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bange 3.0 - (C) Breadu Soft 2008

가기 전에 눈이 많이 왔는데

 

트럭 짐칸에 앉아 갔어요

 

차 좌석엔
식당 취사원의 처가 탔어요

 

그때 농장엔 서열이 있었고

 

모두 식당 취사원과
잘 지내려 했어요

 

그래서 외투를 둘러쓰고
짐칸에 앉았어요

 

몇 시간 뒤 역에 닿았고

 

바로 차표를 끊어
기차에 올랐어요

 

밍수이역에서 내렸는데

1분만 정차했어요

 

남편에게 줄 음식 보따리와
돈과 양식표가 있었고

 

혹시 거기 없을 경우

 

란저우로 돌아가야 해서
옷 보따리도 있었어요

 

밍수이역은 승강장도 없이
아주 작은 역이었고

 

짐 챙겨 기차에서 내렸을 땐

 

벌써 캄캄했어요

 

역 근처의 인가로 가서

 

농장 가는 길을 물었어요

 

남자가 눈에 덮힌
작은 길을 가리키며

 

서쪽으로 가다보면
농장이 나온댔어요

 

밖은 아주 캄캄했고

 

눈에 덮힌 길엔 나 뿐이었어요

 

기차에서 나만 내렸어요

 

역을 나오면서부터

아무도 못 만났어요

 

인적이 끊긴 작은 눈길을

 

10리는 걸어야 했어요

 

짐이 무거웠지만
한가지만 생각했어요

 

내가 와서 구해주기를
남편이 기다린다고

 

위급한 지경일지도 몰라

 

쉬지 않고 계속 걸었어요

 

그러다 보리수 숲까지 왔는데

길이 없어지기 시작했어요

 

짐을 내려놓고 주변을 살폈어요

 

눈으로 덮힌 길 위엔

사람이라곤 안 보였어요

 

뒷날 가오지에를 만났는데

 

농장에서 탈출한 이야기
"도망"을 쓴 사람이었어요

 

나더러 이리와 안 마주친 게
천운이랬어요

 

그날 밤 이리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요

 

남편을 구하러 가야 했어요

 

날 기다리고 있었어요

 

숨이 붙어 있을 동안
가기만 하면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이리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어요

 

남편을 구하려는 일념 뿐이었어요

 

가오는 책에서 자기 스승이
이리에게 잡혀먹혔댔어요

 

그러면서 내가 천운으로
이리와 안 마주쳤댔어요

 

난 생각도 못 했어요

 

농장에서 알게된 펭쉬웨이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현에서 식자재를 사오다가
이리떼에게 쫓겼대요

 

소달구지를 계속 따라왔대요

 

빨리 가면 빠르게
늦게 가면 느리게

 

그 이야기를 들었지만
내 생사는 염두에 없었어요

 

날 기다리는 남편만 생각했어요

 

길을 잃고 주위를 살펴보니

 

한쪽으로 길 같은 게
나 있어서

 

짐을 들고 계속 걸었어요

 

좀 뒤에 사람을 만났어요

 

농장 가는 길을 물었더니

 

저 앞에 보이는 불빛이
농장 사무소랬어요

 

길에만 신경 쓰다보니

 

불빛을 미처 못 봤어요

 

농장에 가족을 찾아온
사람 같았어요

 

근데 가족을 찾지 못 하고

 

돌아가는 길이었을 거예요

 

간부가 아니라
밤길을 나섰을 거고

 

불빛을 따라 사무소에 갔어요

 

안에 들어가니
두 남자가 앉아 있었어요

 

왕징차오를 찾아 왔다 했어요

 

두꺼운 장부를 꺼내더니
넘겨보기 시작했어요

 

농장이 아주 큰 거 같았어요

 

소속을 찾는데 한참 걸렸어요

 

마침내 찾아냈어요

 

왕징차오는 12월 13일
죽었다고 했어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어요

 

구하려는 일념으로 달려왔는데
죽고 말았다니!

 

나무 의자에 주저앉았어요

 

사무실엔 가구가 별로 없었어요

 

처음엔 충격에 빠졌어요

 

울음도 안 나왔어요

 

이런 생각이 스쳐지나갔어요

 

남편은 이제 여기 없구나

 

이 세상을 떠났구나

 

영영 가버렸구나

 

울음이 터져나왔어요

 

두 간부는 못 본 척하며
일만 계속했어요

 

위로 한 마디 하지 않았어요

 

사별하는 가족들을 하도 봐서

 

그렇게 대하는 게
습관이 됐나봐요

 

얼마를 울었는 지

우파 한 사람을 부르더니

 

잘 곳을 마련해주라 했어요

 

함께 사무소를 나왔어요

 

캄캄한 밤이었어요

 

한참 걸어 데려간 게
땅굴 같은 곳이었어요

 

사무소엔 석유등이 있었지만

 

이 굴 속에선
잉크병을 등으로 썼어요

 

우리 농장과 같았어요

 

큰 굴이었고

나무 판자와 천으로
주위를 둘렀어요

 

굴 뒤로 데려가

 

이불 두 벌을 주면서

 

밤에 추우면 덮으랬어요

 

좀 뒤에 또 한 우파 남자가
들어왔어요

 

굴 안에 간이 벽돌 화로와

 

불쏘시개가 있었어요

 

그 위에 냄비 물을 끓이고

 

쌀국수를 삶았어요

 

한 남자가 말했어요
우한의 고모가 보낸 거라고

 

배고프냐고 물어
그렇다고 했어요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못 먹었어요

 

선심 쓰는 게 고마웠어요

 

사무소의 간부들은
식사 배려따윈 없었어요

 

무관심했고 상관 안 했어요

 

같이 먹자고 해서
좋다고 했어요

 

하루 종일 굶어 정말 배고팠어요

 

여유가 없는 줄 알기에
조금만 먹었어요

 

그 사람들에겐
국수를 나눠주는 게

아주 큰일이었어요

 

그래서 조금만 먹었어요

 

들고온 꽃빵을 좀 나눠줬어요

 

정말 맛있다며 먹었어요

 

그때 우리 급식량은 30근이었고

 

간부들처럼
꽃빵을 만들어 먹었어요

 

먹고 나서 두 사람은
곧 잠자리에 들었어요

 

둘은 굴 저 끝에
나는 맞은 편 끝에 있었어요

 

편한 데 잠자리를 펴랬어요

 

둘은 이부자리에 누웠지만

 

나는 불편했어요
그땐 아직 젊은 여자였고

 

낯선 남자 둘과 굴에서
어떻게 잠이 오겠어요?

