...
- 서로 다른 층에서 보면 되잖아요   위층은 너무 비싸요   오케스트라는 시작할 때처럼
갑자기 멈췄고   우리는 또 다시
웃기 시작했죠   부담스러웠을 법도 한데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모든 게 아주 자연스럽고
순수해 보였죠   식사를 마치고 멍청한 여종업원이
계산서를 하나로 가져왔어요   - 제가 내겠습니다
- 그건 안돼요   합석을 요구한 제가
계산하는 게 당연하죠   서로 고집부리지 말고
우리 반반씩 내기로 해요   - 제발...
- 그럼 그러죠   우린 정확히 반씩 부담했어요
팁도 반씩 냈죠   수고하세요   둘 중 선택하세요
팰리스 극장의 '정열적인 사랑'   - 팔라듐 극장의 '안개 속의 사랑'
- 아주 잘 아시네요   표는 논쟁할 필요 없이
각자 사기로 해요   저를 극장표 두 장도 못 살 만큼
가난한 의사로 보시는군요   - 각자 사기로 해요
- 부인이 사주시길 바랬는데   - 어느 극장으로 갈까요?
- 팔라듐으로 가죠   '정열적인...'하는 말은
이제 식상해서요   놀랍고   엄청난   거대한 스케일의   획기적인 영화!   "정열의 불꽃"   개봉 박두!   '버튼스 유모차'
번화가 22번지   실례합니다   위층에서 보니까 기분은 좋지만
너무 무리하셨어요   - 제 고집의 승리죠?
- 죄책감 안 드세요? 전 드는데   - 죄책감요?
- 일을 쉬셨으니 저보다 심하시죠?   오전 내내 일했어요, 잠깐 쉰다고
누구에게 해될 건 없어요   왜 우리가 죄책감을
느껴야 하죠?   - 모르겠어요
- 당신은 너무 착해요   이럴 수가!   그러게요!   우리는 역까지 함께 걸었어요   출구에 도착했을 때
그가 내 팔짱을 꼈죠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기억이 나요   - 부인은 어떤 분이세요?
- 메들린요?   작은 체구에 검은 머리
좀 섬세한 편이죠   뜻밖이네요, 난 부인이
금발일 거라 생각했는데   당신 남편은 어떤 사람이에요?   중간 키에 갈색 머리, 상냥하고
이성적이죠, 섬세한 면은 없어요   - 자랑스럽게 말하는군요
- 그랬나요?   - 안녕하세요
- 수고하세요   기차가 오기 전에
차 한잔 마실 시간은 있어요   일주일에 세 번이나
그 사람은 허락도 없이   그 멋대가리 없는 부부를
집으로 데려왔어   - 홍차 두 잔 주세요
- 케이크나 페스튜리는요?   - 케이크나 페스튜리 드실래요?
- 아뇨, 됐어요   - 이 빵은 새로 구운 건가요?
- 예, 오늘 아침에요   두 개 주세요   7펜스예요   - 베럴, 홍차를 갖다드려
- 빵은 제가 가져가죠   이 빵 하나 드세요
아침에 구운 거래요   - 살찔까봐 겁나네요
- 그런 말 말아요   - 맛있어 보이네요
- 어럴 땐 먹는 걸 참 좋아했죠   -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 그래서...   내가 모든 일을 다 잘하길
바라지만 그럴 순 없다고 했지   하지만 내가
어떻게 벗어나겠어?   낮에는 종일 집안일이나
하면서 틀어박혀 있다가   밤에는 남편 비위나 맞추는
아내 노릇은 못한다고 말야   물고기는 물 속에 있어야 하듯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찾기로 했어   그래서 짐을 싸서 과감하게
그 사람을 떠나왔지   - 다신 돌아가지 않았어요?
- 당연하지   잠시 포크스톤에 있는
여동생의 집에 있다가   친구하고 같이 하이드에
카페를 열었어   - 남편은 어떻게 되셨어요?
- 3년 동안 감감 무소식이야   그럴 수가...   홍차가 커피보다 몸에
더 안 좋은가요?   전문적인 상담이라면
상담료로 1기니를 내세요   - 왜 의사가 됐어요?
- 말하자면 길어요   -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인지 모르죠
- 의사에겐 이상이 필요해요   - 자기 일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 속 얘기를 하라는 거예요?   이야기 하면 안되나요?
사실 그게 제일 궁금한데요   그래요
난 사실 야망이 커요   내 전문 분야에 대한
야망 말예요   - 전문 분야가 뭐죠?
- 예방 의학이에요   - 그렇군요
- 잘 모르겠죠?   -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 대부분의 훌륭한 의사들은   특히 젊었을 때 말이에요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은밀한 꿈을 품죠   어려움을 극복하고 최고의
전문의가 되는... 지루하죠?   아뇨, 잘 알지는 못하지만
지루하진 않아요   제가 말하려는 건 우선
열정적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작가나 화가, 성직자들처럼   소명 의식이 있어야 하죠   - 마음 속 깊이 좋은 일을 하려는...
- 그렇군요   분명한 예방법 한가지는
치료법 50가지의 가치가 있어요   그래서 관심을 갖게 됐는데   예방 의학은 의학이라기보다   건강 상태나 생활 조건
위생상식 같은 것과 관계가 있죠   내 전문 분야인 진폐증을
예로 들어보죠   - 이런...
- 겁낼 것 없어요, 생각보다 간단해요   진폐증은
먼지가 폐로 들어가서   호흡 기능에
장애가 생기는 거예요   이 부근엔 그런 환자를
연구할 기회가 많죠   - 근처에 탄광이 있으니...
- 갑자기 젊어보이는 것 같아요   - 제가요?
- 어린 소년 같아요   왜 그런 생각이 들었죠?   모르겠어요...
