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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선셋”

 

“셰익스피어 서점”

 

“저자와의 대화, 오후 5시 반”

 

자전적인 얘긴가요?

 

글쎄요, 모든 건

 

결국 다 자전적이죠

 

우린 각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니까요

 

토머스 울프의 소설

 

'천사여 고향을 보라'에서

 

울프는 이렇게 말했죠

 

'모든 인간은
각자 쌓은 체험의 총체이며'

 

'작가는 자신이 겪은 그런 체험을'

 

'글로 적을 뿐이다'라고

 

제가 살아온 삶은 평범했어요

 

총이나 폭력과는 거리가 멀었죠

 

정치 음모나 헬기 사고와도요

 

하지만 모든 삶은 드라마입니다

 

전 삶 속의 만남에 관한 얘길

 

글로 써보고 싶었습니다

 

제 삶에서 가장 소중한 건

 

만남의 인연이었거든요

 

그런 인연의 소중함을

 

글로 써보면 어떨까 해서...

 

질문에 대답이 됐나요?

 

더 구체적으로 묻죠

 

정말 프랑스 여자와

 

하룻밤을 지냈나요?

 

제게 그건

 

- 중요치 않아요
- 그랬다는 얘기군요

 

프랑스에 왔으니
그렇다고 해두죠

 

감사합니다

 

결말이
모호하게 끝나는데

 

주인공들이

 

약속처럼 6개월 뒤

 

다시 재회합니까?

 

약속처럼요?

 

그 대답은 한 것 같은데요

 

각자의 취향대로 판단하실 일이죠

 

댁은 재회한다고 믿으시죠?

 

이분은 아니신 거고요

 

질문한 분은

 

- 모르시겠다는 거고
- 작가님 결론은요?

 

실제로 만났나요?

 

실제로요?

 

노인들 표현처럼

 

그걸 밝히면
김빠진 맥주가 되죠

 

이제 마지막 질문하세요

 

다음 작품은 뭐죠?

 

아직 모르겠지만

 

생각하는 건 있습니다

 

팝송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고 싶어요

 

노래 한 곡에 모든 걸 담는...

 

어쨌든 한 남자가 있는데

 

원래 그의 꿈은

 

사랑과 모험을 찾아 남미를

 

유랑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의 현실은 딴판이죠

 

좋은 직장, 멋진 부인

 

모든 걸 가졌지만
그에겐

 

모든 게 무의미할 뿐입니다

 

행복은 소유가 아닌

 

행동속에 있죠

 

어느날 그가 식사를 하는데

 

그의 어린 딸이
식탁에 올라갑니다

 

여름 원피스를 입은 딸은

 

팝송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하죠

 

그 순간 그는

 

16세 소년이 됩니다

 

여자친구가
그를 집까지 태워준 날

 

둘은 서로에게 순결을 주죠

 

차에선 같은 곡이 흐릅니다

 

그녀는 차 지붕 위에 올라가

 

춤을 춥니다

 

딸과 똑같은
그녀의 환한 표정이

 

너무나 사랑스럽죠

 

그는 그 순간 두 곳에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의 모든 삶이 겹치면서

 

시간은 그냥 흐르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죠

 

삶의 모든 순간엔

 

다른 순간들이

 

겹쳐있다는 겁니다

 

그런 걸 써보고 싶어요

 

작가분은 곧
공항으로 가야 합니다

 

모두 감사합니다

 

작가께도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작품으로 또 뵙죠

 

감사합니다
시간이 얼마 남았죠?

 

7시 반엔 떠나야 해요

 

- 늦어도!
- 네

 

- 안녕
- 안녕

 

- 잘 지냈어?
- 응, 자긴?

 

나도 잘 지냈지

 

커피 한잔 마실까?

 

비행기 타야 하잖아

 

아직 시간이 좀 있어

 

- 좋아
- 말하고 올게

 

밖에서 기다릴게

 

커피 마시고

 

- 15분 전까지 올게요
- 사인 다 했어요?

 

- 네
- 혹시 모르니까

 

기사명함 가져가요

 

짐은 차에 실어 놓을게요

 

감사합니다

 

기사가 누구죠?

 

- 여긴 웬일이야?
- 나, 파리에 살잖아

 

벌써 나와도 돼? 끝났어?

 

응, 어제 여기서 잤어

 

- 그래?
- 응, 다락방에서...

 

- 기분 묘하네, 잘 지내?
- 응

 

- 정말 반가워
- 나도...

 

- 카페로 갈까?
- 그러지

 

좀 걸어가야 해

 

아까 봤을 때 정말 놀랐어

 

나, 온 거 알고 왔어?

 

자주 오는 서점이야
분위기가 편해

 

벼룩은 많지만...

 

난 어제 고양이와 잤어

 

서점에서 포스터 봤어

 

자기가 여기 온다는...

 

자기 책에 관한 기사를 봤을 때

 

- 왠지 친근감이 들더군
- 왠지?

 

사진 보기 전엔 자기인 줄 몰랐어

 

혹시 책 읽어봤어?

 

 

처음엔 무척 놀랐지

 

두 번이나 읽었어

 

- 그래?
- 응

 

아냐, 참 좋던데?
낭만적이야

 

그런 책 별로였는데, 아니

 

자기 작품은 정말 좋았어
축하해

 

- 잠깐만
- 왜?

 

카페 가기 전에
물어볼 게 있어

 

뭔데?

 

6개월 뒤 비엔나에 갔었어?

 

- 자긴?
- 못 갔어, 자긴 갔었어?

 

- 꼭 알고 싶어
- 왜? 안 갔다며?

 

갔었어?

 

아니

 

다행이다

 

그러게, 다행이지?

 

한 사람만 갔다면
바람 맞았을 테니...

 

꼭 가려고 했는데

 

사정이 있었어, 그날이

 

할머니 장례식이었거든

 

- 부다페스트 할머니?
- 기억해?

 

- 다 기억해
- 맞아, 책에도 썼지

 

비행기 표 예약한 뒤

 

부음 소식이 와서
장례식에 갔지

 

정말 안됐네

 

그래
자기도 안 갔다고?

 

왜? 왜 안 갔어?

 

난 사정 때문에 못 갔지만

 

자긴 이유가 뭐야?

 

왜?

 

맙소사

 

자기는 갔었구나?

 

어머, 어쩜 좋아?

 

웃는 거 용서해

 

날 원망했겠네?

 

- 날 쭉 원망했지? 그렇지?
- 아냐

 

- 맞아
- 아냐

 

이젠 원망하지 마

 

그래, 원망 안 해
다 이해해

 

기껏 갔다가 바람맞은 뒤

 

폐인처럼 살았지만 뭐 어때?

