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은행

 

감독/ 지아장커

 

상해전기

 

2009년 상하이

 

전 53년 8월
상하이 태생이고

 

모두 4식구예요

 

천 단칭
작가 겸 화가

아버지는 광동에서
공부하러 왔고

 

어머니는 저장 태생이니

 

우리도 이주민인 셈이죠

 

상하이 골목
어디를 가든

 

주민 대부분이 상하이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에요

 

가장 즐거웠던 기억은

 

뛰어 놀던 거예요

 

제일 기억에 남을 만한
시기를 꼽자면

 

문화대혁명 전후겠죠

 

그때가 여덟 살 때부터
열 여섯 살 즈음이라

 

다 기억나요

 

문화대혁명 때문에
이웃 간에 서로...

 

존중하던 풍토가
갑자기 사라졌어요

 

어느 집이 스파이고
어느 집이 자본가이고

 

어느 집이 혁명가인지
알 수 있었어요

 

재수 없으면 끌려나와
거리를 행보했으니까요

 

우리 집 맞은편에
자본가가 살았어요

 

건물 전체가
그 사람 거였는데

 

문혁 땐 한 층만
남았어요

 

한 번은 그 집 사람들이

 

밥 먹는 걸 훔쳐봤는데

 

마호가니 식탁에 하인에
그릇도 고급이었어요

 

문혁 전까지는
계속 그렇게 살았어요

 

골목마다 '짱'을 하는
아이가 있었어요

 

패거리 중
제일 싸움을 잘하고

카리스마도 있으면서
통솔력도 있었지요

 

그때는 누구랑
같이 노느냐에 따라

 

괴롭힘을 당할지

 

괴롭힐지 결정됐어요

 

또 춘추 전국 시대처럼

 

다른 골목에서
원정을 오기도 했어요

 

예를 들어 상대는
장자 공원 패거리고

 

우리가 다종리 패라면
우리도 똑같이

 

쉬동리로 원정을
가는 거죠

 

골목마다 마을마다

 

'짱'으로 불리던 아이가
꼭 한 둘씩 있었어요

 

항상 서로 싸우다가

 

잘 지내다가
또 싸우곤 했어요

 

어렸을 때 기억은
그런 것뿐이에요

 

다들 어디 갔지?

 

나하고 한판 붙을 사람!

 

이리 와

 

올라와서 붙자!

 

빨리 올라와

 

내가 누군 줄 알고?

 

난 캉취엔이야!

 

들어와서 찍지 그래?

 

양 샤오포
경제 관리 과학자 '양 싱포'의 아들

 

내 아버지 양 싱포는

 

중국 민권 보장 동맹을
만들어서

 

국민당에게 잡혀간

 

공산당원과
민주투사를 도왔고

 

그 일로 장개석의
불만을 사서

 

특수 부대에 의해

 

1933년
6월 18일 오전

 

암살 당하셨다네

 

아버지 사무실은
정원이 딸린 건물인데

 

건물을 나가서
골목을 꺾어

 

큰길로 나가자마자
차가 느려지더니

 

갑자기 폭발음이
들리는 게야

 

나는 타이어가
터졌나 보다 하고

 

고개를 돌려 봤지

 

그때 우리 차가
컨버터블 형이었는데

 

바닥만 철제였고 천장은
천으로 되어 있었지

 

천장은 천 한장으로

 

골격으로만 되어 있는
뻥 뚫린 구조라서

 

누구든 총을 쏘면
맞을 수밖에 없었던 게지

 

그런데 커브를 틀자마자
차가 멈춰 서기에

 

왜 서나 싶었는데

 

운전기사가 뒷쪽으로
뛰쳐나가는 거야

 

혼자 도망치려고

 

기사도 이미
배에 한 방

 

팔에 한 방,
피투성이었어

 

난 너무 놀라서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네

 

바로 그때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정신을 잃었다네

 

그리고 잠시 후에
정신이 들었는데

 

나는 바닥에
누워 있었고

 

아버지가 내 위로
쓰러져 계셔서

 

아무리
일어나려고 해도 안 돼

 

그때 열네 살이었으니
힘에 부쳤던 게지

 

중학교 2학년짜리가
겨우 겨우 일어나서

 

아버지를 깨웠지만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네

 

그 사건 후에

 

송칭링은 그래도 끝까지
밀고 나가자고 하더군

 

책임자가 없어졌으니
누군가 맡아야 되잖나

 

그래서 송칭링은
린위탕 박사에게

 

부탁했다네

 

박사는 죽을 게 뻔하다고
거절했지

 

결국 아무도 안 나서서
그 자리는 계속 비었지

 

송즈원에 대한 얘기는

 

비서인 탕위루와

 

기차역에서
나오던 때부터 시작하지

 

때가 여름이라
옷이 비슷했네

 

흰색 양복에
파나마 모자를 썼지

 

기차역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는데

 

그 두 사람이
출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누군가 총을 쐈네

 

송즈원은 그 즉시
바닥에 엎드려서

 

모자가 땅에 떨어졌지

 

송즈원은 살았지만
비서는...

 

계속 서서 걸어가다가
총을 한 방 맞고 말았네

 

그 한 방에 죽었다네

 

그 후로는...

 

비서 부모도 살아 있고

 

결혼한 지도
얼마 안 됐던 터라

 

뱃속에 아이도 있어서

 

어려움이 많았을 걸세

 

비서, 송즈원, 내 아버지
셋이 미국 학교 동창이네

 

셋이 후이하이 로드에서
커피를 즐겨 마셨지

 

나도 아버지랑 자주 갔고

 

그땐 후이하이 로드에
커피숍이 적어서

 

D.D.S 외에
몇 군데뿐이었지

 

장 위엔순
인공 조미료의 왕 '장 이윈'의 손자

 

지금은 별로
유행하진 않지만

 

우리 아버진
요트가 있었어

 

그 요트에는
큰 주방도 있었고

 

식당도 있었고
침실도 있었지

 

외국인들이 집배라고
부르는 요트처럼

 

집하고 똑같아

 

아버지는
그 요트 외에도

 

쾌속정도 있었는데
정말 빨라

 

요트 뒤에 끌고 다녔는데
경주용은 아니고

 

자동차처럼 앞뒤로
세 명씩 탈 수 있었어

 

방향타도 뒤에 달렸고

 

그걸 바이두교부터
탔는데

 

타월지로 된 옷을
입어야 돼

 

파도가 들어와
몸이 다 젖으니까

 

또 에어컨도 있었어

 

30년대에 말이야

 

경극을 하신 것도

 

전문적으로 한 게 아니라
취미로 하는 건데도

 

리허설에
유명 배우를 초빙했어

 

배우들한테는
보수도 조금 주면서

 

보러 오는 사람들한테는
조미료도 주고

 

모기향도 줬어

 

관객이 드는 것도

 

경극 때문이 아니라

 

조미료도 준다고 하고

 

모기향도 준다고 하니까
왔던 거야

 

아버지는 경극도
좋아하셨지만

 

외제도 좋아했어

 

옷은 전통 복장을
입으셨지

 

아버지는 즐길 줄 아는
분이셨어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이런 말을 하셨어

 

즐길 만큼 즐겨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

 

홍위병이 남기고 간
유일한 물건이

 

아트 엔 크래프트 사의
최고급 침대뿐이었어

 

아버진 그것마저도
팔았어

 

평생 누릴 것 다 누렸다고
다다미에서 자도 좋대

 

♪당신이 나를 사랑할 수
있을지 알고 싶었어요

 

♪당신이 나를

 

♪제일 좋아하는지
알고 싶었어요

 

♪내가 우리 사랑에
실수를 한 건가요?

