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른 나라

 

루퍼트 에버렛

 

음악: 마이클 스토리

 

편집: 제리 햄블링

 

1983년 모스크바

 

각본: 줄리언 미첼

 

제작: 앨런 마샬

 

감독: 마렉 카니에프스카

 

- 줄리 스코필드입니다.
- 안녕하시오.

 

- 그거 제대로 돌아갑니까?
- 네, 잘 돼요.

 

- 후세에 기록을 남기고 싶소
-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어요

 

- 한 잔 하시겠소?
- 고맙습니다

 

- 버번은 없소. 스카치요.
- 스카치 좋아요

 

얼음?

- 당연히 그렇겠죠
- 네

 

 

늘 유명해지고 싶어했었소.

 

이름을 남기고 싶었지

러시아 간첩으로요?

 

 

명성이든 악명이든 무슨 상관

잊혀지지는 않을 텐데.

 

 

어머니가 지금 내 모습을 봐야 하는데.

 

- 극소수 스파이 중 최후의 생존자.
- 사실 한 두 명이 아니었지요.

 

어느 쪽으로 튈까
고민하던 사람은 많았소만

 

사실 우리는 아주 소수였소.

 

우리, 행복한 소수. 일단의 형제들.

 

셰익스피어요. .

 

애국심의 화신.

 

그 형제들은 대체 몇 명이나 되었죠?

 

지금이라도 말 못할 것이 있소.

- 그래요? -
아쉽지만 그렇소이다.

 

 

페어프론트, 한심스런 영국인의 고향이죠.

 

어째서 영국의 삶을 경멸하죠?

 

당신같은 배경과 출신을 가진 사람이...

- 제대로 알고 싶소?
- 네, 제대로.

 

 

30년대 영국은 상상도 못할 거요.

 

반역, 충성, 전부 상대적이었죠.

 

무엇에 대한 반역? 누구에 대한 충성?
문제는 그거였소.

 

마티노, 로빈스!

 

지상의 우리는 늙어도
그들은 영원히 늙지 않을 것이요

 

만물은 세월에 시들어도
그들은 영영 젊으리라

 

해가 질 때나 아침에나

우리 그들을 기억하리라

 

 

그들을 기억하리라

 

- 부모님 오셨으니 점심먹자
- 고마워.

- 너 웃었지
- 안 웃었어.

 

- 낄낄거렸잖아
- 입도 뻥긋 안 했어

 

집중이 안 되더라

 

 

아무리 너라도 알아야지
400명 학생들이 쭉 늘어서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추도라니
진짜 웃기는 일이야.

 

- 알지도 못해?
- 장사꾼들 대신 싸우다 죽었을뿐

 

러시아처럼 장교들한테 총구를
돌리고 혁명을 시작했어야지.

 

 

다 상급장교들이었잖아

 

네 생각이야 뻔하지.

 

워튼!

 

- 네, 바클리 선배
- 이거 돌려. 점심 전에 다 붙여

 

- 우릴 위해 죽은 사람들이야.
- 지배계급을 위해 죽은 거지.

네가 그 계급이야.
아닌 척 하는 너도 웃겨.

 

 

왜 그렇게 튀지 못해 안달이야?

- 남들과 다른 게 어때서?
- 내 말이 그 말이야

 

 

- 너도 학생장 되고 싶지?
- 그래.

 

- 학장들도 다르잖아.
- 그런 말이 아니야.

 

난 최고로 특별한 학장이 되고 싶어.

너같은 지식인이 왜 저런 한심한
권력체계에 끼고 싶어하냐?

 

학생장 전에 규율부라는 게 문제야
지금 당장 학생장 하고 싶은데

 

 

너는 다음 학기에 될 거야.
나는 몰라도.

 

하긴 그렇지.

 

누구 마티노 본 사람 없어?

 

제발 정신차려, 베넷.

 

그 친구 나왔구나.

 

아직 아냐.
시간문제지만.

 

기숙사의 녹슨 문이 활짝 열리면...

 

그 문 기름 좀 쳐야겠다.

 

황홀한 그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지.

 

뭐하면서?

 

바람을 가르면서

 

얼룩 사슴처럼?

 

진짜 미치겠다

 

그러면 불타는 듯 부드럽고
온화한 듯 정열적인 시선을

마당을 가로질러 쏘아대며
희망을 거역해 희망하며

 

내가 시선을 받기를 바라겠지.

 

 

그럼 내 심장을 발밑에 바칠 거야

 

- 여기까지 오려면 발 엄청 크겠다
- 한번 볼래?

- 됐어. 마티노 봤어?

 

 

아니, 내 눈에 보이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뿐이야

너희들은?