 

- 농담이야
- 그만해

 

너무 화났었겠다
정말 미안해

 

맹세코 나도 가고싶었어

 

하지만 이해해줘야 해

 

알아
무슨 일이 있나 보다 했어

 

내 잘못이 커

 

전화번호를
받아 뒀어야 했는데...

 

그러게...

 

난 자기 성도 몰랐어

 

우린 두려웠던 거야
맨날 연락하다가 서서히

 

- 식어질까봐
- 식을 틈이 없었지

 

그건 그래

 

그때 만났더라면...

 

우린 잘됐을 거야

 

비엔나에선

 

- 며칠 있었어?
- 2, 3일

 

딴 여자 만났어?

 

응, 그레천이란
멋진 여자

 

걔 얘기도 책에 나와

 

농담이야, 기차역에도 갔었어

 

호텔 전화번호도 써놓고 왔지

 

- 머저리처럼...
- 이쪽이야, 전화 왔어?

 

응, 창녀들 몇 명 한테서...

 

창피해, 묻지마

 

맙소사, 미안해

 

며칠 헤매다가
집으로 돌아갔어

 

비행기 표 때문에
아버지한테 2천 달러를 꿨는데

 

프랑스 여자를
조심하라고 하시더군

 

프랑스 여자가 왜?

 

미국 서부 토박이라

 

편견이 있으셔

 

책에 그렇게 쓰지
'프랑스 날라린 안 왔다'

 

썼어

 

- 썼어?
- 자기가 왔을 경우의

 

버전으로 써봤지

 

어떻게?

 

왜?

 

우린 열흘간 미친 듯 섹스를 해

 

프랑스 날라리답군

 

그리곤 서로가

 

맞지 않는 걸 깨달아

 

- 현실적이네
- 그 버전은 거절됐어

 

책이 안 팔릴 테니까?

 

그래, 그거지

 

어쨌든 성공했네

 

- 베스트셀러 작가로...
- 그렇지도 못해

 

명색은 그렇지만

 

독자는 내 책보단 '모비딕'을 읽어

 

난 자기 책이 좋던데?

 

- 고마워
- 그날 일을

 

좀 미화하긴 했더라

 

어쨌든 소설이야

 

너무 밋밋하면...

 

내 캐릭터도 약간 왜곡됐어

 

참, 내가 아니고 그녀지
난가? 몰라, 어쨌든...

 

- 내가 신경질적이야?
- 그런 면이 있지

 

- 내가 정말 그래?
- 아냐, 농담이야

 

그렇게 안 썼는데?

 

내가 과민한 건가?

 

내 얘길 소설로 읽으니까

 

우쭐하면서도 찝찝했어

 

뭐가?

 

남의 눈을 통해 내가 표현되고

 

기억된다는 게 말이야

 

쓰는데 얼마 걸렸어?

 

한 3, 4년쯤...

 

오래 걸렸네, 하룻밤 얘긴데...

 

그러게 말이야

 

날 잊은 줄 알았는데...

 

전부 다 선명히 기억해

 

- 말할 게 있어
- 뭔데?

 

- 꼭 만나고 싶었어
- 나도...

 

할 말이 너무 많아

 

시간 얼마 남았어? 20분?

 

여유 있어

 

어떻게 지냈어? 무슨 일 해?

 

그린 크로스라는
환경 단체에서 일해

 

뭐하는 데야?

 

수질보호 운동이나

 

화학무기 철폐운동

 

환경법 준행 감시...

 

- 자기 업무는?
- 이쪽이야

 

여러 가지야

 

작년엔 인도 갔었어
수질오염 감시차

 

섬유 산업 공해가 심각하거든

 

정말 보람 있는 일하네

 

나 같은 사람은 구경만 하는데...

 

미국의 책임도 커
자원 낭비에다

 

지구 온난화...

 

자긴 극우보수파 미국인 아니네?

 

왜 그런 일 하게 됐어?

 

정치학 전공 후 정부 관련 일을

 

- 얼마간 했는데...
- 별로였어?

 

응, 희망이 안 보였어
이쪽이야

 

정치로는 아무것도

 

해결 안 되겠길래

 

딴 일을 해보기로 했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일

 

상상했던 대로 멋진 일을 하는군

 

고마워, 좋아하는 일을 하니
난 참 운이 좋지

 

그래

 

난 세상에 대해
절망을 느끼다가도

 

간혹 희망을 품게 돼

 

희망? 희망이 어딨어?

 

아니, 그러니까

 

희망적인 일도 가끔은 있잖아

 

그래
자기가 성공한 건 나도 기뻐

 

하지만 이 세상은 문제투성이야!

 

선진국들은 공해 산업을

 

법 허술하고 임금 싼

 

후진국에 떠넘기고 있고

 

전염병으로 매년
5백만 명씩 죽는데

 

무슨 희망이 있어?
화내는 건 아냐

 

말해봐, 궁금해

 

다시 생각해보니
문제가 참 많네

 

- 고마워
- 아시아에선

 

내 책이 출판도 안 됐어

 

- '스톱' 해봐
- 스톱!

 

사람들도 변하고 있어
구경만 하진 않아

 

세상은 점점 나아질 거야
자기 같은 사람들이

 

고쳐나가고 있잖아

 

환경보호란 단어는

 

최근까지 없었지만

 

이젠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어

 

맞는 말이지만
그래서 위험하기도 해

 

선진국들은 그 점을 악용

 

자기들 경제 논리를
정당화할 수도 있어

 

미 제국주의를 겨냥한 얘기 아냐?

 

그건 아닌데?

 

- 저기 앉을까?
- 응, 멋지군

 

세상이나 사람이나

 

변화하는 모습은 비슷해

 

난 내가 발전하고 있는지

 

그 반대인지 헷갈려
어릴 땐 몸은 팔팔해도

 

마음은 불안정했지

 

지금은 힘든 일도

 

여유있게 대처해

 

힘든 일이 뭔데?

 

지금 이 순간엔 없어
자길 만나서

 

행복할 뿐이야

 

나도

 

파리엔 며칠 있었어?

 

어제 왔어, 열 군데 돌고...

 

끝나서 살 것 같아

 

책 홍보하는 거 지겨워

 

뭐 마실 거야?

 

난 커피...

 

미국엔 왜 이런 카페가 없을까?

 

나도 미국에서 살 때

 

그런 생각을 했었어

 

- 미국에서 살았다고?
- 96년부터 3년간

 

뉴욕대에서 공부했어

 

말도 안 돼, 셀린

 

- 왜?
- 아니...

 

- 그냥...
- 뭐?

 

난 98년부터
뉴욕서 살고 있거든

 

- 뉴욕에?
- 그래

 

재밌네
만날지 모른단 생각은 했지만

 

그럴 확률은 드물지

 

더구나 자긴

 

- 텍사스에 산댔잖아
- 그래

 

오래 살았지
그러다가 이사했어

 

왜 돌아온 거야?