 

조부님 성함은
장이윈인데

 

처음에는 꽤 큰
간장 공장을 경영하셨지

 

나중에는 화학 공장으로
전환했어

 

텐추 조미료 공장을 세워
조미료를 만들었는데

 

마침 일제 불매운동을
하던 때여서

 

조부님의 사업이
큰 성공을 거뒀어

 

일본의 "아지노모토"도
중국 시장에서 물러났어

 

하지만 원료를
일본에 의존하던 터라

 

나중에 텐원 화학이란
회사를 설립했어

 

텐추 조미료에 원료를
공급한다고 "텐원"이야

 

또 텐원은 재활용품을
써야 했기 때문에

 

텐리 니트로겐 공장을
설립했지

 

30년대에 조부님이
세 회사를 세우자

 

사람들은 조부님을
"산업의 아버지"라 불렀어

 

사업이 성공하시자
마침 항일전쟁이 터졌어

 

조부님은
은 십만 냥으로

 

독일 시먼스 제
전투기를 사서는

 

"텐추"란 이름을 붙여
기증했지

 

♪당신이 나를 사랑할 수
있을지 알고 싶었어요

 

♪당신이 나를 제일 좋아
하는지 알고 싶었어요

 

♪내가 우리 사랑에
실수를 한 건가요?

 

♪알고 싶지만

 

♪당신만이
대답할 수 있지요

 

♪왜 내가 당신의 사랑을
기대하게 내버려 뒀나요

 

♪ 난 알고 싶었어요...

 

《수쥬 》
로우 예 감독, 1999

 

쑤저우 호수 2009년

 

1842년 8월 29일
중영 간 남경조약 체결로

 

상하이도 대외 무역의
개항장이 된다

 

1843년 1 1월 17일
영국 대사 발포르가 부임

 

상하이는 정식으로
개항한다

 

조차지가 늘어나고
폭력조직이 성행한다

 

16 부두

 

내 아버지 두웨성은

 

두 메이루
상해 범죄조직원 '두 웨성'의 딸

당신의 조직에 대해서는
전혀 말씀을 안 하셨고

두 메이루
상해 범죄조직원 '두 웨성'의 딸

항상 이 말만 하셨어

 

밥 먹기 전에 항상
'잘 먹겠습니다' 하고

 

젓가락은 끝쪽을 잡고
건네라고

 

그게 조직답다고

 

하루는 아버지와
차를 타고

 

푸싱루 라파이예트
조직으로 갔어

 

보디가드 여러 명이

 

자동차 문 앞에 선 채
건물 앞까지 운전해 갔고

 

철문이 열리자
전화를 하더니

 

문이 열렸고
아버지가 들어가셨어

 

문이 닫히자마자
보디가드들은

 

암살 당할까 봐
쌩 하고 사라졌지

 

아버지가 14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할머니도 곧 돌아가셨어

 

관을 살 돈도 없어서
시신을 멍석에 말아서

 

진흙탕에 버렸어

 

가오교 아래 호숫가의
도로 부근이었는데

 

나중에 나무가
자라더니

 

그 나무뿌리가

 

할아버지 시신을
감싼 거야

 

풍수가가 그걸 알고
아주 좋다고 했어

 

아버진 어렸을 때
아주 개구장이였어

 

완모린의 아버지가
거뒀는데

 

나쁜 짓만 하고

 

장난기가 심해서
다들 아버지를 싫어했어

 

그런데도 아이들은
아버지를 잘 따라서

 

아버지는 거지 왕초라도
왕초가 좋다는 분이야

 

외할머니 예명이
란잉이셨는데

 

엄마와 이모도 같이
순회공연을 다니셨지

 

이모 예명은 위란
엄마 예명은 위잉이었어

 

그러다 상하이에
공연하러 왔는데

 

아버지가 보러
가셨던 거야

 

상하이 텐찬 극장에서
공연했어

 

그 뒤 아버지는
엄마에게 잘 보이려고

 

황진롱의 며느리에게
부탁을 했어

 

이름이 리즈칭이야

 

사실 황진롱 아들은
일찍 죽었어

 

둘이 정혼한 뒤에
죽었어

 

죽은 사람 위패 들고
결혼한 거야

 

남편은 없지만
며느리가 된 거지

 

그래도 집안일은
다 자기가 관장해

 

리즈칭이
아버지 쪽 중매인이 되고

 

엄마 쪽은
엄마 대모가 계셨는데

 

그분이 중매인이 됐지

 

할머니는 엄마를 정실로
보내고 싶어 하셨어

 

엄마도 첩은 싫다고 했고
아버지도 받아들였어

 

아버지 첫째 부인이
아버지를 많이 사랑해서

 

결혼할 때 전재산을
아버지에게 줬어

 

두 사람은 결혼 증명서도
있었는데

 

나중에 둘째 부인과
셋째 부인이 들어와서는

 

첫째 부인을 괴롭혔어

 

그래서 엄마가 결혼할 때

 

결혼증명서를 엄마에게
결혼 선물로 줬어

 

엄마는 그렇게
정실부인이 됐고

 

다른 부인들과도
사이좋게 지냈지

 

그때 사람들은 상하이를
떠나 홍콩으로 갔어

 

우리도 떠나기로
결정하고

 

1949년 5월 27일에

 

하이옌 호를 타고서

 

우송 부두를 출발했어

 

배 위에서
선신 비단 공장을 보면서

 

상하이를 떠나게
될 줄 몰랐다고 하신 분이

 

왜 프랑스로 갔는지
난 아직도 모르겠어

 

홍콩에서도 잘 지냈거든

 

아버지는...

 

여권을 백 사십 장을
만들려고

 

타이완으로 갔는데
15만 달러가 필요했어

 

그런데 가진 건
10만 달러뿐이야

 

돈이 모자라잖아

 

하루는 아버지가 이랬어

 

내가 죽지 않으면
너희가 다 죽는다

 

그리고는 하루가 다르게
건강이 나빠지더니

 

병이 안 나으셨어

 

푸동

 

와이탄

 

난징 로드
츠둔 영화 촬영소

 

우리 아버지
왕 샤오허는

 

1942년 5월 4일에
입당해서

 

공산당 지시로 양수푸
발전소로 들어가셨어

 

1948년 국민당이
연달아 패퇴할 때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아주 격렬했었고

 

국민당에서는 아버지를
주시하고 있었지

 

발전기를 파괴했다는
죄를 씌워

 

4월 21일에
아버지를 체포했는데

 

왕 페이민
중국 지하 공상당원 '왕 샤오허'의 딸

9월 27일에
사형집행 선고를 받았어

왕 페이민
중국 지하 공상당원 '왕 샤오허'의 딸

9월 27일이면
우리 엄마는...