 

어찌할 줄 모르고 앉아 있었어요

 

날 데려왔던 이가
눈치챘는지 말했어요

 

"걱정 말고 푹 쉬어라
괜찮다"

 

너무 늦었고
어쩔 수 없다 생각했어요

 

건네 받은 이부자리를 폈어요

 

이 안에서 죽은 사람 게
분명했어요

 

굴은 거의 비었는데

 

이부자리는 꽉 차 있었어요

 

이부자리를 펴고 외투를 덮었어요

 

굴 천장을 판지와 나뭇가지로
덮어놨는데

 

그 틈새로 별이 보였어요

 

또 그 틈새로 바람이 새들었어요

 

그날 밤 잠을 이룰 수 없었어요

 

긴 여행에 피로했고
한참 울고난 뒤였지만

 

계속 잠을 설쳤어요

 

누워서 천장의 별을 보며
생각했어요

 

이 굴에서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어요

 

여전히 여기 있을 거다
혼령이 여길 못 떠날 거다

 

굴의 틈새로
들여다 보고 있을 거다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억울한 이 고혼들은...

 

이승을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세상에서 배척당했어요

 

지금 어둠 속을 떠돌며

 

가고 싶지 않아 했어요

 

서둘러 저승길로
떠나고 싶지 않아 했어요

 

아직 이승에 미련이 있었어요

 

하지만 세상은 이미
등을 돌렸어요

 

가까운 사람들과 영영

 

떨어지게 됐어요

 

이 세상에서 이런저런
꿈이 있었어요

 

이제 그런 꿈은...

 

잊혀지게 됐어요

 

물론 남편 생각도 했어요

 

자신을 개조해서

 

인민의 품 속으로
돌아오려 했어요

 

다시 글을 쓰면서

 

새출발하려 했는데
영영 가버렸어요

 

이젠 다시 볼 수 없었어요

 

혹독했던 비판회 시절이
떠올랐어요

 

나를 껴안아주며

 

다정하게
'예쁜 자오 자오'라 했어요

 

남편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거 같았어요

 

우리의 심장이 함께 뛰었어요

 

이제 그 심장이

 

뛰는 걸 멈추고 말았어요

 

그 소리를 다신
들을 수 없었어요

 

나와 애들만 고난 속에 남겨두고
떠났어요

 

난 여전히 우파분자였어요

 

남편을 잃고
변함없이 우파였어요

 

어찌 살아갈지 몰랐어요

 

혼자 그 짐을 견딜 수 없었어요

 

힘 없고 약한 우파분자가

 

어떻게 혼자 두 아이를
키우겠어요?

 

란저우에서 남편이 인용했던

"전쟁과 평화"의
한 귀절이 떠올랐어요

 

"살아 있어 행복하다"

 

이젠 이 세상에서 사라졌어요

 

그 행복...

 

모두가 누릴 그 행복을
이젠 알지 못 했어요

 

남편이 저 위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날 밤을 어떻게 났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잤다 깼다 계속 뒤척였어요

 

그러다 마침내 날이 밝았어요

 

이튿날 아침
한 남자는 일찍 나갔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남은 남자한테 말했어요

 

왕징차오의 무덤에 가겠다고

 

간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댔어요

 

나갔다 오더니
무덤이 멀리 떨어져 있고

 

잘 묻어줬으니 걱정 말랬어요

 

아무리 멀어도 좋다고 했더니

그래도 가지 말랬어요

 

그래서 의심이 들었어요

 

우리 농장에서도 많이 죽었고

 

급하게 묻었어요

 

무덤을 못 찾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고 낯선 사람 묘에 가서

 

곡 하고...

 

절하겠어요?

 

놔두라고 했어요

 

무덤을 못 찾는다면
아무 소용 없었어요

 

그날 밤 다른
새 굴로 옮기게 했어요

 

안에 세 사람이 있었어요

 

텐수이에서 온 남매는
페이지펑의 자식들이었어요

 

또 한 명은
우체국 여직원이었어요

 

페이지펑은 전직 교사로
농장에서 죽었어요

 

우체국 여직원의 남편도 그랬고

 

나는 기자였고
역시 남편이 죽었다 했어요

 

그 뒤론 서로 별 말 없이...

 

그냥 울기만 했어요

 

다른 할 말이 뭐 있겠어요?