 

석사도 마쳤고

 

비자도 만료된데다

 

슬슬 겁도 났거든
TV에선 갱단과

 

살인범 얘기뿐이고...

 

게다가 어느날

 

무슨 소리가 나서

 

911에 신고했더니
경찰이 왔어

 

- 3시간쯤 후에?
- 도망치길 기다렸나 봐

 

남녀 경찰 둘이 왔는데

 

여경이

 

차 빼러 잠깐 나간 뒤에

 

남자가 묻더라구

 

총 갖고 있냐고
없다고 했더니

 

이러더군 '하나 장만해요'

 

'여긴 프랑스가 아니요'

 

그래서 말했지 '총 쏠 줄 몰라요

 

총엔 관심도 없구요'

 

그러자 총을 꺼내며 말하더군

 

'언젠가 이런 총에 벌집 되고 싶소?'

 

'오래 살고 싶으면'

 

'적이 쏘기 전에 먼저 쏴야 돼요'

 

다음날 난
총기 구매을 신청했어

 

내가 총을! 코미디지?

 

한데 생각해보니

 

그 경관의 행동이 잘못됐더군

 

그래서 구매 취소하고

 

경찰서 민원실에 전화했지

 

- 그런데?
- 절차도 복잡하고

 

비자 때문에 켕기더군

 

- 추방당할까 봐?
- 응

 

그래서 잊기로 했어

 

- 한데 안 잊혀져
- 당연하지

 

그래도 미국 생활은 좋았어

 

- 그리운 게 많아
- 어떤 거?

 

사람들의

 

쾌활한 분위기

 

물론 가식도 있지

 

'안녕, 잘 지내죠?
네, 댁은요?'

 

'좋은 하루 되세요'

 

파리 사람은 좀 뚱하거든
느꼈어?

 

다들 행복해 뵈던데?

 

- 그렇지않아
- 안 그래?

 

프랑스 남자들은 정말 짜증나

 

왜? 어떤데?

 

물론 다들 친절하지

 

미식가에 요리 잘하고

 

하지만 나와는 안 맞아

 

왜?

 

글쎄, 뭐랄까...

 

그 단어가 뭐지?

 

- 덜 밝힌다?
- 덜 밝혀?

 

사실 그런 점에선
미국인인 게 자랑스러워

 

그래 인정해줄게

 

동유럽 가봤어?

 

아니

 

어릴 때 폴란드에 갔었는데

 

그땐 공산주의였어

 

- 내가 혐오하는...
- 거짓말!

 

- 진짜야
- 농담이야

 

한데 거기서 몇 주 지내며

 

내 자신이 변하는 걸 느꼈어

 

도시는 잿빛이었지만

 

내 마음은 맑아지더군

 

많은 생각들이

 

- 떠올랐어
- 공산주의 이념?

 

나, 공산주의자 아냐

 

계속해

 

강제 수용소에 보낸다

 

어쨌든 이유를 나중에 알았지

 

어느날 묘지를 지나다

 

깨달았어

 

평소와는 완전히 다르게
지내고 있었다는 걸 말이야

 

TV는 못 알아듣겠지

 

살 것도 없지 광고도 없지...

 

그러니

 

오직 글 쓰고 사색만 할밖에

 

소비 강박관념에서 해방되니
자유로워지더군

 

너무 평온했어
그냥 그대로가 너무

 

좋더라고

 

처음엔 지루했지만

 

곧 마음이 충만해지더군

 

멋진 체험이었어

 

비엔나에서 만난 게 9년 전이야

 

- 9년? 벌써?
- 두어 달 전 같지?

 

94년이었어

 

나 좀 변했어?

 

변했지?

 

벗은 몸을 봐야 알지

 

미안

 

머리 스타일이 달라졌네

 

풀어봐

 

그땐 풀었었지

 

자...

 

어때?

 

말해봐, 많이 변했어?

 

얼굴이 좀 마른 것 같아

 

전에는 살쪘었어?

 

- 아니!
- 전엔 살쪘다고 생각했구나?

 

날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어?

 

- 아냐
- 세상에

 

자긴 언제나 아름다워

 

난 변했어?

 

아니, 전혀...
주름은 좀 있네

 

- 알아
- 흉터 같아

 

- 흉터? 총 맞은 자국 같아?
- 농담이야, 미안

 

며칠 전에 악몽을 꿨어

 

꿈에 내 나이가
서른두 살인 거야

 

놀라서 깨보니
스물셋이더군, 안심했지

 

한데 진짜 깨보니
서른둘인 거야

 

- 끔찍해
- 그 맘 알아

 

세월 참 빨라

 

뇌 신경세포는
20살부터 퇴화한대

 

난 나이먹는 게 좋아

 

사는 맛이 나거든
즐기게 됐달까?

 

나도 나이먹는게 좋아

 

한때 밴드에서

 

드럼을 쳤었어

 

- 그래?
- 쓸만한 밴드였는데

 

리더는 음반계약만 관심이 있었어

 

유명해지려고 별짓을 다했지

 

그렇게 뜨고 싶어 했는데

 

결국 밴드는 해체됐어

 

공연도 리허설도

 

정말 재밌었는데

 

정말 아쉬워
한 모금 빨아도 돼?

 

책이 출판됐잖아

 

덕분에 유럽도 돌고
그건 안 재밌어?

 

- 별로
- 별로야?

 

 

- 담배 또 있어?
- 응, 그럼

 

 

환경 분야쪽엔... 미안...

 

세상을 바꾸려는 이상을 품고

 

뛰어든 사람들이 많아

 

그들은 큰 성취만 원하지

 

하지만 변화는

 

작은 실천이 모여서 이뤄져

 

- 우리 일상 속의...
- 예를 들면?

 

멕시코 빈민 돕기 단체에 있을 때

 

우리의 관심사는

 

학교에 지급할 연필이었어

 

거창한 개혁이 아니라
연필이었다고

 

그 일을 하면서 깨달은 게 있지

 

정말 소중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조용히 음지에서

 

일한다는 거야

 

그들은 대가를 안 바래

 

명예 따위도 관심 없어

 

봉사하는 순간을

 

- 즐길 뿐이지
- 그렇게 되는 게 쉽진 않지

 

난 천성적으로

 

현재에 만족을 못 해

 

한가지 욕구가 충족되면

 

또 다른 욕구가 날 괴롭히지

 

욕구는 삶의 원동력 아닐까?

 

그런 말을 믿어?

 

원하는 게 없으면
행복해진단 말?

 

모르겠어
원하는 게 없는 건 우울증 아냐?

