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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챙겼어?
- 응

 

비행 내내 게임 할래?
공부 안 하고?

 

- 들여다는 보겠지
- 그래 뭐

 

이메일 보내면
답장 좀 써

 

얘가 뭔 생각 하고
뭐하고 사나 알게

 

그래

 

무료 화상통화도
일주일마다 하고

 

알았어

 

그나저나...
과학 도면은 챙겼어?

 

응, 넣었을걸

 

참 잘 그렸더라
빈말 아니고

 

고마워

 

또 뭐 있나
컴퓨터 충전했고?

 

 

집에 가면
뭐부터 할래?

 

글쎄

 

우리 대화가
참 훈훈한 게

 

- 네 대답이 참...
- 뭐?

 

피아노 연습 계속해

 

소질도 있고
학교에서도 많이...

 

음악은 배워두면
쓸 데가 있거든

 

이거 살래?
맛있던데

 

- 응
- 그래

 

여기요, 음, 네

 

고마워요, 네

 

아빤 10월에나
갈 거 같아

 

첫 연주회 맞춰 가서
축구 하는 것도 볼게

 

- 여기요
- 고맙습니다

 

올해는 축구
안 할지 몰라

 

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해?

 

나 별로 못해

 

너 무지 잘해
정말로

 

여름 합숙훈련 빠져서
끼기도 뭐해

 

감독님한테 말해

 

아빠가 유럽 사셔서
가보느라 그랬다

 

어쩌고저쩌고

 

상황이 그랬지
꼭 하고 싶다고

 

꼭 하고 싶진 않아

 

안 해도 그만이야

 

당장 결정하진 말고
일단 생각해봐

 

팀 스포츠가
얼마나 중요한데

 

다 왔다

 

이 공항 좋지 않냐?

 

- 완전 멋져
- 근사해 죽지?

 

- 엄마 볼 생각에 설레?
- 응, 친구들도 그렇고

 

그렇지
탑승권하고 여권은?

 

그래
잘 갈아탈 수 있겠어?

 

- 응, 타봤잖아
- 이번엔 복잡해서

 

착륙해도 가만있어

 

승무원이
데려다 줄 거야

 

그런 건 걱정 마

 

좋아, 그래

 

뭐냐...

 

야, 이제
들어가봐야겠다

 

자, 안겨봐
요 녀석!

 

연주회에
맞춰 가볼게

 

사실... 못 와도 돼

 

그건 또 뭔 소리야?

 

못되게 들리겠지만
연주회엔 안 오는 게 속 편해

 

왜?

 

그냥 다른 주말에
왔다 가

 

그래도...
연주하는 거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아빠
싫어하잖아

 

아빠 보면 화낼 텐데
그게 신경 쓰여

 

- 먼저 가세요
- 고맙습니다

 

같이 못 놀게 할 거고

 

그건 엄마하고
의논할게

 

넌 그런 거 걱정 마
알았지?

 

그냥... 아빠가
보고 싶어할 거 알지?

 

왜 엄만 아빨
싫어할까?

 

그야 모르지

 

아빠보다도
지금 애인을 더 싫어해

 

하긴

 

아빠, 걱정 마
방법을 찾아볼게

 

- 이제 들어가야겠다
- 그래

 

- 뭐 도와줄 건 없고?
- 글쎄

 

아빠가
사랑하는 거 알지?

 

- 그럼!
- 그래

 

그야 알지

 

짱 재밌는
여름방학이었어

 

- 정말?
- 그럼

 

아빠도 그래

 

거봐, 그리스
재밌는 데랬잖아

 

그러게

 

그럼 됐어
사랑한다, 아들

 

나도 사랑해, 아빠

 

그런 뜻에서 악수!
가봐

 

- 갈게
- 그래, 가

 

네, 네

 

그래요

 

그리스, 칼라마타 공항

 

비포 미드나잇

 

네, 그럼 좋죠
고마워요, 네네

 

끊을게요

 

- 팔짝 뛰겠네
- 왜 그래?

 

- 반대하고 나섰대
- 그 풍력 터빈?

 

6개월간 구워삶을 땐
다 좋다더니...

 

근데 왜?

 

언덕에 세워보니
미관상 안 좋대

 

- 다 된 줄 알았는데
- 그랬지!

 

- 그러니 열 받는 거지
- 그래도 돼?

 

그럼, 이제
물 건너 간 거야

 

어쩌냐

 

아니, 힘 빠져서
더는 못 참겠어

 

그냥...
레미랑 일할까 봐

 

안 돼
걔하곤 안 돼

 

- 왜 안돼?
- 정부 밑에서?

 

이 정부는 달라
이게 유일한 길이야

 

그런 말 마
여태도 잘해왔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좋겠어

 

게다가 그 남자
싫어했잖아

 

같이 일할 땐
투덜대놓곤

 

재수 없어도
일은 잘하거든

 

- 그래
- 나 속물 될래

 

그 사람한텐
야망밖엔 안 보여

 

정부기관으로 간 것도
권력에 빌붙어 먹자는 거겠지

 

그건 내 알 바 아냐

 

당신, 못 참아내

 

정치공작이며
비굴한...

 

암튼 마음 정했어

 

열심히 쌓아놓으면
무너지는 꼴 다신...

 

비서한테
펜 던지던 놈이지?

 

차라리 진작 옮길걸

 

일에 치일까 봐
쫄았는데

 

이런 기회 또 없어
월급도 그렇고, 할래

 

그래, 해

 

확신은 들어?

 

아니
확신 드는 건 없어

 

나 가면 어쩔까 싶고

 

다들 날 의지했는데

 

어떻게 생각해?
내가...

 

아니, 나야 모르지만

 

너무 성급한 거 같아
풍력 터빈 문제로...

 

아니
꼭 그런 건 아냐

 

- 여름 내내 고민한 거야
- 알지

 

- 나 할 거야!
- 해, 그럼

 

할 거야, 됐지?

 

미쳐!
단순하면 좀 좋아

 

떠나도 문제,
남아도 문제니...

 

- 쉬운 게 없지
- 응, 사는 게 뭔지

 

그러게

 

너무해, 피 같은 휴가 때
딸들은 보름씩 아프고

 

아들은 머나먼
나라로 떠나고

 

내 참사랑은 뒷정리도
면도도 잘 못하고

 

누구 말이야?

 

설마 이 '깔끔대장'?

 

'깔끔대장'?!
'깔끔대장' 다 죽었네요

 

- 더 이상 뭘 바라세요?
- 에구에구!

 

못살아!

 

쟤들 너무 귀엽다!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한 장 찍어놔야겠어

 

근데 엘라는
사과 다 먹었어?

 

- 입속에 든 걸 뺏어먹게?
- 응

 

알았어

 

다 갈색이야

 

멀쩡한 데도 있네

 

엘라, 아빠가 네 음식
훔쳐먹은 증거란다

 

너 폭식증이나
거식증 걸리면

 

내 잘못 아니니
엄마 탓 마

 

한 식구끼리
나눠먹는 정이지

 

사랑한다, 딸

 

말은 번드르르해

 

얘들은 이 휴가를
다르게 기억하겠지

 

맞아
울 엄마도 그랬어

 

내 어릴 적 기억하고 달라
난 찍지 마

 

참 좋으신 분인데
자긴 야박하게 굴더라

 

당신이 끔찍한 때를
못 겪어서 그래

 

끔찍한 때라니까
생각났는데

 

클레오파트라란
내 고양이 얘기 했었나?

 

- 글쎄...
- 말하면 기억날걸

 

이건... 어릴 때 키우던
클레오파트라는

 

봄이면 뛰쳐나가
새끼를 배어와선

 

늘 더도 덜도 말고
두 마리만 낳는 거야

 

- 두 마리?
- 두 마리!

 

매번 매해 두 마리만,
그게 되게... 신기했어

 

나중에 서른 즈음에
아빠랑 점심 먹다가

 

생각나서 클레오파트라
얘길 했더니 아빠가...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귀여운 고양이들
죽이는 거였대

 

내가 '뭐?' 하며 놀라자
말해줬는데

 

- 어떨 땐 7마리씩 낳았대
- 맙소사!

 

5마리는 비닐봉지에
담아서 버린 거지

 

너무 심하다

 

그러니까...

 

어릴 때 엄마 아빠가
날 속인 걸 깜빡하신 거지

 

뭘 기준으로 뽑았지?

 

나도 물어봤어
그럼...

 

솜털 나고 귀여운 애들만
살렸냐 했더니

 

울음을 터뜨리셨어

 

딱한 아빠!

 

차 세워야지
애들 유적지 보고 싶댔어

 

꼭 그래야 해?

 

- 엘라가 꼭 보겠다고...
- 그래서 깨우자고?

 

- 글쎄
- 이럼 어때?

 

올 때 공항 가면서
들르기로

 

- 안 그럴 거잖아
- 그건 그래

 

됐어

 

유적지야!
빠이빠이

 

너희들이 대단하냐?

 

다 거기서 거기긴 해

 

우리 참 나쁜 부모다
세워줄걸

 

- 됐어
- 문화잖아, 차 돌려

 

- 다 들어주면 안 돼
- 하긴

 

돈 주고도 못 사는 공부야
'졸면 다 놓친다'

 

얘들이 마약중독으로
재활원에 가선 그럴걸

 

'아빠 땜에 맘 편히
잔 날이 없어요'

 

'졸면 다 놓친대서요'

 

또 자기 잘못인 거지

 

그래, 나쁜 부모 인정!

 

그니까

 

헨리 보낼 때
맘이 안 좋더라

 

애가 속상해해?

 

아니, 아니
최고의 여름이었대

 

어, 잘됐네!
걔는... 안심해도 될 거 같아

 

얘기해보니 제일
걱정거리가 뭔지 알아?

 

뭔데?

 

여드름하고
여자애들 시선

 

그 아빠에
그 아들이지

 

뭐래?
난 안 그래

 

- 왜 그러세요!
- 뭐가?

 

- 그 생각뿐이면서!
- 무슨?

 

여자, 사실...

 

뭐라는 게 아니라
가만 보면

 

- 늘 여자한테 껄떡대
- 껄떡대다니!

 

- 그래
- 껄떡은 아니지

 

눈빛으로 사랑을
나눈다면 몰라

 

- 어, 그러세요?
- 응

 

역시 스페인 남자가 좋아
그리스 남자나

 

나 국적은 몰라도
털은 부숭부숭해

 

내 보기엔...
헨리가 했을지도...

 

뭘?

 

멜리나란 여자애랑

 

글쎄, 좋아는 했지만...

 

아이고, 장난하세요?

 

왜 최고의
여름이랬게?

 

부자간에
좋은 시간을 보내서?

 

땡!

 

- 순진하긴!
- 아니야?

 

- 그럼 혹시...
- 당연하지

 

- 키스했어?
- 당연히 했지, 그럼

 

비밀이라며
키스했댔어

 

뭐랬는데?

 

암말 않기로 해서
말 안 할 건데...

 

- 빨리!
- 그래

 

헨리 머릿속에 꽉 찬 건
키스뿐이야

 

- 혀를 어떻게 하나
- 그런 걸 물어?

 

 

근데 너무...
너무 귀여웠어

 

얼굴까지 빨개져선
볼살을 깨무는데

 

그럼 멜리나하고
사귄 거네

 

- 응
- 이제 어떡해?