 

 

- 부모님이 오신다면서
- 보면 말해 줄께

 

고마워.

권력을 남용하고 싶은 데 참아주는
성격 좋은 네가 고맙지.

 

 

- 불공평할 뿐 아니라 말이 안 돼
- 그만 해, 저드.

 

수백 파운드 내고 감옥에 보내서
놀이로 시간을 허비하게 하다니

 

잘하는 짓이지.

 

크리켓은 팀 정신을 가르치니까.

 

- 마음만 먹으면 너도 잘 하잖아
- 마음먹기 싫어.

공부 좀 하게 내버려두면 좋겠다구

 

 

기숙사에서 쌍안경 좀 치우지 그래

 

미안하지만 안 되겠어.

 

파시칼이 연구 허가 내줬다구

 

- 누구?
- 파시칼

 

사감님 말이면 성함을 불러야지

- 너도 안 그러면서 뭘.
- 뭐?

 

 

제대로 성함을 안 썼잖아

 

파커슨 씨인데.

 

똑똑한 척 하지 마

 

그럴 필요 없지.

 

난 똑똑하니까.

 

널 체벌할까
반쯤 생각중이야

 

네 생각은 늘 반푼이잖아.

 

뭐야? 옷 갈아입어, 다들.

 

기숙사 대항전에 늦으면
누구든 6대씩 맞는다.

 

파울러같은 놈을 생산하는 게
이런 학교의 존재이유야.

 

대단한 제국의 건설자들,
제국건설에는 상상력이 필요없어.

 

나도 자원했다구.

 

놈은 아프리카부대에 들어갔다가
식민지 통치로 직행할 걸.

매독도 얻고.
놈은 아프리카부대에 들어갔다가
식민지 통치로 직행할 걸.

 

매독도 얻고.

 

 

좀 잘 쳐, 베넷.

 

그러다 원주민 처녀를 하나 꼬셔서
밤마다 수청을 들게 하고 말야.

 

귀국해서는 새하얀 백인 아내를
쳐다보지도 않을 걸...

제발

 

 

그래도 싸지,
제국주의자하고 결혼했으니까.

식민통치가 뭐가 나빠

 

 

식민지 통치는 치욕이야.

 

왜 그리 사사건건 반대냐.

 

혁명에는 찬성이야.

 

이봐, 기숙사 대항 심판이 필요해.

 

좋아, 나하고 저드가 하지.

 

- 난 심판 싫어
- 아냐, 하자.

 

- 심판! 와이드요!
- 아니었어

 

- 도저히 칠 수 없었다구
- 노력을 안 해서 그렇지

 

선 밖으로 완전히 나갔는데

 

불복하는 건가?

 

심판한테 불복하는 건
기숙사규정에 어긋날 텐데.

 

너희는 몰라도 우리 숙사는 그래
체벌을 할 수도 있으니 입닥쳐

 

- 자, 어때?
- 아웃!

 

왜 종을 울리면 안 되지?

저녁이잖아.

 

 

종 정도는 울리자구.

 

나가. 나가. 다 나가.
사감 모셔와.

 

여긴 정말
참을 수가 없어!

 

이런 일은 우리한테 맡겨야지.

 

교장이 부르지만 않았어도
죽지는 않았을 거야

 

퇴학당할 줄 알았던 거라구

 

사감한테 붙잡혔으니
도리가 없지

 

- 상대가 다른 숙사에서 왔고
- 우리가 처리했어야 해.

 

숙사일은 규율부,
나머지는 우리 일이라고.

 

사감은 자기 일이나 하지

 

학생장 권력으로 퇴학은 못 시켜

 

뭐하러 퇴학시켜?

 

그럼 계속 다니게 해?

 

맞고 나면 몇 주 앉기 힘들겠지만

쫓아낼 필요까지야...

 

 

기숙사 기강이 말이 아니야
다 네녀석이 문제야.

 

-그만둬
-입닥쳐

-바로 이런 태도가 문제란...
-입닥치지 못해!

 

 

어쨌든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아

 

개인적으로...

 

문제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진짜 절박했나 봐.

 

그렇다고 뭐가 달라졌겠어?

얘기라도 했으면, 누구한테든.

 

 

개인적 감정은 잊고
의무를 생각하자

 

고백할 일이 있어도
마음에 담아둬.

고백할 일이 있으면 해야지.

 

 

그거야말로 숙사를 위한 일이야.

 

난 내년에 남아있고 싶어.
학생장도 되고 싶고.

 

그런 재목은 못되는 거 같은데.

 

깨끗한 기숙사부터 시작해라

 

깨끗한 기숙사라는 게 있냐?