아니, 알겠어요   말해 봐요   아뇨, 말 못하겠어요
탄광에 대해 얘기 중이었어요   그랬죠
탄분증이라고 있는데   그건 석탄 가루 흡입으로
인해 생기는 병이에요   또 어떤 병들이 있죠?   석폐증이란 게 있어요
강철을 다루는 작업을 할 때   금속 먼지로 인해
생기는 병이죠   강철을 다룰 때요?   그리고 규폐증이란 건   금광의 돌가루가
폐에 쌓여서 생기는 병이죠   그렇군요   - 당신 기차예요
- 네   - 놓치면 안돼요
- 그래요   - 왜 그러세요?
-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오늘 오후는
정말 너무 즐거웠어요   저도요, 장황한 의학 얘기로
지루하게 해서 미안해요   잘 알아듣지 못해서 제가
바보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건너편 플랫폼에서 타셔야죠?
전 신경 쓰지 마시고 가세요   -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 일요일에 케치워드로 오신다면   - 좀 멀긴 하지만 반가울 거예요
- 제발...   - 그럼 언제요?
- 다음 목요일, 같은 시간에요   - 안돼요, 그럴 순 없어요
-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 기차를 놓치겠어요
- 알았어요   - 뛰어가세요, 거기로 나갈게요
- 잘 있어요   고마워요   난 플랫폼에 서서 그가 탄 기차가
역을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봤죠   기차 꼬리가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요   난 그가 철리에 도착해서   개찰구에 표를 내고   거리로 걸어나가서   현관문 열쇠를 열고
집에 들어가는 걸 상상했어요   그의 아내, 메들린은   아마 거실에 앉아
그를 맞이하거나   위층의 자기 방에 있겠죠
몸이 좋지 않다면서요   작은 체구에 검은 머리의
그 섬세한 여자요   난 그가 카도마 식당에서   어느 멋진 여자를 만나
점심을 같이 먹고   영화도 같이 봤다는 걸
말할지 생각해 봤어요   하지만 안 할 거란 걸
깨달았어요   그런 말은 안 할 게
불을 보듯 뻔하죠   그 순간 처음으로 두려움이
엄습해옴을 느꼈어요   난 맨 앞 칸에 탔어요   가능한 한 빨리 집에
도착하고 싶었거든요   앉자마자 황급히 날 쳐다보는
사람이 없나 둘러봤어요   사람들이 내 맘 속을
읽을 것만 같았어요   건너편에 앉은 목사님만이
날 쳐다보셨죠   난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아서
책을 읽는 척 했어요   케치워드에 도착했을 때
전 굳게 결심을 했어요   - 다신 알렉을 만나지 않겠다고
- 안녕하세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경박하게 보인 것 같았어요   아, 안녕하세요?   그리고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까지 걸어왔죠   그 날 행동은 바보 같았지만
누구에게 해를 주진 않았으니까요   당신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거실에
있었는데 가슴이 철렁했어요   여보, 무슨 일 있어요?   - 별일 아니니까 침착해
- 무슨 일인데요? 왜 그래요?   바비 일이야,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차에 치었어   심각하진 않아
차에 살짝 치었는데   돌에 부딪혀
충격을 좀 받았대   윗층에 의사 선생님이
와 계셔   괜찮습니다, 부인
걱정하실 거 없어요   몇 시간만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정말로 심각하지 않은 거죠?   그럼요
천만다행이었어요   진정제를 먹였어요   2,3일 간 집에서
안정을 취하게 하세요   그럼 금방 회복될...   머리에 붕대를 감고
누워 있는   바비의 모습에
정말 아찔했어요   당황한 모습을 감추려고 했지만
제 정신이 아니었죠   모든 게 제 잘못 같았어요   벌을 받은 것 같았고
무서운 경고인 것 같았어요   한 시간쯤 지나 모든 게
다시 제대로 돌아갔죠   바비는 완전히
정신이 돌아오자   모두의 관심을 받는 걸
즐거워 했어요   맛있겠다   바비의 미래에 대해 저녁 내내
얘기했던 것 기억나요?   지금 결정 짓기엔
바비는 너무 어려요   멋지잖아, 바비가 그런 것에
적성만 있다면...   적성이 있는지
어떻게 알아요?   다음 주면 기관사가
되고 싶다고 할 걸요   기관사가 되고 싶다고
한 건 지난 주였어   지금으로서는 해군이
최종적인 꿈이군요   - 듬직하잖아
- 멋있고 건강한 삶을 누리며...   세계 각지에서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존경도 받겠지만   우리는 어떡하고요?   - 무슨 말이야? 우린 어떡하냐니?
- 바비를 보기 힘들어지잖아요   - 말도 안돼는 소리
- 왜 말이 안돼요?   말끔한 얼굴로
바다로 나갔던 바비가   돌아올 땐 긴 턱수염에
앵무새를 데리고 나타날 걸요   당신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해군을 생각하고 있군   바비는 외아들이에요
다 클 때까지 곁에 두고 싶어요   알았어
회사에 취직시켜서   매일 아침마다
아들 얼굴을 보도록 해야겠군   그렇게 약올릴 거예요?
그런 뜻은 아니라고요   알았다구
당신 맘대로 해   - 여보!
- 왜?   오늘 모르는 남자와 점심 먹고
극장에도 갔어요   - 즐거웠겠는데
- 의사인데 꽤 괜찮은 남자였어요   - 아주 좋은 직업이지
- 여보...   '내 왕국은 한 마리 말 뿐인가'
리차드 3세가 말했었지?   그래요   그가 한 말이 아니라면
다른 것도 다 엉망이 되는데   언젠가 저녁에
초대했으면 해요   그거 좋은 생각이야
누구를?   알렉이란 의사요
지금까지 얘기했잖아요   - 꼭 저녁에 초대해야 돼?