 

글쎄, 페이스북 친구하면서
한동안 연락은 하겠지

 

둘이 평생
함께하면 어떨까?

 

사람이 참 후져

 

- 어떨 때 보면...
- 그냥...

 

자기 뭐야?
12살 소녀니?

 

첫사랑 상대
기억이나 해?

 

그럼, 기억하지
자긴데

 

23살까지
총각이셨다니

 

첫사랑 얘기지
첫경험 아니잖아

 

좋아, 인정!

 

나랑 처음
사랑에 빠지셨다?

 

교감 느낀 건 처음인데
난 첫사랑 아냐?

 

당연히 아니지

 

이런...

 

- 난 맞는 줄 알았거든
- 설마...

 

- 제시, 썰렁해
- 그럴 수도 있지 뭐

 

근데 나이가
몇 개세요?

 

41살이고
그대만 사랑했소

 

당신 진짜...

 

뜨거운 밤 위해
무지 공들이네?

 

당연하지

 

트로이 목마 타고 가서
로켓을 투하할 거야

 

미국 고딩한테 코 꿴
내 신세야

 

진짜 못 말려

 

우리 나중에
꼭 그거 해야 돼?

 

뭐?
그야 당연하지

 

패트릭한텐
의미 있는 거야

 

아들 부부가
준비 중일 거고

 

- 애들도 신 나게...
- 아니

 

- 재밌을 거야
- 아니, 호텔 가는 거

 

괜히 신세 지긴...

 

안녕, 아가야

 

그래

 

아, 알았어
알았어, 알았어

 

괜찮아, 걱정 마

 

런던에서 전화해
조심해서 가고

 

다 끄랬대
곧 이륙할 건가 봐

 

비행기 타면
전화하랬거든

 

맘이 안 놓여서

 

왜?

 

뭔데?

 

그냥... 모르겠어
진짜...

 

이걸 계속해야 할지

 

왜?

 

매년 여름방학하고
성탄절 때마다...

 

- 맘이 안 좋긴 해
- 기분이 너무 착잡해

 

기숙학교 가는 거면
차라리...

 

애 엄마하고
얘기 좀 통했으면

 

알아, 꼭 적진에
보내는 심정이지

 

이번엔 맘이 더 그래
진짜...

 

벌써 고1 되는데

 

4년 후면
우리 손을 떠나

 

이거보단 그게 낫지

 

중요한 시기라
곁에 있어줘야 하는데

 

이런 시기는
영영 안 와

 

그래서 어쩌게?

 

저러다 지치면
안 오겠구나 했는데

 

어떻게 시간이 흘러
여기까지 왔네

 

고등학생이라고
여자친구 사귀고

 

다음엔 대학 얘기
나오겠지

 

맞아

 

지금이...
그때인 거 같아

 

걔 엄마한테 말해서
우리랑 살게 해달라자

 

- 바이올린도...
- 그런 일은 절대 없어

 

법에서 시키는 것도
마지못해 해주는데

 

- 변호사랑 통화할래?
- 아니, 그 인간 싫어

 

밥맛이야

 

- 내가 할까? 그냥...
- 아니, 제발 다신 하지 마

 

야구공 던질 줄도
모르더라

 

뭐 어때?

 

그냥... 팔꿈치를 써
계집애처럼

 

- 당신 탓 아냐
- 아니, 내 탓 맞아

 

아버지가 가르칠
부분이니까

 

- 애가 야구 싫어할 수도...
- 말하자면 그렇단 거야

 

벌써 14살 돼가는데
아버지가 필요하지

 

제시
난 시카고 안 가

 

누가 가자 했어?

 

그 말이 왜 나와?
혼잣말한 건데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 혼잣말이 나와

 

저기...

 

자긴 훌륭한 아빠야

 

갠 당신 주변이며
편지도...

 

편지는 읽지도 않아

 

읽어
티를 안 낼 뿐

 

이때를 놓치면
다신 안 와서 그래

 

웬일이니!

 

왜?

 

다들 이러다 헤어져

 

무슨 소리야?

 

이러다 깨진다고

 

맙소사, 또...
또 앞서간다

 

아니, 확실해

 

우릴 결딴낼 시한폭탄에
불 붙인 날이야

 

먼저 폭탄엔
불 안 붙이고요

 

- 타이머를...
- 어쨌든 그렇다고

 

타이머인지 뭔지
가기 시작했어

 

그렇게 된 거야

 

속상해서 상대 탓하다
찢어지지

 

말문 막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 그런 거 아니야
- 맞아

 

아냐, 지금도
많이 버텼어

 

- 어디 해봐
- 쭉 평행선 걷다

 

교차로에서 난 서쪽,
자긴 동쪽!

 

이러다 끝나는 부부 많아
카트린도...

 

- 농담도 도가 있어
- 아냐!

 

농담이지만
뼈가 있어

 

알았어?
그냥... 끝이야

 

유적지 멀었어?

 

아, 문 닫았더라

 

- 그래
- 저기... 그래

 

거긴 오면서
공항 갈 때 들를 건데?

 

맞아

 

- 서둘러 갈 거지?
- 그럼

 

내 사과는 어디 갔어?

 

네 사과는...

 

사과는 언니가
다 먹었나 보다

 

그치?

 

목록 좀 줘봐

 

- 없는데
- 지갑에 있어

 

지갑 봐봐

 

- 여기
- 응

 

여깄네

 

엄만 장군이야

 

- 니나 대위
- 넵!

 

누구 맘대로
장군이야?

 

나 장군이야, 알았어?

 

엘라 대위

 

넵!

 

'깔끔대장' 이병,
물건 건들지 말 것

 

알겠슴다

 

니나...

 

니나!

 

우리 팀 다 어디 갔어?

 

- 이거?
- 어... 응

 

빨간 거

 

이거?

 

좋아

 

됐다

 

피망!

 

둘 다 읽었어요

 

1권 '그 시절'
2권 '이 시절'

 

1권이 '이 시절'
2권이 '그 시절'

 

우리끼린 그래요

 

'이' 덕에 뭉쳤고
'그' 덕에 아파트 샀다고

 

책엔 셀린느가 좀
이상하게 나오던데?

 

왜요?
별말 없던데

 

2권은 섹시해요

 

비행기 놓치곤
커튼 친 채

 

몇 날이고 사랑하잖아요
와아!

 

진짜 그랬어요?

 

그랬나 보네?

 

3권은 읽었냐?

 

두 권보다 낫던데

 

두 권 쓰는 거보다
오래 걸렸어요

 

그건 안 읽었어요

 

마누라가 줬는데
보통 길어야죠

 

제목도 길던데 뭐죠?

 

'오래됐지만 상영 많이 못 한 연극
찰나의 임시배역'

 

길어도 엄청 기네

 

안 그래도 다들
너무 길대요

 

그래도 훨씬 낫던데
야심차고

 

그런가 보죠 뭐

 

뭐라세요?

 

그냥 그 책들이...
다 좋대요

 

참 좋아하세요, 그렇죠?
뭐...

 

여기 정말
맘에 들어요

 

토마토도 탐스럽고...

 

냄새도 나요

 

정말 싱그러워요

 

네, 아버님의
자랑거리죠

 

우습게도

 

파리 떠나 여기 오면서
진짜 쫄았는데

 

갈 때가 되니
가기 싫네요

 

왜 쫄았는데요?

 

그러게, 왜요?

 

여긴 수천 년 된 신화와
비극이 가득한 데라

 

비극이 일어날까 봐

 

미노타우로스가
애들 잡아먹을까 봐?

 

 

그거예요

 

여기 있는 내내

 

머리가 이상한 사람들을
떠올려봤거든요

 

그들 각자의 독특한 관점으로 본
하루를 써볼까 해요

 

어떤 할머니는 계속해서
데자뷔가 보이는 거예요

 

무슨 경험을 하든
전에 겪었던 거 같죠

 

여기 우리와 앉아
얘기하면서도

 

머릿속으론...

 

'아까 말하지 않았나?'

 

'어제 여기서
똑같은 말 하지 않았나?'

 

- 데자뷔같이?
- 그게 계속되죠

 

특이하죠?

 

경험하는 모든 게,
아침, 신문, 영화가

 

처음 같질 않은 거죠

 

그런 증세가 있어요?

 

병명이, '지속적 데자...'
있는데 정확힌 몰라요

 

또 안면인식 장애를 가진
두 사람이 등장해요

 

20년 산 마누라도
못 알아보는 사내는

 

거울 속 자신을 봐도
단절감을 느끼죠

 

다른 사람은
그 반대예요

 

중년 가정주부인데

 

얼굴을 칼같이
기억하기 때문에

 

큰 도시에 살지만
작은 읍내 같죠

 

택시가 지나가면
생각해요

 

'오, 저 기사는 3년 전 성탄절 날
보쥬광장까지 날 태워다줬는데'

 

어떤 할머니가
지나가면

 

'아, 작년 지하철에서
내 밑에 밑에 앉았던 분이다'

 

누굴 만나도 친근하고
남 같질 않은 거죠

 

난 첫 남자 같군요
늘 단절감을 느끼죠

 

아킬레아스, 안나,
안녕하세요

 

저 녀석 보게!
지금 참 좋은 때다

 

저 왔어요, 할아버지

 

그러니까...
등장인물이 셋이네요?

 

아뇨
셋 말고도 많은데

 

지금은 아킬레아스라는
그리스 청년을 고민 중이죠

 

저요?

 

네 이름을 땄는데

 

보는 건 다 일시적이란
생각에 사로잡혔어요

 

바다를 보면 그게 말라
화석이 될 날을 생각하는

 

뭐, 글쎄

 

좀 허세 냄새가
나는데요

 

허세적이긴요
진짜 재밌잖아요

 

책을 들면
궁금해지죠

 

'누가 마지막으로
읽게 될까?'

 

그게 재밌나?

 

그런 생각 가끔 해요

 

그럼 여자, 차, 술엔 관심 없고
죽음만 생각하는군요

 

죽음까진 아녜요
변형을 보는 거죠

 

너무 먼 미래를
본달까

 

아, 네

 

소설로는 좋구먼

 

거기에 나 같은
늙은이도 덧붙이게

 

아침에 뭐 먹었나는
깜빡해도

 

14살 때 술집에서

 

댄서가 춤출 때 나왔던
노래는 즐겨듣는

 

- 그거 좋네요
- 그럼...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인 거네요?

 

그럼 연결고리는?

 

같이들 자나?
그런 거 필요 없나요?

 

시간을 잃은 게 아니라
인식 문제죠

 

소설의 전체배경을
영화로 할까 해요

 

캐릭터들이 어떻게 보면
'워터프론트'와 흡사하죠?

 

- '워터프론트' 봤나?
- '워터프론트'요?

 

- 말론 브란도 나온!
- 그래

 

책의 1장은 개봉일,
타임스퀘어, 1954년

 

계속 데자뷔를 겪는 할머니가
스크린 앞으로 걸어나오죠

 

그때도 계속
생각해요

 

- '이거 본 거 아닌가?'
- 네

 

다른 장은 1979년
파리 영화학 수업

 

그리곤 1993년 뮌헨에서
엘리아 카잔 회고전이 열리죠

 

그게 시간중심이지
어떻게 아닌가?

 

시간이지만
인식에 가깝죠

 

- 별로군요
- 또 길어지겠네!