 

여기든 다른 학교든 말야

 

특별 예배를 하는 게 어때?

 

-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길잃은 양들처럼 헤매입니다.

 

우리의 욕망에 무릎 꿇고...

 

다 사감이 동문이 아닌 게 문제야.

 

그렇구나

 

동문이면 생각없이 거길 갔겠어

 

어떤 덴지 다 알 텐데

 

너도 조심하라고
여기서는 일탈이 용기라고

 

- 저드한테 가도 돼?
- 맘대로

 

나는 남자뿐 아니라 여자와도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을 것이며

 

짐승과도 하지 않을 것이다

 

여자가 짐승과 함께
눕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 나는 외로운 야수다
- 당장 떨어져

 

거 참 이상하다.

 

결국 다 넘어오던데.
베넷의 법칙이야

- 난 안 넘어가
- 넌 정상이 아니잖아.

 

 

- 되게 빠르네. 누가 했냐?
- 청소부가.

 

불쌍한 마티노.

 

결국 다 넘어오는 이유는

 

혼자 하다가 외로워져서 그래

 

- 같이 할 사람이 아쉬워지거든.
- 난 아니야. 네 취향은.

엄마도 그래서
영감탱이하고 결혼한다고

 

 

- 사랑하기 때문 아닐까
- 불가능해.

 

그 콧수염, 역겨워.
아버지만큼이나 싫다니까

 

너도 가리냐?

 

끔찍하다구.
어른이잖아.

 

다 한 때라 이 말이지.

 

- 네 공산주의 노릇도 마찬가지야.
- 오호라

 

- 저드
- 왜?

 

- 너하고 여자친구 말야
- 뭐가?

 

- 그렇게 달라?
- 뭐랑?

 

남자애들이랑.

 

내가 어떻게 아냐.
해봤어야지.

 

무슨 일이니, 워튼?

 

- 선배 목욕물 때문에요.
- 자기가 알아서 하라고 해.

 

더 자렴.

 

차다고 난리가 났어요.
바클리한테 이르겠다고.

 

새로 뜨거운 물을 받아다가
천으로 덮어서 탕에 갖다놔라

 

고마워요, 저드.

 

- 서둘러라, 워튼.
- 네.

 

은 너무 어려워.

 

그래도 끝내 이해 안 되는 말은 없더군.

 

경제학을 가르치면 좋을 텐데.

 

맑스가 교과서가 되야 되는데.
혼자 읽긴 힘들어.

 

그것도 이불 둘러쓰고 말야.

 

바클리가 또 손전등을 압수해갔어.

 

- 몇 개째야?
- 열 두 개.

 

원래 학교가 공부시키는 데 아니냐
공부하겠다는 데 손전등을 뺏다니.

 

- 실상을 부모들이 알아야 되는데.
- 알아, 적어도 아버지들은.

 

뭐해? 들어가 자.

 

하코트, 토요일 7시에 만나줘.

 

- 이게 뭐야?
- 제 생각엔...

하급생들은 생각하지 않아.
복종하는 거야.

 

반짝반짝 닦으라고 했잖아.

 

 

이것만 빼면 괜찮은데.

 

- 지워.
- 네.

 

- 남프랑스 빌라 하나 찾아봐요
- 그럴까?

 

물론이죠. 신혼여행차요.
학교 끝나면 저도 가게요.

 

친구를 데려가면
비용이 많이 들까요?

 

- 그이가 저드를 안 좋아할 걸?
- 저드 얘기가 아녜요.

 

하긴 아서는 18살 이하는
다 게이인 줄 알죠.

 

걱정이 많이 돼요.

 

남들 의심하는 사람 보면
다 자기 구린 데가 있던데.

 

- 아서는 아주 정상적인 인간이야.
- 다 위장이에요.

 

아직 취소할 시간 있어요
차 세웁시다.

 

농담하면 안 돼.
그 사건도 있는데

 

- 엄청 인기가 없었다면서.
- 마티노요? 아니에요

 

- 하지만 그런 애는...
- 죽는 게 낫죠.

 

그런 사람 한 두 명 아는데,
영영 불행해.

 

재밌기는 한데...

 

가이 좀 보라구, 다 자랐어.
애가 아니라 청년이지.

 

학기 끝나면 휴학하고
세상구경을 좀 하지 그러냐.

 

미쳤어요?
이제 제대로 배우려고 하는데.

 

- 인생을 배워야지.
-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 군대는 어때요?
- 물론 군대 좋지.

 

- 군대에는 인생이 있잖아요.
- 그럼 그럼.

 

사람 죽이면서 돌아다니는.

 

말버릇이 그게 뭐냐!