왕 페이민
중국 지하 공상당원 '왕 샤오허'의 딸

나보다 17개월 먼저
태어난 언니가 있고

 

내 생일이 48년
10월 24일이니까

 

9월 27일에는
배가 남산만했겠지

 

우리 엄마는
만삭의 몸으로

 

어린 언니를 안고

 

할머니를 모시고
감옥으로 갔어

 

그 모습을 본 군중들이
모두 격분했어

 

그날 티란챠오 일대
감옥 주변은

 

교통이 마비됐고

 

경찰들은...

 

굵은 채찍으로
엄마를 때렸어

 

쫓아내려고

 

하지만 엄마는
꿈쩍도 안 했지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

 

감옥에 공고가 붙었어

 

명령이 하달되지 않아
사형집행을 중지한다고

 

그때 아버지는
양수푸 감옥에

 

수감 중이었는데

 

티란챠오 감옥의
특별 형사법정으로

 

이송되셨어

 

형사 재판을
비밀리에 진행해서

 

국민당이 일처리를
쉽게 하려고 그런 거지

 

아버진 유죄판결을 받고
티란챠오 감옥에서

 

9월 30일 오전에

 

사형집행을 받았어

 

아버지는...

 

9월 30일 오전
10시 반

 

티란챠오 감옥에서
돌아가셨어

 

그날 홍콩의
"다공바오" 기자가

 

인터뷰를 하러 와서

 

사진을 많이 찍었어

 

그때 찍은 사진이
아주 많아

 

아버지가 감옥에서
걸어 나와서

 

법정에 서 계신 것도
찍었고

 

난 아버지를
그 사진들을 보고 알았지

 

내가 태어났을 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라

 

아버지를 한 번도 못 봤어

 

사진만 보고 아는 거야

 

아버지 사랑을 못 받아서
너무 보고 싶어

 

왕 샤오허

 

아버지 돌아가시고 엄만
자살을 하려고 했어

 

이웃은 두 딸을 생각해서
죽지 말라고 말렸지

 

죽으려고 했는데

 

마비가 와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어

 

자살을 할 수가
없었던 거지

 

그때 방금 보여 준
사진 속에 있던 지하당원

 

그 아저씨가
집으로 찾아와서

 

엄마한테 이렇게 말했어

 

무슨 수를 쓰든
두 딸을 잘 키워라

 

아이들 몸에는 샤오허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그 아이들을
버리고 가면 안 된다

 

엄마는 그 말을 듣고
이를 악물고 우릴 키웠어

 

우릴 버리고
죽지도 않으셨고

 

8달 동안
너무너무 힘들었어

 

1945년 5월 25일에
해방이 됐는데

 

해방군이 난징 로드로
들어온다는 거야

 

그때 엄마는
정신이 이상해져서

 

아버지를 찾아다니셨어

 

공산당이 왔으니
아버지도 오실 거라고

 

우리 집이 산마 로드와
한코 로드 부근이라서

 

난징 로드와 가까워

 

엄마는 해방군이
행렬 뒤쪽으로

 

포로를 끌고가는 걸 보고

 

행렬을 따라 가면서
아버지를 찾았어

 

와이탄까지

 

<상하이 전투>
왕빙 감독, 1959

 

상하이 해방을 축하하자

 

마오 주석님 만세!

 

해방군을 환영합니다!

 

상하이 해방은

 

제국주의의 침략세력이
이 땅에서 사라졌으며

 

우리 동포들의 영원한
독립을 의미합니다

 

전쟁에서 패한 놈들은

 

강대한 동포들 앞에서
벌벌 떨고 있습니다

 

1949년 5월 27일
상하이 해방

 

북쪽은 식량난이 심해

 

팔로군 십 수 부대가
모두 남하해서

 

우리 부대도 포위 당했어

 

우리가 버틸 수
있을까요?

 

<홍시>
왕 퉁 감독, 1996

 

왕 퉁 / 영화감독
군 고위직 간부 '왕 종리엔'의 아들
내가 수저우에서 소학교
1학년을 마쳤을 때

왕 퉁 / 영화감독
군 고위직 간부 '왕 종리엔'의 아들
그때가 대략
1949년이었고

 

1946년...

 

1948년이구나
그 당시에는

 

국공 전쟁이
아주 격렬해서

 

휴교 하자마자
바로 상하이로 이사했지

 

그때는 이유를 몰랐지만
지금은 알아

 

우리 집 같은 대가족이

 

스무 명 넘는 사람들이
왜 상하이로 갔는지

 

타이완으로 이주하려고
상하이로 갔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지

 

배를 타려고 갔던 거야

 

우리 가족은 상하이의
어느 공원에서 살았는데

 

전부 담으로
둘러쳐져 있었어

 

국민당 간부들이
그 부근에 살았거든

 

가족들이 전부
공원에서 천막을 치고

 

배를 기다렸어

 

그때의 기억들은

 

96년에 만든 "홍시"라는
영화에 모두 담겨있어

 

나중에 종싱이라는
배가 도착했는데

 

배도 아주 큰 데다
검사도 까다로워서

 

우리가 갔을 때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서

 

배 타기가 무척 힘들었어

 

우리 형제가 열 명인데

 

아버지는 멀리
앞쪽에 계셨고

 

어머니와 외할머니
하인 수십 명과

 

아버지 부관이
배를 타게 도와줬지

 

배에 오른 뒤에
우리를 잃어버릴까봐

 

부모님도 그때
헤어졌거든

 

외할머니가 우리를
밧줄로 엮어서

 

구슬 꿰듯 아이들을
전부 한데 묶으셨어

 

아이들을 줄줄이 꿰고
웬 할머니가 지나가니까

 

군인들이
우릴 지켜봤어

 

어머닌
아버지 부관이랑

 

승선 수속을
밟고 계셨고

 

우리는 밧줄에 묶여
배를 탔지

 

미아가 안 되려고

 

한 사람씩 밧줄 꼭 잡고
올라가렴

 

내 아버지 성함이
왕 종리엔인데

 

황푸 군사학교
1기 졸업생이지

 

그리고 국공 전쟁이
발발했어

 

적군 중에 황푸 군사학교
동창들이 많았지

 

전쟁은...
금세 지쳤지

 

같은 중국인끼리

 

싸우고 죽였으니까

 

이념 전쟁이었잖아

 

우리는

 

쉬벙 결전이라고 하는데
그쪽은?

 

후이하이 전투...

 

그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아버지는 제4단장
총사령관이셨는데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

 

'류등을 막아라'

 

류 보청과

 

등 샤오핑

 

그들의 부대는

 

다비에산에 있었고

 

아버지 임무는
그들을 막는 거였어

 

그런데...

 

누구 전화야.