 

욕구가 있다는 건 건강한 거지

 

불교 신자들은 이렇게 얘기하지

 

'다 비우고 나야'

 

- '모든 게 채워진다'
- 난 뭔가를 원할 때

 

의욕이 생기던데

 

뭔가 갖고 싶은 건

 

좋은 거라고 생각해

 

그게 구두든 사랑이든

 

문제는 마음이야

 

갖고 싶은 구두를
못 가졌을 때

 

분노를 느낀다면 그건 문제지

 

인생은 힘든 거야

 

고통 없인 성숙도 없어

 

불교 신자라도 된 거야?

 

- 아니
- 왜?

 

글쎄...
그냥 뭔가에 구속되기 싫어

 

이해해, 난 뭐든 존중하지만

 

맹목적 믿음엔 반대야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간 적 있어

 

- 트라피스트?
- 카톨릭 시토 수도회...

 

- 거긴 왜?
- 우연히 책을 읽고

 

흥미가 생겼거든
수도자들과 지내봤어?

 

아니, 그런 덴 관심 없어

 

- 계속해
- 다들 근엄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활기차고

 

정 많고 유머 있더군

 

남에게 뭘 강요도 않고

 

그냥 조용히 신을 섬기며

 

평화롭게 사는 거지

 

신선한 체험이었어

 

사람들은 대개 더 많은걸

 

가지려 해

 

더 많은 돈과 명예를 쫓으며

 

심신이 지쳐가지

 

- 맞아
- 나도 그중에 하나야

 

욕심에서 벗어나질 못하지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욕심 말이야

 

몇년 전에 내가 사귄 남자는
불교를 배운다고

 

아시아의 절을 찾아다녔어

 

- 나도 그러려고 했지
- 한데 재밌는 건

 

절 마다 승려들이 유혹하더래

 

그거 하자고...

 

진짜야

 

늘 그게 문제라니까

 

그래서 자기가 멋져

 

왜, 그걸 잘해서?

 

- 아니!
- 아냐? 실망이네

 

자긴 현실 속의 이상주의자야

 

열정을 행동에 옮기잖아

 

그러려고 노력해

 

난 이제 8시간 동안

 

비행기 여행을 해야 해

 

파리를 더 많이 보고 싶어

 

같이 좀 걸을까?

 

- 어때?
- 그래, 좋아

 

- 괜찮아?
- 물론이지

 

얼마지? 4.5유로?

 

내가 낼게
경비 다 나와

 

- 이 정도면 팁 돼?
- 응

 

- 충분해
- 동전 많네

 

- 가볼 만한 데 있어?
- 오늘 세일데이야

 

- 그게 뭔데?
- 파리의 모든 가게가

 

세일하는 날

 

그럼 쇼핑하자

 

안 돼, 후회해
가게마다 전쟁터야

 

이 길로 산책하자
여기 참 좋아

 

쇼핑보단 낫겠군

 

아무래도 좋지만

 

난 쇼핑을 즐겨
구경만 해도

 

쾌감을 느껴

 

정신과적으론... 이쪽?

 

그런 건 정상이야

 

- 치료받아봤어?
- 아니

 

- 받아야 할 것 같아?
- 농담이야

 

- 섹스 고민 상담해봤어?
- 섹스 고민?

 

- 농담이야
- 우리 섹스

 

근사했잖아

 

- 우리 섹스 안 했어
- 농담이지?

 

안 했어, 그래서 특별했지

 

섹스했어!

 

난 콘돔 없인 섹스 안 해

 

특히 처음 만난 남자와는...

 

정말 기억 안 나?
섭섭하네

 

 

책은 안 써도 일기는 써

 

그날 일 적어놨어
자기 기억은 너무 미화됐어

 

난 콘돔 상표까지 기억나

 

징그럽게 별소릴...

 

뭐가 징그러워?

 

집에 가서 94년 일기 찾아볼게

 

잠깐만

 

묘지에서 했나?

 

묘지에 간 건 오후야

 

공원에서 했어
아주 늦은 밤

 

- 공원에서
- 잠깐만

 

어떻게 그걸 잊어?
기억 안 나?

 

자기 말이 맞는 것 같아

 

장난 치는 거지?

 

놀리는 거지?

 

미안해, 자기 말이 맞나 봐

 

난 가끔 고통을 회피하려고

 

기억을 묻어둘 때가 있어

 

그날 밤 일이 후회돼?

 

잊어버리는 게

 

더 나은 일도 있어

 

난 그날 밤 일 또렷해

 

- 나도
- 그래?

 

그런 줄 알았는데...

 

우리 약속 날짜가
장례식 날이라

 

더 잊고 싶었는지도 몰라

 

그래, 괴로운 기억이겠지

 

관속에 할머니 시신이
누워있는데

 

따뜻하던 그 손이
차갑게 식어있더군

 

할머니 손 같질 않았어

 

너무 싸늘했지

 

난 울면서도 혼란스러웠어

 

할머닐 못 봐서 슬픈 건지
자기를 못 봐서 슬픈 건지

 

미안해
요 며칠 기분이 좀 그래

 

- 왜?
- 모르겠어, 그냥

 

자기 책을 읽어선가?

 

그해 여름엔 희망이 넘쳤는데

 

그게 이젠 다...

 

모르겠어

 

아픔이 없다면
추억이 아름다울텐데...

 

그 말 멋진데?

 

차에 써 붙여도 돼?

 

자기도 책 써봐
그 제목 붙여서...

 

- 내용은 딴판일걸?
- 섹스 장면 없고?

 

그거 알아?

 

다시 만났으니

 

추억을 바꿀 수 있어

 

허무한 이별의 엔딩 없이

 

그래, 살아있는 한
추억은 계속 변하지

 

얼마 전에 어릴 때 기억이

 

착각임을 깨달았어

 

8살때 쯤 우리 엄만 내게

 

늘 밤길을 조심하랬어

 

무서운 아저씨가 사탕주며

 

나쁜 짓 할지 모른다고

 

그 말을 하도 들어서

 

실제로 당한 걸로 착각했었어

 

밤길 하면
섹스가 연상될 만큼...

 

지금도 섹스를 할 때면

 

밤에 길을 걷는 상상을 하게 돼

 

나 너무 웃기지?

 

- 그 길 여기서 가까워?
- 아니

 

굉장히 멀어

 

어릴 때 일기 썼었어?

 

응, 썼다 말았다 했지

 

83년 일기를 얼마 전에

 

읽었는데

 

그때 고민거리가

 

지금과 똑같더군

 

그땐 더 순수했지만

 

사물을 보는 시각은
지금과 똑같아

 

난 통 안 변하나 봐

 

누구나 그래

 

사람은 각자 어떤 성향이 있어

 

세월이 흘러도 그건 변치 않지

 

그럴까?