 

난 맘에 드는데

 

걔 말 듣지 말게
자전거 만드는 애야

 

나한테나 보내보게

 

그러죠

 

저쪽으로 가

 

마놀리스, 조심해!

 

프랑스에선 토마토는 토마토로,
피망은 피망으로 채워요

 

정말요?
우린 둘 다 같은 속을 넣죠

 

그래도 맛이
다르거든요

 

 

셀린느, 너무 꽉
채우진 말아요

 

나중에 오븐에서
넘치면

 

- 알았어요
- 지저분하니까

 

잘하고 있는데요 뭐

 

절대 스테파노스 말
듣지 말아요

 

요리라곤 근처에도
안 가봤으니까

 

알았어요

 

사실, 제가...

 

내가 하게 냅둬!
내가 할 거야!

 

내가 할게, 여보

 

부부싸움을
칼을 들고 해요?

 

그만해요
칼 들고는 싸우지 마요

 

싸우는 게 아니라
타협 중인데

 

 

그런 게
타협이라고요?

 

와, 타협을
칼을 들고 하네!

 

바로 그거죠

 

너무해

 

우리 스타일이죠

 

와아, 맞춤형
스타일을 찾았군요

 

왠지 스타일이라니
어감은 좋네요

 

- 다 된 거죠?
- 네

 

칼싸움이
스타일이래요

 

우리한텐 익숙한데

 

너무 멀리 가진 마라!

 

모두에게 고맙단 말부터 해야
음식이 넘어갈 거 같아요

 

특히, 패트릭

 

지난 6주를 어떻게
보내게 될까 했거든요

 

그리스 펠로폰네소스에 있는
작가 게스트하우스로

 

초대한단 편지를 받곤
'까짓 거 가보자' 했죠

 

오늘 일찍 공항에서
헨리가 그러데요

 

최고로 멋진 여름을
보냈다고

 

저도 똑같아요
그래서 감사하고요

 

저와 제 가족에게
베푸신 거 다 감사해요

 

- 패트릭을 위해!
- 패트릭을 위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공항에서 처음 보곤
생각했지

 

설마 그 작가가
저렇게 입었을라고

 

근데 이젠
그 비결을 알 거 같군

 

훌륭한 작가들이
많이 왔다 갔지만

 

작가보다 재밌는
파트너는 없었지

 

- 내가 그랬잖아
- 그래

 

셀린느

 

셀린느와 생기 넘치는 딸들과
함께 지내서 정말 좋았어요

 

내 소중한 친구, 나탈리아를
만난 것도 뿌듯했고

 

남편, 엘리아스는
친형제 같은 놈이었죠

 

- 애들 일은 죄송해요
- 말썽을 하도...

 

할아버지,
안나도 저도 감사했어요

 

늘 일만 시켰는데

 

안나하고 오니까
어른들 식탁에 껴주시네요

 

어른이 된 걸
환영하네!

 

얼마나 사귀었어요?

 

지난 여름부터요

 

1년 전 여기서
만나곤

 

전 바로
아테네로 갔죠

 

폐막 파티 때
만났어요

 

셰익스피어 작품을
할 때거든요

 

누구 역을 했어요?

 

'겨울 이야기'의
페르디타요

 

정말 명연기였죠

 

보러 갔던 거
기억하죠?

 

아, 페르디타!

 

'당신 춤출 땐 파도가 되어
온몸으로 리듬을 탔으면 해요'

 

브라보!

 

그 남자주인공보다
더 잘하시겠는데요

 

참 작품성 높은...

 

그래도 뒤풀이가
더 좋았어

 

둘이 만났으니까요

 

낡은 오토바이를
타고 갔었죠

 

- 근사하군
- 네

 

밤새 돌아다니다

 

짐 싸게 극장에
데려다 줘야 했어요

 

- 새벽이었거든요
- 평생 못 잊어

 

만 이천 명이 들어가는
야외무대였는데

 

텅 빈 거예요

 

안나는 뒷자리에
앉아있었죠

 

그때 제가
무대에 올라서

 

속삭인 거죠

 

음향시설이
워낙 좋아서

 

입술만
보인 게 아니라

 

3초쯤 지나자
목소리까지 들렸어요

 

뭐랬는데요?

 

넘어가 주죠

 

그리곤 이틀 후에
파리로 날아가야 했죠

 

어떻게 연락했어요?

 

무료 화상통화를
매일 하다시피 했죠

 

헤어져 있을 땐

 

노트북을 베개 옆에 놓곤
함께 잠들었죠

 

현대식 로맨스네요

 

깨어나 보면
화면이 깨져 보여서

 

안나 얼굴이
되게 웃겨요, 꼭...

 

- 하나만 물어도 될까?
- 네

 

화상통화 할 때

 

둘이...
야한 짓도 했나?

 

- 질문이 저질이다!
- 저질이라니!

 

가상세계에 관심 있는
어설픈 인류학자지

 

이젠 또 인류학자셔!

 

응, 가령
가까운 미래의 섹스는...

 

지어낸 게 아니라

 

플러그를 꽂고
성기에 뭔가를 붙인 후

 

아무나 골라서
가상 성교를 하는 거죠

 

자기 입맛대로
프로그램한 다음

 

원하는 대로
키보드만 치면 돼요

 

'메릴린 먼로가
귓바람을 넣는다'

 

그거 좋은데요

 

- 네!
- 사실 그렇죠

 

고맙습니다
이거 이거 좀...

 

안 될 거 없죠

 

점점 더 많은 경험들이
가상세계에서 일어날 텐데

 

하긴 그래

 

작가신데
어떨 거 같으세요?

 

컴퓨터가 '전쟁과 평화'보다
더 잘 쓴다면

 

그럴 일은 없지

 

그럼 어떨지
궁금할 뿐이에요

 

체스 플레이어, 카스페로프와
같은 심정일 거 같아요

 

- 최고가 못 됐다는...
- '그랑 블루'처럼!

 

네, 컴퓨터가 이길 줄
누가 알았겠어요!

 

'기계는 인간의 본능을
못 따라가지'

 

근데 이젠 컴퓨터를
못 당하잖아요

 

쥐를 실험하는
다큐를 봤는데

 

전선을 연결해서
쥐가 스위치만 밀면

 

오르가즘을 느껴요

 

과학자들이 그 딱한 쥐를
비웃더라고요

 

음식에 물도 마다하고
그거만 해대다가는

 

결국엔 죽었거든요

 

인류의 미래도
그럴 거 같아요

 

그냥...

 

그러다 죽죠

 

그럴 수도 있지만

 

어느 세대든 늘
말세라고들 하지만

 

그래도 잘
살아가잖나

 

그럼 질문 하나
들어갑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죠

 

우린 쾌락에 집착하고
포르노에 빠진

 

물질만능주의자로
사는 반면

 

컴퓨터는 이성적이
돼간다고요

 

그럼 애초부터 인간을
그렇게 봤냐는 거죠

 

아폴로 신전 정문에
이런 말이 쓰여있네

 

바로
'그노티 세아우톤'

 

'너 자신을 알라'지

 

그래도 99%가
자동화됐고

 

우리 인격이나
자아라 여기는 것도

 

뇌가 하는 일은
미미하고

 

거의 저절로
돌아가죠

 

그럼 뭘 보고
판단하죠?

 

자아라는 게
미미한 수준이라면

 

왜 맨날
그 타령을 하지?

 

내 주요부위와 같군

 

크지도 않고 요만한 게
관심은 무지 원하니

 

이하동문요!

 

어떻게 만나셨어요?

 

- 모르나?
- 뭘요?

 

제시 책을 읽어봐요

 

저와 섹스하는 게 어떨지
궁금하면 읽어봐요

 

읽어봐요!

 

잠깐만요
스테파노스

 

아니, 워낙 잘 써서요

 

잘 썼죠

 

18년 전에 만나
사랑 비슷한 거에 빠졌지만

 

서로 못 찾다가
10년 후에 우연히 만나서...

 

- 아니, 우연히 만나긴
- 아닌가?

 

우리 얘길
그대로 썼길래

 

- 그래, 그래
- 그걸 읽곤 찾아갔죠

 

너무 로맨틱하다!

 

그다지
그렇진 않아요

 

결혼해서
애 있단 얘길...

 

제대로 말해야지

 

그 부분은 끔찍해요

 

끔찍하다니
필연이지

 

콘돔 없이 처음 자곤,
쌍둥이!

 

- 한방에 홈런, 빵!
- 그 후 부엌데기가 됐죠

 

그것도 좋잖아요
애들이 인형 같던데

 

- 고마워요
- 귀엽긴 해요

 

물론 좋은 면도
있어요

 

하나 알려줄까요?
'남자 내꺼 만들기'

 

져도 그만인 게임은
이기게 해줘요

 

- 아, 그래
- '업' 되죠

 

제시 만난 날
핀볼을 하는데...

 

우리 관계가
다 사기였던 거야?

 

마지막에 볼을
아래로 흘리면

 

- 이긴 걸로 믿죠
- 져놓고 이래요

 

제가 이겼으면
안... 안 잤을걸요

 

이런 말 안됐지만
은근 마초예요

 

백치미인을 꿈꾸죠

 

- 일생의 로망이죠
- 꿈이에요

 

저기...

 

네?

 

작가신 거예요?

 

네, 그래요

 

그럼 쓰는 게... 책?

 

네, 몇 권 썼죠

 

와아!
작가는 난생 처음 봐요

 

- 그래요?
- 너무 똑똑하시겠다

 

그냥...

 

전 피곤하면
제 이름도 못 쓰겠던데

 

어떤 책 좋아해요?

 

뜻이 담긴
얘기가 좋아요

 

완전 아름다운
러브스토리 같은...

 

물론 좋죠

 

그 책 한 번 읽었는데

 

- "로미오와..."
- "줄리엣"!

 

맞죠?

 

네!

 

그 책 아신다!

 

아주 좋은 각본이죠
책 아니고 각본이에요

 

영화를 토대로 한
책인 줄 알았는데

 

아뇨
각본이에요

 

각본이었구나
와아!

 

근데 다는 못 읽은 게

 

가끔씩 잡지도
틈틈이 봐줘야

 

사람들이 어떡하고 사나
알 수 있고...

 

그거 중요하죠

 

네, 완전 완전
똑똑하고

 

분명히 물건도
크실 거 같다!

 

대체 왜 난
이 여인네만 보면

 

좋아죽을까요?!

 

이 부분이 웃겨요!

 

은근 마초의
썰렁한 파트죠

 

오늘 헨리
떨궈주고서

 

제게 좋은 직장까지
들어왔는데

 

그걸 버리고
시카고 가자 해요

 

내가 언제?

 

전 마누라 위해
한 주 걸러 애 봐주자고요

 

저기요
그만하세요

 

아들 보내자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 그렇죠
- 참 좋은 애던데

 

네, 녀석 덕에
체스 잘 뒀어요

 

- 우린 헤어지게 되면...
- 응?

 

제가 키울 거예요

 

아! 뭐, 괜찮아

 

난 스무 살 애인하고
깨가 쏟아질 테니

 

호호호!
사랑스런 남자들!

 

당신이 더
사랑스러워

 

이 얘기는 남편이
참 좋아하는 건데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단번에 알 수 있는 얘기죠

 

- 준비됐어요?
- 네

 

엄마가 전에
간호사여서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는 걸 많이 봤죠

 

- 아, 그 얘기...
- 들어주세요!