 

생각을 해봐
다 아는 사이고

 

친한 사람끼리
전쟁을 한다는 걸...

 

2009년 타이완

 

미국에서
8년 동안 일하고

 

1975년에
타이완으로 돌아왔네

 

칭화 대학으로

 

아버지는 항일전쟁 때
후방에 계셨고

 

리 자통
칭화대 교수
어머니는 우리를 데리고
상하이를 떠나지 않았지

 

상하이 사람들도
거의 다 남았고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네

 

전쟁에서 이기고
우리 아버님은

 

다시 공무원으로
돌아가셨어

 

쉬저우로 발령 받고

 

일제 강점기 때의 업무를
인수하는 일을 하셨어

 

아버지는 오래 못 하시고
그만두셨지

 

그 일이라는 게

 

일제시기에 부정 축재한
사람들과 관련이 있었고

 

우리 아버지는

 

청탁이나 뇌물을
받는 분이 아니셨으니

 

사실 상 할 수가
없었던 거지

 

결국 상하이로
돌아오셨어

 

지금도 기억나네

 

한 번은 누가 과자 상자를
갖고 와서

 

우리 형제들이
모두 기뻐했었어

 

어머니께서
과자상자를 열었는데

 

그 안에는 금괴가
가득 들어있었지

 

그 당시 우리 옆집에

 

신시어라는 회사의
사장이 살고 있었고

 

옆집의 옆집에는

 

탕은보 장군이 살았는데

 

1949년 '상하이
공격'이 시작됐을 때부터

 

탕은보 장군 집 문 앞에

 

항상 군인이
보초를 서고 있었어

 

하루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날 데리러 오신 거야

 

교장 선생님이 아버지께
왜 오셨냐고 물으셨지

 

아버지는 오늘 보니

 

항상 탕은보 집 앞에 있던
보초병이 보이지 않는데

 

무슨 일이 터진 것 같으니

 

집에 가는 게
안전할 것 같다고 하셨지

 

그러자 교장 선생님은
학생들을

 

모두 집으로 보내셨어

 

그런데

 

사람들이

 

탕은보 집이 비었다는 걸
알아버린 거야

 

우리 집에서 창문으로

 

그 집이 다 보였네

 

사람들이 탕은보 장군
집으로 몰려가서는

 

그 집의 가구며 모든
세간을 싹쓸이 해가더군

 

장 신이
번역가 겸 작가

우리 외할머니는

 

증궈판의 막내딸이셨고

 

아버지는 우페이푸의

 

수석비서셨는데

 

사고를 당해서
객사하셨어

 

누가 총을 쏜 거야

 

매일 그 사건이
신문에 났는데

 

살아계신다고 했다가
또 돌아가셨다고 했다가

 

한 석 달 가량

 

우리 집에서는
그 사실을 몰랐어

 

남북이 왕래가
완전히 끊겼었거든

 

그러다 이모부 한 분이

 

꿈에 아버지가 피를
철철 흘리면서

 

절을 하시더래

 

그게 우리들을
부탁한다는 뜻이었나 봐

 

그래서 그 이모부가 나랑
내 동생한테 잘해주셨어

 

난 대학 다닐 때까지
애인이 없었어

 

어머니는 딸을 빨리
시집보내고 싶으셔서

 

중매쟁이한테
부탁을 하셨어

 

난 선 보러 갈 때마다
어머니랑 크게 싸웠지

 

우리 남편하고
사촌오빠랑

 

또 두 사람이 더 있는데

 

넷이 미국에 있을 때

 

사촌오빠는 결혼해서
부인이랑 같이 갔고

 

나머지 셋은 백수였는데
차를 한 대 사서

 

다섯 명이서 미국 전역을
놀러 다녔어

 

사촌오빠가 올케 언니를
쫓아다닐 때

 

배를 타고 베이징까지
찾아갔는데

 

사촌오빠가

 

하늘의 달빛이니

 

가장 밝은 별이니

 

말을 얼마나 잘했다고

 

결혼하고
애가 둘이 생기니까

 

오빠도 언니를 대하는
태도가 변해

 

한 번은 삼촌 집에서
밥을 먹는데

 

언니가 나한테 반찬 좀
집어 달라고 하니까

 

오빠가 "넌 손이 없냐"
이러는 거야

 

그러니 여행을 다닐 때도
사이가 별로 안 좋았어

 

어느 정도였냐면

 

남편이 보다 못해서
언니를 챙겨 줄 정도였지

 

언니가 기분이 좋아서

 

중국으로 돌아가면

 

좋은 여자
소개시켜 준다고 했대

 

그리고는 나랑 내 동생을
식사에 초대했는데

 

그 남자 세 명이랑
미스 우란 여자도 있었어

 

우린 그렇게 처음 만났어

 

그 뒤로 남편이 찾아와서
같이 뭔가 하러 가자는데

 

난 둘이서만
만나는 게 어색해서

 

사촌오빠랑 같이
몇 번 어울렸지

 

시간이 많이 흘러서

 

크리스마스였나...

 

새해 전날 밤이었구나

 

사촌오빠 집에서
파티가 있었어

 

그 날 낮에
사촌오빠의 동생이

 

극장에서 남편과
우연히 만났어

 

"상하이에 있었네? "

 

그리고는 파티에
초대를 한 거야

 

그렇게 다시 만나서

 

밤 12시가 넘으니까

 

오빠가 어디
놀러 가자고 해서

 

다들 나가 버리고

 

집에는 나랑
남편만 남게 됐는데

 

남편이 한사코 나더러
편지를 쓰라는 거야

 

나는 안 쓴다고 했고
그렇게 한 시간을 다퉜어

 

밖에선 택시가
한 시간을 기다렸고

 

남편이 먼저 편지를 써서
나도 답장을 하게 됐지

 

호우 샤오시엔
영화 감독

상하이는 "해상화" 때문에
처음 접했고

호우 샤오시엔
영화 감독

그 전에는 상하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어

 

로케이션 헌팅하러
갔을 땐

 

건물들이 막 헐리기
시작하고 있어서

 

안 되겠다 싶었지

 

결국 대만에서 스튜디오
촬영을 하기로 결정했어

 

"해상화 전기"의 원작은
정말 훌륭해

 

예를 들면 고급 요정의
장삼(일패기생)이라든가

 

작가가 일찍이
경험한 거라서

 

등장인물들 모두
개성이 살아있어

 

옛날에는 가문의
법도에 따라

 

남자들도
연애를 하지 않았고

 

결혼은...