 

그 동굴도 고인들의 이부자리가
여기저기 널렸어요

 

이불에 싸서 묻거나

그마저 안 한 사람들도 있어

 

그렇게 남았을 거예요

 

그날 밤 그 이부자리에서 잤어요

 

다른 굴에도 우리 같은
과부와 고아들이 있고

 

농장의 생존자들도 있었겠지만

 

아무도 못 만났어요

 

간부들은 자기 일만 끝내고
신경도 안 썼어요

 

오기 전에 불상사에 대비했어요

 

혹시 남편이 죽었을 경우

란저우로 가게 돼 있었어요

 

란저우를 떠날 때

큰아들이 7살
작은아들이 4살이었고

 

오랫 동안 보지 못 했어요

 

이제 관할에서 벗어나
란저우로 가도 됐어요

 

그땐 차표 구하기가 힘들어

 

간부에게 표를 부탁했어요

 

좋다고 했어요

 

몇 시간 뒤 돌아오더니

 

표를 안 산도 된댔어요

 

상부에서 새 지시가 내려왔대요

 

농장의 수용자를
모두 집에 돌려보내라고

 

그날 오후에 기차가 출발한댔어요

 

그래서 모두 표를 안 사고
돌아가게 됐어요

 

그날 란저우로 떠났어요

 

밍수이가 아닌
가오타이 역에서 출발했어요

 

밍수이에선
기차가 1분만 정차했고

 

승강장도 없었어요

 

그때 만난 게 왕치였어요

 

짐이 많아 도와줄 사람을
농장에 부탁했더니

 

왕치를 보내줬어요

 

역에 가보니 피난민들처럼

 

서로 밀면서 기차에 타려 했어요

 

왕치는 뒤에 남아야 했고

 

남은 꽃빵을 줬더니

뒷날 그걸 기억했어요

 

징차오는 모른댔어요

 

나중에 기차 안에서 누가 와

왕징차오의 처냐 물었어요

 

내가 온 줄 알았지만
만나지 못 하게 했대요

 

그 사람이 주천셩이었어요

 

38사단의 고참 간부였는데

 

젊은 여자와 동거해
사생아를 낳아

 

군직에서 쫓겨나
노동교양을 받게 됐어요

 

왕징차오를 잘 안다면서

 

의젓한 사람이라 모두 존경했대요

 

아직 상중이라
긴 이야기는 못 나눴어요

 

먼 길이었는데
기차가 아주 느렸어요

 

거기다 먹을 걸 주지 않았어요

 

우리 몫의 빵이 없었어요

 

빵을 제공한다 해놓고
하지 않았어요

 

가져온 음식은 벌써 다 먹었어요

 

옆에 한 농민이 앉았는데

 

볶은 밀가루가 있었어요

 

돈과 양식표를 좀 주고
반사발과 바꿨어요

 

그것만 먹었어요

 

딴 사람들은
어떻게 했는지 몰라요

 

가는 내내 속였어요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거의 다 왔다
조금만 기다려라

 

이제 거의 다 왔다"면서

 

란저우에 다 왔을 땐
먹을 게 다 떨어졌고

 

받은 게 없었어요

 

집에 가면
먹긴 하겠지 생각했어요

 

란저우도 기근인 걸 몰랐어요

 

내가 없는 동안
란저우 사람들도 굶주렸어요

 

그때 여동생이 둘이었는데

하나는 소학교
또 하나는 중학교에 다녔어요

 

둘이 일요일에 힘든 일을 했대요

 

멀리까지 가 당근 잎을 모아왔대요

 

당근 잎은 전에 안 먹었어요

 

농민들이 남겨둔
당근 잎을 모아

 

자루에 담아 집에 가져왔대요

 

전엔 입에도 안 댔어요

 

여동생과 내 아들들이
란저우에서 굶주리고 있었어요

 

집에 들어서는데

 

나 혼자인 걸 보고
다 눈치챘어요

 

겨울방학이라
여동생들도 집에 있었어요

 

아버지는 상황이 그렇게
나쁜 줄 모르셨어요

 

겨울방학이 되면 여동생들을

 

남편에게 보낼 생각도 하셨어요

 

하지만 내가 갔을 땐
죽은 지 한 달 지났어요

 

그래도

 

집에 오니
마음이 놓이고 속 편했어요

 

큰일 치루고 왔어요

 

그 뒤 신문사로 돌아가

 

한동안 잡일을 했어요

 

그러다 1961년 9월 하순에

 

전체간부회의에서 갑자기

우파들을 복권시킨다
선포했어요

 

그토록 기다렸던 날이었지만

 

왕징차오를 비롯해
죽은 사람들을

 

사후 복권시킨다는 소식에

 

울음만 나왔어요

 

이제 와 무슨 소용예요?
다 가고 없는데!

 

나는 살아남았고

 

아들에게 돌아왔어도
깨어진 가족이었어요

 

신문사에서 작은 집을 내줘
아들들과 옮겼어요

 

복권된 뒤로는

 

62년부터
자료실에서 일하게 됐어요

 

당시 58.24위안으론
세 식구가 살기 쉽지 않았어요

 

여전히 배가 고팠고
62년에도 식량이 부족했어요

 

그래도 셋이 근근히 지냈어요

 

문화혁명 중에
또 같은 일이 벌어졌어요!

 

아직 안 한 이야기예요

 

다시 우파분자로 낙인 찍혔어요

 

1969년 3월

 

그때 신문사를 극좌파인
군이 운영했는데

 

6, 70명을 감금하고

1명을 체포했어요

 

나는 태도가 불손하다고

중징계를 받았어요

 

우파분자로 낙인 찍혀
공직에서 쫓겨나고

노동개조를 하게 했어요

 

후이닝으로 보냈는데

아버지 고향이지만
가본 적도 없었어요

 

어쩔 수가 없었어요

 

우리 집안이 지주 성분이랬어요

 

집안이 땅을 가진 적 없다고
써냈는데도

 

우린 노동자 성분이었어요

 

아버지 고향인 후이닝에 관해
많이 물었어요

 

고향에서 제일 가까운 인민공사
이름도 몰랐어요!

 

수십년이 흘렀는데
어찌 알겠어요?