- 점심 때는 당신이 집에 없잖아요   그렇지   여보...   또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실은 여보...   대체 뭐가 그렇게
웃긴지 모르겠군   당신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웃는 거예요   난 정말 엉뚱하고
바보스러운 여자예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고   크게 부풀려 생각했으니...   당신이 왔을 때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고 했잖아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었다고   이제 알겠어요
네, 알아요   드디어 목요일이 됐고
난 알렉을 만나러 갔어요   꼭 나갈 필요는 없지만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였죠   중요해 보이진 않아도
어쨌든 약속을 했으니까요   난 용케 같은 테이블에
앉았죠   그리고 기다렸지만
그는 오지 않았어요   오케스트라의 여자 단원들은
평소처럼 연주하고 있었죠   난 첼리스트를 봤어요
지난 주엔 그렇게 우스꽝스럽던   그 여자가
전혀 우습지 않았어요   그저 가엾고
애처로워 보였죠   점심을 먹은 후에
병원 근처를 지나면서   혹시 그가 안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올려다 봤어요   무슨 일로 못 나왔는지
많이 궁금했거든요   그 날은 평소보다 일찍
역에 도착했어요   영화도 즐길 수가 없었죠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불과한
영화에 짜증만 났어요   그래서 끝나기도 전에
나와 버렸죠   차를 테이블로 가져가면서
휴게실에서 기다렸는데   실수하는 게 아닌가
싶더군요   알버트, 무슨 짓이에요!   - 나도 모르게...
- 경고하는데 손 단속 좀 잘해요   당신은 화날 때 더 근사해요
마치 복수의 여신처럼..   그럼 복수의 여신이 되어드리죠
마음대로 여기 들락거리지 마요   지난 월요일에 당신이 한 말을
생각하면 싫진 않았을 텐데   지난 월요일은 잊어버려요
난 근무 중이에요   손더스 씨가 들여다 보고
이런 걸 알면 좋으련만   손더스 씨가 만약 창을
들여다 보는 습관이 있다면   들여다 볼 가치가 있는 거나
들여다 볼 거예요   - 부끄러운 줄 좀 알아요
- 좋으면서 화내지 말아요   그렇다고 해두죠
조용히 차나 마셔요   - 다 당신 탓이에요
- 난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난 오늘 밤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점잖게 굴지 않으면 오늘 밤이고
내일 밤이고 안 만나 줄 거예요   - 키스해 줘요
- 안돼요, 저 부인이 보잖아요   - 카운터 너머로 빨리요!
- 알버트, 그만해요!   - 좋아서 그래요
- 제발 이러지 말아요   알버트!
과자를 다 쏟았잖아요   때 맞춰 잘 왔네요
그림 좋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와서 과자나 주워요   어서요!
그렇게 막고 서서 뭐해요!   휴게실을 나왔을 때 그가 타는
기차가 들어오는 게 보였어요   그는 플랫폼에 없었어요
갑자기 다신 그를   못 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팠어요   정말 미안해요, 당신한테
알럴 방법이 없었어요   - 서둘러요, 놓치겠어요
- 갑작스런 수술이 있었어요   식당으로 쪽지를 보낼까 했지만
당신이 당황해할 것 같아서요   아무 말 말아요   빨리요!
기차가 떠나요   이렇게 해명하게 돼서 기뻐요
다신 못 만날 줄 알았는데   말도 안돼요, 어서요!   - 다음 목요일에 봐요
- 네, 다음 목요일요   - 갈게요! 다음 목요일이요!
- 잘 가요!   케치워드 행 열차가
3번 홈에서 출발하겠습니다   별들이 궤도를 이탈하고
온 세상이 불탄다 해도   도널드 덕은
사라지지 않을 걸요   그래서 도널드 덕이 좋아요
활기와 열정이 넘치잖아요   이제 본편 시작하네요, 웃음은
거두고 눈물 흘릴 준비를 해요   "정열의 불꽃"   하지만 그건
형편없는 영화였어요   우린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살짝 나왔죠   죄라도 지은 사람들처럼요   여자 안내원이 이상하게
우릴 쳐다봤어요   아주 화창한 오후였고
기분도 상쾌했죠   우린 식물원에
가기로 했어요   사람들의 행동도
달라질 거예요   날씨가 늘 따뜻하고
밝다면 말이에요   그렇게 움츠러들며
힘들어하지 않을 것 같아요   정말 아름다운
날씨였어요   보트를 타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한 아이는 꼭 바비 같았어요
그 모습에 가책을 느낄 법도 한데   아니었어요, 정말 즐거웠죠
그저 마냥 행복했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알렉이
바라보지만 말고   호수로 들어가 보자고 했어요   배가 다 대여 되었지만, 노인을
설득해서 겨우 한 척 빌렸죠   그 노인은 불안한 눈치였는데
그가 옳았어요   알렉은 무서운 속도로
노를 저었고   난 물에 손을 담갔어요   아주 차가웠지만
느낌이 좋았죠   노 저을 줄 모르죠?   솔직히 털어놔야 겠군요
실은 노 저을 줄 몰라요   당신이 원하지 않았다면
노 저을 일은 없었을 걸요   자, 키를 잘 잡아요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즐겁고 행복하고
해방감까지 느꼈어요   그 모든 게
부끄러운 일이고   당신이 안다면 상처 받을
일들이었지만요   내 마음은 한없이
부풀어 올랐어요   당신하고가 아니라
낯선 사람하고요   - 조심해요! 지나갈 수 없겠어요
- 왼쪽을 잡아당겨요!   세상에...   내가 오른쪽과 왼쪽도
구별 못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영국 사람들은 정신 나간
사람들에게 친절하죠   그 노인도 우리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홍차에 우유
설탕까지 있잖아요   고마워요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당신도 알죠?     알고 있어요   난 당신을 사랑하게 됐어요   네, 알아요   솔직하게 말해 줘요
내 생각이 맞는다고   - 어떤 생각요?