 

- 듣고 있어
- 아주 재밌으니까

 

엄마는 그분들께
그랬대요

 

'안녕하세요
전 카트리나예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셨군요'

 

'교통사고를
심하게 당하셨지만'

 

'이제 괜찮을 거예요'

 

죄송해요

 

'완쾌되실 거예요'
뭐 그런 말요

 

여자들은 한 명도 안 빼고
맨 처음 묻는 게

 

다른 사람 상태래요

 

'애들은 어때요?'
'남편은 어때요?'

 

'누가 또 다쳤나요?'

 

근데 남자는
하나같이

 

깨어났다고 하면
맨 처음 하는 게 뭐게요?

 

자기 물건을 본대요

 

솔직히 그게
무사한가 봐야죠

 

작동이 잘 되는지도!

 

- 팔팔해야지
- 그래, 그래

 

그러다가 나중에서야
애들은 어떤지 묻고

 

자기가 죽일 뻔한
사고당사자도 묻는대요

 

한마디로 이거네요

 

'거시기 우선,
나머진 뒷전!'

 

거시기, 거시기,
거시기, 거시기...

 

그렇게 성적으로
편가르기 할 거면

 

왜 여자들은 남자를
바꿔보겠다고

 

시간을 허비하죠?

 

그러게요
타고나길 그런걸

 

말 돌리기엔 선수셔

 

이건 뭐 천재네!

 

개구리 보고
녹색이라고 뭐래!

 

그건 그래요

 

듣다 보니 궁금한 게

 

영원한 사랑이란 게
아직 의미가 있나요?

 

결국은 깨질 걸
알잖아요

 

그렇지

 

부모님 함께 사세요?

 

아뇨

 

아니다, 자넨?

 

사시지만
이혼하실 순 있죠

 

그야 그렇지

 

돈이 더 많았다면
헤어지셨을 거 같아요

 

되게 현실적이다!

 

난 세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어

 

저희 할머니의
엄마는

 

임종 직전 온 가족에게
26페이지나 되는 편지를 쓰셨어요

 

그리고 3페이지는
연극에 썼던 의상 얘기고

 

딱 몇 줄만
남편 얘기였죠

 

배우셨어요?

 

아뇨, 그분은...

 

재봉사, 재봉사요

 

재봉사셨는데
멋진 친구들이 많으셨어요

 

증조할아버지에 대해선
3가지로 요약해 주셨죠

 

참전하셨고

 

직장 때문에 이사했고
돌아가셨다

 

큰 충고라며

 

로맨틱한 사랑에
목매지 말라고 하셨어요

 

우정과 일로 인해
진정 행복하셨다고

 

격하게 동감한다

 

그거 땜에
항상 망하지

 

소울메이트란 거

 

우릴 채워주고 보듬어줄
누군가를 그리는 거

 

난 남편한테 기대치가
아주 낮아요

 

- 돈 안 벌어올 거 알고
- 절대 안 벌지

 

그럼 할머니는요?
소울메이트셨어요?

 

재밌게도 네 할머니는
합리적이셨어

 

자긴 자기가 챙기고
난 내가 챙기랬지

 

자기주장만
내세우진 않고

 

그거 최고인데요

 

사실 그렇죠, 네

 

그래서 이 자리에
없잖아

 

우린 하난 아니었어
늘 둘이었지

 

그편이 좋았고

 

정말 근사해요

 

이이는 제 위에 꼭...
군림하려 들죠

 

내가 군림하려 해?

 

응, 나도
군림하려 들고

 

말렸어

 

결국 중요한 건

 

상대방의 사랑이 아니라
삶 전체의 사랑이야

 

그거 다행이네요
삶이야 만만하지만

 

제 어부인은...

 

그리스 비극의
종결자는

 

천사의 탈을 쓴 마누라가
광녀란 걸 알게 된 이 몸이죠!

 

호텔 얘기 물어봐

 

오늘 호텔에 못 가면
환불받나요, 아님...

 

환불은... 못 받아요

 

안 가시려고요?
가세요

 

멋진 선물이지만
짐도 싸야 하고 애들도...

 

애들 걱정 말고,
맘에 쏙 들 겁니다

 

- 애들은 맡겨둬요
- 정말 좋아요

 

호텔까지 이어진 길이
환상이죠

 

후회 안 해요

 

안 가시면
우리 삐져요

 

네, 고마워요

 

가보세요

 

저기... 엘리아스를
생각하면

 

가장 그리워지는 게

 

밤에 제 옆에
누운 모습이에요

 

가끔씩 팔이
제 가슴까지 내려오면

 

전 꼼짝을 못하고
숨까지 죽이죠

 

그래도, 안심이 돼요
완전히

 

또 거릴 걸으며 냈던
휘파람 소리도 그리워요

 

제가 뭘 할라치면
환청이 들리죠

 

'오늘 추우니까
스카프 둘러'

 

근데... 요즘엔
소소한 건 깜빡해요

 

희미해지는 게...
잊혀지는 거죠

 

그럼... 그럼 두 번
잃는 것만 같아요

 

그래서 가끔씩 그이 얼굴을
세세히 떠올려보죠

 

눈빛이며 입술,
그이 치아

 

피부결이며
머리카락까지

 

그이가 떠나면서
다 사라졌지만요

 

또 가끔,
늘은 아니고 가끔

 

진짜 그이가 보여요

 

구름이 걷히면
그이가 있죠

 

만져질 것 같이!

 

그러다 환상이 깨지면
그이는 또 사라져요

 

한동안은 아침마다
그랬어요

 

햇빛이 너무 세지
않으면요

 

햇빛이 세면
그이가 사라져요

 

그렇게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죠

 

해가 뜨고 지듯이

 

많은 게 참
한순간이죠

 

우리네 삶도
그렇고요

 

우린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거니까

 

우린 누군가에게
참 소중하지만

 

잠시만...
왔다 가는 거예요

 

왔다 간다!

 

부질없죠

 

- 왔다 간다!
- 왔다 간다!

 

결국 창문에 비친
얼굴을 보곤

 

더는 9살 소년이
아님을 깨닫지

 

나이 들고 수염 나고
눈꼽 끼고...

 

너무 슬프다

 

상상의 친구가 있는
남자 얘길 해줄 줄 알았는데

 

어떤 거?

 

50대가 되고
상상의 친구가 다시 나타나는?

 

- 바로 알아본?
- 그거

 

- 맘에 들어?
- 재밌어

 

그 편지 기억나?

 

당신 20살 때 40살 된
자신에게 쓴 편지

 

첫 문장도 기억나

 

'40 먹은 제시에게,
이혼 안 했길 바란다'

 

그건 기억 안 나고
딴 부분을 볼 땐

 

- 자긴 그대로야
- 그래

 

우린 진화하는 거 같지만
그다지 안 변하나 봐

 

내가 제일
변한 게 뭐게?

 

뭔데?

 

어릴 땐 시간이
빨리 가길 바랐어

 

왜?

 

내 맘대로 하게

 

부모님, 학교에서
자유롭게

 

눈감았다가 뜨면
어른이 됐으면 했어

 

막상 되고 보니
천천히 가면 좋겠고

 

나이가 어찌 됐든
이런 생각이 들어

 

모든 게 추억 아님
꿈이라고

 

맞아
당신 그렇더라

 

나도 그래

 

'이게 내 인생 맞나?
지금 일어난 거 맞나?'

 

- 그치
- 그니까

 

해가 갈수록 더 소심해지고
주눅이 들게 돼

 

이해할 수 없는 게
많아져서

 

- 내가 말할 땐 모르곤!
- 나도 그쯤은 알아!

 

모르는 것도 괜찮아

 

중요한 건 보고 찾는
호기심이지

 

진짜 그래
그게 어려워 그렇지

 

무슨 소리야?

 

열정을 어느 정도
유지하는 거

 

전엔 넘쳐났거든

 

어릴 땐
작가친구 녀석들하고

 

무슨 큰일을
해낼 줄 알았어

 

우리 세상이라고

 

오만에 찌든
찐따였던 거지

 

- 그건 좀...
- 돌직구인가?

 

이젠 그 에너지,
창의력, 야망도 없어

 

착각도 좀 해야
뭘 해볼 맛이 나지

 

젊은 애들은 늘
자신을 비교하지

 

늘 기준을 두고
거기에 맞춰 판단해

 

- 당신도 그랬고
- 뭘?

 

'랭보는 17살 때 뭘 읽었고,
스콧 피츠제럴드는...'

 

'발자크는 식전에
글 썼는데 난 뭐냐'

 

여잔 그런 생각 안 해

 

안 그래?

 

우린 비교를
덜하고 살지

 

뭔가를 이룬 여자들은
50대는 돼야 해

 

그전에 인정받긴
어렵거든

 

30년간 애들 키우느라
집에 묶여있다 나가니까

 

사실 그거 알아?

 

일종의 해방이야

 

우린 남하고
비교 안 해

 

마틴 루터 킹이나
간디, 톨스토이하고

 

잔 다르크는?

 

10대에 프랑스를
구했으니...

 

누가 잔 다르크가
되고 싶어해?

 

조국이고 뭐고

 

불타 죽은 데다
처녀였어!

 

그러긴 싫지
업적은 훌륭해도

 

- 웬일이니!
- 왜?

 

아무것도 아냐

 

- 왜?
- 좀 이상해서

 

뭐가?

 

그냥... 이거, 우리,
걸으며 얘기 나누는 거

 

하긴

 

스케줄, 음식,
일 얘기 말고

 

어슬렁대며 잡담하는 게
얼마 만인지

 

이 소리 들려?

 

- 바닷소리?
- 아니

 

뭐?
아, 애들 발자국 소리가 없다

 

혼낼 것도, 치울 것도,
열 받을 것도 없네

 

응, 언제 그러고
못 그랬지?

 

- 정처 없이 걷는 거?
- 응

 

뤽상부르 공원
기억나?

 

 

당신 탁구로
보내버렸잖아

 

감축해요
쌍둥이 밴 여자 이기고!

 

쌍둥이 밴 여자한테
지는 거보단 낫죠

 

못 말려

 

내 생각엔

 

우리 부모님 댁 나와서
애들 갖기 전까지가

 

당신의 유일한
해방 기간이야

 

10년쯤 되는 그 시간이
참 좋았어

 

길게 하나로 흐르듯...

 

하루, 일주일, 1년,
별다를 게 없었지

 

전엔 기억의 기준이

 

직장, 남친,
그런 거였는데

 

지난 7년의
기억들은

 

애들 기준으로
떠올려져

 

진짜 그래

 

당신도 그래?

 

그럼, 시간이
도표화 되어 있지

 

- 진짜?
- 왜?

 

그냥 당신도 그런다는 게
놀라워서

 

좋아
스피드 퀴즈!

 

2009년 8월!
2009년 8월, 빨리 말해

 

- 뭐야?
- 2009...

 

장인 장모님하고
휴가 갔는데

 

니나가 수두 걸리자
엘라도 옮았지

 

놀라운데

 

'참 잘했어요'
도장 찍어주나?

 

봐서

 

저기, 뭐 물어도 돼?

 

그럼

 

오늘 기차에서 처음 봐도
내가 매력 있을까?