 

깐거우란 곳을 물었어요

 

어릴 때 아버지한테
들어봤다 했어요

 

그때부터 친가의 친척들한테
연락을 보냈어요

 

그러다 4월 초에

 

후이닝으로 노동개조를 보냈어요

 

도착하던 날
큰 눈보라가 몰아쳤어요

 

후이닝 출신의 왕수란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어요

 

"두 손이 있는데
왜 도시에서 빈둥거리나"

 

이 말을 듣고 전국적으로
도시의 실업자들을

 

농촌으로 보내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4월 초에 후이닝에 갔는데

 

그때 이미 큰아들은
농촌으로 간 뒤고

작은아들은 중학교에 다녔어요

 

원래는 나와 함깨 보내려 했어요

 

나는 파직 되고
걔를 누가 돌봐줘야 했어요

 

근데 애가 영리했어요

 

농촌에 가면 힘들다는 걸 알고

 

'노동선전대' 선생에게 물어봤어요

 

선생은 바라지 않으면
안 가도 된다 했어요

 

그래서 주소를
어머니 집으로 옮기고

 

란저우에 남도록 했어요

 

학교에선 내가 가는 걸 돕게
며칠 쉬게 했어요

 

후이닝엔 아버지의 이복형제들인
숙부들이 있었어요

 

한 아버지에 어머니가 달랐어요

 

그쪽이 후이닝으로 옮긴 건...

 

이야기가 좀 복잡해요

 

할아버지한테
본처와 후실이 있었어요

 

아버지는 본처 소생이고

숙부들은 후실 소생이었어요

 

할아버지가 1947년에
돌아가시자

후실은 란저우를 떠났어요

 

그때 후이닝으로 가서
2,30묘의 땅을 빌렸어요

 

나중에 그 작은 땅 때문에
지주 성분이 됐고

 

온 가족이 지주 성분으로
분류됐어요

 

지주라고는 하나
숙부들은 몹시 가난했어요

 

내가 갔을 때 서류에는
숙부 집에 있게 돼 있었어요

 

"편의 제공"이라고
늘 쓰는 말 있잖아요

 

근데 가보니
내게 내 줄 방이 없었어요

 

큰 숙부래봐야 7,8살 위였어요

 

처와 애들 너댓이 있었고

 

온 식구가 한 방을 쓰고
큰 침상에서 함께 잤어요

 

다른 숙부들은 더 해서
토굴집 같은 데 살았어요

 

방 내줄 형편이 못 됐어요

 

또 숙부들은
내가 우파라는 걸 알았는데

 

가뜩이나 지주 성분이라
압박이 심했어요

 

나한테 이렇게 말했어요...

 

"집이 너무 작고

 

또 아무래도

 

'한솥밥'을 안 먹는 게 낫겠다"

 

그 말 뜻 알아요?

 

같이 지내게 되면
더 눈총 받는다는 거였어요

 

지주가 아닌 집이 좋겠으니
그렇게 하랬어요

 

그때 동행했던 간부가

 

장씨 성으로 좋은 사람이었어요

 

아직 마을에 있었고

지방 간부 집에 묵고 있었어요

 

숙부는 가기 전에 빨리 붙잡아

 

다른 지낼 곳을 부탁해보랬어요

 

숙부는 지방 간부의 집으로
나를 데려갔고

 

장씨 간부한테 사정을 말했어요

 

숙부 집에 지낼 방이 없다고 했어요

 

사정을 이해했어요

 

지낼 방도 없고

 

가져온 물건을 둘 데도
없다고 했어요

 

그때 가져온 게

한 차 분은 되는데

 

어디 둘 데가 없었어요

 

간부는 생각해보자며
우리를 돌려보냈고

 

그날 밤은 숙부 집에서 잤어요

 

이튿날 간부가
한 농민 집에서 받아주겠다니

 

그리 가랬어요

 

그날 작은 숙부들이
짐 옮기는 걸 도왔어요

 

농민의 성은 왕씨고
빈농 성분이었어요

 

숙부는 그 말을 듣고

 

왕씨가 사람 좋고
잘 해줄 거랬어요

 

그렇게 손수레에 짐을 싣고
농민의 집으로 갔어요

 

농민의 집은 둥근 움집이었어요

움집이 뭔지 알아요?

 

네, 둥근 흙 굴집인데
처음 봤어요

 

진흙 벽을 세워놓고

 

가난해서 서까래나 기와를
올릴 여유가 없어

 

천장을 흙벽돌로 둥글게 해놨어요

 

거기 빈 방이 있어
그리 짐을 옮겼어요

 

취사도 됐어요

 

방의 폭이 2,3미터 됐고

 

길이가 6,7미터에
온돌이 있었어요

 

취사용 쇠냄비를 가져갔어요

 

농촌에선 큰 냄비를 쓰는데

 

내 건 좀 더 작았어요

 

숙부가 방 구석에
작은 화덕을 만들어줘

 

취사할 수 있었어요

 

다음에 불쏘시개로 불을 피워

 

냄비에 물을 끓이게 했어요

 

집에서 보온병을 가져와
늘 더운 물을 먹게 됐어요

 

왕씨 농민이 진짜 잘 해줬어요

 

사실 아주 먼 친척 관계였어요

 

그 집 할아버지는 자기를
왕 할아버지라 부르랬어요

 

촌수가 어찌 되는지는 잘 몰라도

나를 한 집안 사람처럼 대했어요

 

그때 난 30대였는데
50대 부부를

왕 어머니, 왕 아버지라 불렀어요

 

그땐 아직 호구에 안 올라
양식표를 받지 못 해

 

첫 날 저녁을
그 집 식구와 같이 먹었어요

 

메밀국수와
집에서 담근 짠지였어요

 

말했듯이
아주 먼 친척 간이라 했고

 

한 숙부와 잘 아는 사이였어요

 

그날 밤 왕 어머니 말이

 

그 빈 방을 오래 안 썼는데
온돌을 데워놨댔어요

 

그날 밤 따뜻하게 잤어요

 

저녁 먹고 바로 잠들었어요

 

이튿날 아침 일어나...