 

어른들이 OK하면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살고

 

성생활은
문제가 아니었거든

 

그때는 연애를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고

 

해방 이후에
점차 유행한 거지

 

그래서 여자들과의
쫓고 쫓기는 감정싸움은

 

아주아주 대단하고

 

재미있는 소재라고
생각해

 

《해상화》
호우 샤오시엔 감독, 1998

 

19세기, 청 말 무렵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
장저 일대의 부유층이

 

상하이 조차지로
피난 온 것을 계기로

 

상하이는 크게
번성하게 된다

 

상하이
이위엔(예원)

 

《중국》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 1972

 

1972년에 지도자
동지가 나를 찾더니

 

안토니오니라는 유럽의
유명한 감독이 있는데

 

그 사람이 영화를 찍으러
중국으로 온다는 거야

 

저우언라이 총리가
초청해서 오는 건데

 

나더러 잘
접대하라는 거야

 

주 치엔성
영화 스태프

 

둘째 날
촬영 도중이었어

 

난징 로드에서
촬영했는데

 

내가 봐도 안 좋은 것만
찍는 것 같은 거야

 

낙후된 모습만
골라서 찍어

 

속으로 상당히
불만이 많았어

 

계속 그러니까
나도 맞섰지

 

계속 이런 식이면
촬영 중지라고

 

감독은 자기가 보기에
전부 멋진 광경인데

 

뭐가 안 좋냐는 거야

 

자기는 좋아보여도

 

내가 보기에는
더 좋은 게 있는데도

 

좋은 건 안 찍고

 

안 좋은 것만
골라서 찍더라고

 

좋다는 기준이
달랐던 거지

 

2년이 지난 뒤에 갑자기

 

우리 대대장님이 날
방송국으로 데려가더니

 

분명히 얘기했어

 

안토니오니의 영화
"중국"을

 

중앙 문혁반

 

장칭, 장춘챠오
야오원위엔

 

이런 사람들이 보고는

 

반공, 반중화, 반인민적인
독초라고 했다는 거야

 

나중에 들었지만
"4인방"이

 

그 일을 구실로 총리님을
끌어내리려고 했던 거지

 

조사가 계속되고
답변도 계속하고

 

심지어 그때

 

여기서 토론회도 열렸어

 

영화 속에 나왔던
장소를 전부 찾아갔어

 

상하이 정유소도 가고
골목도 가고

 

현장에서 비판회도 열고

 

스파이, 반역자
반혁명가...

 

온갖 딱지가 다 붙더라고

 

이제 서른 살밖에
안 된 젊은이가

 

정치에 대해
뭘 알겠나?.

 

안토니오니가
뭘 찍었는지

 

영화를 못 봐서
지금도 몰라

 

그 영화에서 말하려는 게
도대체 뭐냐고!

 

55년인가 56년 초
노조 총연맹에서

 

나더러 토론회에 가래

 

황 바오메이
방직공장 노동자

그래서 갔더니
류수조우 부시장이

황 바오메이
방직공장 노동자

문 앞에 마중 나와서는

 

주석님은 벌써
도착하셨다고

 

난 노조 주석인 줄 알고
서둘러서 들어갔지

 

코트를 옷걸이에
벗어 놓고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마오 주석님이랑

 

시장님이 계신 거야

 

너무 놀라서
꿈을 꾸는 건 줄 알았어

 

멍해져서는
주석님 손을 잡고

 

계속 주석님 얼굴 보면서

 

악수만 했어

 

완전히 정신이
나갔었어

 

주석님은 내가
손을 안 놓으니까

 

그만하고 앉으래

 

그리고는
어디 출신이냐고 물어서

 

'상하이 푸동 출신입니다'

 

그랬더니
'좋은 곳이네요'

 

또 직장이 어디냐고 해서
'방직공장 다닙니다'

 

그랬더니
훌륭한 일 한다면서

 

모든 인민의 옷은
우리한테 달려있으니

 

열심히 일해서
옷을 만들라고 하셨어

 

그리고 9시 쯤
공연을 보러 갔어

 

바로 여기 극장에서
공연을 봤어

 

주석님은 공연을 보시고
난 그 옆에 앉았지

 

주석님은 안내 책자까지
읽으시니까

 

공연하는 사람도
긴장해서 죽을 지경인지

 

재주넘기 하던 사람이
무대 밖으로 떨어지고

 

일어나서 다시
재주를 넘고 그랬어

 

59년엔 세계청년
학생축전에 나갔어

 

비엔나에서 열렸는데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이 가다가 멈춰서

 

중국 사람을
구경하는 거야

 

실물을 보니까
얼마나 예뻤겠어

 

그 전까지는
박물관 사진으로

 

변발하고 전족을 한
중국인만 보다가

 

난 완전히
달랐을 거 아냐

 

중국인을 보려고 비엔나
전역이 떠들썩했었어

 

전부 엄지를 치켜세우고

 

'중국 만세'
감탄을 하더라고

 

그땐 내가 중국인이란 게
너무 자랑스러웠어

 

돌아와서도
열심히 일했고

 

그러다 나중에는
영화도 한 편 찍었어

 

황 바오메이 동무

 

절 찾으세요?

 

그쪽이 황 바오메이?

 

그런데요

 

억압 받고 무시당하던
한 사람이

 

인민에게 존경 받는

 

노동자의 모범이
된다는 것은

 

큰 변화가 아니겠는가!

 

《황 바오메이》
시에 진 감독, 1958

 

난 열네 살에
이 공장에 들어왔는데

 

그땐 일본인의
위펑방직이었고

 

해방 후에는 상하이
17 공장으로 바뀌었어

 

60년에는
공부하러 갔다가

 

돌아온 뒤에도 계속
이 공장에서 일했어

 

87년에
퇴직할 때까지

 

1월에 누나한테서
편지를 받았어요

 

할 말이 있으니 상하이로
와 달라는 내용이었지요

 

누나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서

 

기차를 타고
상하이로 갔어요

 

그때 누나는
상하이 음대 학생이었고

 

학교 기숙사에서 살아서
난 학교로 찾아갔지요

 

누나는 나를 보더니
아주 기뻐하면서

 

날 피아노 룸으로
데리고 갔어요

 

그리고는 문을 닫더니
우는 거예요

 

난 바로 알 수 있었어요

 

어머니께 일이
생겼다는 걸

 

어머님 성함은
상관 윈주이고

 

장인에서 태어나셨어요

 

1938년 항일전쟁 때
상하이로 피난을 왔지요

 

웨이 란
영화배우 '상관 윈주'의 아들

그 당시 어머니는
열아홉 스물 정도

웨이 란
영화배우 '상관 윈주'의 아들

현재의 젊은 여성들처럼
상하이에서 살기 위해

 

일자리를 찾고 계셨어요

 

그러다 후이하이 로드의
허 씨 사진관이란 곳에

 

접수원으로 취직했어요

 

사진관 사장 허조밍은
카메라 감독이면서

 

자기 사진관도 열었는데
어머닌 거기서 일하면서

 

사진 찍으러 온 유명
배우들도 많이 보셨어요

 

진옌이나 구예루도
거기서 사진을 찍었대요

 

어머니가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하니까

 

표준어만 배우면
될 수 있을 거라고 했대요

 

그래서 어머닌 진짜로
연기학원에 다니셨어요

 

《무대 자매》
시에 진 감독, 1964

 

저 사람 왕년의 연극배우
상수이화 아냐?.