 

어머니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나요?

 

생각일 뿐이야.
아서 생각에...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해서

 

지금 그만두라고요?

 

10년 동안이나 다녔는데.

싫으면 하지 마.

 

전 학장이 될 거예요.

 

 

기숙사 최고의 학생조직.

 

그 생각만으로 10년을 버텼어요.

 

언젠가는 최고가 되겠다고.

원한다면 그러려므나.

 

 

피로연에 돌아가 봐야겠다

 

한 잔 하시겠습니까?

 

셰리로 하죠

 

정말 왔군

 

안 올 줄 알았어?

 

모르겠어.
오길 바랬지.

 

자, 이렇게 왔어.

 

네가 배고프면 좋겠군.

 

캐비아하고 토스트밖에 못 먹었더니 배가 고파.

 

나쁘지 않은데 뭘

 

하코트라고 부를 수는 없어
내 이름은 가이야.

 

알아. 나는 제임스야.

 

제임스, 이름 좋구나

 

겁이 나서 못 올 뻔 했어

 

오다가 선생들하고 마주쳤다니까

걱정마. 여긴 못 와.
돈이 없어서.

 

 

- 훈제연어 좋아해?
- 아주 좋아해.

 

나는 술마시고 먹는 거 좋아해.

 

- 우리 끔찍하게 취해볼까?
- 그럴까

 

술취하면 쓸데없는 말을 하게 돼

 

그래도 축하할 일이 있으니까.

 

셰리주입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와인 리스트 주세요.

 

독일산 백포도주가 어떻겠습니까?

 

샴페인으로 하죠.

 

가장 좋은 삼페인이 어느 거죠?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잘 처리됐어

 

바클리, 헨더슨이
최악의 사태는 막았지

 

하지만 스캔들은 정말 빨리 퍼져
부친 회사는 해로우는 안 받아

 

어차피 해로우 출신은 사양이지만

 

바깥 세상에는 이 사건이
학교와 무관하다고 분명히 해야 해

 

다시는 이런 일을 용납할 수 없다

 

친아버지는 14살때 돌아가셨어.

 

부활절 휴가 때, 잠자리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

 

숨죽인 비명소리...
갇힌 듯한...

 

부모님 방으로 갔는데
불이 켜져 있길래

 

그냥 돌아가려 했지

 

그 때 엄마 소리가 들렸어...
살려줘요...살려줘

 

진짜 이상했어

 

조용하다가...
다시...살려줘...

 

어찌할 바 몰랐어.

 

괜찮냐고 물어봤더니
가이, 살려줘, 그러더군.

 

꼭 죽을 것처럼 들렸어.

 

그래서 들어가봤더니...

 

- 이 얘기 꼭 듣고 싶어?
- 아니. 얘기하고 싶다면 좋아

 

하고 싶어.

 

아버지는 심장마비셨어

 

- 그걸 하다가...
- 저런!

 

흔한 일이지

 

남자야 행복하게 죽었지만
엄마는...

 

갇혀버린 거야

 

- 그럴 수가
- 끔찍했지

 

엄마는 내내 눈을 꼭 감고 계셨어

 

처리하는 동안 너무 민망했어

 

당연하지

 

다시는 눈을 똑바로 보지 않으셨지

 

나는 아버지를 늘 싫어했어.

 

더러웠지

 

하지만 엄마는 좋았는데

 

그 후로 완전히 달라졌어

 

- 그래서 재혼하시나 보다
- 그럴지도

 

나중에 꼭 하고 싶은 일 알아?

 

자전거로 유럽을 여행하고 싶어

 

- 진짜 좋은 사람이랑 말이지?

 

누구랑 같이 잔 적 없어. 너는?

 

나도

 

좋을 텐데.

 

사랑에 빠져본 적 있어?

 

- 아니, 너는?
- 나도

 

들어가야겠다

 

나쁜 기집애

 

수지, 이리 와

 

단단히 걸렸다, 베넷.

 

파울러인 줄 알았잖아

 

수도관은 정말 엉망진창이야
제길, 사감 선생은 뭐하는 거야.

 

토미토미라고 불러도 돼?

 

맘대로

 

사랑에 빠졌어.

 

그게 뉴스냐?

 

사랑에 빠졌다니까

 

넌 취했어

 

지금까지는 게임이었는데

 

이제는...

 

너 뭐하는 거냐?

 

내일까진 안 들어와도 되잖아

 

옷은 또 왜 학장처럼 차려입고

 

다음 학기 연습이야

 

- 쓸데없는 짓 하지마.
- 내가 이걸 얼마나 기다렸는데.