 

양식표를 신청하러
공사 사무소로 갔어요

 

사무소가 십리 길이었고
절차 밟을 게 많아

 

그날은 일 안 했어요

 

양식표가 나왔는데
한달 치 밀가루였고

 

부근에서 밀가루룰 타
따로 취사하게 됐어요

 

또 왕 아버지 말대로
버들 망태기를 샀어요

 

등에 메고 다니는 망태기였어요

 

농촌에선 누구나
이 망태기를 썼어요

 

거름 나르는 일 할 때 썼고

 

또 불쏘시개를 모으고

 

땔감인 당나귀와 말 똥을
주워왔어요

 

사흘 째부터 일했는데
거름을 날랐어요

 

생산대장이 사람들에게
이미 내 이야기를 해놨어요

 

란저우에서 온 우파분자라고

 

농민들은 별로 개의치 않았어요

 

대장은 문혁을 내세워
위세부리는 인물이었어요

 

함께 일하는 여자들은
친절하고 호기심이 많아

 

이것저것 물어봤어요

 

처음엔 대장과 함께 일했는데

 

망태기에 너무 무겁게 지운다고
딴 여자들이 말했어요

 

자기들과 같이 하면
일이 훨씬 편할 거랬어요

 

빨리 해야 하고 쉴 틈 없던
농장과는 달랐어요

 

농민들이 말했어요
"공동의 일이니 슬슬 하라"고

 

그게 그랬어요
혼자 아무리 열심히 해봐야

돌아가는 건 같았어요

 

농장 일보다 수월했어요

 

대장은 언제든
작업을 중단시키고

 

남자들과 나무 판에 흙 말로
장기를 뒀어요

 

자신은 일하는 시늉만 했어요

 

이 번이 두 번째라

복권될 기회가
없으리라 생각했어요

 

생산대의 농민들은

 

나를 남처럼 대하지 않았어요

 

한 번은 대장이 없는 틈에
빈둥대고 있었는데

 

누가 말했어요, "장 대장 온다
뭐랄지 모르니 조심해라"

 

자기들은 별 상관 없지만

 

내가 걸리면
문책 받는 걸 알았어요

 

농민들은 날 봐주고
가족처럼 대했어요

 

온 직후에 왕 어머니가
사람들에게 말했어요

 

우파분자라고
날 따돌리면 안 된다고

 

무슨 분자니 하는 식으로

 

사람을 대하지 말고

 

손님으로 한 가족으로 대하랬어요

 

첫 날 온돌에
어떻게 불 피울지 몰랐는데

 

불 피우는 걸 도와주고

 

보살펴줬어요

 

매일 왕 어머니는 문 앞에
불쏘시개를 놔뒀어요

 

늘 딸처럼 대하며 살펴줘서

 

따뜻한 온돌에서 잠들었어요

 

농장에서 오래 춥게 지냈던지라

 

여기가 별천지 같았고

 

큰 자유를 찾은 기분이었어요

 

그래도 농촌 생활은 힘들었고

우물도 없었어요

 

빗물을 받아놓고 썼어요

 

세수할 땐

 

물을 조금 떠서
문지르면 그만이었어요

 

근데 특별히 나한테는
대야를 쓰게 해줬어요

 

나한테 잘 해줬어요

 

근데 한 달이 지나고
점점 힘든 일이 생겼어요

 

타온 밀가루를 다 먹고
밀을 갈아야 했어요

 

그때 거긴 맷돌질 할
연장이나 당나귀가 없었어요

 

당나귀는 공공 재산이었고

 

손으로 갈아야 했어요

 

밀을 까부르는 건
남들이 도와줬지만

 

가는 건 본인이 해야 했어요

 

그게 힘들었어요
익숙하지 않아서

 

힘든 일은 아닌데
웬지 어지러웠어요

 

하루는 하다가 갑자기 땀이 났어요

 

왕 어머니가 왜 그러냐 물었어요

 

"왜 그렇게 땀 흘리느냐?

 

안색이 안 좋다"며

 

어지럽다고 했어요

 

웬지 갈다보면 어지럽다고

 

앉아 있으라고 하더니
대신 일을 해줬어요

 

이전의 농장 일은 힘들었어도

 

몸에 밴 일이었어요

 

이 일은 더 쉬운데
웬지 잘 안 됐어요

 

어째야 할지 몹시 걱정했어요

 

조금도 못 갈았어요!

 

그 가족이 다시 해결해줬어요

 

당나귀가 있는 산의 농가를
왕 어머니가 알았어요

 

그 집에 말해서
당나귀를 빌려왔고

 

그렇게 밀을 갈 수 있었어요

 

나한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늘 나서서 도와줬어요

 

그 뒤론 손으로
밀을 갈지 않았어요

 

내가 간 첫 해는
후이닝에 비가 많이 와

 

풍년이었어요

 

그땐 아직 젊고 건강해
일 많이 했어요

 

그해에 양식을 충분히 받아

 

이듬해까지 먹고 지냈어요

 

근데 3년째에 가뭄으로
양식이 모자랐어요

 

후이닝에선 낫으로
밀을 베지 않았어요

 

잡아 뽑았어요

 

농장에선 낫을 썼지

손으로 해본 적이 없었어요

 

하루는 밭일을 나갔는데
뽑다가 손에 물집이 잡혔어요

 

왕 어머니가 보고 말했어요

 

"그 손으로 내일
어떻게 일하겠느냐?"

 

낫만 써봤다고 했더니

 

"진작 말하지
낫을 빌려주마" 했어요

 

밀의 키가 낮아
쭈그려 앉아야 했어요

 

근데 농촌 여자들은 전족을 해
앉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무릎 꿇고 일했어요

 

다들 집에서 만든
무릎받침을 썼어요

 

왕 어머니는 나이 들어
밭일을 못 해

 

자기 무릎받침과 낫을 빌려줬어요

 

농장 일처럼 힘들진 않았어요

 

공사의 사람들은

 

내게 잘 해줬어요

계급의 적이 아니라

 

인간답게 대했어요

 

가뭄이 들고

 

먹을 게 부족했어요

 

힘든 시절이었어요

 

개에게 줄 물도 없었어요

 

다들 강물을 먹으라고
밤에 개들을 풀어놨어요

 

강물이 탁했지만
사람 먹을 물도 모자라

 

개들을 풀어놨어요

 

첫 해 겨울에
감자를 많이 수확했어요

 

몇백근 됐어요

 

그 감자를 광에 저장해놓고

 

요긴하게 먹었어요

 

감자 가루로 국수도 해먹었어요

 

지금도 감자를 안 먹어요

그때 하도 물려서!