 

복권 당첨자와 전신 마비 환자를

 

관찰한 연구결과

 

닥친 상황은 서로 극과 극인데

 

6개월쯤 지난 후엔

 

양쪽 다 본래의 성격으로

 

- 돌아가더래
- 정말?

 

명랑한 사람은 장애인이 돼도

 

여전히 명랑하게 살고

 

꼬여있던 인간은

 

부자가 돼도
꼬여 있더란 거지

 

그럼 난 평생 우울하게 살겠네?

 

- 당연하지
- 젠장

 

우울증 걸렸어?

 

그렇진 않아

 

하지만 걱정돼
원하는 걸

 

- 못해보고 죽을까 봐
- 뭘 하고 싶은데?

 

 

그림도 그리고
기타도 매일 치고

 

중국어도 배우고
곡도 많이 쓰고

 

하고픈 건 많은데 마음뿐이야

 

혹시 유령이나 영혼을 믿어?

 

아니

 

안 믿어?

 

- 그럼 환생은?
- 안 믿어

 

- 신도?
- 응

 

좀 심했나?

 

마법은 믿고 싶어
낭만적이니까...

 

- 별자린 믿어?
- 그럼!

 

- 그렇군
- 말 되잖아?

 

자긴 전갈자리
난 궁수자리, 우린 찰떡이야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어

 

'마법이나 신비를 믿지 않으면'

 

- '죽은 거나 같다'
- 난 우주엔

 

영원한 뭔가가 있다고 여겨왔어

 

하지만 요즘 와선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해

 

나이가 들수록

 

삶이 소중하다는 걸 느끼게 돼

 

인생은 한 번뿐이야
이 삶보다 더

 

소중한 게 어딨어?

 

매일이 마지막인데

 

난 그런 생각이 들면
엄마한테 전화해

 

그럼 엄만

 

'너 암 걸렸니?
자살할 거 아니지?'

 

전화를 괜히 했다 싶게 만든다니까

 

우린 어떨까?

 

- 뭐가?
- 우리가

 

- 오늘 밤 죽는다면...
- 종말이 와서?

 

꼭 그건 아니라도
그냥 오늘 죽는다면

 

무슨 얘길 하고 싶어?

 

- 책? 환경?
- 오늘 죽는다...

 

무슨 얘길 하고 싶어?

 

- 글쎄...
- 질문이 어렵지?

 

아냐

 

책 얘긴 분명히 안 해

 

환경 걱정도 안 할거고

 

우주의 신비에 대해
말할 거 같아

 

- 대화 장소는...
- 어디?

 

호텔 방

 

죽을 때까지 뜨겁게
사랑을 나누며

 

호텔까지 갈 거 뭐 있어?

 

저 벤치도 있잖아

 

이리 와, 어서

 

우린 오늘 밤 안 죽어

 

유감이네, 미안해

 

극단적인 예를 든 거야

 

미안해

 

내 얘긴

 

타인과의 소통은 힘들다는 거야

 

맞아, 다 형식적이지

 

섹스가

 

- 삶의 전부는 아니지만
- 왜 아냐?

 

내 친구는 애인에게
섹스 불만만

 

늘어놨었어

 

사귄 지 1년 뒤부턴 늘 그랬지

 

애인은 엄청 열 받았어

 

왜?

 

자존심에 상처 받은 거지

 

더 일찍 말하지

 

남잔 상처를 잘 받아

 

- 여자보다?
- 그 문제에선...

 

그런가?

 

그건 아마 남자가

 

- 여자보다 더 쉽게...
- 만족을 느껴서다?

 

그래, 그건 맞아

 

어쨌든 그 친구 말이

 

다음에 남자 사귀면
섹스 전에

 

- 취향을 조사하겠대
- 글로? 말로?

 

글로 써서

 

OX식 말고 주관식 질문으로

 

예컨대
'당신은 변태 끼가 있나요?'

 

예상 대답은, '아뇨, 다만
엉덩이 때리는 건 좋아함'

 

'섹스 중에 야한 말을
듣고 싶나요?'

 

- 이런 거?
- 그냥 야한 말 말고

 

구체적인 단어를 밝혀야지

 

- 나?
- 응

 

어떤 말을 듣고 싶어?

 

모르겠어

 

'성기'란 말 들으면 어때?

 

무지 좋아

 

그래?

 

9년 만에 둘 다 변태 다 됐군

 

대신 솔직해졌잖아

 

서로 내숭 안 떨고

 

그동안 거시기를
닳도록 써먹었지?

 

자기도 정숙하게
산 것 같진 않은데?

 

- 고마워
- 미안

 

- 그래서 어쩔 건데?
- 그러게

 

어떤 곡 써?
곡 쓴다며?

 

어떤 곡?

 

그냥 노래야

 

사람들에 관한 노래

 

고양이 노래도 있고

 

- 불러봐
- 안 돼, 기타가 없어

 

- 반주 없이...
- 안 돼

 

기타 없인 못 불러

 

왜 안 돼?

 

- 나중에...
- 한 곡만...

 

언제?
6개월 뒤 여기서 만날까?

 

비행기 타고 왔다

 

- 또 바람맞으면?
- 그만해

 

그만 돌아가자

 

비행기 놓치겠어

 

센 강변 쪽으로 가자

 

그래

 

- 뉴욕으로 갈 거야?
- 응

 

결혼해서 애도 있다며?
축하해

 

이제 네 살이야

 

- 이름은?
- 헨리

 

장난꾸러기지

 

- 부인은 무슨 일 해?
- 초등학교 교사야

 

- 애 있어?
- 응, 둘... 어쩌지?

 

차에 두고 왔어!

 

6개월 전에! 어떡해!

 

농담이야
언젠간 갖고 싶지만

 

아직은 아냐

 

- 사귀는 남잔 있어
- 잘됐네

 

- 직업은?
- 종군 사진기자

 

늘 집을 비워

 

나도 바쁘니까 상관없어

 

그일 안 위험해?
많이 피살되던데

 

그인 괜찮다지만 걱정돼

 

사진 찍을 땐 정신없거든

 

- 무슨 얘기야?
- 뉴델리에서

 

부랑자를 봤는데...

 

- 불량... 뭐?
- 집 없는 부랑자

 

그래

 

도와줄 생각 않고
사진부터 찍더군

 

사진발 잘 받게
옷깃은 세워주면서

 

그 사람의 상황에는
관심도 없는 거야

 

프로는 다 그런 거 아냐?

 

알아

 

그게 나쁘단 건 아냐

 

나라면 그렇게 못할 거란 거지

 

유람선 타보자

 

- 안 돼
- 재밌을 거야

 

- 시간 없어
- 지금 출발하나 봐

 

15분 여유있어
휴대폰 있어?

 

- 응
- 기사를

 

선착장으로 오라면 돼

 

유람선은 관광객이 타는건데...