 

프랑스 대사가 못 되면 정말 불행할 걸

딱하구나

 

 

사는 게 그런 거야

 

공립학교 나와서 공직에 들어가고
가이 베넷 경이 되고...

부르조아지 비위나 맞추고

 

 

뭐?

 

레닌이 변절자 칼 캡스키한테 한 말이지

 

변증법을 절충주의로 대체했거든

 

아니 그런 짓을

 

왕족 주위를 벌벌 기면서
앞뒤 못가리고 손에 입맞추며

 

노예근성에 젖어산다고 했지

 

- 재밌는 사람이구나
- 아니야

 

- 제임스는?
- 누구?

 

하코트, 이름이 제임스래

 

솔직히 그 미소년은 관심없다

 

손전등을 다 뺏어가더니

 

이런 데 기어 들어와서
인생 조지게 만들고

 

여긴 정말 참을 수가 없어

 

- 잘 자
- 잘 자

 

누가 내 마음을 훔쳐갔나?

 

하루종일 꿈꾸게 하고

 

영영 실현되지 못할 꿈...

 

누가 꼴찌야?

 

- 워튼, 맨지스 당장 오라고 해.
- 네, 바클리 선배

 

- 왔구나.
- 무슨 일이야?

 

끔찍한 얘길 들었어.

 

파커슨이 파울러를 붙잡아두고

 

너 대신 학생장을 맡기려고 해.

 

뭐라구?

 

다음 학기에 규율부가 모자라.

 

무슨 소리야?

 

너랑 베넷뿐이야.
둘로는 안 돼.

 

데브니쉬는?

그 녀석 그만둔대.

 

마티노 사건을 부모님이 걱정해서

 

 

당장 농업대학에 진학시킨대.

 

파울러는 너보다 한 학년 선배고

 

저드는 규율부를 거부하니까.

 

저드?

 

저드를 설득하지 않으면

 

잘도 되겠다!

 

미안해.

 

저드가 유일한 희망이야.

 

대답은 노야.

 

재고해 줘.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하기 싫은 일은 안 시킬게.

 

조회니 출석 점검이니
다 하지 않아도 좋아

 

대정치가 싹수가 보인다.

 

- 친구 대 친구로 말하는 거야.
- 물론 그렇겠지, 그럼.

 

너도 파울러가 남는 건 싫잖아.
네 인생도 비참해질 걸.

안 됐군.

 

 

그래도 억압체제에 동참하기는 싫어.

 

미치겠군!

 

볼 수가 없어.

 

괜찮아요?
누구 불러올까요?

괜찮아. 약간 어지러워서.

 

 

아름다운 건 다 살짝
균형이 맞지 않아

 

그 목에 살짝 패인 곳에
꿀을 부어 핥아먹고 싶다니까

 

십분 전에 끝내라고 했잖아, 워튼

 

베넷, 나 좀 따라와

 

너 정신 나갔냐?

 

솔직히 그래

 

그따위 소리를 주니어한테 하고 그래?

- 들어도 몰라
- 왜 몰라. 제발 정신 좀 차려

 

 

너나 차려

 

철 좀 들어라

 

대체 무슨 소리야?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군
데브니쉬가 그만둔대

 

파울러가 학생장으로 남을지도 몰라

 

그럴 리가 있나

 

사실이야
나 좀 도와줘

 

저드가 규율부는 싫다고 고집이다

 

저드를 설득해봐
너랑 친하잖아

 

- 차라리 지옥에서 희망을 찾아라.
- 그렇게 해야 해.

 

파울러가 너를 잘도 참아주겠다

 

한 번이라도 쓸모있게 굴어봐

 

어디 보자

 

괜찮은데, 좋아

 

- 베넷
- 왜?

 

유니폼 좀 보자

 

이게 뭐야?

 

이걸 주름이라고 잡았어?

 

다림질에 소질이 없어서

 

다시 해, 전부.

기숙사 망신을 내버려둘 순 없어

 

 

기숙사 전체는 아니지
주니어들은 중심이 아니고

 

- 저드도 아니잖아.
- 저드 얘기는 하지도 마

저드? 저드...

 

 

달빛이 밝네

 

이런 밤이면

 

소리없이 부드러운 바람이
나무에 키스를 하고

 

이런 밤이면 담을 넘어

 

롱포드로 달려가는 상상을 하지

 

하코트가 누웠던 그 곳으로

 

난 못 해.

 

규율부가 될 수는 없어

 

왜?

 

- 나도 체면이 있어
- 뭐라구?

 

내가 학교의 웃음거리인 건 알아

 

하지만 존경받는 웃음거리 아냐?