- 당신도 날...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 말이요   -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 왜요?   - 난 당신을 잘 몰라요
- 하지만 사랑하잖아요?   - 네, 그래요
- 로라   이러지 말아요, 이성을 찾아요
내가 이성을 찾도록 도와줘요   이래선 안돼요
지금 우리가 한 말들은 잊어요   - 아니, 이미 늦었어요
- 이러면 안되잖아요?   들어봐요
이성을 찾기에는 너무 늦었어요   우리가 한 말을 잊기에도
너무 늦었죠   이런 말을 했든 안 했든
상관 없어요   우린 알고 있었어요
오래 전부터요   어떻게 그렇게 말하죠?
우린 겨우 4주 전에 만났어요   처음으로 얘기를 나눈 건
지난 주 목요일이었고요   지난 목요일부터...
당신에겐 긴 시간이 아니었나요?   - 솔직히 말해봐요
- 그랬어요   다신 날 만나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죠?   - 하루에도 몇 번씩요
- 나도 그랬어요   사랑해요
당신의 그 큰 눈과   미소짓는 모습과
수줍어 하는 모습, 그리고...   - 내 농담에 웃는 모습들 모두...
- 제발 그만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당신도 날 사랑하잖아요   안 그런 척해도 소용 없어요
사실이니까   네, 그래요   당신이나 다른 누구한테도
거짓으로 꾸미고 싶진 않지만   이제부터 내 속마음을
감출 거예요   이러면 안돼요
모든 게 엉망이 될 거예요   그러니 이런 얘기는
여기서 끝내야 해요   우린 서로 사랑한 만큼
자유롭지 않아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우리가 자제를 하고
분별 있게 행동한다면   아직 시간은 있어요   아니, 시간이 없어요   - 당신 기차예요
- 그래요   플랫폼에
같이 나가 줄게요   알렉, 여기서는 안돼요
누가 보면 어떡해요?   당신을 정말 사랑해요   여보, 음악 좀
줄여야 되지 않겠어?   이봐, 로라   - 네, 왜요?
- 정신이 딴 데 가있군   내가요?
그랬나봐요   음악을 좀 줄여도 괜찮겠지?
귀가 멍멍해서 말야   네, 그럼요   퍼즐이 거의 끝나가니 곧 가서
자자고, 좀 피곤해 보이는데?   천천히 해요
난 편하니까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천천히 해요
난 편하니까   정말 편하다면   정말 편한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걸요   대충 만족하고 평화롭게
지내려고 노력하는 거겠죠   기차가 떠날 때
그 순간의 행복감이   영원하길 바랬어요   그를 태운 기차가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   정말 행복했어요   기차를 타러
플랫폼으로 가는데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죠   기차 안에서도 책을
읽는 척하지도 않았어요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신경도 안 썼죠   비참하고 창피한 마음이
들었어야 했지만 아니었어요   뿌듯한 행복감이 밀려왔어요   사랑에 들뜬
바보 같은 여학생 같았죠   그가 날 사랑한다고 했고
나도 사랑한다고 했어요   그건 사실이었어요
정말 사실이었죠   그가 나를 품에 안는
상상을 했어요   그와 여기저기 멋진 곳을
여행하는 상상도 했어요   터무니 없는 공상이었죠
마치 어린 소녀가...   결혼하는 상상을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어요   열차 창 밖의
어둠 속에서   나무와 전봇대가 어슴푸레하게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어요   그 속에 알렉과
내 모습도 보였죠   알렉과 나...   지금보다 좀 젊었지만
사랑에 빠진 모습이었어요   방해물도 없었죠   우리는 파리에 있었고
오페라 특등석에 앉자   오케스트라 연주가 시작됐죠   그 다음 우린 베니스에 있었고
만돌린 소리를 들으며   곤돌라로 운하의 물결을
가르며 여행했죠   우린 더 멀리까지
여행했어요   내가 가보고 싶던 곳은
다 갔죠   뱃전에 기대서서 바다와
별을 바라보기도 했어요   또 야자나무 사이로   달빛이 비치는 해변을
걷기도 했죠   그런데 야자나무가 운하를 따라
늘어선 버드나무로 변하더니   그 터무니없는 공상들이   다 사라졌어요   그리고 케치워드에 도착해
개찰구에 표를 내고   평소처럼 집으로 걸어왔어요   차분하게 가라앉은 마음으로요   조금도 들뜨지 않았죠   내가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고칠 때 기억나요?   당신은 기억 못하겠지만
난 기억해요   함께 살면서
당신에게 처음   거짓말을 했는데
당신은 몰랐죠   그때부터 였어요
모든 것이 창피했고   죄책감이 들며
두려워졌죠   - 여보, 잘 다녀왔어?
- 당신 왔어요   - 즐거웠어?
- 네, 즐거웠죠   - 뭘 했는데?
- 쇼핑하고 점심먹고, 영화도 봤죠   - 당신 혼자서?
- 네   아뇨, 꼭 그렇진 않아요   무슨 소리야?
꼭 그렇진 않다니?   영화는 혼자 봤지만
점심은 메리와 같이 먹었어요   시댁에 가야 한다고 해서
영화는 같이 못 봤죠   시댁이
밀포드 외곽에 산대요   그래서 메리를 버스 정류장에
데려다 주고 혼자 집에 왔어요   메리를 본 지도 오래됐군
어떻게 지낸대?   좋아 보였는데
좀 살이 찐 것 같아요   안 그래도 예쁘니 서둘러
배고프니까   먼저 내려가요
5분도 안 걸려요   - 번호는요?
- 케치워드 37번 부탁해요   케치워드 37번요?   - 여보세요?
- 메리하고 통화할 수 있을까요?   - 잠깐 기다리세요
- 네, 그러죠   - 여보세요?