 

가뭄으로 농민들은 굶주렸어요

 

나는 집에서 보낸
양식표로 지냈어요

 

농민들은 말이 아니었고
개들도 굶어 죽었어요

 

대장은 양식을 훔쳤어요

 

농민들은 굶는데

 

훔친 걸로
자기 돼지들을 살찌운다는

 

말이 나돌았어요

 

그 집 식구들은
쉬운 일만 하면서도

 

남들 몫과 똑같이 받았어요

 

양식을 훔쳐 굶주리지 않았어요

 

그무렵 계급투쟁이 격화됐고

 

린뱌오가 지시를 내렸어요

 

몇 호 지시인지는
잘 기억 안 나지만

 

도시인들을 농촌에
내려보내란 것이었어요

 

똑똑히 기억은 안 나도
그랬어요

 

란저우에서 상당수가 왔어요

 

대장이 일장훈시를 했어요

 

"지금은 전시와 같다

 

우파분자들의 행동에 따라

 

즉걸처분해
총살시켜도 무방하다"

 

근데 1972년에

 

문화대혁명 대상자를
다시 선별했어요

 

많은 신문 사원들을 체포해
농촌으로 보냈고

 

나같은 우파분자들을

 

반혁명분자, 파괴분자로
처리했어요

 

절도로 비판받은 이가 있었는데

 

처가 일이 없고
살기가 곤궁했어요

 

뭐랬냐 하면...

 

석탄인가를 훔쳤다 했어요

 

석탄 조금 훔쳤다고

파괴분자라며 농촌에 보냈어요

 

당시엔 이중으로 처벌 받았어요

 

당에서 제명 당하고
공직에서 쫓겨났어요

 

그때 란저우의 친척에게서
편지가 왔어요

 

란저우로 돌아와
재심사를 받아보라고

 

어떻게 그렇게 해요?

 

근데 여동생이 전보를 보냈어요

 

작은아들이 폐렴이니
돌아오라고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근데 간부는 전보가
공식적이 아니랬어요

 

그 전보로는
공식 증명이 안 된다면서

 

여동생은 작은 공장에 다녔고

 

상사와 사이가 좋았어요

 

그래서 다시 전보를 보냈어요

 

공장의 직인을 찍어서

 

다시 요청했더니
란저우로 돌아가도 좋댔어요

 

물론 내 본뜻은
재심사 받는 것이었어요

 

당시 란저우에선
호구조사가 엄격했어요

 

아들과 어머니 집에 있었는데

 

한밤중에 검사관들이 찾아와

 

호구조사를 했어요

 

그 중 하나가 친척이었어요

 

날 알면서도 몇 가지 묻곤

 

눈을 찡끗하더니
별다른 조사 없이 나갔어요

 

그 뒤 여동생 숙사로 갔어요

직원 숙사고 조사가 없었어요

 

여동생은 갓난애가 있어
도움이 필요했어요

 

애 돌보고 가사 일 하는

 

집안 일을 봐주면서
재심사 소식을 기다렸어요

 

신문사를 군이 관리하고 있어
처리가 더디게 진행됐어요

 

냉담한 태도였고
호의라곤 없었어요

 

모든 서류가 공안국을 거쳤어요

 

공안국을 거쳐야
일이 진행됐어요

 

처음엔 공안국에서
복직 신청을 거부하고

 

후이닝으로 돌아가랬어요

 

다행히 사촌의 남편이
공안국에서 일했어요

 

공안국에서 근무한 지
얼마 안 됐지만

 

상사가 힘이 좀 있었어요

 

그렇게 뒷 경로를 통해

 

마침내 재심을 받아들여
신문사에 복직했어요

 

1972년 4월에
란저우로 돌아왔지만

 

1974년 8월이 되어서야

 

신문사에 복직할 수 있었어요

 

근데 오래 못 있을 거 같았어요

 

정치적 압박감이 심했어요

 

막 복직한 우파분자라고
보는 눈이 곱지 않았어요

 

란저우에서 딴 일을
찾아보려 했어요

 

그때 어머니는 60대였고

건강이 안 좋으셨어요

 

여동생은 수력발전설계를
전공했는데

 

문화혁명을 겪으면서

공장 일을 하게 됐어요

 

어린아이들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병으로
육아나 가사 일을 못 도왔어요

 

내가 자료과에서 일하며
늦게 돌아가는 게

 

어머니한테 안 좋았어요

 

그래서 란저우에서 이직을 하고

 

집안 일을 도울 생각이었어요

 

그때 란저우는 문화혁명으로
교사가 부족했어요

 

특히 중학교 교사가 그랬어요

 

신문사에 내가 심장병이 있고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신문사를 관두고
교사로 일하고 싶댔어요

 

어차피 날 못마땅하게 여겼어요

 

근데 최후 통지를 해왔어요

 

간난으로 가라고

 

석 달 안에 안 가면
일자리가 없댔어요

 

복직한 지 얼마 안 되는데
뭐라 따지겠어요?