 

원칙에 충실하다는 점을
높이 사는 거지

 

지금 와서 포기하다니
그럴 수는 없어

 

- 넌 남들한테 신경 안 쓰잖아
- 개인적으로 욕하면 그렇지

 

하지만 신념이 가짜였다고 할 걸

 

아냐

결국 다 잘난 척에 불과했다고

 

아니,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거야

 

 

그런 게 공산주의 아니야?

 

전부 가짜라고 할 걸.

 

공산주의는 허위라고

 

- 스탈린을 욕하듯이
- 스탈린이 무슨 상관이야

 

죽도록 고생해서 후진국을
20세기로 끌어오고

새로운 사회개념을 창조했는데
사람들은 그를 비웃고 놀려

 

 

참을 수가 없다구

 

여기 누구야?

 

괜찮아, 나도 잠이 안 와

 

워튼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산책이나 하려고, 같이 갈래?

 

산책할 차림이 아니야

 

공부하고 있었어

 

방해 안 할게.

 

손전등 쓸래?
네 거야.

 

고마워.

 

- 여기 파이프 아직 멀쩡하지.
- 나야 모르지.

 

정말 파울러를 계속 남게 한대?

 

- 그럴 수도 있지.
- 파울러도 동의했어?

 

몰라...솔직히 이젠 관심도 없어.

 

지쳤어.

 

- 며칠 째 잠을 못 잤는지 몰라.
- 그래?

왜들 난리인지 몰라.

 

- 누가?
- 누구든.

 

 

계속 체제를 유지하지만
이제 아무도 믿지 않아.

 

당연히 안 믿지.

 

나은 체제를 상상하기 두려워할 뿐이야.

 

- 그렇게 생각해?
- 완전 넌센스라는 건 너도 알잖아.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큰 잘못이지.

 

논리적인 결과를 인정하기 싫을 뿐이야.

 

그런 건가?

 

네 지위, 계급, 돈...

인생 살기 편하게 해주는
기득권을 잃을까봐 두렵고

 

 

평범하게 살기가 무서워서.

 

아마 그럴 거야...맞아.

 

창문 열어 놔.

 

저 친구 완전히 맛이 갔군.

 

자유주의자는 스트레스를 못 견뎌.

 

너 진짜 냉정하구나.

 

뭐하러 동정해?

 

편한 인생, 편한 양심을 바라는 건데
자격도 없으면서 말야.

 

잠이나 잘래.

 

파울러에 대한 싸움에 동참할 거야?

 

너무 미워한다
객관적이 되어봐.

 

객관적으로 볼 때 절대 반대야.

 

제발, 토미.

 

우정을 내세우면 용서 못해.

 

맨지스도 그러더라.

 

친구 아니니까 상관없지만.

 

생각은 해 볼게.

 

내일은 하루종일 난리법석일 텐데.

 

사열행사...

 

열 두 시에서 네 시까지 교련,
학생들이 병정놀이나 하고.

 

너 사열행사를 내가 망치면

 

규율부 할래?

 

사열행사를 망치면
네가 규율부가 못 될 걸.

 

잘 자.

 

가이?

 

조심해, 바클리가 돌아다녀.

 

알아, 들킬 뻔 했어.

 

심장마비 걸리는 줄 알았다구.

 

좋아, 이제 휘장 가져와.

 

- 행운을 빌어요.
- 고맙다.

 

정렬!

 

- 사열 준비 완료입니다.
- 수고했네.

 

- 부친께서는 어떠신가?
- 잘 계십니다.

 

- 왜 그랬어, 베넷?
- 뭘?

- 너 때문에 우승을 놓쳤잖아.
- 어디 나 하나 때문인가.

 

 

넌 퍼레이드 최악의 군인이야.

 

난 군인이 아니라 학생이야
너도 마찬가지고

 

넌 기숙사의 수치고
학교의 수치야

구리를 윤내는 데는 소질 없어
손톱도 잘 안 깎는데

 

 

벨트 보여줘.

 

이 앞에서 옷을 벗으라고?

내 놔.

 

 

여섯 대 체벌감이야.

 

- 파울러, 허락한다.
- 좋았어, 따라와.

 

딜라헤이와 바클리에게 항소한다.

 

오호라.

학생장들이니까, 내 권리야.

 

 

그래봤자 소용없어.

 

권리는 권리야.

 

굳이 그러겠다면 좋아.

 

- 그냥 보냈다간!
- 그런 일 없어.

 

베넷이 학생장한테 청원했대.

 

- 어떻게 될까.
- 죽도록 맞을 걸.

 

엉덩이에 한 대라도 맞으면

 

당장 사감한테 달려가서

 

3년 간 관계를 가진 학생을
다 불어버릴 거야.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생각 없었어.