 

당연하지

 

지금 이 모습이?

 

나한테... 말 걸고
같이 내리자고 할 거야?

 

다른 걸 돌려서
묻는 거네

 

'네 처지를 알고 있냐?'

 

'그래도 바람피울 거냐?'

 

- 그렇다면 될걸
- 그랬잖아

 

로맨틱한 말 기대했는데
초 쳤어

 

그래, 저기...

 

기차에서 본다면
눈을 뗄 수 없을 거야

 

다가가서 말하겠지

 

'아가씨, 아가씨를 보니
발정난 염소가 되는군요'

 

그만해
저질이야!

 

염소?
됐고 결과는...

 

당신은 낙제야

 

기차에서 날 눈여겨보긴커녕
무심코 넘길 거야

 

뚱보 아줌마에
머리도 빠진걸

 

잠깐, 머리까지...?

 

그게 나야!

 

함정을 파놓으셨네
합격 못 하게

 

사실인 걸 뭐

 

실제상에선요
대머리 아줌씨

 

중요한 건 내가
기차에서 말 걸었단 거야

 

내가 한 일 중
제일 잘한 짓이지

 

정말?
염소다

 

- 어이!
- 안녕

 

그건 좋은
질문이 못돼

 

진짜 질문은,
내가 내리자고 하면

 

응?

 

따라 내릴래?

 

물론 아니지
다들 기다릴 텐데

 

게다가...

 

41년 묵은...
발정 난 염소?

 

완전 엽기야!

 

나 도망칠래
살려줘요, 경찰아저씨!

 

언제 41살이 됐는지

 

믿어지지 않지
너무 늙었어

 

40살 넘은 남자랑
자다니

 

솔직히 그거 알아?

 

내가 잔 남자 중
제일 늙었어

 

- 의미 있네
- 진짜야

 

- 제일 늙진 않았을걸
- 뭐?

 

바르샤바 회의
잊었나?

 

- 무슨 회의?
- 바웬사 전 대통령

 

바웬사 전 대통령,
그 얘기가 왜 나와?

 

우리 사귀기 전이니
인정해

 

나한테 고백했잖아
마음이 스르르 열렸다고

 

- 같이 잤겠지
- 그래

 

완전 미쳤구나

 

고르바초프였어

 

지리 젬병에
미식축구랑 도넛광 양키!

 

- 고르바초프였네요
- 공산권이 짬뽕됐어!

 

당연히 안 잤어
취소해!

 

- 그래, 그러지 뭐
- 미쳐!

 

그럼 체코
대통령인가?

 

말을 말자

 

사실은 나중에
말하려 했는데

 

내가 비밀
못 지키잖아

 

뇌에 종양
생겨서 죽어?

 

아니, 아니
그런 거 말고

 

사실 그런 거긴 하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뭐? 언제?

 

식사 전에 아버지가
문자 보내셨어

 

어쩜 좋아
왜 말 안 했어?

 

다들 예상했던 거야

 

장수하며 멋지게 사셨어
96살이셨으니

 

할아버지 가시곤
얼마 못 사셨네

 

1년 채 안 됐지

 

웃긴 건 완전히
성인이셨단 거야

 

종군간호사셨고
우릴 다 건사하시면서도

 

누구 흉보시는 걸
못 봤거든

 

- 만나뵐걸
- 괜찮아

 

마지막엔 모르는 사람들
보기 꺼려하셨어

 

사랑스러운 여자로
평생 살다가

 

할아버지 돌아가시자
고약해지셨지

 

그럴 수 있어
너무 슬퍼서

 

아버지 말론
죽을 날만 기다리셨대

 

같이 사신 게 얼마야?

 

- 74년 됐지
- 대박!

 

- 그게 가능하긴 해?
- 그러게

 

74년 살면
우린 몇 살 되지?

 

언제부터 쳐야 돼?

 

아무래도
처음 잤을 때부터?

 

그러지 뭐

 

그럼... 1994년

 

그래, 94년이면...

 

- 지금부터 56년!
- 98살인 거네

 

앞으로 56년이나
날 견뎌낼 수 있겠어?

 

난 당신 견뎌낼지
모르겠어

 

그 많은 변화를
목격하신 거야

 

둘이 만났을 땐
전기가 없었으니

 

학교까지 말 타고
데려다 주셨겠지

 

졸업할 때 할아버진 수석,
할머닌 차석이셨대

 

그게 뭐야?

 

일등, 이등이셨다고

 

일부러 몇 개 틀려주셨을걸
할아버지 기 살라고

 

자고 싶다면
그게 낫지

 

옆에 있는 누구도
그랬잖아

 

암튼 아버지한테
전화했거든

 

- 그래야지
- 위로 겸

 

말실수한 거 같아

 

그랬거든
'아버지, 고아네요'

 

- 썰렁해하시더라고
- 썰렁하네

 

그러게

 

- 아버지 다음 자기야
- 그러게, 암튼...

 

두 분이 합장을
원하셨대

 

뼛가루를 섞어서
같이 묻어달라고

 

할아버지 장례식 땐?

 

상대 장례식엔
참석 않기로 했대

 

맞다

 

내 장례식엔 와줘

 

뭐?

 

한 번이라도 양복 입고
면도한 걸 보고 싶어

 

애들 손잡고, 좋잖아

 

나보다 오래 살걸

 

두고 보자
둘 중 하난 알겠지

 

장례식 보러
같이 갈래?

 

텍사스에?

 

파리는 아니겠지

 

꼭 갔으면 좋겠어?
비행기 표도 비싸고...

 

혼자 가는 게 낫겠다

 

- 어, 안녕
- 꼬마야

 

내가 안 가야
사촌하고 놀아나지

 

그건 그래

 

거기선 흔한 일 아냐?

 

아까 질문에
답 안 했어

 

무슨 질문?

 

날 56년 더
참아줄 수 있냐고

 

기대만빵이야

 

말은 번지르르하지

 

좋은 와인처럼
농익었을 테니까

 

오, 엽기 스페인 남친
강림했네

 

난 그리스인이거든

 

저거 봐!

 

와아, 10대 때 봤던
영화가 생각나

 

50년대
흑백영화였는데

 

어떤 커플이
폼페이 유적지를 거닐며

 

몇백 년 된
시체를 봐

 

잠자듯 누워서
서로 꼭 껴안고 있더라고

 

왠진 몰라도
가끔 그 장면이 떠올라

 

잘 때 당신이
안아주면

 

- 생매장된 거 생각했어?
- 응

 

즐겁진 않겠네

 

글쎄, 무섭진 않아

 

애들을 사이에 눕히고
잠든 시신들...

 

- 멋지겠네
- 그래!

 

어릴 땐 사랑하는 사람하고
죽는 게 로맨틱한 줄 알잖아

 

나하고 죽고 싶어?

 

어쩌면

 

함께 첫날밤 보냈을 때는,
다 옛날 일이지

 

이젠 아냐
살고 싶어!

 

로맨틱한 말 기대했는데
초 쳤어

 

나쁜 여자!

 

나 진짜 나쁜 여자네!

 

98살 때 다시 물어봐
그전까진...

 

미안

 

내가 말한
예배당이야

 

비잔틴 시대 거라
천 년은 됐지

 

들어가도 돼?

 

응, 그럴걸

 

봐보자

 

계세요?

 

시력의 수호성인,
성녀 오딜리아의 성지라

 

다들 시각 장애인을 위해
돈을 내고 가지

 

괜찮네

 

이 그림들을 보면
일본 수도승이 생각나

 

인생무상을
깨달은 듯해서

 

더운 날 물로
그림을 그리면

 

다 그릴 때쯤엔
마른대

 

눈이 파여졌네
눈먼 걸 표현했나?

 

그런 줄 알았는데
관리인 말로는

 

터키인들이
점령했을 때 그랬대

 

그렇군

 

터키 음식
다신 먹나 봐

 

그래, 국제사회에
파장 좀 일겠는데

 

그럼 터키 남자랑도
다신 안 자

 

전 세계적으로
충격을 주겠는걸

 

이건 아니었다

 

당신 기독교인인데

 

교회에서
성적 농담 하고

 

하면 안 되는데

 

심하게 했어

 

애들이 우리 결혼은
어땠느냐더라

 

그래?
뭐랬어?

 

그냥...
조용하게 했댔어

 

너무 조용해서
기억도 안 나네

 

말발은!

 

왜 결혼하길
바라는지

 

목맨다니까

 

교회에 온 김에 할까?

 

- 아니
- 역시

 

애들 좋아하는
동화가 다 그래

 

애들 어릴때

 

보던 만화들 끝이 다
'결혼했다'잖아

 

피노키오랑 아빠도,
도널드 덕이랑 조카도 할 판이야

 

56년을 더
같이 산다면

 

- 응
- 내 뭘 바꾸고 싶어?

 

왜?

 

합격 불가능한 질문엔
답 안 해

 

뭐야, 바꾸고 싶은 게
그렇게 없어?

 

내가 완벽해?

 

- 좋아
- 그래

 

- 사실...
- 대봐

 

하나 바꿀 수 있다면

 

날 바꾸려는 걸
막고 싶어

 

참 교묘하게
잘 빠져나가

 

난 자기 훤해
내 손바닥 안이지

 

그럴까?

 

당신이라면 빠삭해
저리 가보자

 

- 빠삭 근처도 못 갈걸
- 그래?

 

이 세상 누구보다
당신 잘 알지만

 

- 대수는 아니지
- 지금 말이야

 

- 뭐?
- 참 좋다

 

- 가깝게 느껴지고
- 그래

 

가끔 자긴 헬륨을 마시고
난 산소를 마시는 거 같았거든

 

왜 그런 말을 해, 엉?

 

봤지?

 

다큐로 말해도
개그로 받잖아

 

이런 걸 말하는 거야

 

진정 서로에 대해
알려면

 

먼저 자신부터
더 알아야 해

 

 

내 친구 중에
뉴욕에서 온 조지 기억나?

 

아니

 

- 아, 한참 전이었다
- 뭐가?

 

아냐
암튼 내 친구인데

 

백혈병 걸려
죽게 된 걸 알곤

 

제일 먼저
안도감이 들더래

 

안도감? 왜?

 

9개월 시한부인 걸 알기 전엔
돈 걱정을 달고 살더니

 

잘됐단 생각이
들더래

 

9개월은 떡칠 만큼
돈 많다고

 

그렇군

 

그 덕에 인생을
즐길 수 있게 된 거야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서

 

그제야 사람들 얼굴도 보는
여유가 생긴 거지

 

어떻게 됐어?

 

뭐가?

 

아직... 살아있어?

 

아니, 죽었어
오래전에

 

어젯밤 꿈속에선
책을 다 읽었어

 

'방랑자들'이란
책이었거든

 

'방랑자들'?

 

떠돌아다니는 거,
방황하는 젊은이들

 

진짜 책이야?

 

아닌데 참 좋았어

 

신선하고 재밌고
실험적인 에너지가...

 

- 꿈에서 책을 읽다니
- 꿈에선 다 명작이야

 

난 액션 히어로
꿈꾸는데

 

슈퍼히어로처럼 날아선
벽을 통과하다가

 

끝에는...
오르가즘을 느껴

 

꿈이 현실이 되도록
힘써보죠, 마님

 

아직 있다...

 

아직 있다...

 

아직 있다...