 

간신히 복직했는데

 

다시 잃을 순 없었어요

 

결국은 하는 수 없이

 

간난으로 가야 했어요

 

다른 이유도 있었어요

그때 재혼했는데

 

두 번째 남편이 간난에 있었어요

 

서북민족학원에서 일했는데

 

그 조직을 해체시키고

 

상당수의 인원을
간난으로 보냈어요

 

간난은 추운 고산지대였어요

 

해발 2천9백미터였어요

 

딴 데면 어머니를
모시고 가겠는데

 

고산지대라
어머니 건강에 더 안 좋았어요

 

옮겨야 했지만

 

한참을 미루다가

 

1975년 4월에 갔어요

 

나한테는 말 안 하셨지만

어머니가 친구분들에게 그러셨대요

 

"펭민이 가면
난 오래 못 산다"라고

 

어머니가 계신 집엔

 

화장실이 없었어요

 

내가 가면 손주 둘 뿐이었어요

 

용변을 보려면

 

제일 가까운 공중 화장실이
7, 8미터 거리였어요

 

이미 한 눈을 실명하셨고

 

다른 눈도 잘 안 보였어요

 

더는 자신을 돌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가면
오래 못 산다셨어요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간난에 가서
뭘 하겠냐 물어

 

중학교 국어 교사를
하겠다고 했어요

 

고졸 출신이라고
이력에 나와 있었지만

 

할 수 있다고 했어요

 

당시 신설된 간난 민족학교에

 

국어 교사로 보내줬어요

 

그때 여동생 편지가 왔어요
어머니가 몹시 아프다고

 

답장을 썼어요

 

치료 해보고

 

그래도 호전 안 되면
전보를 보내라고

 

일주일도 안 돼 전보가 왔어요

 

내 답장을 받기도 전이었는데

 

빨리 집에 오라 했어요

 

학교 동료들이
수상하게 생각했을 거예요

 

이제 막 와선
집에 가보겠다 했으니

 

집에 와보니 병이 위중했어요

 

어머니가 걷지를 못 하셔서

 

제부가 병원에 모시고 갔어요

 

근데 병원에선 죽어간다고
안 받아줬어요

 

난 우파분자에
여동생은 공장 직원

 

제부는 하방돼 온 처지였어요

 

아무 힘이 없었어요

 

결국 간신히 한의원에 모셔갔어요

 

망막출혈이 뇌에 이르렀고

 

지나치게 신경 쓴 게
병이 된 것 같으며

 

치료가 안 된다 했어요

 

내가 가면 오래 못 사실 걸
어머니는 아셨어요

 

나중에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간쑤일보가 내 가족 둘을 죽였다

 

처음엔 남편, 다음엔 어머니

 

날 안 보냈으면
그렇게 빨리 안 돌아가셨어요

 

그때 나한테는 아직
수업이 배정 안 됐어요

 

한 여동생은 공장에 휴가낼
형편이 못 됐어요

 

또 한 여동생은 애가 둘인데

 

걸음마 하는 애와 갓난애였어요

 

내가 휴직계를 내고
어머니를 돌봤어요

 

두세 달 뒤에

 

어머니는 긴 병환 끝에
세상을 떠나셨어요

 

장례식은 간소하게 치뤘어요

 

나와 작은여동생 둘 뿐이었어요

 

동생은 며칠 휴가를 냈어요

 

큰여동생은 못 왔어요

 

나중에 겨울 휴가 때
여동생들이 집에 왔고

 

어머니 묘에 작은 묘비를 세웠어요

 

1978년 12월에 마침내
나는 정치적으로 복권됐어요

 

왕징차오는 간쑤일보의
우파 우두머리라며

1979년에야 복권됐어요

 

결국 신문사의 우파 11명이
모두 복권됐어요

 

그 뒤...

 

79년에 민족학원으로 옮겼어요

 

1990년에 비로소

 

농장에서 같이 고생했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했어요

 

그 중에 가오타이에 사는
사오종화라고 있었어요

 

편지를 보냈더니
바로 답장이 왔어요

 

이렇게 썼어요
"지금 가오타이에 사는데

 

남편이 있었던 농장과 멀지 않다

 

남편이 밍수이에서
죽은 건 알지만

 

남편 이름은 몰랐다

 

남편의 묘를 찾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지만

 

편지를 받기 전까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묘 찾는 걸 돕고 싶다"

 

그 동안 나도
같은 소망을 품고 있었어요

 

1961년 농장에서 나올 때
간부들이 거짓말 했어요

 

남편의 묘를 찾지 못 해

고별의 예를 갖추지 못 했어요

 

수십년 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어요

 

마침내 1991년
큰아들 파샤와 함께

 

가오타이로 가서
애아버지 묘를 찾아

 

제사를 올리게 됐어요

 

당시 그곳엔

 

묘지로 길이 안 나 있었는데

 

그곳 지리를 잘 아는 사오종화가

 

자전거로 안내했어요

 

아들 파샤는 자전거를 빌렸고

나는 샤오종화의 자전거

 

뒤에 타고 갔어요

 

30여년이 흘렀지만

 

남편이 묻힌 곳을
찾아내기를 바랐어요

 

묘를 찾는 가족들을 위해

 

농장의 간부들이

 

고인의 묘 위에
이름이 적힌 돌을 놔뒀어요

 

검정 잉크나 붉은 물감으로
써놨어요

 

글씨가 안 지워지도록
돌을 엎어놨어요

 

널린 무덤들을 보며
아주 비통했어요

 

그 동안 과연 남편 무덤을
찾을 수 있을지 몰랐어요

 

여기서 나올 때
애들은 아기였어요

 

이제 다 큰 아들을 데리고

 

그애 아버지가 묻힌 곳에 왔어요

 

묘지에 들어서면서부터
울음이 터져나왔어요

 

아주 큰 묘지에
무덤들이 꽉 차 있었고

 

이 무덤 저 무덤을 다니면서

 

돌을 다 뒤집어봤지만
이름이 다 지워졌어요

 

샤오종화가 1979년에 왔을 땐

 

아직 이름이 보였다고 했어요

 

이젠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어요

 

셋이 모든 무덤을 돌아다니며

 

돌을 집어 이름을 살펴봤지만

 

남편 무덤을 찾을 수 없었어요

 

모든 무덤이 같았어요
이름이 다 지워졌어요

 