- 여보세요, 메리?   로라! 전화를 다 하다니
난 네가 죽은 줄 알았어   그래
오랫동안 못 만났지?   있잖아   우리 집의 평화를 위해서
거짓말 좀 해 줄 수 있겠어?   - 얼마나 나쁜 일인데?
- 내 목숨이 달린 일이야   오늘 쇼핑하러
밀포드에 갔었거든   남편의 생일 선물을 사기로
단단히 맘을 먹고 말야   기압계가 달린 시계를
사고 싶었는데   '스핑크 앤 롭슨'에는
맘에 드는 게 없었어   근데 브로드햄 분점에는
내가 찾는 게 있다잖아   그래서 1시 30분 기차로
그걸 사러 갔었어   - 그래서?
- 할 수 없이 거짓말을 했지   남편이 오늘 즐거웠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너랑 점심을 먹은 후
넌 시댁에 가고   난 영화를 봤다고 했거든   - 프레드를 만나면 그렇게 말해줘
- 그래, 그게 뭐 어렵다고   - 다음엔 네 부탁을 들어줄게
- 언제 점심이나 같이 해   - 그거 좋지
- 다음 목요일은 어때?   목요일은 안돼, 밀포드에
가야 하거든, 금요일은 어때?   - 좋아, 그럼 약속한 거야
- 그래, 좋아   음식이 다 타겠다
빨리 가봐야겠어   그래, 알았어   - 안녕
- 안녕   그 주는 비참했어요   난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죠   한 집에 살면서 나의 변화를
당신이 모르는 게 이상했어요   드디어 목요일이 됐어요   그 날 12시 30분에 병원 앞에서
알렉을 만나기로 했죠   - 잘 지냈어요?
- 잘 있었어요?   당신이 안 올 줄 알았어요
일주일 내내 그 생각만 했어요   그럴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왔네요   바이올렛의 결혼 피로연 이후
로얄 호텔엔 처음이었죠   아주 멋진 곳이었어요   알렉이 샴페인을 주문했죠   내가 반대하자 중년도
한때 라면서 우겼어요   우린 즐겁게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죠   정말 매력적이었어요, 그냥 만나면
당신도 그를 좋아했을 거예요   밖으로 나온 뒤, 그는 날
놀라게 해 줄 일이 있다며   호텔 라운지에서 5분만
기다려 달라고 했어요   그리곤 계단을
뛰어 내려갔죠   존경받는 의사가 아니라
흥분한 남학생처럼요   그때 메리가 사촌과
호텔 식당에서 나왔어요   식당 안에서 내내
나와 알렉을 지켜봤을 거예요   샴페인을 마신 것까지도요   로라! 정말 너였구나
내 사촌이 너라고 했지만...   - 안녕하세요?
- 내가 눈이 안 좋잖아   난 계속 쳐다봤는데도
네가 아닌 줄 알았어   유감스럽게도 난 널 못 봤어
술 마시는 것도 봤겠네?   점심에 샴페인은 과하다고 해도
언제든 괜찮다고 알렉이 말해서   알렉?
알렉이 누구야?   알렉 하비 씨 말야, 오랫동안
알고 지낸 하비 가족 기억하지?   - 아니, 난 모르겠는데...
- 곧 그 사람이 돌아올 테니   가까이서 보면 알아볼 거야   아주 매력적이고 친절한
남자 같던데요   네, 정말 세상에서 제일
친절하고 멋진 의사죠   - 알렉, 메리를 기억하죠?
- 기억이 안 나는데요   소용없어, 처음 보는 분이야
분명히 만난 적 없어   그럴 리가, 그 때 우리 만찬 때
알렉 부부도 있었던 것 같은데   작년 크리스마스 때 말야   - 알렉, 로랜드슨 부인이에요
- 처음 뵙겠습니다   - 날씨가 대단하죠?
- 네   물론 지금 봄 날씨를
기대할 순 없지만요   네, 그래요   이만 가 봐야지, 지금 다른
친척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거든   - 다음에 뵙죠, 하비 선생님
- 안녕히 가세요   - 샴페인 마시던 거 정말 부러웠어
- 잘 가   그럼 이만...   - 너무 놀랐어요
- 신경 쓰지 말아요   점심 먹는 동안 내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어요   잊어버려요, 나가요
깜짝 놀랄 게 있어요   계단 아래에 2인승
승용차가 있었어요   알렉이 오후를 위해
친구한테서 빌린 거였죠   난 기쁜 것처럼 보이려고
애썼지만 잘 안됐어요   그 두 사람이 비웃으며
쑥덕거럴 생각만 났죠   우럴 험담하리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어요   우린 브레이필드에서 멀지 않은
교외로 나갔어요   인적이 드문 곳에
차를 세우고 내렸죠   개울 위에
작은 다리가 있었고   태양은 계속 구름 사이로
나왔다 들어갔다 했죠   우린 다리 난간에 기대 서서
흐르는 물을 봤죠   내가 몸을 떠니까
그가 안아주었어요   - 추워요?
- 아뇨, 괜찮아요   행복해요?   아뇨, 별로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요   그럴 필요 없어요   친구에게 거짓말을 해서
같이 있어도 즐겁지 않은 거죠?   그렇지 않나요?   그런 것 같아요   꼭 물어보고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요?   당신도 그렇죠? 서로에게
어쩔 수 없이 끌리는 거요   내가 그런 것처럼
당신도 그렇죠?   네, 그래요   우린 그 다리에서
오랫동안 있었나봐요   친구의 차고로 돌아왔을 땐
이미 어둑어둑했죠   그때 난 어떤
위기감을 느꼈어요   알렉도 그랬을 거예요   우린 둘 다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았으니까요   알렉이 스티븐의 아파트에
차 열쇠를 갖다놔야 한다며   같이 가자고 했어요   내가 매몰차게 거절하자   스티븐이 늦게 돌아온다고
했지만 난 거절했어요   돌아가야 겠어요
기차를 놓칠 것 같아요   - 어디로요?