 

- 그럼 가도 돼?
- 이런 망할 자식.

 

당시엔 너도 좋아했잖아.

 

죽일 놈.

 

게임에 불과해.
흥분하지마.

 

스포츠맨이면 패배에 순응해야지.

 

나는 꿈도 못 꿀 일이야.

 

수를 쓴 거야.
다 그러잖아.

 

난 안 그래.

 

때가 닥치면 너도 그럴 걸.

 

설마.

 

시험 말고 게임 말이야.

 

스포츠맨쉽은 정말 위선이야.

 

스크럼 속 짓거리야 다 알지.

 

그래.

 

동이 트려고 해.

 

가야겠어.

 

크리켓이 왜 싫은지 알아.

 

진짜 끝내주니까 그래.

 

저드의 모순이군.

 

크리켓은 자본주의 음모의 필수요소지.

 

맞아.

 

프롤레타리아는 강제노동하는데
부르조아는 공이나 치면서 놀고.

 

바로 그거야.

 

이 게임은 어느 모로 보나

 

추수하는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부당한 지주의 권리가 낳았지.

 

- 이제 뭘 좀 제대로 아는구나.
- 고마워.

 

매점에 있네.

 

진짜 멋있지 않냐?

 

쳐다보지 좀 마.

 

저쪽은 신경도 안 쓰는데.

 

당연하지.

 

- 실수하면 배우는 게 있어야지.
- 그럴 수가 없어.

 

마음을 바꿀 수 없는 거야?

내가 아니라 아버지가 문제야.
완강하시거든.

 

- 다음 학기에 가면 안 돼?
- 너무 오래 기다려야 돼.

 

 

학생장이 될 거라면 몰라도...

규율부원이라면 그럴 가치가 없어.

 

 

사상 최고의 행복감을 느껴줄래,
만일 내가 규율부원이 되어주면?

 

조건이 있어.

 

기도회에도 안 나갈 거야.

 

넌 민중의 영웅이야.

 

상으로 특급 식사를 대접할게.

 

- 제임스가 아니라면 너랑 사귈 텐데.
- 그렇게까지 흥분할 거 없어.

 

이성적인 선택일 뿐이니까.

 

- 서둘러, 맘 바뀌기 전에.
- 간다, 가.

 

- 워튼.
- 네, 베넷 선배.

 

- 아이스크림 하나 더 먹을래?
- 좋아요.

 

매점에 롱포드에서 온 애가 있어.
하코트라고...아니?

 

네.

 

좋아, 이걸 좀 전해줘.

 

하코트를 왜 그렇게 좋아해요?

 

네가 모르는데 내가 말해주랴.

 

너 말 안 들으면 맞는다. 내놔!

 

고맙다.

 

- 얘기 좀 할까?
- 물론. 뭔데?

 

규율부가 되기로 했어.
단 조건이 있는데...

 

- 이것 좀 봐.
- 뭔데?

 

이번엔 잡았어.
절대 안 놓쳐.

 

왜들 이래?

 

잠깐만, 나중에 얘기하자.

 

베넷 대신 학생장을 시켜 주면
네가, 아니 아버지가 달라질까?

 

당연하지.

 

아버지한테 전화를 걸지 그래?

 

승산이 있다는 거야?

 

베넷한테 회의실로 오라고 해.

 

난 못해.

 

왜 그래, 용기가 없어?

 

좋아, 내가 하지.

 

엎드려, 베넷.

 

이해가 안 돼.

 

이번에도 협박하지 그랬어.

 

왜냐하면...

 

뭐야?

 

사감을 찾아가면
제임스 얘기를 털어놔야 돼.

 

그래서?

 

둘 다 쫓겨날 거야.

 

넌 속도 좋다.

 

그럴 순 없어.

 

그를 사랑해.

웃기지마.

 

 

이제 가장은 신물이 나.

 

넌 농담인 줄 알지만 아냐.

 

나는 절대 여자를 사랑할 수 없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마티노는 열 살 때 알았대.

 

그런 걸 어떻게 열 살 때 알아?

알 수 있어.

 

 

새로운 발견도 아냐.

 

옛날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자인하고 나니 어떻게 보면 마음이 편해.

 

그런 일에 육감을 믿다니.

육감 말고 뭐가 있어.

 

그걸 읽는다고 공산당이 돼?

 

 

공산당이라 맑스를 읽는 거잖아.

 

- 유감이군.
- 고마워 대단한 우정이군 .

 

미안해.

 

잘난 척해서.

 

너라고 어쩔 수 없겠지.