 

아직 있다...

 

졌다

 

신용카드 주시죠

 

호텔비는
냈을 텐데요

 

그렇지만
신용카드는...

 

- 부수적인 용도래
- 네, 그러죠

 

- 월리스 씨?
- 네

 

선생님 책 팬이에요

 

남편이 첫 데이트때
선물해줬는데

 

두 번째 책이 나왔을 땐
큰소리로 같이 읽었죠

 

오, 와아!

 

- 사인 좀 해주시겠어요?
- 해드리고말고요

 

고맙습니다

 

그리스 판 삽화
맘에 들어요

 

참 좋네요

 

뭐라고 쓸까요?

 

소피아와
파블로스요

 

 

그리스어로 번역하면
어떻게 되죠?

 

그러니까...

 

제대로 된 건진
모르겠어요

 

그래서 번역서가
필요하죠

 

맞아요

 

멋지네요!

 

같이 해주실래요?

 

저요?

 

네, 실제
매들린이시죠?

 

매들린요?
아니에요

 

전 줄 알지만
전혀 아니에요

 

이이가 상상력이
풍부하죠

 

좀 해주세요

 

남편한테 큰 선물이
될 거예요

 

제가 쓴 책도 아닌데
무슨 사인을...

 

- 해드릴게요
- 네, 고마워요

 

그럼 해볼까?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됐다

 

너무 감사드려요

 

이거 봐봐!

 

- 와, 되게 좋은데!
- 그러게

 

깨끗하고
에어컨도 있고

 

너무 좋다
웬일이니!

 

와아, 욕조 좀 봐
세상에나!

 

이거 봐

 

스테파노스 부부가
와인하고 커플마사지를 선물했어

 

너무 고맙다
가기 전에 선물하자

 

애들 것도
뭐 좀 사고

 

물론 그래야지

 

애들 보고 싶다

 

난 아냐

 

경치가 너무 좋아
봐봐

 

내가 유일하게
관심 있는 경치는...

 

뭔데? 왜?

 

바로... 여기야

 

여기... 감상할래

 

왜?

 

재밌네

 

오늘에서야 안 건데

 

이젠 수염이 안 빨개

 

붉은 수염에
반했었는데

 

안 빨간 게 아니라
하얗게 센 거야

 

색깔 따위로 사랑이
시들진 않겠지, 응?

 

- 그치?
- 그렇긴 한데...

 

애들 속눈썹이 빨개

 

그걸 보면
처음 만날 때가 떠올라

 

절실히
바라는 게 뭐게?

 

그게 뭔데?

 

- 한 다음...
- 뭘 해?

 

이거!

 

뭔데?

 

당신 옆에서
혼자 눈뜨기

 

니나랑 엘라가
안 뛰어들고?

 

그렇지

 

당신 생각하는 소리
못 들은 지 꽤 됐어

 

- 생각하는 소리?
- 응

 

내가 듣고 싶은 건

 

자기 눈 떴다
감았다 하는 소리

 

시속 천만 마일로
머리 돌리는 소리

 

그 후에 들려
생각하는 소리가

 

생각하는 소릴 듣는대서
진짠 줄 알았어

 

눈꺼풀 소리잖아
나 아직 순진한가 봐

 

그래서 자기가 좋아

 

나도
생각하는 거 좋아

 

이젠 아침에 생각도,
모닝섹스도 못 하지

 

내일은 달라

 

너무 기대돼서
잠도 안 올 거 같아

 

난 이 순간이 기대돼

 

좋아

 

생각 그만하고 하자

 

자지 말고
깨어있다가

 

또 하는 거야

 

너무하네

 

대체 누구야?

 

- 애들
- 그래

 

무슨 일 있을 때만
하랬는데

 

얘들 별일 없겠지

 

어디...

 

헨리야
걱정 마

 

얘, 별일 없어?

 

런던이니?

 

아!

 

아, 벌써?

 

그래

 

아니, 찾았어

 

내일 부쳐줄게
걱정 마

 

응, 애들이 보고 싶대

 

너 대신 뽀뽀해줄게

 

그래

 

알았어
전해줄게

 

엄마랑 잘 지내고

 

응, 나도 사랑해
끊어

 

그래...

 

됐다...

 

괜찮대

 

시카고에 도착하면
전화한대

 

왜 안 바꿔줘?
벌써 두 번째야

 

전화 기다린 거
뻔히 알면서

 

시간이 없대
탑승해야 돼서

 

까먹고 간 건 뭔데?

 

과학숙제,
내일 부쳐주면 문제없어

 

애 엄마 얘긴 말지

 

뭐?
내가 뭐랬게?

 

엄마랑 잘 지내라고?
그건 좀...

 

비꼰... 비꼰 거 아냐

 

알지만 좀 그래

 

지나간 일이
생각나잖아

 

잊었다고 생각해?

 

미국인들은 없었던
일인 척하더라

 

끄집어낼
필요는 없지

 

그때 생각하기
싫다면?

 

스트레스잖아

 

- 그게 뭐 대수야
- 대수지 그럼

 

며칠 전엔
농담도 한걸

 

걔 엄마랑 나랑
진흙탕 레슬링 하겠다고

 

진흙탕 레슬링?
그랬어?

 

웃더라
당신보단 유머감각 있어

 

당신이 걔 엄마
욕하면

 

자기 욕 하는 걸로
들려

 

나 걔 엄마 욕 안 해
나도 같이 망가지지

 

그건 아는데

 

굳이 꺼낼 이유
없단 거지

 

걔도 그쯤은 컸어

 

자기 엄마랑 나랑
사이 안 좋은 것도 알고

 

걔 엄마랑 나지

 

가만있어도
걔 엄마가 날 건드려

 

날 싫어할 만해

 

옛날에 자기 남편
먹었으니

 

아님 내가 먹힌 건가?

 

그럼, 그거지

 

걔 엄마와의 사이 갖고
농담한다고

 

트라우마가
되진 않아

 

기정사실인걸

 

당신 죄책감을
내게 뒤집어씌우진...

 

그건 아냐

 

오히려 농담하면서
편히 받아들일 거라고 봐

 

그래, 당신이 맞아
늘 그렇잖아

 

이제 그만하자

 

걔 엄마가 술 먹고
애 힘들게 한 건 우리 잘못 아냐

 

그만하자고

 

같이 있는 거
맘 안 놓여도

 

판사는 여자한텐
모성본능이 있다고 봐

 

메데아의
모성본능이겠지

 

메데아라고?

 

응, 그리스 신화

 

에우리피데스의
각본이지

 

전남편 괴로우라고
애를 죽인 거나

 

당신 괴롭히려고
애 다치게 한 거나

 

아니, 걔를 떼어놔서
힘든 거뿐야

 

가끔 당신은
너무 가더라

 

당신 마누라 잘못 갖고
나한테 뭐라지 좀 마

 

전 마누라!
전 마누라 된 지 한참 됐어

 

애초에 잘 해결했으면
이런 미움 안 받았겠지

 

그래
다 내 잘못이야

 

잘못된 일은 다 내 탓 해도
꼼짝없이 당해야지 뭐

 

헨리 일로
똥물 튀긴 건?

 

무슨 똥물?
뭔 소리야?

 

뭔 소린지 말해줄게

 

시카고 가고
내 인생 포기하란 거

 

헨리한테 당신이
필요해서 그런다니

 

내 기분이 어떻겠어?

 

비참해, 알겠어?

 

그 직장은 어쩌라고?

 

- 그래
- 말해봐

 

- 와봐
- 죄책감 들어, 됐어, 됐어

 

그걸 그렇게 본 건
당신이야

 

여자들은 애들
'양욱'하는 게 본능이야

 

뭐?

 

'양욱'하는 거!

 

양육하는 거?

 

그래, 나 발음 구려!

 

게다가 매사에
삐딱하고

 

표정 좀 봐
다 내 잘못인가?

 

무슨 표정?

 

과학숙제도
못 챙기냐는 표정!

 

- 내 탓 하잖아
- 나 암말 안 했어

 

아무 말 안 했지
할 필요 뭐 있어

 

늘 내 잘못인걸

 

돌겠다

 

회사 냉장고에서
봤는데

 

붙여놓는 자석에
글 쓰여있는 거 있잖아

 

다 조합해보니까

 

'여자는 희생이란 큰 정원을
영원히 탐험한다'

 

와, 신이 보낸
메시지군

 

응, 까놓고 사실이고

 

만 년도 더 된 말이지만
거기까지!

 

난 그런 여자 사양해

 

게이들한텐 결혼이,
여자들한텐 피임이 중요하듯

 

딴 여자들이 희망을 포기한다고
나까지 그러라곤 하지 마

 

난 절대 안 해

 

내겐 무엇보다
중요한 거니까

 

와아, 브라보!
잘하면 노벨상 타시겠어

 

저기...
노벨상 위원회에 알려줄게

 

여성해방에 기여하는
일할 건가 봐

 

그래

 

파리 중산층에서 자라기
힘들었나 보네

 

포스트페미니스트 시대에
소르본 대학에서 고뇌했겠군

 

재수 없어
근데 있잖아

 

시카고로
언제 이사가?

 

예쁜 집 골라 커튼 만들고
침대커버도 깔맞춤 해야지

 

이렇게 저녁시간
까먹고 싶어?

 

오늘 밤 이러다 말래?

 

당신이 시작했어

 

당신이 계속
물고 늘어지잖아

 

진짜로 계속
얘기하고 싶다면

 

감정적 말고
이성적으로 대화하자

 

그럴 수 있겠어?

 

또 시작이군
감정적 말고 이성적!

 

자긴 늘 유일무이한
이성적인 역할

 

난 비이성적에 히스테릭한
감정녀 역할이지

 

기대앉아
다 파악한 듯 말해

 

제 말이
곧 진리인 양

 

내가 뭘 어쨌다고?

 

이성적인 남정네들 덕에
세상이 이 꼴 났어

 

정치인들은
전쟁 일으키고

 

기업 윗대가린
환경 망쳐

 

부통령, 국방부장관,
너무 이성적이지

 

부통령, 국방부장관?
좋아

 

집단학살?
무지 이성적인 생각의 발로지

 

거기까지 갔어?
우리에서 집단학살까지?

 

좋아!
한번 해보자고

 

하나만 묻지

 

헨리 인생에 있어서
우리와 지내는 게 도움이 될까?

 

- 그리 튀는군
- 아니

 

관두질 않으니
얘기하자는 거야

 

딱 하나만 물을게

 

당신하고 나와 지내면
헨리 인생에 보탬이 될까?

 

그래, 우리랑 살면
훨씬 낫겠지

 

좋아

 

걔 엄만 알코올중독에
증오로 가득 차서

 

헨리를 데려오고 싶어하는
순수한 우리 마음을 이용해 먹는

 

나쁜 년이니까

 

맞아
나도 동감이야

 

그 앨 미국에서
빼내올 순 없지만

 

우리가 가서
살 순 있어

 

대대적인 이사지만
어때?

 

미국에서
행복할 순 없겠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인가?

 

거기도 비슷한
일자린 있잖아

 

- 비슷한 일자리?
- 응

 

- 장난해?
- 아니

 

왜 나만 맨날
양보해야 돼?

 

오버하진 말자, 응?