 

상관 윈주/ 영화 배우

 

어머니의 첫 번째 남편은

 

중학교 때
미술선생이었는데

 

장다옌이라고

 

그 사람은 어머니가

 

영화배우가 되는 걸
싫어했어요

 

그 문제로 싸우다가
결국은 이혼했지요

 

그 뒤 야오커와 결혼해서
누나가 태어났고

 

극단을 결성해서
북쪽으로 갔어요

 

텐진과 베이징 일대에서
9개월 동안 공연하고

 

오고 가기 불편해서

 

어머니는 누나도
데리고 갔는데

 

상하이에 돌아와 보니

 

야오커한테 다른 여자가
생겼던 거예요

 

결국 어머니는 야오커와
결혼생활을 정리했어요

 

그 뒤엔 잠시 란마와
동거를 했었고요

 

1950년
란신 극장에서

 

"홍기가"를 공연할 때

 

내 아버지
청수야오와 만났고

 

51년에 내가 태어났어요

 

어머니는 1968년
11월 22일

 

살던 건물의 4층에서
뛰어내리셨어요

 

새벽에 옥상에서요

 

그때 밑에서는
채소시장이 열려서

 

어머니는 마침
광주리에 떨어지셨는데

 

아직 숨이 붙어 있어
말도 할 수 있었지만

 

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늦었던 거예요

 

게다가 어머니는
반혁명가로 찍혀서

 

아무도 손을 안 써서
더 그랬어요

 

그렇게 어머니는
세상을 뜨셨어요

 

누나가 날 불렀던
다른 이유는

 

누나는 그 당시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농촌으로 연수를 받으러
상하이를 떠나야 했어요

 

일단 상하이를 떠나면
어떻게 될지 몰랐어요

 

나와 누나는
아버지는 달랐지만

 

사이가 무척 좋았어요

 

그래서 작별을
하려고 한 거죠

 

멀리 떨어지면 다시
못 만날 수도 있으니까

 

그럴 때
어머니 일이 터졌고

 

누나는 장례식 이야기도
들려줬어요

 

그 당시
누나의 남자친구였던

 

옌카이라는 음대생이
도와줬다고 했어요

 

옌카이는 나중에
1971년...

 

문혁 중에
계파 다툼으로

 

'최고 반혁명 분자'로
찍혀

 

24세 젊은 나이에
감옥에서 자살했어요

 

그것도
큰 충격이었을 텐데

 

누나도 한 달 동안
옥살이를 했어요

 

옌카이와 가장
친했다는 이유로

 

그리고는 한 달 뒤
감옥에서 나왔는데

 

너무나 초췌하게
변한 거예요

 

그때 누난
자주 아버지를 만났어요

 

두 사람도
사이가 아주 좋았거든요

 

누난 아버지를
친아버지로 여겼고

 

아버지도 누날
친딸처럼 대했어요

 

부녀 사이가
아주 좋았죠

 

그러다가
한 남자를 알게 됐는데

 

열 살 연하와
사랑에 빠진 거예요

 

그러다 임신을 했고

 

누나는 상하이를 떠날
결심을 했어요

 

직업을 구할 수 없어서
살 길이 막막했거든요

 

그 남자의 어머니가
홍콩에 살았고

 

누나 아버지도
홍콩에 살아서

 

둘이 홍콩으로
가기로 하고

 

일단 선전으로 가서
기회를 엿보기로 했어요

 

그런 와중에
남자는 체포되고

 

누나는 만삭의 몸이라
호텔에 있어서

 

잡히지 않았죠

 

하지만 나중에
도망치려 했다는 이유로

 

학교에 불려갔을 때

 

누나는 비판 받았고
일자리도 주지 않았어요

 

아이가 태어났고

 

누나가 병원에 있을 때
아이가 입양됐어요

 

그로부터 얼마 뒤

 

누나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난징 로드와

 

장닝 로드 교차로에서
사고가 났어요

 

큰 트럭에 치어서

 

그 자리에서
즉사했어요

 

2009년 홍콩

 

내 성은 먀오

 

모우로 알고 있지만
먀오라고 읽어

 

내 본명은
먀오 멍잉이고

 

우리 집은 형제들이
아주 많아

 

여자 형제 중에
내가 셋째야

 

남녀 합하면 다섯째고

 

웨이 웨이
영화 배우
왜냐하면 그 당시
우리 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는
차를 만드는 분이셨어

 

사업가셨는데

 

중산에서 상하이로
이사를 했어

 

내가 고등학교
졸업했을 때

 

일본과 미국 간의
태평양 전쟁이 터졌어

 

그리고 그때는...

 

공부하기 싫었고

 

마침 황조린과
페이무 극단에서

 

배우를 모집하기에
오디션을 봤지

 

그때 그 자리에

 

상하이에서 제일 큰
영화사 사장

 

이름이 우 싱자이인데

 

염색공장 사장이야

 

그런데 예술을
아주 좋아했어

 

우리가 무대에 오르면
페이 감독이 칼린으로 가

 

칼린극장 무대 앞에 서서
출연료는 얼마나 줄 건지

 

그렇게 결정했어

 

또 영화사가 있으면
스튜디오가 필요하다고

 

우 사장이 쉬자후이
스튜디오도 샀어

 

상하이에
있었으니 알겠네

 

류지에가 책임자였고

 

그때 마침 차오위의
영화를 준비 중이었는데

 

차오위 (완자바오) 말이

 

극본을 다 못 써서

 

약 한 달 반 정도
기다려야 한다는 거야

 

황조린 영화도 끝났는데
어쩌겠어?

 

우 사장은
페이무 감독을 불러서

 

촬영소가 하루 비면
유지비가 엄청난데

 

그렇게 둘 수는 없으니

 

대체용 영화라도
만들라고 한 거야

 

"작은 마을의 봄"은
그렇게 나왔어

 

사람들이 모두 감독한테

 

웨이웨이는 저우웬 역에
안 맞는다고 했어

 

내가 어떻게
그 역을 하겠냐고

 

감독님은 그 사람들한테
웨이는 당신들 생각보다

 

여성스럽다고

 

감독님은 날
믿어주셨어

 

하루는 감독님이
내게 이런 얘기를 하셨어

 

내가 지금부터 하는

 

이 말만 기억해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되"

 

"그칠 줄 알라"

 

이제는 말할 수 있지만
특별임무도 맡기셨어

 

리웨이는
연기도 처음이고

 

나이도 아주 젊었지

 

그때까지 연애도 한 번
못 해봤을 거야

 

감독님이 아는 한은
없었어

 

감독님 말씀이

 

연기에 몰입하려면
실제 감정이 생겨야 한다

 

그래야 작품이
산다고 하셔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사고를 치고 말았지

 

촬영이 끝나면
감정을 추스려야 하는데

 

리웨이는 그걸 못했지

 

난 리웨이를 피해
홍콩으로 도망 온 거야

 

어찌할 바 모르는
내 마음이

 

부서져 텅 빈
이 성벽과 같군요

 

내가 함께 떠나자고 하면

 

나와 같이 가겠소?

 

정말인가요?