 

알았어

 

내가 낼게

 

- 그 남자 사랑해?
- 누구?

 

- 사진 기자
- 물론이지!

 

휴대폰 좀 줘볼래?

 

 

어디로 오라면 돼?

 

케이앙리 콰트르로

 

뭐? 케, 케이...

 

앙리 콰트르
케이앙리 콰트르

 

앙리 콰트르

 

말귀가 어두워?
앙리 콰트르

 

- 헨리 4세?
- 맞아!

 

- 그렇게 설명하지
- 미안!

 

필리프?

 

제시 월러스예요

 

 

지금 유람선을 타고 있어요

 

헨리 4세 선착장으로 와줘요

 

거기 어딘 줄 알죠?

 

짐은 다 실었어요?

 

네... 다음 선착장요

 

네, 이따 봐요

 

- 됐어?
- 응

 

노트르담 사원이군

 

독일군이 파리에서

 

퇴각할 때

 

노트르담 사원에

 

폭발물을 설치했대
스위치 누를 병사가 남았는데

 

결국, 폭발을 못 시켰대

 

노트르담의 아름다움에 압도돼서

 

며칠 후 연합군이

 

폭발물을 발견했지
불발된 채로

 

대성당, 에펠탑
이런 데서도

 

폭발물이 또 나왔대

 

실화야?

 

몰라, 어쨌든 멋진 얘기지?

 

그래

 

노트르담도 언젠간 사라질 거야

 

전엔 저 자리에
딴 성당이 있었어

 

- 같은 자리에?
- 응

 

유람선 타길 잘한 것 같아

 

파리는 역시 근사해

 

내 말 듣기 잘했지?

 

- 태워줘서 고마워
- 천만에

 

내가 우리 얘길 책으로 쓴 건

 

그날의 모든 걸 잊기 싫어서였어

 

그 만남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오래 기억하고 싶었어

 

그 말 들으니 기쁘네

 

나도 간단히 잊을 수가 없었거든

 

요즘은 다들 쉽게 사랑하고

 

쉽게 끝내잖아

 

옷 바꿔입듯 상대를 바꾸지

 

난 아무도 쉽게 잊은 적 없어

 

누구나 저마다의 특별함이 있거든

 

헤어진 빈자린
딴사람이 못 채워줘

 

난 헤어질 때마다
큰 상처를 받아

 

그래서 새로 누굴
사귀기가 어려워

 

너무 힘드니까

 

하룻밤 인연도 안 만들어

 

별것들이 다 생각나 괴롭거든

 

사소한 일까지

 

난 어릴 때

 

난 어릴 때
학교에 늘 지각했었어

 

등굣길에 엄마가
내 뒤를 밟아 봤더니

 

나무에서 떨어진
밤톨도 들여다보고

 

개미랑 낙엽 따위를
구경하고 있더래

 

사소한 것들

 

사람을 만나도

 

난 그런 사소하고

 

작은 일에 감동하고
못 잊어

 

누구나 저마다의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지

 

자기 수염의
붉은빛 털도 기억나

 

떠나기 전 그 새벽에

 

햇살에 빛나던 모습

 

그 모습이 늘 그리웠어

 

나 웃기지?

 

내가 책을 쓴 이유가
확실해졌어

 

- 뭔데?
- 저자와의 만남에

 

자기가 찾아오면
꽉 잡으려고

 

내가 올 걸 알았다고?

 

책을 쓴 건
자길 찾으려는 뜻도 있었어

 

거짓말이라도

 

- 듣기는 좋네
- 책 안 썼으면

 

어떻게 다시 만났겠어?

 

만날 확률 0%겠지

 

하지만 이제 우린

 

자기 책 속의 캐릭터일 뿐이야

 

주인공 할머니의

 

회상에 등장하는

 

대체 비엔나에 왜 안 온거야?

 

- 이유 말했잖아
- 알아, 하지만

 

왔으면 좋았잖아

 

그럼 모든 게 변했을텐데

 

그렇게 생각해?

 

응, 솔직히

 

그때 안 만난 게 다행일지 몰라

 

서로 원수 됐을까 봐?

 

잠깐씩 만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어

 

멋진 장소에서
산책이나 하며

 

왜 그때 연락처를

 

교환 안 한 걸까?

 

젊고 어리석었으니까

 

지금도 그럴까?

 

젊을 땐 사랑의 기회가

 

얼마든지 올 것 같지만

 

그런 기회는 많지 않지

 

올 때 꽉 잡아야 해

 

과거는 잊는 게 순리야

 

운명론을 믿는 거야?

 

세상엔 생각보다 제약이 많아

 

상황이 같다면 결과도 늘 같아

 

H2와 O가 만나면 물이 되듯...

 

할머니가 더 늦게 돌아가셨거나

 

일찍 돌아가셨다면

 

상황은 달라졌어

 

- 다 끝난 일이야
- 알아, 하지만

 

왠지 뭔가
억울하단 느낌이 들어

 

결혼날 잡고도
자기 생각만 했어

 

결혼식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다가

 

자기 모습을 봤어

 

우산을 접으며
빵집에 들어가더군

 

브로드웨이 13번가였어

 

지금 생각하니 자기가 맞나 봐

 

난 11번가에 살았어

 

 

결혼 생활 어때?
통 얘길 않네

 

그랬나? 별일이네

 

그냥 대학교 때 만나게 됐어

 

헤어졌다 만났다를
몇 년 반복하다가

 

다시 만났고
그녀가 임신해서

 

결혼했지

 

어떤 여자야?

 

유능한 교사, 좋은 엄마지

 

예쁘고 똑똑하고

 

당시 난 생각했어

 

훌륭한 남자들은 모두

 

자신 아닌 남에게
헌신하며 사는구나

 

그래서 그들처럼 결혼한 거야?

 

뭐랄까, 내 자아를
완성시키고 싶었어

 

정직한 본능을

 

포기하고서라도

 

이해가 돼?

 

결혼 상대가 누군지는
그다지 안 중요했어

 

완벽한 짝은 없잖아

 

중요한 건 책임지는 거야

 

주어진 의무에 대해서

 

존경과 신뢰가
사랑보다 중요하다

 

뭐, 그런 생각이었지

 

그래서 결국 지금은

 

보육원 차린

 

수도승 꼴이 됐지

 

지난 4년간
아내와 섹스한 게 열 번도 안 돼

 

비웃는 거야?

 

- 불쌍해서?
- 수도승이 섹스를

 

- 열 번이나 해?
- 수도승 보단 낫다, 그래

 

누가 건드려만 주면

 

허물어질 것 같아

 

다 왔어, 내려야 해

 

젠장

 

마음이 별로 좋진 않네

 

결혼 생활이 안 행복하다니

 

- 정신과 의사인 내 친구가...
- 그 여잔 잘 살아?