 

시카고 가는 건
오버할 만해

 

꼭 가자는 거
아니잖아

 

얘기해보잔 거지

 

2초만 쌍심지 좀
꺼볼래?

 

- 2초!
- 그래

 

학교로 애들 데리러 갈 때
35분쯤 늦곤 안절부절못했지

 

애들이 운동장 돌며
걱정할 거 아니까

 

난 항상
그런 느낌이야

 

내 잘못으로 애를 두고 왔으니
데려오고 싶다고

 

애 데려다 준 뒤엔
늘 이렇더라

 

슬퍼서 싸움을 걸어

 

걔 멀쩡해
의젓한 애라고, 알아?

 

이젠 그런 보호가
필요하지도 않고

 

어린 시절 함께
못 해준 건 맞아

 

안타까워할 일이지만
이젠 다 컸어

 

그거 말곤
훌륭한 아버지잖아

 

이혼한 사람이
수백만은 돼

 

잘한 거냐?
아냐

 

하지만... 이러자

 

한 달 후에도
직장 때려치우고

 

공들인걸
포기해줬으면 싶다면 말해

 

근데 지금도
마음만은 변함없어

 

애 양육권을 나눠만 준다면
미국에 가고 싶지만

 

보름에 한 번
주말에 보는 건

 

학기당
30일보다 짧아

 

그거 때문에 우리 인생을
통째로 바꾸긴 좀 그래

 

- 그건 맞아
- 그렇지?

 

봤지?
나 이성적이야

 

입장이 참 거지 같아

 

아무 짓 안 한 애가
날벼락 맞은 셈이니

 

원래 부모인생에
끌려다녀

 

나 아님 당신 결혼도
어찌 됐을지 모르고

 

그렇지도 않아

 

최악엔 끔찍한
양쪽 부모 밑에서 컸겠지

 

그래

 

다 내가 망친 거야

 

나와 지내려고
파리로 온 거?

 

- 아니, 그런 말 아냐
- 각오한 얘기야, 인정해!

 

- 내가 뜯어말렸잖아
- 그만해!

 

당신하고 뉴욕에 산 2년간
난 모든 걸 포기했지만

 

쌍둥이 낳으려면
돌아가야 했어

 

출산도 복잡하고
엄마랑 있고 싶어서

 

당신도 좋댔고!

 

그래

 

그거 하나
부탁한 걸로

 

평생을 우려먹어?

 

그만하자, 응?
그만해

 

미국으로 가기 싫다면
안 가, 얘기 끝이야

 

난 좀 더 자주
볼 수 있는 길을 찾아서

 

한 식구처럼
지내고 싶을 뿐이야

 

한 식구처럼 안 되면?

 

또 뭔 소린데?

 

그렇게 으르고 협박하는 거
못 견디겠어

 

이렇게 안 하면
평생 화내겠단 거 아니야

 

아니야?

 

내 말 맞지?

 

실은...
짚이는 게 있어

 

문제는 내가 중요한 일을
맡는 걸 꺼린단 거야

 

내가 뭔가 해내면

 

우리 관계에서 당신 입지가
줄어든다고 여기나 봐

 

우리 관계에서
내 입지?

 

난 미국학교에서
학기당 2과목 가르치니

 

와, 대단한 입지네!

 

내가 욕심나는 일자릴 구한 거와
당신 그러는 게 우연은 아냐

 

이런 생각들 자체가
완전 헛소리란 거 알잖아

 

하나 물을게

 

딸애들 없었다면
이렇게 싸우면서

 

여태 함께 살았을까?

 

뭐?

 

자긴 멘붕 마을
이장 같은 거 알아?

 

딱 그래

 

내 생각엔 당신
시카고로 가야 해

 

가서 헨리 챙기고

 

난 파리에서
애들하고 그 일 하고

 

왜 이러는 건데?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당신하고 딸들을
포기하라고?

 

왜 모든 걸
어렵게 만들어?

 

나랑 살면 불행해

 

내가 아들하고
떼어놓는다며?

 

너무 아무 말이나
막 던진다

 

난 잘 해결해보려고
하는데

 

잘 들어, 제시

 

여기서 6주
지내는 동안

 

참 좋았어

 

당신은 매일 글 쓰고

 

날씨도 참 좋고

 

원랜 그리스
오기 싫었어

 

알아

 

그러니 언제
돌변할지 몰라

 

또 저래...

 

치즈에 올리브오일
왕창 먹고

 

행복한 듯 행동해도

 

정작 화나서
죽겠단 얘길 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헷갈려

 

무슨 일 벌어질지
알려줄게

 

늘 일어나는
일만 일어나

 

별일 없이!

 

그래, 난 내 시간이
전혀 없어

 

답해야 할 이메일만
만 통이 넘고

 

난 안 그렇고?

 

온종일 저녁하고
당신 부자 오줌 흘린 거 닦는데

 

당신은
소설가들하고

 

'어쩌고저쩌고,
정말 천재시다!'

 

'오, 어쩌고저쩌고,
그쪽이 더 천재예요!'

 

그러다
헨리가 가니까

 

속상하다고
내 꿈 포기하라고?

 

벌써 꿈이 됐어?

 

오후엔 확신 안 서더니
꿈이 됐네

 

본인 생각을
알기나 하는 거야?

 

그래, 내 꿈 맞아!

 

확신 안 섰다고
싫단 건 아냐

 

- 그래
- 뭔 상관이람?

 

매일 2시간씩 올리브나무
아래에서 사색하기 바쁜데

 

소크라테스 씨,
가운 드릴까?

 

겨우 1시간이야

 

아니, 나갔다 다시 오는데
2시간 걸려

 

난 꿈도 못 꿔

 

제 잇속은 참 잘 챙겨

 

난 남들
건사하기 바쁜데

 

어디 갈 때도 자기 짐만 싸지
나머진 내 차지고

 

애들 짐 못 싸게
할 거면서, 절대!

 

신발 빠뜨리고
입던 속옷 넣을 테니

 

바람이나 쐴래

 

존재에 대해 사색하는 건
좋다 이거야

 

난 못하니까
생각할 시간도 없지

 

일하고 애 보고
일하고 애 보고...

 

잠깐 참아줄래?
바이올린 조율하게

 

그거 알아?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사무실에서 똥 눌 때야

 

똥내 맡으며
머릴 굴린다고

 

그 대사 정말 좋군

 

책에 써먹어야지

 

그랬다간
최고 명대사가 되겠지

 

내가 한 말이나 한 짓
다신 책에 써먹지 마!

 

애들 것도 그렇고!

 

그럼 첫째, 작가랑
놀아나지 말았어야지

 

둘째, 지금 쓰는 책엔
안 나와

 

셋째, 나는 나
꼴리는 대로 써!

 

늘 그렇듯
자기 위주야

 

아니, 희생한 주부처럼
굴지 마

 

지금은
쌍팔년대가 아냐

 

억압당한 연기
아주 쩌는데

 

온종일 집에 박혀서
허드렛일 하는 건 나야

 

- 당신은 6시 반 퇴근이고
- 6시야

 

당신이 학교 데려다 주고
내가 데려오고

 

공평하게
일도 나눴어

 

거긴 프랑스 파리란 거
까잡쉈나?

 

매일 알려주는 걸
까먹을 리가!

 

난 당신에 맞춰
살고 있는 거 알잖아

 

올 여름휴가는 미안해
나 땜에 왔으니

 

근데 당신 바닷가에서 뛰놀고
그리스 샐러드 흡입했지

 

아무래도 집안 일에 파묻힌
컨셉하곤 거리가 있던데

 

남자들 좋은 점이
마법을 믿는 거야

 

요정들이
빨랫감 치우고

 

요정들이
설거지해주고

 

요정들이 애들
선크림 발라주고

 

요정들이 그리스 샐러드
만들어주면 처먹고

 

내 말 들어봐

 

당신이 우릴 잘
돌봐주는 거 알아

 

애들도 잘 돌보고

 

친구들이며 세상까지
오지랖을 펴지

 

엄마 되기 전에도 그런 걸
확대해석하고 있어

 

그치만 몇 년째
이 말 하는데

 

자신을 돌보는 일도
했으면 좋겠어

 

진심이야

 

가르치려 들지 마

 

나 6시면 칼같이 집에 오는
성실한 사람이야

 

생전 베이비시터
불러본 적 있어?

 

없지

 

애들 소아과 의사
이름 알아?

 

질문 좀 그만해
허구한 날 그래

 

그래, 좋아

 

근데 난 매일 저녁
저녁 만들고

 

애들 씻기고
책 읽어 재워

 

어떨 땐 당신도 있고

 

어떨 땐 대학행사며
홍보투어 가, 그치?

 

또 영감 떠오르면
글쓰기에 매달리지?

 

나도 가끔
영감 떠올라

 

글 쓰고 싶어?
그럼 써

 

아니, 나 원래 노래하고
기타 치고 곡 쓴 거 알지?

 

지금도 하고 싶어

 

근데 그럴
시간이 없어

 

일단 먼저...

 

나 취미로
글 쓰는 거 아냐

 

둘째, 자기 시간을
가져봐

 

하루 일과 힘들다며
불평할 시간은 있잖아

 

당신 노래 참 좋아
알아?

 

나 그 노래 때문에
인생을 포기했잖아

 

당신 에너지의
8분의 1만 뚝 떼서

 

욕하고 징징대고
걱정하는 대신

 

그 에너지를
연주에 쏟으면

 

멋진 연주자가
될 거야

 

그래

 

신발 안 신어?

 

누가 말려

 

모르겠다

 

당신이 이긴 거 같아?

 

활동적이고 열정적인 여자들이
애 키우는 거 보통 일 아냐

 

애를 창문으로
던져버리고 싶을 거래

 

난 애들 다치게 하긴
싫었지만

 

백번도 넘게
죽고 싶더라

 

나 힘든 내내 당신은
북투어나 헨리 일로 없는데

 

부담 주긴 싫었어

 

왜 그 여류작가가
토스터에 머릴 넣었나 알겠네

 

오븐이었어

 

말장난하재?
내 말 알잖아

 

토스터든 오븐이든
그게 그거지!

 

어쩔 줄 몰라 애들 붙들고 운 게
몇 번인 줄 알아?

 

그럴 때 엄마가 느끼는
죄책감을 알아?

 

그런 기분을
당신만 느낄까?

 

당신은 이해 못 해
됐어?

 

난 남자들 뭐가
두려운지 알아?

 

날 고분고분한
주부로 만들까 봐

 

누가 감히
그럴 수 있다고

 

차라리 토스터에
머릴 박는 게 쉽지

 

당신은
고분고분 안 돼

 

출산후유증이
아직도 남았나 봐

 

애들 태어날 때
어쩔 줄 몰랐거든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잘한대

 

암컷 원숭이처럼

 

근데 난 뭘 어쩔지
모르겠더라고

 

애들을 너무 사랑하지만
실수만 연발했어

 

당신은 자주
집 비우고

 

전화로 어떻게
지냈냐 묻는데

 

말할 수 없었어

 

그렇게 멍청한 게
너무 창피해서

 

당신 잘해냈어

 

- 안 그래
- 맞아

 

그때그때
잘해나갔어

 

난 그냥...

 

애들 재우려면 오밤중에도
몇 시간씩 유모차를 밀면서

 

동네를 휘젓고
다녀야 했는데

 

퍽치기도
피해가더라

 

얼핏 봐도 너무
딱해 보였던 거지

 

35살 넘어서 좋은 건
강간확률이 적단 거야

 

읽은 거야
진짜야!