 

말은 평등이니 어쩌니 해도
마음 속으로는 다른 녀석들처럼

이성애자가 동성애자보다 낫다고
여전히 믿고 있잖아.

 

 

온갖 이름을 생각해봐.
게이, 호모, 고자...

 

이봐, 우리 좀 같이 걸을래?

 

고마워.

 

베넷은 불평 못해.

 

좋은 소식이야.
데브니쉬가 남는대.

 

자네도 양심을 지킬 수 있겠군.

 

베넷, 너한테는 안 됐지만
별로 놀랍지는 않겠지.

 

다음 학기 학생장은
너 대신 데브니쉬를 민다.

 

나쁜 자식!

 

어쩔 수 없었어.

 

다시는 내 세례명을 부르지 마.

 

너 참 쉽게 넘어갔구나.

 

- 아버지도 학생장이셨거든.
- 물론 그러시겠지.

아들의 아들도 줄줄이 해먹겠지.

 

우린 파울러한테서 숙사를 구했어.

 

 

네 양심도 구했고.

잘 됐군, 모든 문제가 해결돼서.
호모도 없고 빨갱이도 없으니.

 

 

시비걸지 마.

 

다음 학기에도 얼굴 봐야 되는데
사이좋게 지내자구.

 

세상 끝난 거 아니야.

 

아니라고?

 

저런 인간들이 지배하는데...

 

파리 주재 대사를 꿈꿨어.

 

오, 베넷, 괜찮은 친구지.

 

재미있어, 한때는 기대를 걸었지만

 

사실, 우리랑 좀 달라.
사실, 우리랑 좀 달라.

 

파리는 안 돼, 하이티는 몰라도.
파리는 안 돼, 하이티는 몰라도.

 

그 친구는 학생장도 못했고
그 친구는 학생장도 못했고

 

평범한 규율부일 뿐이라고.
평범한 규율부일 뿐이라고.

 

그것뿐이잖아
그것뿐이잖아

 

그 이상이야
그 이상이야

 

남은 평생 나의 본성을
숨기고 살아가야 해
남은 평생 나의 본성을
숨기고 살아가야 해

 

그러면서 아주 객관적으로...
그러면서 아주 객관적으로...

 

- 둘 다 가질 수는 없어
- 알아
- 둘 다 가질 수는 없어
- 알아

 

위장하는 건 하는 거고
진짜로 하는 건 달라
위장하는 건 하는 거고
진짜로 하는 건 달라

 

마음대로 하라고 두지만
내내 경멸하지
마음대로 하라고 두지만
내내 경멸하지

헛소리 하지마.
헛소리 하지마.

 

 

웃다가 막판에 복수를 하지.
웃다가 막판에 복수를 하지.

 

감상적인 헛소리일 뿐이야.
넌 수치가 아냐.
감상적인 헛소리일 뿐이야.
넌 수치가 아냐.

 

나 같은 사람이 사회의 수치가
아닌 세상이 있나.
나 같은 사람이 사회의 수치가
아닌 세상이 있나.

 

공산주의가 진짜면 얼마나 좋을까.
공산주의가 진짜면 얼마나 좋을까.

 

진짜야.
진짜야.

 

지상의 천국일 텐데.
지상의 천국일 텐데.

 

지상의 지상이야.
지상의 지상이야.

 

정의로운 지상
정의로운 지상

 

물론 토미는 스페인 내전에서 죽었소.
물론 토미는 스페인 내전에서 죽었소.

 

최고였지, 신났었고.
최고였지, 신났었고.

 

파시스트한테 쓰러지기 전까지는.
파시스트한테 쓰러지기 전까지는.

 

돌아가고 싶은 적 있으세요?
돌아가고 싶은 적 있으세요?

 

아니요.
아니요.

 

보고 싶은 사람도 없으세요?
보고 싶은 사람도 없으세요?

 

없소.
없소.

 

그리운 게 하나도 없으세요?
그리운 게 하나도 없으세요?

 

크리켓이 그립소.
크리켓이 그립소.

 

가이 베넷은 1955년에 소련으로 망명했다.
가이 베넷은 195

 

토미 저드는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주의자 편에서 싸우다

 

1937년 3월 11일에 죽었다.
그의 나이 스물 둘이었다.

 

 

제임스 하코트는 런던 머천트뱅크의 회장이다.

그는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가이 베넷이 장남의 대부이다.

 

 

파울러는 1959년 소령으로 퇴역했다.

사업에서 실패한 뒤 은퇴하여
해안가 벡스힐에서 지낸다.

 

 

짐 멘지스는 1951년 보수당원이 되었다.

하원의원으로 시작해 재무부 장관까지 올랐다.
그는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