- 스티븐의 아파트로요   알렉...   알렉, 난 집으로 가야 해요
돌아가야 해요   차 한잔 주세요   - 어서들 오세요
- 안녕하세요, 부인?   - 위스키 두 잔 주세요
- 규정 시간 외에는 못 팔아요   저 오래된 샌드위치 밑에
숨겨갈 테니 걱정 말아요   이건 오늘 아침에 만든 거고
난 그런 짓은 못해요   - 그러지 말고 줘요
- 6시 이후에 와서 맘껏 마셔요   내 목이 얼마나 타는지
볼래요?   미안하지만 규정 시간 외에
술을 팔면 전 끝이에요   내가 그렇게 되면
속이 시원하겠어요?   딱 한 번만 봐줘요
다신 이런 부탁 안 할게요   - 베럴!
- 네?   - 알버트 씨한테 잠깐 오시라고 해
- 알겠어요   - 누구? 기둥 서방이라도 되시나?
-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 이러지 말고 잘 지내봅시다
- 이러지 말아요   - 이러다 혼쭐날 줄 알아, 불한당들!
- 누가 불한당이란 거야?   당신들! 경찰을 부르기 전에
당장 나가요   다른 손님들한테까지
폐 끼치지 말고요   화가 단단히 나셨군!   - 무슨 일이에요?
- 이 작자들이 행패를 부렸어요   - 우리가 뭘 어쨌다고 이러지?
- 마실 것 좀 달라고 한 것 뿐이에요   - 날 모욕했어요, 알버트 씨
- 우린 그런 적 없어요   - 가벼운 농담을 했을 뿐이죠
- 둘 다 그만 나가요   - 우리도 있을 권리가 있어요
- 내 말 못 들었소, 나가요!   이봐요, 여긴 학교가 아니라
자유 국가요   개찰구에서 당신들 표를 봤는데
기차가 곧 올 거요, 당장 나가요   - 이봐요...
- 쟈니, 가자고, 어서!   - 노땅들하고 말싸움 할 필요 없어
- 나가요   잘 있어요, 할망구   오늘 만든 샌드위치라니
거짓말 작작해요   - 고마워요, 알버트
- 말을 저 따위로 하다니 뻔뻔하긴!   베럴, 조용히 해, 브랜디나
조금 따라와, 마음 좀 가라앉히게   - 난 개찰구로 가야 해요
- 나중에 봐요, 알버트   알았어요   5시 43분 발
케치워드 행 열차가   3번 홈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 집에 가야 해요
- 난 아파트로 다시 갈 거예요   - 이제 집에 가야 돼요
- 난 아파트로 갈 거예요   집에 가야 돼요   실례합니다
깜빡 잊은 게 있어서요   로라!   비가 와서요   큰길로 나가자마자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우산이 없어서
코트가 젖었군요   감기에 걸리면
절대 안돼요   - 내 모습이 정말 흉하군요
- 내가 이쪽에 둘게요   고마워요   빨리 불이
피워올랐으면 좋겠는데   - 장작이 젖었나봐요
- 네, 그런가봐요   좀 앉아요, 로라   기차를 탔다가 다시 내렸어요
정말 바보 같죠?   우리 둘 다 바보예요   - 알렉, 난 여기 있을 수 없어요
- 잠깐만요   잠깐만 있어요
잠깐만요   빨리 나가야 돼요!   부엌 쪽으로 나가요
뒤쪽에 계단이 있어요   - 알렉, 자넨가?
- 그래   - 일찍 돌아왔군
- 몸살 기운이 있어서   수다스러운 언쟁을
좋아하는 로저하고   저녁 먹기로 한 건 취소했어
일찍 좀 쉬려고   - 로저 수다에 이젠 좀 질리거든
- 식사는 어떻게 할 거야?   나중에 먹고 싶으면
식당에 전화하지   - 여긴 서비스 좋은 고급 아파트거든
- 그건 그렇지   갖가지 음식이 다있지   자네를 의심해 본 적이 없었는데
뭔가를 숨기고 있군   - 스티븐, 사실은...
- 변명이나 사과할 필요는 없어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나니까
일찍 와서 미안해   은밀한 환자를 면담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여자들은 대체로
신경이 예민한 편이라   병원 분위기를
불편하게 여기지   복도에 들어섰을 때
황급히 나가는 소리를 들었어   뒷계단으로 서둘러
나갔을 테지   자네 성격에 이런 일도 있다니
정말 놀라워, 알렉   그렇게 당황할 필요는 없어
우린 오랜 친구고   난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니까   정말 미안해
스티븐   자네한테는 이 모든 게
부정해 보이겠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아   오랜 친구 사이에 변명이
필요 없다는 건 자네가 옳아   - 가야겠군, 코트와 모자를 가져오지
- 그래   - 잘 있게
- 내 열쇠를 돌려줬으면 좋겠어   두 개뿐이었는데
안타깝게도 하날 잃어버렸거든   - 화가 단단히 난 거지?