 

엉망이야

 

걔가 결별 위기의 커플을

 

- 상담했는데...
- 결별 이유는?

 

시간이 지나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열정이 있기를
기대하는 게 문제야

 

그게 말이 돼?

 

우리가

 

계속 뜨겁게 쭉 사랑했다면

 

딴 일을 언제 했겠어?

 

자긴 섹스하느라 책 못 썼을걸?

 

난 책 못 써도 좋아

 

부인이 그러는 거 자연스런 거야

 

애는 안 돌보고

 

허구한 날 섹스만 밝히면

 

그것도 문제 아냐?

 

꼭 섹스만이 문제는 아냐

 

그래, 그렇겠지

 

요즘 커플들 다 문제 많아

 

남자들이

 

삶에 자신감을 잃는 것 같아

 

가족 부양 의무에

 

너무 얽매여서

 

난 남자의 부양 바라지 않아

 

직업이 있으니까

 

하지만 사랑은 받고 싶어

 

기사가 기다리네

 

작별해야겠군

 

연락처...

 

같이 가
집까지 태워줄게

 

지하철 타면 돼

 

비행기 뜨려면 두시간 남았어

 

가면서 얘기 더 해

 

방향이 틀린데...

 

집이 어딘지 설명했어?

 

 

- 길 아는 거지?
- 응

 

다행이군

 

- 지하철보다는 낫잖아?
- 물론이지

 

난 이제 사랑에 연연 안 해

 

상처받기 싫거든

 

그보단 딴것들에 관심을 쏟고

 

삶의 희망을 찾지

 

그래서 애인과 늘 떨어져 지내?

 

그런가 봐
늘 붙어사는 건 싫어

 

둘이 즐겁게 지내다

 

그가 떠나면 외롭지만 홀가분해

 

늘 붙어살면 질식할걸?

 

아깐 남자가 필요하다며?

 

한데 옆에 있으면 숨 막혀

 

웃기지?

 

난 혼자 있을 때 행복해

 

함께 있으면서
고독한 것보단 나아

 

사랑은 힘들어

 

몇 번 상처받으면
환상이 깨지지

 

그럼 포기하고
현실을 인정하게 돼

 

아니, 사실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본 적도 없어

 

좋은 남자들이었지만

 

진정한 교감은 없었어

 

적어도 내 입장에선

 

그 정도로 힘들었어?

 

그렇진 않지?

 

꼭 그렇다기보단

 

자기 책을 읽고 혼란이 생겼어

 

전엔 내가 얼마나

 

낭만과 꿈이 많았는지

 

깨닫게 됐거든

 

그런데
지금 난 사랑을

 

못 믿게 됐어

 

그날 밤
내 모든 걸 쏟아부어서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어

 

자기가 내 모든 걸 다

 

가져가 버린 것 같아

 

내 심장은 식었어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내겐 현실과 사랑이 공존 못 해

 

내가 사귄 남자들은
다 결혼했어

 

나랑 끝나면 결혼하더라고

 

그리곤 전화해서 내게 고맙대

 

진정한 사랑을 가르쳐줘서

 

- 나도 할 말없군
- 나쁜 놈들!

 

왜 내겐 청혼 안 해?
거절했겠지만!

 

하긴 다 내 탓이지
인연을 느낀 남자도 없었어!

 

인연이란 게 뭐야?

 

그런 게 어딨어?
짝을 못 만나면

 

- 반쪽짜리 삶이야?
- 말 좀 하자

 

상처받는 데 지쳤어

 

그래서 이젠
애초에 노력 안 해

 

- 소용없으니까...
- 그래선 안 돼

 

그건 인생을...

 

듣기 싫어

 

나 내릴 거야

 

- 차 세워요
- 안 돼

 

- 내리지 마
- 함께 있기 싫어

 

건들지 마, 택시 탈래!

 

아녜요, 계속 가요

 

좀 더 얘기하자
계속 가줘요

 

진정해

 

자기랑 있으니까 난 참 좋아

 

날 안 잊은 것도 고맙고

 

안 잊었지!
그래서 화가 나

 

보란 듯 결혼해서
파리에 나타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오해 말아, 미련은 없어

 

유부남과 엮이긴 싫어!

 

세월도 흘렀어

 

그 순간은 사라졌어
그래서 슬퍼

 

섹스한 것도 기억 못 했잖아

 

기억하고 있었어

 

- 정말?
- 응

 

- 괜히 내숭 떤 거야
- 내숭?

 

그럼 그날의 일
다 기억난다고 해?

 

지는 별 보며
와인 마신 것까지?

 

우린 섹스 두 번 했어!

 

난 자길 만나서 너무 행복해

 

사나운 환경투사로 변했지만

 

그래도 함께 있으니 좋아

 

- 나도 그래
- 미안해, 자기한테

 

- 화풀이를 해서...
- 괜찮아

 

여자로서 난 실패했어

 

초월한 척하지만

 

속으론 죽어간다고
감각 없는

 

무생물처럼 변하고 있어

 

속으로 죽어간다고?

 

난 1년 365일 불행해

 

안됐네

 

아들과 있을 때만 행복해

 

카운슬링도 받고

 

온갖 짓 다 해봤어

 

촛불도 켜고
야한 속옷도 사고...

 

- 촛불이 효과 있어?
- 전혀!

 

아내와 난
사랑을 느끼는 방법이 달라

 

헤어지고 싶지만 아들 때문에 참지

 

걜 위해선 어떤 고통도
참을 수 있어

 

걔와 헤어져선

 

하루도 못 사니까

 

하지만 우리 집엔 웃음이 없어

 

- 애가 너무 가여워
- 비극이네

 

우리 부모님은 싸우고 나도

 

얼굴만 보면 웃는데

 

다 늙은 황혼에
이혼하긴 싫어

 

평생 배우자와
남남처럼 살다가

 

인생 다 가버리면
너무나 비참하지

 

난 행복해지고 싶어
내 아내도

 

행복해야 하고

 

하지만 우린 의무감에 살고 있어

 

세상의 도덕적 기준에 맞춰서

 

난... 늘 꿈을 꿔

 

어떤 꿈?

 

어떤 꿈이냐 하면

 

난 플랫폼에 서 있고

 

자긴 기차 타고 내 곁을 스쳐 가

 

스쳐 가고
스쳐 가고 또 스쳐 가지

 

그 꿈에서 깨면

 

또 딴 꿈을 꿔

 

임신한 자기가
내 옆에 누워있지

 

내가 만지려 하면
자긴 날 거절해

 

그래도 난 자길 만져

 

피부가 너무 부드러워서
울다 깨면

 

아내가 보고 있어
낯선 타인처럼

 

난 속으로 외치지
'이렇겐 살 수 없다'

 

'이건 의무감이지'

 

'사랑이 아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진작 사랑따윈

 

포기했어야 해
자기가 날

 

바람맞힌 그날

 

그날 포기했어야 해

 

그런 얘길 왜 해?