 

리 웨이 웨이 웨이
영화배우 영화 배우

 

《작은 마을의 봄》
페이 무 감독, 1948

 

"작은 마을의 봄"은

 

평이 아주 나빴던
영화였어

 

페이 밍이
영화감독 '페이 무'의 딸

나라가 어려울 때
이런 영화는 너무

 

부드럽다는 거지

 

게다가 어떤
평론가들은

 

회색분자라고까지 했어

 

하지만

 

그건 페이 무를
몰라서 하는 말이지

 

아버지의 속마음을

 

1949년 연초부터

 

분위기가
심상찮았어

 

물가도 오르고
금화를 사용했는데

 

돈을 들고 나가면
금세 다 써버렸어

 

아주 힘든 시기였지

 

그때 "다공바오"에서
일하던

 

둘째 삼촌이

 

홍콩에도 사무실이
있었어

 

홍콩에서 "다공바오"를
출간하려고 했는데

 

아버지한테
그 일을 부탁했어

 

삼촌은 아버지한테

 

아예 아이들도 데려와서
홍콩에서 살라고 했어

 

처음 홍콩으로 왔을 땐

 

계속 살 생각은
전혀 없었어

 

상황이 안정되면
상하이로 가려고 했지

 

단순하게 생각했었어

 

집을 구하고
정착을 하고 나서

 

나도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아버지도
상하이로 돌아가셨다가

 

베이징에 가셨어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하지만 그때도
상황이 안 좋아서

 

뭔가를 하려고 해도...

 

제도도 없었고
체계도 안 잡혀 있었어

 

게다가 매우 불미스러운
일도 겪으셨고

 

아버지에 대해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서

 

제작 여건도 그렇고

 

사람들 반응도 그렇고

 

아버지가 느끼기에...

 

절망적이었지

 

그래서 아버지는
홍콩으로 돌아왔어

 

51년에 돌아가셨으니
몇 년 만이야.

 

어쩌겠어?

 

가족이 앞으로 홍콩에서
살아야 하는데

 

나는 아직 어렸고

 

아직 학생이었고

 

그런데 둘째 삼촌이
이러셨어

 

그럼 이렇게 하자

 

상하이에는 우리가 살던
집이 그대로 있으니

 

상하이로 돌아가라고

 

내가 장녀라서
동생들을 데리고

 

떨어지지 않게
끈으로 묶어서

 

상하이로 돌아갔는데
너무 그래서...

 

베이징 인민
예술대학으로 갔어

 

'인민 예술' 대학

 

내가 거기도 갔었어

 

그때 총장이
진즈광이었는데

 

총장 말이
입학은 가능하다

 

연극과도 가능하고

 

경극과나
음악과도 가능하다

 

단, 자백서를 써야한다
이러는 거야

 

자백서를 왜 쓰나?.

 

자백할 게 뭐 있다고

 

당시 상하이를 떠난
이유가 뭔지 쓰래

 

그 사람들이 알고 싶은 건
하나야

 

아버지도 홍콩에서
베이징으로 갔을 때

 

'왜 상하이를 떠났냐'는
질문을 받았어

 

"애국하지 않았다"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더군

 

시간이 그렇게 흘렀는데
같은 걸 묻다니

 

안 되겠다

 

그래서 다음 날 떠났어

 

베이징에서
광저우로 갔지

 

광저우에서

 

홍콩으로 가려고

 

그때 이미
통행증이 필요한 지라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홍콩으로 밀항했어

 

오늘 어떤 영감과
차 마시다

 

내 몸이 안 좋은 걸 보고
함께 미국으로 가자네

 

《아비정전》
왕 가위감독, 1990

 

나도 안다

 

이 나이가 되면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나기 힘들지

 

내 본적은 우시이지만

 

상하이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상하이 사람이지

 

판 디화
영화배우

사람들한테도
본적이 우시란 말 안 해

판 디화
영화배우

상하이 사람이라고 하지

 

홍콩에 와서 처음에는

 

광동어를 배우기 싫었어

 

나는 그저
나그네일 뿐

 

홍콩에는
잠시만 머물다가

 

돌아갈 줄 알았지

 

난 엄마와 함께
홍콩으로 왔어

 

왜냐 하면

 

내가 항상 말해왔듯이

 

난 '구시대'가 좋지만
딱 한 가지 싫은 게 있어

 

아버지에게는 엄마 외에
다른 여자가 있었어

 

첩 말이야

 

그 당시 중국인은
참 이상했어

 

중국 남자들은 사실...

 

어느 정도 잘 살게 되면

 

아내를 두셋이나
거느리려고 했어

 

외국인도 마찬가지지

 

다만 결혼을
하는 게 아니라

 

연애를 하는 거지만

 

중국인은 둘째 부인
셋째 부인을 두는 거지

 

마침 그때
우리 엄마는

 

1949년 상하이에
큰 사건이 있었고

 

시대가 변해서 날 데리고
홍콩으로 온 거야

 

아버지가
선택을 해야 했어

 

여러 부인중에
누굴 데리고 살지 말야

 

그건 좋은 일이었어

 

어쨌든 엄마는 자진해서

 

아버지를 떠나겠다고
말하고는

 

홍콩으로 온 거야

 

홍콩에서 엄마는
장사를 시작하셨지

 

이름도 재밌어
보따리 장사

 

'보따리 장사'라고
들어봤나?.

 

물건을 조금씩
들고 다니면서 팔지

 

살만했어

 

원래 합법적인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불법은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불법이라고
잡아가는 거야

 

벌금 내고 나니
한푼도 없어

 

그래서 내가
노래를 불렀지

 

난 정말
효녀라고 생각해

 

이유가 뭐냐면...

 

엄마 시대에는
불행한 일들이 많았어

 

여자들은 불행했었지

 

엄마도 어린 나이에
결혼했고

 

아버지는 얼마 안 지나
엄마에게 질려서는

 

기생집에 드나들었어

 

엄마는 교육을 못 받아서
세상일은 잘 몰랐지만

 

아주 똑똑하셨어

 

혼자서 많은 걸
깨우치셨지

 

자수나 뜨개질
요리나 기타 등등...

 

전통적인
양가댁 규수셨어

 

하지만 엄마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으셨지

 

나이가 들어서는

 

어느 정도는
행복하셨다고 생각해

 

나랑 엄마는 나이 차이가
많지 않거든

 

16살 차이밖에 안 나

 

우린 자매처럼
때론 친구처럼

 

뭐든 다 털어놓고 지내서
엄마에 대해 아는 게 많아

 

그래서인지 난
내가 늙은 게 좋아

 

내가 나이가 있기 때문에
여러 경험을 했으니까

 

나는 주위의

 

젊은이들을
아주 사랑해

 

내가 말하는 사랑이란
젊은이들에 대한

 

관심이야

 

젊은이들은 이런 마음이
생기기 어렵지

 

자기가 직접 겪지 않으면
잠깐만...