- 화난 게 아니라 실망했네   난 뛸 수 없을 때까지 달리다
가로등에 기대서서 숨을 돌렸죠   큰길로 연결되는 길목까지
와 있었어요   그렇게 뛰는 게 바보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너무나 자존심이 상하고
죽고 싶을 만큼 창피했어요   잠시 거기 서서
숨을 고른 후   역을 향해
걷기 시작했어요   비는 여전히 내렸지만
많이 오진 않았죠   갑자기 집에 갈 수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마음을 가라앉히고 좀더
생각할 시간을 가질 때까진요   그러자 집에서 기다럴 당신과
저녁 준비가 걱정됐어요   그래서 큰길로 나가 담배를 사고
당신에게 전화를 했죠   기억나죠?   여보세요
당신이에요?   네, 저예요   네, 그런데 저녁 식사 때까지
못 가겠어요   루이스 양하고
같이 있거든요   도서관 사서인 루이스 양요
전에 말한 적 있잖아요   지금은 자세히 말할 수 없어요
루이스 양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조금 전에 길에서 만났는데
상황이 안 좋아요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의사가
올 때까지 함께 있기로 했어요   네, 그래도 나한테 늘 잘해 줘서
모르는 체 할 수가 없어요   샌드위치 사먹을 게요, 에델에게는
수프 좀 남겨놓으라고 하세요  
가능한 한 빨리 갈게요   알았어요, 끊어요   당신이 너무 날 믿었기 때문에
거짓말하기가 쉬웠어요   난 아주 쉽게 타락했죠   난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금방
큰 길에서 벗어났죠   나도 모르게 알렉에게
달려갈까봐 두려웠어요   그가 역으로 날 뒤쫓아
올 걸 알았거든요   난 꽤 오래 걸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전쟁 기념관이었죠   시청 바로 맞은편에
있는 거 당신도 알죠?   비는 완전히 그쳤지만
내 마음은 답답하기만 했어요   그래서 의자에 가서 앉았죠   주위엔 아무도 없었고
난 담배에 불을 붙였어요   당신은 여자가 길에서 담배 피는 걸
싫어하지만 그렇게 했어요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한참을 거기 앉아 있었어요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 채...   그런데 좀 떨어진 곳에서
경찰이 왔다갔다 했어요   나를 수상쩍다는 듯이
쳐다보면서요   그러다 결국
나한테 다가왔죠   괜찮으십니까, 부인?   - 네, 고마워요
- 누구를 기다리세요?   아뇨, 아니에요   이런 습한 밤에 이런 데
앉아 있으면 감기 걸려요   지금 가려던 참이에요
기차를 타야하거든요   정말 괜찮으신 거죠?   그럼요, 고마워요
수고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난 태연하게 보이려고 애썼어요
경찰이 보고 있었으니까요   마치 죄인이 된 것 같아   서둘러 큰 길 쪽으로 갔죠   케치워드 행 막차가 출발하기
15분 전에 역에 도착했어요   그때서야 3시간이 넘게
헤매고 다닌 걸 알았죠   하지만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 않았어요   스탠리, 정말 대단해요   스탠리, 정말로요   - 역구내에서 만나요
- 알았어요   - 브랜디 한잔 주세요
- 문닫아야 돼요   알아요, 하지만 아직
시간이 좀 남았잖아요   - '쓰리 스타'요?
- 예   메모지하고 봉투도
좀 주시겠어요?   - 그건 매점에서 사셔야 돼요
- 문을 닫아서 그래요   꼭 필요해서 그러니
부탁 좀 할게요   알았어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 고마워요
- 곧 문 닫는 거 아시죠?   네, 알아요   - 로라, 사방으로 찾아다녔어요
- 제발 가세요, 제발요!   - 기차마다 다 찾아봤어요
- 제발 가세요   - 이런 식으론 못 떠나요
- 떠나야 돼요, 가요   당신 기분이 어떤지 알아요
스티븐이 일찍 온 건 뜻밖이었어요   - 그는 당신이 누군지도 몰라요
- 그 사람이 비웃었겠죠?   - 당신도 내 얘기를 했을 거예요
- 그런 적 없어요   - 당신 얘긴 한번도 안 했어요
- 왜 말을 못했죠?   우리가 얼마나 부정한지
왜 말을 못했죠? 용기도 없이...   - 그만 진정해요
- 사실이잖아요   우린 진심으로 사랑해요
중요한 건 그거죠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들이 있어요   이제 내겐 자존심이나
체면이 남아 있지 않아요   정말 다시는 날
안 볼 수 있어요?  
당신이 도와준다면요   당신을 사랑해요, 로라
내 삶이 끝날 때까지...   나도 알기 때문에
당신을 쳐다볼 수가 없군요   이게 끝이라는 걸 알아요   당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만나는 건 이제 끝이죠   하지만 아직은 안돼요
제발 아직은 안돼요   그래요, 아직은 안돼요   오늘밤 당신의 기분을 알아요
우리가 추하다고 느끼겠죠   우리에겐 각자의 가정이 있고
갈 길도 서로 달라요   죄책감이나 부정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럴 수 없고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치뤄야 할 대가는 너무 크죠   그 모든 걸 알아요
나도 당신과 똑같으니까   이제 나를 봐도 돼요
괜찮아졌어요   우리 더 신중해지도록 해요
마음의 준비도 하고요   아무리 용기를 낸다 해도
이런 갑작스런 이별은 잔인해요   서로에게 그토록
큰 상처를 낼 순 없어요   알았어요   - 이제 가야겠어요
- 알아요   - 아직은 안돼요
- 네, 아직은 안돼요   - 문 닫을 시간이 지났어요
- 아, 그래요?   - 문을 잠가야 해요
- 알았어요   - 로라, 꼭 약속해줘요
- 무슨 약속요?   지금 아무리 비참하고   생각이 많아도   - 다음 목요일에 만나 줘요
- 어디서요?   12시 30분에
병원 앞에서요   - 알았어요, 약속해요
- 당신한테 할 얘기가 있어요   - 떠나는 것에 대해서요?
- 그래요   어디로 갈려구요?
병원을 포기할 순 없잖아요   제의를 받은 게 있어요
당신에게 말할 생각도   받아들일 생각도 없었는데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인 것 같아요   - 어디로요?
- 멀리 요하네스버그로요   - 알렉...