 

미안해
나도 잘 모르겠어

 

모르겠어

 

누구나

 

자신이 제일 불행하다 여기지

 

기사 읽고
자긴 행복한 줄 알았어

 

유명 작가에 처자식도 있고

 

한데 나보다 더 불행하다니

 

안됐네

 

그 덕에 웃으니 다행이군

 

집이 이 근처야?

 

내가 불행하다니까 기분이 풀려?

 

응, 훨씬 나아졌어

 

다행이군

 

아냐, 행복을 빌게

 

내가 남편도 자식도 없다고

 

남의 불행을 즐길 순 없지

 

자긴 좋은 엄마가 될 거야

 

그럴까?

 

우울증 치료만 받으면

 

- '스톱' 해봐
- 스톱!

 

내릴까?

 

테스트해봐야지

 

내가 껴안으면 허물어지는지

 

어떤 것 같아?

 

멀쩡한데?

 

기분 괜찮군

 

집이 여기야?

 

아니, 저 아래야

 

저 아래?

 

집 앞까지만 갔다 올게요

 

근사하네

 

- 저기서 살아?
- 응

 

- 몇 년 됐어?
- 4년

 

아까, 꿈 얘기

 

진짜야?

 

아니면 날 꼬시려고 거짓말한 거야?

 

꼬시려 거짓말했지

 

- 내 수법이야
- 효과 있어?

 

응, 가끔

 

내 고양이야, 너무 귀엽지?

 

언제 제일 예쁜 줄 알아?

 

밖에 데리고 나오면

 

매번 신기한 듯
모든 걸 뚫어지게 봐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

 

작은 코로 냄새 맡는 것 봐

 

너무 예뻐, 예뻐 죽겠어!

 

- 이름이 뭐야?
- 체

 

체?

 

- 왜?
- 공산주의자

 

체는 안녕이란 뜻도 있어

 

그래

 

내 예쁜이

 

가끔 파티해, 참 재밌어

 

그럼...

 

자기 노래 한 곡
들어볼 수 있을까?

 

- 비행기 놓쳐
- 지금 미리 가서

 

한 시간 기다리느니

 

자기 노래나 듣고 싶어

 

딱 한 곡? 빨리 듣고 가

 

그래

 

계단이 고풍스럽군

 

안고 있어

 

안녕

 

 

- 차 마실래?
- 좋지

 

- 카모마일 괜찮아?
- 응, 좋아

 

- 메르시
- 메시?

 

- 집이 엉망이라고?
- 아니, 고맙다고

 

- 메르시보꾸
- 아, 메르시

 

프랑스어 실력 꽤 늘었던데?

 

- 정말?
- 응

 

이젠 거의 완벽해

 

어떤 노래 들려줄 거야?

 

못 하겠어, 너무 창피해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라고?

 

아무 곡이든 좋아

 

비웃을 거잖아

 

- 내가?
- 응

 

절대 안 그래

 

좋아

 

영어 가사 노래는

 

세 곡 있어

 

고양이에 관한 곡

 

옛날 남자친구에 관한 곡

 

그리고 나머진

 

그냥 왈츠풍의 노래야

 

왈츠? 좋지

 

그거 불러줘

 

못 불러도 흉 안 볼 거지?

 

좋아

 

불러 볼게

 

♬ 왈츠 한 곡 들어봐요 ♬

 

♬ 그냥 문득 떠오른 노래 ♬

 

♬ 왈츠 한 곡 들어봐요 ♬

 

♬ 하룻밤 사랑의 노래

 

♬ 그날 그댄 나만의 남자였죠 ♬

 

♬ 꿈같은 사랑을 내게 줬죠 ♬

 

♬ 하지만 이제 ♬

 

♬ 그댄 멀리 떠나갔네 ♬

 

♬ 아득한 그대만의 섬으로 ♬

 

♬ 그대에겐 하룻밤 추억이겠죠 ♬

 

♬ 하지만 내겐 ♬

 

♬ 소중한 당신 ♬

 

♬ 남들이 뭐라든 ♬

 

♬ 그날의 사랑은 내 전부랍니다 ♬

 

♬ 다시 한번 돌아가고 싶어 ♬

 

♬ 그날 밤의 연인이 되고 싶어 ♬

 

♬ 어리석은 꿈일지라도 ♬

 

♬ 내겐 너무 소중한 당신 ♬

 

♬ 그런 사랑 처음이었죠 ♬

 

♬ 단 하룻밤의 사랑, 나의 제시 ♬

 

♬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어 ♬

 

♬ 난 언제나 행복해요 ♬

 

♬ 그날의 영원한 추억 때문에 ♬

 

♬ 다른 사람 품에 안겨있어도 ♬

 

♬ 죽는 날까지 내 맘엔 그대뿐 ♬

 

♬ 왈츠 한 곡 들어봐요 ♬

 

♬ 우울한 마음에 떠오른 노래 ♬

 

♬ 왈츠 한 곡 들어봐요 ♬

 

♬ 하룻밤 사랑에 관한 노래 ♬

 

- 한 곡만 더!
- 안 돼, 약속했잖아!

 

딱 한 곡이야, 더는 안 돼

 

차 한잔 마시고 가

 

한 가지만 물어볼게

 

누구나 가사에 이름 넣어줘?

 

물론이지

 

자기 노래인 줄 알았어?
착각 마

 

사팔눈 뜬 꼬마, 자기야?

 

응, 재밌지?

 

- 할머니셔?
- 응

 

- 꿀 넣을까?
- 응

 

니나 시몬 콘서트 가봤어?

 

아니, 죽어서 참 안됐어

 

그래, 너무 슬퍼

 

고마워

 

뜨거워

 

난 콘서트 두 번 가봤어

 

너무 멋지더라

 

내가 좋아하는 곡이야

 

근사하지?

 

콘서트도 참 재밌었어

 

피아노 치며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멈추곤

 

무대 끝으로 걸어 나오는 거야

 

아주 천천히

 

그리곤 관객에게 말을 걸지

 

'자기 안녕, 반가워'

 

'나도 자길 사랑해'

 

그리곤 천천히
피아노로 돌아가지

 

귀여운 오리궁둥이를

 

흔들면서

 

그리곤 연주를 계속하는 거야

 

그러다가 또 갑자기

 

다른 곡을 연주하더니

 

멈추곤 관객에게 이러지

 

'이봐 거기, 엉덩이 좀 흔들어'

 

'제법 귀여운데?'

 

자기, 이러다가 비행기 놓쳐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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