결국 묘지의 한 공터에서

 

제물을 올렸어요

 

샤오종화가 현지에서
복숭아와 과일을 사왔고

 

우리는 란저우에서
대련을 가져왔어요

 

내가 써온 "수조가두"와

 

함께 고난을 겪은

양캉과 두버지의 추도문이었어요

 

파샤가 대련을 읽기 전에
아버지라 외쳤어요

 

30년만에 처음이었어요

 

아버지라 불러보질 못 했어요

 

말을 배우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었어요

 

처음으로 아버지라
부르는 걸 듣고

 

너무나 감격스러웠어요

 

그애가 대련을 읽고서
모두 통곡했어요

 

그날 날씨는 좀 흐렸어요

 

묘지는 아주 조용했어요

 

새 소리나 벌레 소리도
없었어요

 

그 정적 속에서
아들의 대련을 태우고

 

무덤에 엎드려 흐느꼈어요

 

다음엔 내가 써온
"수조가두"를 읽었는데

 

계속 목이 메었어요

 

내 생각을 담아온 것이라
끝까지 읽어야 했어요

 

가까스로 읽기를 마쳤어요

 

그리고 샤오종화가

두버지와 양캉의
추도문을 읽었어요

 

남편이 핍박을 받게된
세 편의 글이

 

후세에 남을 것이며

 

고이 잠들기를 빌었어요

 

다음엔 현지 풍습에 따라
종이를 불태웠어요

 

샤오종화는 묘지에서
먼 곳에 살았지만

 

나보다 10살 아래고
체력이 좋아

 

자전거 뒤에 나를 태웠어요

 

길이 험했지만

 

별 탈 없이 뜻한대로 됐어요

 

제사를 끝내고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오래 전에 내가 묵었던
굴의 사진도 있었어요

 

당시의 모든 걸
상세하게 담아두고 싶었어요

 

가슴 아팠지만

 

오랜 숙원을 풀고

 

란저우로 돌아가게 됐어요

 

우린 30년만에 제사를 올렸지만

 

모든 가족들이
다 그렇진 못 했어요

 

우리 뿐일지도 몰랐어요

 

돌로 둘러싸인 무덤도 있었어요

 

가족들이 찾아 왔지만

 

유해를 옮기지 못한 것 같았어요

 

숱한 사람들이 애통하게
같은 길을 오갔을 거예요

 

나는 남편의 무덤을 못 찾았어요

 

고인을 찾아왔는데

제대로 매장 안 된
유해들도 있었어요

 

무덤들 중엔

 

유골이 드러난 곳이 있었어요

 

입을 벌린 해골들이

 

모래에 반쯤 묻혀 있었어요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어요

 

억울하게 죽어

 

고이 잠들 수 없다고

 

1978년의 11기 3중전회 이후
55호 문건으로

 

대다수 우파분자들이
복권됐고

 

우파라는 낙인에서 벗어났어요

 

공식 통계에 따르면

 

55만 2,827명의
우파분자가 복권됐고

 

이 숫자는

 

우파로 낙인 찍힌 이들의
99.98%예요

 

96명만 복권 안 됐어요

 

"좌파의 화"란 책에 그렇게 나와요

 

현재는 대여섯 명만
남았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96명예요

 

다이후앙이 쓴 "구사일생"에도
96명으로 나와요

 

하지만 기록된 것보다
규모가 훨씬 광범위했어요

 

아무튼 기록된 숫자의
99.98%가 복권됐어요

 

나머지 0.02%

 

그러니까 이 96명만
실제 남았는데

 

반우파투쟁은
철저히 부정되지 않았어요

 

철저히 부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55여만명이란 게
기록된 숫자일 뿐예요

 

55여만 외에
기록 안 된 게 허다해요

 

예를 들어 대학생들은

 

냉혹하게 처리됐어요

 

란저우 대학의 많은 학생들을

 

우파라며 노동개조 보냈고

 

살아서 돌아오지 못 한
사람도 있었어요

 

우리 가족만
박해 받은 게 아니라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겪었고

 

그 사실을 써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1989년 은퇴한 뒤
책을 쓰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많이들 말렸고

 

여동생들까지 그랬어요

 

"왜 쓰느냐?" 했어요

 

"써봐야 발표도 못 할텐데
왜 쓰느냐?"고

 

친구들은 이런 걱정도 했어요

 

기억을 되살리는 게
너무 가슴 아플 거라고

 

왜 그 쓰라린 기억을
들추려는지

이해를 못 했어요

 

"왜 들추려느냐?

한 번으로
족하지 않느냐?"면서

 

바로 그렇게 아픈 경험이었기에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야 했어요

 

내가 직접 겪은 사실들이라

 

쓸 이유가 충분하다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나 자신의 이야기고

 

나보다 누가 더 잘 알겠어요?

 

내가 안 쓰면 누가 쓰겠어요?

 

전화 받아야겠네

 

여보세요?

 

네, 그래요

 

아니, 못 들었어요

 

그래요

 

그래요

 

다른 생존자

 

그래요

 

그래요, 남편과 같은
농장에 있었어요

 

74살쯤 돼요

 

나보다 손위예요

 

아들이 둘인데
큰애는 2003년에 죽었어요

 

지금은 작은애 뿐예요

 

그럼 복권됐어요?

 

우파였어요?

 

아니...

 

그랬어요?

 

나중에 복권됐어요?

 

문화혁명 땐 괜찮았군요

 

이름과 전화번호를 말해줘요

 

펜 가져올게요

 

됐어요

 

'정확하다'의 '증'?

 

샤오증샹?

 

네, 네, 네

 

전화 고마워요

 

안녕히 계세요

 

쿤밍의 또다른 생존자에게서
온 전화예요

 

이 영화를 혁명기를 살아간

혁명가와 혁명의 피해자
모두에게 바칩니다

 

감독: 왕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