- 형님이 거기 계세요   그곳에 새 병원이 생겼는데
내가 와줬으면 해요   사실 아주 좋은 기회예요
가족들도 다 데려갈 생각이죠   그 동안 어떻게 할까
많이 고민했어요   아직 아무에게도 얘기
안 했어요, 아내한테도요   당신을 떠나는 건
견딜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이 떠나야겠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스탠리!   언제 떠나는데요?   얼마 안 남았어요
2주쯤 후에 떠나요   - 정말 금방이네요
- 내가 여기 있기를 바래요?   - 그 제의를 거절할까요?
- 바보 같은 말 말아요   -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할게요
- 그런 말 말라니까요   케치워드 행 열차가 3번
홈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나한테 화난 거 아니죠?   네, 화 안 났어요   지금은 아무 생각도 없이
피곤할 뿐이에요   - 용서해 줄래요?
- 뭘 용서하죠?   모든 걸요
우선 당신을 만난 것부터   눈에서 잡티를 빼준 것과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에게 큰 고통을 준 것도요   용서할게요
당신이 날 용서한다면요   목요일이에요!   이 모든 게
일주일 전이었어요   바로 얼마 전이었다는 게
정말 믿어지지 않아요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날이었어요   우리 평생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는 날이죠   약속대로 12시 30분에
병원 앞에서 그를 만났어요   오늘 12시 30분에요   바로 오늘 오후였어요   우린 또 교외로 나갔지만
오늘은 빌린 차가 아니었어요   차 안에서 난 가끔 그에게
담뱃불을 붙여 줬어요   얘기는 많이 하지 않았죠
모든 감각이 마비된 것 같았어요   우리는 시골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전에 갔던 그 개울의
다리로 갔죠   전에 함께 갔던
그 다리로요   마지막 몇 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갔어요   역으로 함께 걸어가면서
난 생각했어요   이것이 알렉과의
마지막이고   앞으로는 그이 없이 이 모든 걸
혼자 봐야 한다고요   하지만 그런 생각 때문에   알렉과의 마지막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어요   로라,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뭐든 할 말이
생각났으면 좋겠어요   - 애쓰지 말아요, 괜찮아요
- 당신이 먼저 타는 걸 보고 갈게요   - 아뇨, 내가 그쪽 플랫폼으로 갈게요
- 알았어요   우리 서로 다시는
만나지 못할까요?   글쎄요, 몇 년 동안은
못 만나겠죠   그때 쯤엔 애들이
다 자랐겠죠?   우리 애들이 만나서
알고 지낼 수도 있을까요?   내가 가끔 편지를
쓰면 안될까요?   안돼요, 알렉
우리 약속했잖아요   알았어요
당신을 정말 사랑해요   내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해
당신을 사랑해요   죽고 싶어요   죽을 수만 있다면요   죽으면 날 잊게 되잖아요
난 기억되고 싶어요   알아요
나도 기억되고 싶어요   - 이제 몇 분 안 남았어요
- 로라! 이게 웬일이야   녹초가 될 정도로
쇼핑을 했더니   발도 아프고
목은 바짝바짝 타   카페에 들어가 쉬고 싶었지만
기차를 놓칠까봐...   - 힘들어!
- 이 분은 하비 선생님이셔   안녕하세요? 죄송하지만
차 한 잔 갖다 주시겠어요?   - 카운터까지 갈 기운이 없어서요
- 네, 그러죠   운명은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에게 너무 잔인했어요   달리를 만난 거예요
짜증날 만큼 수다스러운 달리가   몇 분 안 남은 우리의 마지막을
다 망쳐버렸죠   떠들어대는 달리의 수다가
하나도 귀에 안 들어왔어요   - 너무나 당황스러웠어요
- 설탕을 안 넣었군요   - 스푼에 있습니다
- 알렉은 점잖고 더없이 정중했어요   아무도 알렉의 속마음은
알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때...   - 당신이 탈 기차예요
- 네, 알아요   - 우리와 같이 안 가세요?
- 전 반대 방향인 철리로 가요   - 그렇군요
- 전 일반 개업의입니다   - 다음 주에 아프리카로 떠나실 거야
- 대단하시네요   5시 40분 발 철리, 리 그린   랭던 행 열차는 4번 홈입니다   - 가보겠습니다
- 그러세요   안녕히 가세요   잠깐 그가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었어요   그리고 떠나가 버렸어요   멀리, 영원히
내 인생 밖으로요   뛰어가지 않으면 놓칠 거야
건너편 플랫폼까지 가야하니   기차 얘기를 하니까
브로드햄 역의 일이 생각나네   달리의 수다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가 탄 기차가 출발하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죠   기차가 출발했어요   난 속으로 말했어요
그는 가지 않았어   마지막 순간에 용기를 내
떠나지 않을 거야   뭔가 깜빡 잊은 채하며
금방 휴게실로 다시 올 거야   그가 돌아오길 기도했어요   한 순간 만이라도
그를 다시 볼 수 있기를요   하지만 그 순간은 오지 않았죠   우리 기차인가봐
저 기차가 케치워드 행인가요?   - 아뇨, 급행 열차예요
- 항구로 가는 거야   그럼 여긴
정차하지도 않겠네   - 초콜릿 좀 주세요
- 밀크 초콜릿으로요?   프레드, 난 죽고 싶었어요!
정말 죽고 싶었어요!   난 승강장 가에
떨면서 서 있었어요   하지만 그럴 수 없었죠   그럴 만한 용기가 없었어요   당신과 애들 때문이라면
좋겠지만   아니었어요   다른 생각은 하나도 없었어요   더 이상 불행해지지 않도록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면 하는   간절한 바램뿐이었어요   난 돌아서서...   휴게실로 돌아갔어요   그때 거의 정신을
잃었던 거예요   여보!   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행복한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요   내가 도와 줄 일이라도 있어?   네, 항상 당신이 도와 줘요   당신이 멀리 간 것만
같았는데   네...   나에게 돌아와 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