 

♪내 마음 속에

 

♪ 그대의 미소

 

♪늦가을에 그대

 

♪ 아무에게도
뺏길 수 없어

 

♪봄날의 빛을

 

♪ 아무에게도
뺏길 수 없어

 

♪내가 가진 희망

 

오래 안 불렀더니
가사를 잊었네

 

홍콩, 빅토리아 항구

 

2010년 상하이

 

선인&완궈
증권 주식회사

 

창장증권

 

양 화이딩
증권 투자가

지금은 내가
잘 나가는 것 같지만

양 화이딩
증권 투자가

88년까지만 해도
집에는 기둥밖에 없었어

 

찢어지게 가난했어

 

아주 구차했어

 

그러다 보니 하루빨리
내 처지를 바꾸고 싶었어

 

생각해 봐

 

우리 집에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부부가 둘이 벌어도
월급이 72위안이야

 

게다가 부부가
떨어져 살았으니

 

한 달에 저축할 수 있는
금액이 4위안

 

1년에 48위안밖에
안 되는데

 

그 돈으로
차표 사면 없어

 

그래서 88년 3월 28일에

 

사표냈어

 

그리고 4월 21일에
증권시장에 뛰어들었지

 

상하이에서 제일 큰
증권회사로 갔어

 

시캉 로드
101번지에 있었어

 

국채증권 가격을 봤더니

 

오전에
104위안이었어

 

그땐 장기 채권 거래소가
전국에 6군데 있었고

 

상하이 당보에 매일마다

 

개장가와
마감가가 실려서

 

도서관에서
시장조사를 했지

 

그래서 알아낸 게
안후이 허페이였어

 

아침 개장가가 92위안
마감가가 96위안인 거야

 

밤에 기차를 타고
허페이로 내려가서

 

국채를
2만 위안어치 샀어

 

96위안에 사서

 

상하이로 와서는
112위안에 팔았지

 

하루만에
14위안이 오른 거야

 

2만 위안어치 샀으니
2천 8백 위안 번 거지

 

그날 난 잠을 설쳤어

 

38년 동안 밤잠을 설친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

 

그 당시 상하이의

 

1일 국채 거래량은
2백만 주였는데

 

내가 하루에 70만 주
거래했어

 

난 상하이 경찰서로 가서
경찰 2명을 요청했어

 

사람들한테는 내가

 

개방 후에 부자가 됐는데

 

타지에서 사업을 하려니
무서워서 그런다고 했지

 

그랬더니 경호업체에서
둘을 보내주더라고

 

한 달에 월급
6백 위안 줬어

 

당시에는 수표도 없었고
신용카드도 없어서

 

상자에 백만 위안
넣어두려니

 

너무 불안한 거야

 

기차 탔을 때
소지품 검사해서

 

상자 가득한
현금을 보면

 

사람들이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

 

범죄자라고 여기겠지

 

한 번은 뤄양의 여관에서

 

상자를 여는데
누가 그걸 본 거야

 

그때는 백 위안짜리도
없어서

 

10위안 5위안짜리로
50킬로가 넘었어

 

금세 경찰차가 오더니

 

소환장을 주더라고

 

왔다 갔다 하는 데도
번거롭고

 

그래서 소개장을 써서
보디가드한테 들려줬지

 

그 뒤로 번거로운
일이 없어졌어

 

상하이 월드
엑스포 공원

 

엑스포 성공
조국에 영광

 

저는 1982년
9월 23일

 

상하이 진산구
팅린에서 태어났어요

 

한 한
작가 겸 카레이서

내 여자 친구는
명문고에 들어갔는데

한 한
작가 겸 카레이서

난 못 갈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열심히
특기를 찾았어요

 

그때 내가
빠르다는 걸 알았어요

 

전에는 몰랐었거든요

 

어쨌든 체육 특기생으로

 

명문고에
입학하게 됐어요

 

솔직히 특기가
두 가지 있었어요

 

하나는 달리기이고

 

또 하나는 글짓기였는데

 

쉬는 시간을
포기하기 싫어서

 

수업시간에 글을 썼어요

 

그래서 낙제한 과목이
꽤 많아요

 

솔직히 말하면
그 땐 내 머리만 믿고

 

한두 달 공부하면 금방
성적이 오를 줄 알았어요

 

그래서 공부를 안 했는데

 

고등학교 수학은

 

중학교 때 수학처럼
간단하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포기했죠

 

학교 다니기도
힘들었어요

 

선생님이 금방이라도
'넌 퇴학이야'

 

이럴 것 같았어요

 

그래서 학교에서
쫓아내기 전에

 

자퇴서를 냈어요

 

선생님이 학교 그만두고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고

 

어떻게 살 거냐고 물어서

 

원고료 받아서
살 거라고 했어요

 

선생님들이
다 웃더라고요

 

나도 똑같이 웃어줬어요

 

베이징에서
처음 원고료를 받았어요

 

"삼중문"은
초판만 3만 부 찍었고

 

고료로 받은 3만으로는
차를 살 수 없었어요

 

며칠 지나자 출판사에서
매진됐다고

 

2만 부 더 찍자는 거예요
그럼 총 5만 위안인데

 

그 돈으로도
새 차를 살 수가 없어서

 

중고차를 사려고 했는데

 

또 5만 부 더 찍어서
총 10만 위안이 생겼어요

 

그래도 내가 사고 싶었던
차는 살 수 없었어요

 

푸캉, 산타나, 제다 차가
성능이 좋았는데

 

돈이 모자라더라고요

 

베이징 지프
2020을 사려니

 

얼만지 모르겠고

 

그때는 홈페이지도
없었거든요

 

한 20만은 하겠다 싶어서

 

20만 부 팔고 나서
차를 사러 갔어요

 

20만 위안 들고요

 

그 차를 사는 게
제 꿈이었거든요

 

어렵사리
대리점을 찾아서

 

이 차 얼마냐고 물었어요

 

그 질문을 할 때
너무 떨렸어요

 

직원이
4만 위안이라는데

 

순간 망설였어요

 

인간은 참 간사한 것이
19만이면 샀을 텐데

 

그리고나서

 

한참 고민한 끝에
푸캉 차를 샀어요

 

정말 체계적으로
조사를 했었는데

 

제다는 동북 지방
택시라서 안 되겠고

 

산타나는
상하이 택시인데

 

택시 브랜드를
몰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개성 없어 보이니까

 

푸캉을 사서
베이징에 갔는데

 

알고 보니 푸캉이
베이징 택시더라고요

 

당시 상하이의 레이싱 팀
폭스바겐 333은

 

중국 최고의
레이싱 팀이었는데

 

사장 말이 내가 합류하면
최소한 홍보는 될 테니

 

성적은 기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 차가 내가 처음
경주에서 탄 차예요

 

그 해에만 두 번
우승했어요

 

만약 우승을
아주아주 많이 해서

 

언젠가 내 자신이
만족을 하게 되면

 

사람들에게 나는 사실
작가라고 말할 거예요

 

이곳은 세계 금융 센터
최상층입니다

 

백 층 높이
474미터이며

 

현재 세계 최고의
전망대로...

 

감독/ 지아장커

 

자막/ 김 태 훈

 

자막제공/ 부산국제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