 

못 말리겠다

 

이건 기억나

 

애들 방방이 타는 거 보는데
너무 예쁘더라고

 

애들이 좋아하니
나도 좋고

 

한 놈이 훌라후프로
줄넘기를 하며 타니까

 

다른 놈이 갖고 싶어서
싸우는 거야

 

그때 사소한 질투와
이기심이 보이더라고

 

그리곤 생각했지

 

'그래, 이게...
자연스러운 인간 심리다'

 

늘 조금은 불만인 거

 

영원히 만족을
모르는 거지

 

내 말은... 우릴 봐
얼마나 좋아

 

에덴 동산이 따로 없는데도
내내 싸우잖아

 

자연스런 인간 심리는
하나가 아니야

 

복합적이지

 

애들 노는 거 보면서
그걸 느꼈다면

 

당신이 우울한 거야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난 애들
싸우는 거 보면

 

삶으로 들어오는
아름다운 에너지가 보이고

 

짓밟히거나 빼앗기지
않겠단 걸 느껴

 

그걸 보는 게 좋아
희망이 생기거든

 

그렇게 분노를
좋게 봐주면서도

 

자신을 갈구잖아
일, 애들, 나 땜에

 

화나는 적 없어?

 

화나도
그걸 좋게 보진 않아

 

그거 알아?

 

당신 책
본 사람들은

 

내가 헨리 밀러 같은
도발적인 타입하고

 

사랑하는 줄 알아
하!

 

당신은
잠자리 순서도

 

판에 박혔는데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키스 키스,
가슴 가슴, 거기!

 

난 단순한
쾌락이 좋아

 

그래
너무 단순하시지

 

이 말 계속
해주고 싶었어

 

당신은 어딜 봐도
헨리 밀러는 아니라고

 

있잖아
이 방 진짜 이상해

 

자꾸 엽기적이 돼
진짜 그리스인처럼

 

- 방 탓 하긴!
- 우리 뭐니?

 

근사한 밤 보내야지
이런 식 말고

 

근데 김이 새버렸어

 

바보 같아서
못 하겠어

 

그런 거 같다

 

난 이 선물 준
그 부부한테 욕 나와

 

커플 마사지?
그건 또 뭐래?

 

추잡하긴!

 

안 받아도 되네요!
아셨죠?

 

왜 그래!
그리 나쁘지 않은데

 

난 호텔 좋더라

 

섹시한 기분 들고

 

그렇겠지

 

북투어 아저씨

 

힐튼 호텔 빠돌이

 

워싱턴에서
책 낭독하던 날 밤

 

마침 핸드폰이
망가져 주시네

 

편리도 하지!

 

애들 걸고 서점의 에밀리랑
안 잤다고 맹세해봐

 

에밀리랑 안 잤다고
맹세해 보라고

 

질투 안 해
질투 타입 아니잖아

 

그냥 알고 싶어

 

남자답게 인정해봐!

 

난 내 인생을
통째로 줬어

 

더는 별로
줄 게 없다고

 

아무한테도
안 줄 거고

 

날 책잡고
싶은 거라면

 

책 안 잡힐래

 

난 당신 사랑해

 

거기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고

 

하지만 계속 날
열 받게 하려고 안달이라면

 

책잡혀 주지

 

- 응, 들을래
- 좋아, 뭐

 

그럼 1번부터 하자

 

1, 넌 완전 돌았어
진짜야

 

네 지랄병 6개월 넘게
참아줄 사람 찾아보셔

 

하지만 난 널
패키지로 수용했어

 

싸이코이자 똑순이!

 

너 변하는 건
바라지도 않아

 

있는 그대로의 널
받아들인 거지

 

묻는 말에나 답해

 

나 강간당할 위험을 안고
유모차 끌면서 개고생할 때

 

에밀리란
계집애랑 잤어?

 

대체 무슨 에밀리...
뭔 소리야?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달달한 이메일 쓴 여자

 

'오, 제시,
폭풍공감해요!'

 

'그랜드 커멘더가 러시아 문학 중
짱인 거 같아요!'

 

당신 질문이

 

내가 당신과 딸들,
우리 삶에 전념했느냐는 거면

 

답은 확실히
'그렇다'야

 

같이 처잤구나!
눈물 나게 고맙네요!

 

네 옛날 남친 엄마 돌아가셨을 때
간 거 갖고 뭐랬나?

 

아니지
왜게?

 

프랑스 여자들 헤프니까
무슨 일 있을 걸 알았다고

 

하지만 날
사랑하는 거 아니까

 

좀 복잡한 여자라도
괜찮았지

 

난 따분하게
서로를 소유하며

 

남들이 만든 틀 속에
갇혀 지내기는 싫거든

 

그럼 완전
숨막히니까!

 

더는 못 해먹겠다

 

이게 무슨
상황인 줄 알아?

 

간단해

 

더는 당신 사랑 안 해

 

아가씨?

 

지금은 말하기 싫어

 

혼자 왔어요?
누구 기다리나?

 

네, 혼자가 좋아요

 

전 성질 땜에 애들, 남편,
다 힘들게 하죠

 

딱 내 타입이네

 

이럴 기분 아냐
혼자 있고 싶어

 

카페 건너에서부터
쭉 봤는데

 

불편하게 하긴
싫지만

 

눈에 확 띄는
미인이세요

 

정말 고맙군요

 

한잔 대접하면서
조금씩 알아가고 싶은데

 

출장 왔어요?

 

아, 남친 있구나

 

헤어졌어요

 

아이고, 안됐네요
들어줄까요?

 

낯선 사람하곤
말 안 해요

 

나 낯선 사람 아닌데

 

우리 전에 만났어요

 

94년 여름?

 

딴 사람과
착각하시네요

 

아뇨
사랑에도 빠졌죠

 

- 설마요
- 네

 

다정하고 로맨틱한
남자는 떠올라요

 

혼자가 아니란 기분
느끼게 해주고

 

나란 사람
존중해줬죠

 

나예요
내가 걔예요

 

그럴 리가요

 

난 그쪽이 모르는
오늘 밤 일을 알아요

 

그래요?
뭔데요?

 

중요한 건데

 

실은 오늘 밤을
예전에 겪어봐서 알죠

 

어떻게요?

 

시간 여행자거든요

 

그렇구나

 

내 방에
타임머신이 있는데

 

당신 구해주러
왔어요

 

뭘 구해요?

 

하찮은 일로
눈이 멀게 될까 봐

 

하찮지 않아요

 

기차에서 만난 다정하고
로맨틱한 남자 있죠?

 

그게 나예요

 

- 그쪽요?
- 네

 

전혀
못 알아보겠네요

 

완전 삭았어요

 

시공을 초월하자니
힘드네요

 

그쪽은 오히려

 

기억하는 거보다
훨씬 아름다워요

 

헛소리!
장난할 기분 아냐

 

그 여우 짓에 홀리면

 

시카고 슈퍼에서
정신 들겠지

 

달달한 멘트 날린다고
뜻대로 되진 않아

 

달달할 생각 없는데

 

뭔가 오해하나 본데
그게 아니고

 

난 사신으로
온 거예요

 

미래에서
막 왔거든요

 

난 82살의
당신과 사는데

 

편지를 주면서
읽어주래요

 

그래서 온 거죠

 

저 80 넘게 살아요?

 

그러믄요!

 

히프 상태는요?

 

나이스죠!

 

- 그렇군
- 완전 나이스예요

 

외모는 관심 없어요

 

사랑스러운 면이
더 많아졌죠

 

그거 잘됐네요

 

그럼 읽어줄까요?

 

말리면 듣나요?

 

- 관심 없다면야...
- 아녜요

 

읽어봐요

 

좋아요
읽어줄게요

 

'셀린느에게'

 

'난 숲 반대편에서
네게 편지를 쓴다'

 

'이 편지는
촛불을 밝히듯...'

 

그만!
난 그렇게 안 써요

 

'숲 반대편'?
뭔놈의 숲요?

 

좀 읽으면 안 돼요?

 

알았어요

 

'이 청년을 보내니까'
나, 청년이에요

 

'보디가드로 여겨줘'

 

'문제도 많고
평생을 바둥대면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속을 썩여놓고'

 

'미안해하는
한심이지만'

 

'네가 유일한
희망이야'

 

'셀린느, 네게 하고픈
충고는 이거야'

 

'넌 지금 인생의
황금기에 들어섰어'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중년이란 12살 때보다
조금 더 어려울 뿐이더라고'

 

'그땐 친구들과
춤추며'

 

'비지스의
하우 딥 이즈 유어 러브나 들었지'

 

이게 뭐... 암튼...

 

'셀린느, 넌 잘 살 거야'

 

'딸들도 잘 자라서
페미니즘의 아이콘이 될 거고'

 

그건 좋네요

 

지금 막 보니까

 

중요한 추신이
있나 본데

 

지루한 중간은
건너뛰죠

 

듣던 중 반갑네요

 

- 그럴까요?
- 네

 

그럼 그러죠

 

- 지루해 죽겠어요
- 네

 

자, 어쩌고저쩌고...

 

재테크에
별점 얘기고

 

그렇지, 여기다

 

'추신, 그건 그렇고
최고의...'

 

'그건 그렇고
최고의 섹스는'

 

'남부 펠로폰네소스에서 보낸
하룻밤에 경험했어'

 

'놓치지 마'

 

'성적인 감각이 한올 한올
치솟는 기분이었거든'

 

치솟는다니 좋네요

 

어떤 느낌일까나

 

황당한 놀이
그만하자

 

우리가 소설 속
주인공도 아니고

 

방에서 한 말 들었어?
내 말 들었지?

 

그래, 들었어

 

이젠 날 사랑
안 한단 거?

 

진심 아니겠지만
진심이면...

 

어, 젠장!

 

당신도 어린애들이나
딴 사람들처럼

 

동화 속에
살고 싶은 거군

 

난 풀려고
애쓰고 있어

 

무조건 사랑한다고,
아름답다고

 

80살에도 엉덩이
빵빵하다고

 

웃게 해주고 싶어서

 

그래

 

당신 지랄
다 받아줬다고

 

되돌리려고 낑낑대는 줄
안다면 오산이야

 

근데 진정한 사랑을
원한다면

 

이게 맞아

 

실제 삶이니까

 

완벽하진 않지만
실제야

 

그게 안 보인다면
눈이 먼 거니 두 손 들게

 

돌겠구먼

 

그럼 그 타임머신은?

 

뭔 소리야?

 

어떻게 작동해?

 

좀 복잡해

 

작동시키려면
다 벗어야 해?

 

그니까...

 

응, 솔직히
그거 땜에 골치 아파

 

옷이 좀 시공 연속체를
통과하기엔 안 좋더라고

 

와아, 완전
똑똑하시다!

 

미치겠다

 

- 시공...
- 연속체

 

- 연속체!
- 응, 그거

 

당신 편지에 대해
계속 생각나는 게 있거든

 

응?

 

남부 펠로폰네소스
얘길 하잖아

 

지금 남부
펠로폰네소스에 있는데

 

최고의 밤이라고
말해준 게 오늘 밤일까?

 

그렇담...

 

환상적인 밤이
기다리나 보네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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